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동네 분식점에 가 콩국수를 먹으며 읽었다. 가장 읽을 만했던 건 '삶과 문화' 꼭지에 쓴 신형철 평론가의 칼럼이다(이번에 새 필진으로 가세한 듯하다). 제목부터 '아, 즐거운 체호프!'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일보(10. 07. 13) 아, 즐거운 체호프! 

예컨대 이런 글은 얼마나 진부한가.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나오는 리틀 피플의 차이를 살펴보면 전자는 외적 억압의 상징이고 후자는 내적 병리의 반영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는 외부의 억압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 때문에 생기는 것일 수 있다, 무라카미가 60년 만에 오웰을 다시 쓴 것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1984년 이전으로 후퇴했다, <1Q84>가 독서계를 휩쓸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불행하게도 <1984>일지 모른다….

이런 내용의 글을 쓸 뻔 했다. 이미 너무 많은데 또 보탤 필요가 있을까 싶어 접었다. 진부한 세상이 진부한 칼럼을 양산한다. 칼럼니스트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다른 시각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하게 엉망인 현실 때문이다.

적어도 이 지면에서만은 즐거운 얘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길. 분노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념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제는 일일이 분노하기조차 지쳐버려서, 그저 이 나라는 안 된다고 체념하면 속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체념하면 지는 것이다. 힘 있는 어떤 분들이 세계를 거꾸로 되돌리기 위해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으니 우리도 각자 분야에서 그만큼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체념하지 않으려면 즐거워야 한다. 그분들이 잠 안자고 시뻘건 눈으로 열심히 할 때 우리는 충분히 자고 낄낄대면서 해야 한다. 그런 태도를 배워보기로 하자. 레이먼드 카버의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소설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체호프의 산문을 읽는 일은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인생은 지독하게 재미없는 농담과 같지만 그런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만약 여러분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성냥에 불이 붙었다면, 호주머니 속에 화약창고가 들어있지 않았음을 기뻐하고 하늘에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별장으로 가난뱅이 친척들이 들이닥치거든 새하얗게 질리지 말고 환호작약하십시오. 경찰이 아니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손가락이 가시에 찔렸을 때에도 기뻐하십시오. 눈을 찌르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아내나 처제가 피아노를 두드려대기 시작하거든 발끈하지 마시고 뛸 듯이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들개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거나 고양이들의 연주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연주를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 아내가 여러분을 배신한다면 아내가 배신한 것이 조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인생은 아름다운 것>에서.

아, 즐거운 체호프! 비슷한 맥락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세상의 바보들에게는 웃으면서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고 했고 무라카미 류는 적들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체호프를 따라 이렇게 말하자. 국가적인 비극의 조사결과를 오류와 실수투성이로 발표해 망신을 당하고 세계가 조롱하는 국책사업을 개발독재 시대의 마인드로 밀어붙이는 한편, 민간인을 불법 사찰해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고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특정인의 TV 출연을 막기 위해 제작진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등, 대한민국을 30년 전으로 되돌린 이 황당하고 창피한 정부 밑에서 보내야 할 시간이 2년 넘게 남았다는 사실에 머리를 쥐어뜯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시오. 20년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10. 07. 13. 

P.S. 나도 며칠 후에는 칼럼을 써야 하기에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는데, 덕분에 좀 '가벼운' 기분으로 써보기로 했다. 매번 머리를 쥐어뜯게 되지만, 그래도 4주에 한번씩일 뿐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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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통령은 정말 잘 뽑고 볼 일이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17 10:02 
    경향신문에서 '목수정의 파리통신'을 옮겨놓는다(지난번 신형철 칼럼과 짝을 이룰 만하다). "대통령은 정말 잘 뽑고 볼 일이다"가 제목이어서, '좀 센데!'하며 클릭했는데, MB 얘기가 아니라 사르코지 얘기였다. 하지만 결국 MB 얘기. 위안거리는 그렇게 잘났다는 프랑스인들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 베를루스코니를 총리로 둔 이탈리아 국민들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이번 월드컵에서 나란히 죽을 쒔다는 점도 공통적
  2. 인생의 아름다움과 비극적 유머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11 01:48 
    오늘자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읽기'를 옮겨놓는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대한 '해럴드 블룸의 읽기'를 바탕으로 적은 글이다.번역본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고려대출판부),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에 실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참조했다.참고로 국내에 소개된 체호프 단편집은 이 작품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그렇
 
 
델러웨이부인 2010-07-13 14:30   좋아요 0 | URL
즐거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0-07-13 19:12   좋아요 0 | URL
저는 전달자일 뿐인데요...

미지 2010-07-13 16:42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사드립니다 ~

로쟈 2010-07-13 19:12   좋아요 0 | URL
제가 대신 감사를 받는 건가요?^^

비로그인 2010-07-13 19:01   좋아요 0 | URL
배신할 아내가 없어서 안타깝네요 ㅋㅋ
매번 머리를 쥐어뜯게 되지만?
이건 상상이 잘 안 되네요.
이렇게 얘기하면 화내실지 모르겠지만 늘 술술 힘들이지 않고 쓰시는 것 같아서요^^

로쟈 2010-07-13 19:08   좋아요 0 | URL
나름대로 쥐어뜯습니다.^^;

paul 2010-07-13 19:10   좋아요 0 | URL
이제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일상적 대화의 주제가 된 듯하군요. 정말로 30년 전으로 되돌려진 시간이라면 오히려 지금의 대응방식이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행동이 결여된 '비판의 말들'이 유희되고 소비될 수도 있다는 우려입니다. 왜 대부분의 조소섞인 비판들이 2년이라는 유예를 굳이 들먹이며 고통의 시간을 합리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에 골몰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2년 뒤에 어떤 세상이 도래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인데, 단지 시간의 (길고) 짧음이라는 추상적 안위에 안도하라는 충고가 지나치게 허무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요. 더 가볍게 읽는다면야 물론 문제 될 것은 없겠죠. 웃으면서 화내는 것은 더 어렵지만, 아직 우리들은 정당하게 화내는 법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로쟈 2010-07-13 19:12   좋아요 0 | URL
"체념하지 않으려면 즐거워야 한다"는 게 한 가지이고, 분노도 축적하려면 즐거움의 외양을 필요로 한다는 게 다른 한 가지입니다. 사실 정색하고 비판하기엔 너무 엉터리 같기도 하구요(천안함 조사결과도 그렇지만). 안에서부터 바가지가 새기도 하고...

루딘 2010-07-14 08:27   좋아요 0 | URL
아내는 배신을 안하는데 조국이 배신을 행하는 파렴치한 현실은 어찌하나요? 조국이라는 개념보다는 정부의 개념이겠지만... 항상 로쟈의 글에 감사를 드리며.

로쟈 2010-07-14 15:42   좋아요 0 | URL
네, 조국은 좀 다르죠. 모국이라고 해도 되겠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