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고원의 10년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2010)이 출간된 김에 비평고원에서의 활동 초창기에 로쟈가 어떤 글을 올려놓았었나 궁금해서 찾아봤다("나는 네가 10년 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주로 댓글이 많았는데, 마침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작가들'이란 테마로 주인장(쿤데라님)과 논쟁을 벌인 게 있어서 약간 정리해 옮겨놓는다. 댓글답지 않게 길게 쓴 대목도 있다. '마침'이라고 적은 건 안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 강의 자료를 만들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비평고원 10>에는 '논쟁의 고원' 장도 포함돼 있는데, 어떤 논쟁들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대개는 아래와 같은 분위기로 진행됐을 것 같다. 참고로  카페 주인장의 닉네임은 이후에 '소조'로 바뀌었다. 가라타니 고진 전담 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영일 씨가 그의 본명이다. 그때는 비평가나 번역가로 데뷔하기 이전이었다. 물론 나도 '무명의 로쟈'였고(카페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장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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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가 싫어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쿤데라의 작품 중에 <자크와 주인나리>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희곡으로 각색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답니다. 한데, 그는 <백치>를 다시 읽고 나서 진절이를 쳤답니다. 장황하고, 과장됨에 대해. 해서 쿤데라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평소 자신이 즐겨 읽었던 디드로의 소설을 희곡화 시킨 것이랍니다.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는 쿤데라가 하는 말 그대로 믿기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안닮은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매우 닮았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어렵죠.(쿤데라님)

00. 11. 01.
쿤데라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란 건 약간 어폐가 있거나 예의 과장(!)인 것 같습니다. <백치>의 장광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하더라도, 제가 읽은 글에서 그는 <운명론자 자크>와 <악령>에 대해서 찬탄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참고로 한 도스토예프스키 학자는 그의 소설들을 18세기의 철학적 콩트들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테르나 디드로의 철학 소설들 말이지요. 좀 부피가 다르긴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론은 대개 <소설의 기술>(혹은 <소설미학>)과 <배반당한 유언>(<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참조할 수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자료가 있으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00. 11. 02. 
아마 <소설의 기술>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쿤데라의 모든 책을 갖고 있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여기저기 살림을 나누는 바람에 지금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찾아보기로 하죠.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나보코프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한 건 아주 유명합니다. 3류 취급을 했죠. 하지만, 그가 높이 평가한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와 모티브들을 소설화하기도 했구요. 제가 찾아보니까, "나보코프와 톨스토이"를 다룬 논문은 한편도 없는데 반해서, "나보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다룬 논문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영향 관계, 혹은 영향에의 불안 관계가 있는 것이죠. 콘래드에 대해서 제가 잘 모릅니다. 다만 그의 <밀정>(<비밀요원>)이 다루고 있는 소재가 <악령>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 정도.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차이점은 유머 대 숭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유머'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쿤데라의 유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머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쿤데라 작품엔 절대적인 가치(구원)이나 종착역이 존재하지 않고 웃음은 바로 그 작품 전체구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 전체가 농담이 되는 것이죠. 도덕에 대한 조롱(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처럼). 한데,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엔 웃어서는 안되는 종착역(구원/도덕)이 전제된 상태로 현실에 역투사되고 있습니다.그의 작품에서 유머는 진지함을 보충해주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쿤데라와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작가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조셉 콘래드가 있습니다.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했던 이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지나치게 숭고화된 형태의 러시아정신이 나타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자주 헝가리인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셉 콘래드는 원래 헝가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쿤데라는 러시아의 체코 침공을 몸소 겪은 사람이고 나보코프는 과격한 러시아 혁명을 피해 서구로 망명한 작가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마도 이 같은 사회적 경험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바로 이런 과장되고 숭고한척 위장하고 있는 러시아 정신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 평가가 낯선 것은 아니지만, 또 그런 만큼 관습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바흐친이 밝혀준 바대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바흐친은 소설이란 장르 자체의 성질로 설명합니다.(그의 설명에 논리적 정합성이 좀 떨어지는 면은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웃어서는 안되는 종착역이 있다는 건 그의 사상의 경우에 국한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미완성작이고, 거기엔 별개의 사상과 감정들이 극단의 스펙트럼까지 공존하며 이질적인 웃음과 비장함들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작가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에서 결코 기독교적 진리만을 강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그 문제를 좀더 복잡하게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죠. <대심문관>의 논리와 조시마 장로의 설교만큼 이질적인 것도 드물겠지만, 작가가 어느 한쪽편에 치우져 있다고 보아지진 않습니다. 그 두 가지 논리, 두 가지 세계 모두 도스토예프스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서열이 부여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읽는 건 도스토예프스키를 너무 편하게, 관습적으로 읽는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덧붙여. 쿤데라의 '웃음'과 가장 유사한 철학적 개념이 저는 로티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쿤데라의 소설들이 철학에 접근할 때, 거꾸로 로티의 철학서들은 비철학으로 이탈해 나갑니다. 이들의 근접조우에 대한 글을 저는 구상중에 있습니다. 로티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현재 그는 인문학 교수죠.) 주요 철학자에서 빠질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 그는 중요한 저자입니다. 쿤데라와도 궁합이 잘 맞을 수 있는(!)...   

1.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은 구분가능한가? 님은 제가 말한 쿤데라와 유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머의 차이점에 대해 그건 관습적인 평가이고 사상적인 면에서만 타당한 이야기이다라고 말습하셨습니다. 한데,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머는 문학적이고 진지함은 사상적이란 말입니까? 만약 사상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이 구분가능하다면, 쿤데라의 사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 콘래드, 나보코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관계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푸시킨을 가장 높이 평가했는데, 푸시킨과 나보코보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푸시킨의 주장르는 시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들 간의 영향관계가 없었다고는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소재나 창작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해석의 문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속편은 알료샤가 신에 대해 회의하고 방랑하다 죽는 것으로 구상되었다고 말들합니다. 하지만, 쓰여지지 않은 작품까지 생각해서 쓰여진 작품을 판단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시마 장로와 <대심관>은 너무나 극과 극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주 상반된 세계가 훌륭하게 그려졌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종교적 설교집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 그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은 곧 그 작품이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경우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이 아주 상반된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여 대결합니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가 바로 그들이죠. 한데, 이 작품에서 중심은 세템브리니에 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죠. 그렇다고 종국적으로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에 통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같이 이반의 사상과 조시마 장로의 사상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손을 들고 있는 쪽은 조시마 장로쪽입니다. 물론, 이때 이반의 사상은 지양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반의 사상이 존재함으로 이 이야기가 소설일 수 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이반의 사상으로 인해 조시마 장로의 사상을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죠.  

4. 쿤데라와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로티는 책 머리에 쿤데라의 글을 인용할 정도니 언뜻 보아도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데, 쿤데라가 철학으로 가는 방면, 로티는 비철학으로 간다는 말에는 약간의 언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쿤데라와 관계가 있는 '철학'이란 오늘날 의미의 철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철학에 해당되는 철학을 한 사람이란 제가 생각하기론 플라톤 외에는 없습니다. 개념에 대한 의존이 부재하던 시기의 철학 말입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실존수학'이란 용어는 바로 이런 철학을 말하고 있죠. 이에 반해 로티는 기존 20세기 사상가들의 유행인 문학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미국식으로 약간 변주되어 있지만요.  

00. 11. 03.
쿤데라님과 논쟁 아닌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논쟁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찾아 읽었던 팬이고, 도스토예프스키의 팬이기도 합니다. 한때 제가 써보고 싶었던 글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유머'였는데, 쿤데라님이 그의 유머에 대해서 너무 폄하하고 그의 사상(바흐친을 빌면, 최종적인 말)에 대해서 너무 강조하고 계신 것 같아 반론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보코프도 지적한 것이지만,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작품에서도 주인공이 벌이는 소극들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이지요.  

문학적인 면과 사상적인 면은 구분가능한가? 문학작품에 나타난 사상이란 작품에서 유추하거나 추출해낼 수 있는 어떤 철학적, 사상적 관념들 혹은 입장을 말하는 것이겠죠. 정신과 육체의 고약한 이분법이 여기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흔히 도스토예프스키를 말할 때 심오한 사상을 가진 작가라느니 어떠니 하는 말을 하는데, 제가 말한 사상이란 건 그렇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이 아닌 저널리즘적인 글이나 작가일기 등에서 표명하고 있는 정치관이나 세계관을 말하는 거죠. 그런 글들에서 엿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은 지극히 국수적(러시아 민족주의)이고 광신도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소설들에서 똑같은 걸 읽어낼 수 있느냐 하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를 구분지어 말한 것이죠.  

그런 식의 자기분열(?)이 설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인지요? 아니면 당위적으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인지요? 쿤데라는 어느 쪽이냐 하면, 그는 순전히 작가입니다. 소설의 가치와 위엄을 믿는 이야기꾼이죠. 다만 철학적 소설(소설로 하는 철학)의 전통에 서 있을 뿐. 그래서 그가 소설론에서 피력하고 있듯이 소설에 대한 관념,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다만 그때의 사상이란 건 소설이라는 육체 속에 녹아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콘래드, 나보코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관계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푸시킨을 가장 높이 평가했는데, 푸시킨과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보코프의 영향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푸시킨은 나보코프뿐만 아니라 모든 러시아 작가들이 경배하는 작가입니다(혁명기 미래파만 빼고).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니까. 나보코프는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영어로 번역하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주석서를 낸 바 있습니다. 그의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어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죠. 푸시킨의 영향과 관련하여 나보코프의 마지막 영어 소설인 <재능>을 들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 <롤리타>의 중층적인 서술기법 또한 <예브게니 오네긴>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재나 창작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소재나 테마를 다른 방식으로 비틀거나 패러디 하는 게 영향관계와 무관할 수 있을까요? 패러디는 패러디되는 것에 대한 희화화나 오마주 양방향에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나보코프의 의도는 전자에 가까워 보이지만, 제 생각에 거기엔 모종의 경쟁의식도 끼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대가가 아니라면 맞상대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하지만,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 그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은 곧 그 작품이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경우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이 아주 상반된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여 대결합니다. 나프타와 세템브리니가 바로 그들이죠. 한데, 이 작품에서 중심은 세템브리니에 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죠. 그렇다고 종국적으로 나프타가 세템브리니에 통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다성성을 주장하는 바흐친을 따르자면, 반드시 어느 한쪽에 중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물론 바흐친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작가의 일방적인 독백을 거부한다는 것이죠. 그런 독백을 드러낸 작품들 가운데 읽을 만한 작품은 몇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이 이반의 사상과 조시마 장로의 사상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손을 들고 있는 쪽은 조시마 장로쪽입니다." 물론 그것이 추정해 볼 수 있는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그건 작품-텍스트 바깥의 얘기입니다. 의도의 오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반해 로티는 기존 20세기 사상가들의 유행인 문학주의과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미국식으로 약간 변주되어 있지만요."라는 건, 로티를 싫어하는 철학자들이 하는 얘기지만, 저로선 동의하기 힘듭니다. '문학주의'가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지만(그런 의미에선 데리다도 문학주의자입니다), 로티는 대단히 엄격한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죠. 제가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와 로티를 좋아하는 건 그들이 가진 친연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친연성에 대해 쿤데라님은 동의하시지 않는 걸로 결론내릴 수 있을까요?...   

00. 11. 03. 
제가 자꾸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쿤데라님의 말대로, 서로간의 취향,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있는 거라면, 저마다 각양각색인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유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유머가 주가 아니라는 거죠. 다시말해, 라블레와 쿤데라의 친연성이 라블레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친연성보다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상대적인 것이죠. 라블레와 쿤데라의 작품에선 '웃음'이 주된 거니까요."  

이때의 웃음은 좀 확장된 의미의 웃음이겠죠? 순전히 웃기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시는 건 아닐테니까. 쿤데라는 '좋은 기분'이란 말을 쓴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분, 혹은 유머를 불러 일으키는 것, 그것이 그의 문학의 미덕이죠. 하지만, 그 이상의 주장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요? 라블레적 웃음의 중세 카니발적 세계관과 연관되는 것처럼, 쿤데라의 웃음, 혹은 유머 또한 그가 지향하는 소설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세계관을 그의 흔히 쓰는 말로, 그의 사상이라고 부르면 안되는 것인지?  

"다시 말해, 도스토예프스키와 쿤데라의 친연성은 도스토예프스키와 까뮈의 친연성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상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은 분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그의 사상적인 면이 그 같은 문학적 형식을 만들었다고 그 같은 형식으로만 그같은 사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상과 문학의 분리불가능은 원론적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문학작품 '안'에만 있는 건 아니죠. 소위 순수문학을 주장했던 우파 문인들의 경우, 문학작품은 어떠한 정치적 주의주장도 포함해서는 안된다는 하나의 '정치적 주장'이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작품의 정치적 순수성, 혹은 순수주의는 작품 '바깥'(맥락)과의 관계 속에서만 읽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쿤데라님이 말씀하신 거라면, 제가 오해한 것이구요.  

"구원에 대한 전제(불안하긴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장광설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쿤데라님의 의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소위 요즘의 연구자들도, 제가 아는 한,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쿤데라가 말하는 '철학'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죠. 문학과 철학이 아직 분화되지 전 철학, 다시말해 소설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쿤데라는 이런 표현방법의 하나로 블로흐가 먼저 시도하고 무질이 발전시킨 에세이라는 장르를 소설 속에 도입하기도 하고, 플라톤의 <향연>을 패러디하기도 합니다. 이때, 블로흐나 무질이 행했던 철학이나 사상과 플라톤 저작 속에 나타나는 철학은 오늘날 의미의 철학과는 분명 다르죠."  

사실, 이 부분은 제가 더 검토해 봐야 하는 부분입니다. '소설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철학'의 대표적인 예가 '향연'인가요? 고대 그리스의 메니푸스 풍자 같은 걸 예로 들 수 있을까요? 그것이 철학과 다르다는 것은 소위 (철학적) 개념에 저항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작가들 간의 영향 관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자칫 무용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조이스와 울프,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비교가능합니다. 한데, 마르케스와 보르헤스 같은 경우는 조금 망설여집니다. 물론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대적인 문제이니까요. 즉, 윤대녕과 이광수는 서로 비교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죠."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건수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모든 비교문학적 가능성에 의문을 갖고 계신 건지? 문학과 음악, 미술 등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어불성설인가요?  

"따라서 모든 작품들과 비교 가능하죠. 예를들어 발자크와 쿤데라의 비교." 물론입니다. 그것이 읽을 만한 것을 산출하기만 한다면. "전 텍스트주의가 아닙니다. 텍스트 밖에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죠. 해서 작가연구가 부정하는 것엔 찬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 연구가 주가 되면 안되겠죠. 소설 텍스트 연구 80%, 소설 외 텍스트 및 작가 연구 20% 전 뭐 이 정도로 균형을 맞추죠."  

그 비율이 일률적인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감이신가요? "이에 반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그는 자신의 대사회적 사상과 예술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죠. 전 일단 작가의 입장을 존중하는 편입니다." 물론 존중해야겠지만, 그때의 작가는 독자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엄격한 훈련은 소설쓰기에도 존재합니다. 훈련없이 소설쓰기는 힘들죠. 한데, 소설쓰기 훈련과 철학 훈련의 차이점은 전자가 순전히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만, 후자는 철학과하는 제도화되어 있는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데리다도 문학주의자죠. 제가 별루 좋아하지 않는. 순전히 저 개인적 취향입니다."  

문창과가 철학과만큼 많은 건 아니지만, 소설 쓰기 역시 공식/비공식적 교육의 장 혹은 제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전 쿤데라-카프카-하이데거 정도 되겠네요." 그렇다고, 제가 쿤데라-도스토예프스키-데리다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들만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하이데거를 좋아하시면서 대표적인 하이데거리언인 데리다를 싫어하는 건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후기 하이데거라면, 쿤데라님의 표현대로 대표적인 문학주의자인데(그래서 소위 많은 철학자들이 후기 하이데거를 싫어했죠.)...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도 대표적인 문학주의자의 주장 아닌가요? "앞으론 구체적으로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하면 좋겠네요. 우선 이번 달 작품으로 선정된 <농담>과 <카라마조프>를 중심으로....." 예, 저도 적극적으로 (다시) 읽고 싶습니다. 다만, 직장인인 관계로 충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렵군요. 문학주의자도 생계 유지는 해야 하니까...  

로쟈님과의 논쟁에 있어 제가 약간 불리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의 말에 수긍이 잘 가지 않거든요. 한데, 이것만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작가다. 한데, 우리 나라에서 그는 너무 과대평가 받고 있다. 도스토예스키에 대한 과대 평가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국문학에선 그것 자체가 하나의 논문거리가 되죠. 김윤식의 글 중에 이에 대한 글들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대결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죠. 예를 들어 조연현, 김동리, 서정주 같은 사람들. 일본에선 고바야시 히데오, 하니야 유타카 등등.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하면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저개발의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거죠.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쿤데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쿤데라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라블레, 블로흐와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한데, 명백한 것은 한국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선 열심히 읽으려고 하지만, 라블레나 블로흐에 대해선 그런 작가가 있는지 어떤 작품을 썼는지도 잘 모른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전 균형, 균형을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지적 균형. 쿤데라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선 라블레, 블로흐에 대한 이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죠.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쿤데라에 무게중심을 둔다면요.

00. 11. 06. 
쿤데라님의 메일 잘 받아 보았습니다. 마감된(?) 논쟁의 작은 차이에 대해서, 약간의 보충을 하고자 합니다. 사실, 쿤데라 문학에 대한 애착은 남못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 카페를 둘러보면서 긴장(!)하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죠. 아무려나 좋은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호가 확산되는 건 말 그대로 좋은 일이고, 그런 일에 저보다 힘써 주시는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쿤데라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그리고 제가 기억에 의존했던 대목)은, <소설의 기술>(책세상), 94-95쪽입니다. 한 대담에서 쿤데라는 예의 자신의 소설론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전제는 "철학자가 생각하는 방식과 소설가가 생각하는 방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 질문자가 "그러나 <작가일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완전히 직설적이죠."라고 말하자, 쿤데라 왈:

"그러나 그의 생각의 위대함은 거기 있는 게 아니죠. 그가 위대한 사상가인 것은 다만 소설가로서의 그를 통해서입니다[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옮긴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그의 인물들을 통해 범상치 않을 정도로 풍부하고 새로운 지적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인물들 속에 투영된 그의 생각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하지요. 예를 들면 샤토프 같은 인물 말이예요.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온갖 주의를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생각을 샤토프에게 투영시키고 있기는 해도 그 생각은 금방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도, 일단 소설의 몸뚱아리에 들어오게 되면 성찰의 본질이 달라지게 된다는 규칙, 교조적인 생각이 가설적인 생각이 바뀌게 된다는 규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 철학자들이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놓치게 되는 게 바로 이거죠..."

쿤데라님과의 논쟁에서 제가 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작가일기>의 저자 혹은 문학텍스트 바깥의 저자)와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나눈 것은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바흐친과 아주 유사하게, 쿤데라는 소설의 규칙을 이야기 합니다. 어떤 교조적인 생각도 소설의 옷을 입게 되면, 가설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소설이란 장르의 힘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힘이죠(그는 철학자가 아닌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 대목에서, 저는 "쿤데라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논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죠...  

10.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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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30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1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