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김없이 4주에 한번씩 칼럼을 쓸 차례가 되는데, 오전까지 아무 생각이 없다가 불현듯 '파레토 법칙'이란 게 떠올라서(사실 어제 읽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힌트를 얻었다) 3시간 동안 꼼지락거리며 쓴 것이다. 파레토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들을 하지만 그의 저작은 거의 소개돼 있지 않다는 점도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하긴 좀 '식상한' 놀라움이기도 하지만...   

경향신문(10. 07. 20) [문화와 세상] ‘20:80의 사회’

‘파레토 법칙’이라는 게 있다. 경제학 상식이긴 한데, 20%의 원인이 80%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발견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 법칙을 개미 관찰을 통해서 착안했다. 경제학자가 어쩌다 개미 관찰까지 하게 됐을까 의문스럽지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을 착상했다는 뉴턴의 ‘전설’도 있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여하튼 이야기인즉, 파레토가 개미들을 관찰해보니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니더란다. 20%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80%는 빈둥대며 놀더라는 것이다. 그 일하는 개미 20%만 따로 분리하여 통 속에 넣고 관찰하니까 신기하게도 다시 20%만 일하고 80%는 놀았다. 그럼 빈둥대던 80%를 분리시켜 놓으면? 그중 20%는 ‘정신 차리고’ 또 열심히 일했다. 결과적으론 아주 오묘하게도 항상 20 대 80이 유지됐다. 그래서 ‘법칙’이다. 



이 ‘20 대 80 법칙’은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다. 마케팅 쪽에서 “백화점 매출액의 80%는 20%의 단골손님에서 나온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법칙에는 정치적 색깔도 보태질 수 있는데, ‘파레토 우파’라고 부를 만한 진영에선 “20명의 엘리트가 평범한 80명을 살린다”고 주장한다. 개미사회에서도 ‘엘리트 개미’와 ‘평범한 개미’가 나뉘는지 모르겠지만, 20 대 80이란 비율의 의미를 그렇게 엘리트주의로 해석하고 정당화한다.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천재론’은 아예 ‘파레토 극우파’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반면에 ‘파레토 좌파’가 관심을 갖는 건 차등적 소유와 분배 문제다. ‘어떤 사회든 전체 부의 80%는 20%가 소유한다’는 파레토의 통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더욱 심화되어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가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과연 개미사회에서도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와 소유의 독점이 이뤄지는지 의문스러우면서, 동시에 이런 현실이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우려와 무관하게 바야흐로 ‘20 대 80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 한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만으로 모든 일이 가능해지고,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80%가 노는 사회가 아니라 80%를 놀게 만드는, ‘쓰레기’로 만드는 사회의 도래다. 이미 징후가 없지 않다. 청년실업이 낳은 자조적인 용어 ‘잉여’는 80%의 실존적 위기감을 표현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20% 안에 들기 위한 경쟁에서 악착같이 승리하는 일? 하지만 개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20 대 80’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인격과 무관한 ‘구조적인’ 것이다. 어떤 사회가 80%의 탈락자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면, 사실 그런 사회체제 자체가 ‘쓰레기’ 아닌가? 자학이야말로 ‘삶의 기쁨’이라고 고집하지 않는 한, 80%가 유의미한 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유토피아’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20 대 80 사회’가 비관적인 전망만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20%의 노동력만으로도 경제가 유지된다면, 우리는 적절한 로테이션을 통해서 80%가 놀고 먹을 수 있는 ‘개미들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럴 용의와 의지가 있는지가 문제다. 

10. 07. 19. 

P.S. 파레토란 이름을 처음 본 건 루이스 코저의 <사회사상사>(일지사, 1978; 시그마프레스, 2003)에서였던 듯싶다. 둘다 절판된 거 같지만, 내가 읽은 건 일지사본이었다. 2003년에 원서의 2판이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번역본도 개정판이 출간되면 좋겠다. 아니, 어쩌면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홍성사, 1980, 기린원, 1988)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수준급의 개설서들일 텐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세월의 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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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7-2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었는데, 20:80에 대해 확실이 알았습니다. 손부족한 날에 안전한 이사 바랍니다.

로쟈 2010-07-20 13:39   좋아요 0 | URL
맛보기일 뿐이죠. 개미 얘기의 출처가 궁금해서 좀 찾아봤지만, 모두 '일설'에서 그치더군요...

2010-07-20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