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와 친일청산의 방식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대로는 다가오는 3.1절도 고려해서 고른 책이 박지향 교수의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 2010)다. '과거는 낯선 나라'란 말도 있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윤치호의 내면과 우리시대의 많은 초상들이 겹쳐지는 걸 느꼈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은 후기에 덧붙여 놓았다.   

한겨레21(10. 03. 01)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 펴냄)는 서양사학자 박지향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가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주창하며 내놓은 저작이다. 기존의 친일청산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족주의 사관’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이젠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범적으로 시도한 것이 ‘윤치호 다시 보기’다. 일제 시기 대표적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친일파의 거두’였던 윤치호(1865-1945)의 사상과 내면을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영어 일기를 통해 재구성하고 재평가하고자 한다.   

윤치호는 어떤 인물이었나? 젊은 시절 오랜 유학생활과 교사생활을 거친 윤치호는 당시로선 매우 드문 국제적 배경에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사상으로 저자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를 꼽는다.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윤치호는 이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인식을 일생 동안 견지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이 세상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쫓아내는 곳이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차라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떠 전사적 정신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에게 어떤 민족이 약한 것은 그 민족의 죄이지 다른 민족의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유와 정치적 독립은 만세운동으로 가능하지 않았고, 제 힘으로 싸워서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적 다윈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이지만,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문명 수준이 앞선 나라가 뒤진 나라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고, 강한 인종이 약한 인종을 가르치면서 범한 일부 범죄는 ‘필요악’으로 용인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정신의 소유자였지만, 윤치호에게 그 백성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1천 명 가운데 채 한 명도 신문을 읽지 않는 무지한 대중이 ‘강건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윤치호는 약소국의 정치적 독립에는 첫째로 국민이 지성과 부와 공공정신을 갖추고, 둘째로 국제정치적으로 찾아오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독립보다는 실용적인 교육을 우선시했다. 저자의 평가대로, “그는 너무 엄격한 잣대로 사회발전과 대중의 수준을 평가하였다.” 결과적으론 동족에 대한 불신과 이민족 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가게 했다.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마치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한 것처럼 조선도 당분간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것이 현실주의자로서 그가 ‘저항’ 대신에 ‘협력’을 선택한 논리다.  

 

협력이란 ‘조국을 배반하고 적과 협조하는 것’을 뜻하지만, 저자는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의 탈신화화와 협력행위에 대한 재평가를 사례로 들어 저항과 협력의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협력과 저항 모두 자립을 목표로 하지만 단지 그것을 성취하려는 수단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친일 민족주의자’라는 새로운 범주의 도입까지도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혹 윤치호는 ‘친일 민족주의자’였던 것일까? 

“윤치호의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일생 지녔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에필로그에 적었다. 윤치호의 입장을 내재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 접근법의 한계에 대한 고백으로도 읽힌다.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같은 것이 아닐까. 인질로 잡힌 사람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그에게 호감과 지지를 내보이는 심리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10. 02. 24.  

P.S.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윤치호의 생각이었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해서.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서양 근대문명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윤치호가 영국과 미국에 실망했으면서도 여전히 영미식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은 해방 후 그가 쓴 서한에서도 드러난다. "듣자니 조선 사람들이 민주정부 출범에 관해 거론한다는 데 내겐 마치 6세 어린이가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을 거론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영국과 미국 두 나라만이 세계에서 민주주의로 성공한 유일한 나라들입니다."(199-200쪽)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다. 유교 사회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본 것인데(둘다 기생적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 점은 음미해볼 만한 게 아닌가 싶다.  

윤치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유교사회의 윤리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한데 공산주의는 유쿄보다 더 나쁘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에 볼셰비즘이 창궐하는 이유는 기생주의라는 습성 외에 일본 정책이 조선 사람에게서 먹고살 수단을 빼앗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치호는 대중이 사실상의 기아상태, 그리고 그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볼셰비즘은 뿌리뽑히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143쪽) 

'공산주의=기생주의'라는 주장이라면 크게 놀랍지 않은데, 놀라운 것은 그가 공산주의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아직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최고 수준의 협조적 문명"을 획득한 국민에게나 가능한 것인데 조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앵글로색슨인들조차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해방후에도 윤치호는 공산주의의 위험을 심각하게 경고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사발전 단계론에 대한 그의 점진주의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몇몇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영국이 고도의 정치력과 노련한 지혜를 가지고 서서히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유도해 가고 있다 하더라도, 대한조선이 어떻게 진짜 사회주의의 ABCD도 모르면서 인민공화국체제를 경영할 수가 있겠습니까?"(143-4쪽) 

인용문은 모두 해방후에 윤치호가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영문으로 써서 보냈다는 서신 '한 노인의 명상록'에 들어 있으며, <좌옹 윤치호 서한집>(국산편찬위원회 편, 1995)이 출전이다. 절판된 책인데, 기회가 되면 도서관에서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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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2-2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시 정부에 대한 프랑스인의 묵인을 캐내는 것은 레지스탕스를 거국적으로 했다는 신화깨기의 핵심입니다.신화깨기를 자세히 살핀 게 <비시 신드롬>인데 우리가 이 문제를 차분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감정적인 인신공격성 욕설이 난무하겠지요.너 친일파 아니냐 너 빨갱이지...하는 식의.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흠집내려는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박지향이나 이영훈의 문제제기도 정정당당히 평가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10-02-28 12:45   좋아요 0 | URL
윤치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 근대사와 한국사회의 많은 대목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보는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태도가 많더군요...

비로그인 2010-03-04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신채호 전집(전집이 있는지 모르겠네)을 읽어보고 싶어요..

청소년 용으로 나온 책중에 용이야가 나오는 책이 있는데 익숙치는 않았지만 꽤 재미있고 활달해지더라구요.. 제가 무협지를 좋아해서 그런지 어쩐지 엄청.. 배꼽이 아플정도로 웃었다는.. 거기다가 메세지도 만만치 않고..

로쟈 2010-03-05 00:41   좋아요 0 | URL
윤치호와 유길준에 대해 몇 권 읽어보려고 합니다. 나이들면서 왜 점점 읽을 책이 많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체력은 떨어지는데요.^^;

2010-03-05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