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후에 일이 있어서 오전에 바쁘게 작성하여 보낸 원고인데, 매번 턱걸이하는 기분이 든다. '권장도서' 문제를 빌미 삼아 '몰상식한' 현실에 대한 소감을 간단히 적었다.     

경향신문(10. 06. 22) [문화와 세상]‘유해한 책’ 과 ‘유해한 현실’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들이 쓴 <교양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다 보니 ‘읽어서는 안되는 책 15권’이란 항목이 눈에 띈다. 일본에도 우리처럼 아직 ‘불온도서’라는 게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아직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사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읽어서는 안 된다’고 따로 골라놓은 것이다. 물론 이런 목록은 거꾸로 ‘한번 읽을 테면 읽어보라’고 광고하는 의미도 갖는다. 2008년에 국방부 불온도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예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금지한 책의 목록에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과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포함돼 있다. 읽다 보면 숨이 막힐 것 같다는 게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대한 평이고, 순진한 영혼을 전부 태워버릴 수도 있는 책이라는 게 <차라투스트라…>를 읽지 말도록 권유하는 이유다.

그런 금지도서 목록과 반대되는 것이 권장도서 목록이다. 각 대학별로 제시하는 필독 고전목록 외에도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런 목록을 들여다보면 문득 권장도서 목록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일단은 책이 너무 많으며, 따라서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전제다. 다 읽을 수 없기에 가려 읽어야 하고, 가려 읽기 위해서는 일종의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거기에 뒤따른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에게 적합한 건 아니라는 판단에 동의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황석영의 단편 <삼포 가는 길>에서 등장인물인 술집 작부 백화의 “내 배 위로 연대 병력이 지나갔어”라는 대사가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권장도서로는 불가하다는 주장과 마주하게 되면 ‘읽을 만한 책’의 기준에 합의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기준에 따라서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에 포함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반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청소년을 여전히 자율적인 주체라기보다는 훈육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문제다. 어느 정도의 독서력과 분별력을 갖춘 청소년이라면 어떤 책을 읽을지 말지는 스스로 판단하여 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권장도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행여 그들이 ‘전염병’에라도 걸릴까 염려되어 ‘항균실’에 감금해놓기보다는 면역을 키워주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권장도서 목록 정도 가지고 과연 온전한 지도와 통제가 가능한지가 문제다. 과거 노출 수위가 높은 영화 장면들을 ‘가위질’하고 상영하던 것처럼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문제가 될 만한 대사와 장면을 삭제한 ‘안전한’ 문학작품만 청소년들에게 읽히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권장도서 목록에 빠져 있다고 청소년들은 <삼포 가는 길>을 안 읽게 되는 것일까?

아니,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유해한 책’ 이전에 ‘유해한 현실’이다. 사실 술집 작부의 말보다도 청소년들에게 더 유해한 것은 관행적으로 향응과 성접대를 받았다는 ‘스폰서 검사’ 스캔들이지 않을까? 무얼 보고 배우라는 것인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안보의식을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전쟁 시나리오나 공모한다는 서울시의 행태는 또 뭔가? 이런 ‘몰상식한’ 현실을 방기한 채로 과연 ‘청소년 권장도서’의 의의를 옹호할 수 있을까? 청소년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위해서도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권장할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10. 06. 21. 

P.S. 기사를 옮겨놓기 위해 검색을 하는데, 내일자 '책읽는 경향'에서 다루는 책이 <로쟈의 인문학 서재>다. 반갑기도 하고 일견 놀랍기도 한 마음에 이 또한 옮겨놓는다(그래도 '유해한 책'은 아닌가 보다).  

경향신문(10. 06. 22) [책읽는 경향]로쟈의 인문학 서재 

반복하자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 ESR가 우리의 존재 근거이자 원리이다. 인간이 ‘의미의 질병’을 앓는 동물인 것은, 그러한 ESR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걸 우리의 대뇌가 급속하게, 불완전하게 진화한 결과로 본다.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의 위장을 닮은 대뇌가 해야 할 일은 위장과 마찬가지로 소화 작용일 뿐이다. 그러한 작용으로써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기운 나게 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이 대뇌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What’s it all about?”(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혹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이 그 물음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고 요구이다. (203쪽)

지금 이 대목에서 니체를 읽어주고 있는 로쟈 선생이 환기해주는 사실은 인간이란 먹고, 살고, 낳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살고 다음 세대에게 그저 넘겨주는 역할만 하면 되는 ‘다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먹고 살고 낳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 사실은 감동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에 안도감이 섞인 감동을, 우리는 동물처럼 단순한 마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에 자부심이 섞인 불편함을.(권해진 | 미래의창 편집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6-21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2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보 2010-06-2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통해 니체,데리다,지젝 읽기가 좀더 명료해졌습니다.
다음 책 출간을 고대하는 독자로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로쟈 2010-06-22 17:25   좋아요 0 | URL
저자로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2010-06-24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4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