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11월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격월로 서평을 게재하는데, 이번에 다룬 것은 두 명의 디자이너가 쓴 <슈퍼노멀>(안그라픽스, 2009)이란 책이다. 내가 고른 것은 아니고 편집부에서 제안해준 책. 생각할 거리가 없진 않아서 나름대로는 소득을 얻은 책이기도 하다.   

공간(09년 11월호)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슈퍼노멀? 일단 제목이 ‘노멀’하지 않다. ‘규칙’이나 ‘규범’을 뜻하는 라틴어 ‘노르마(norma)’에서 나온 ‘노멀’은 표준적인, 정상적인, 평범한 것을 가리킨다. ‘슈퍼’는 ‘위의’나 ‘너머의’라는 뜻이니까 ‘슈퍼노멀’ 자체가 조어상으로는 모순형용이다. 보통 특별하면 평범하지 않고 평범하면 특별하지 않은 법인데, ‘특별한 평범함’이라니? <슈퍼노멀>(안그라픽스, 2009)은 후카사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 두 명의 제품 디자이너가 안내하는 이 ‘특별한 평범함’의 세계다. 책의 부제가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인데, 덧붙이자면 그 감동에는 예기찮은 놀라움도 포함되어 있다.     

 

책에는 저자들이 발견한 '슈퍼노멀' 오브제 50여 점이 작품 설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전시장에 진열된 ‘작품’이기도 한 이 슈퍼노멀 제품들이 첫눈에 주는 인상은 소박함과 단순함이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던지는 방향으로 살짝 기울어진 쓰레기통과 철사를 조금 두껍게 하고 간격을 기능에 맞게 조정한 과일바구니, 공기환기구의 창살을 빼다박은 공기청정기와 과장된 아치가 다리부분에 포함된 욕실의자, 그리고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여 사용자가 손을 다치지 않게끔 배려한 쇼핑바구니 등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노멀한’ 물건들에 ‘특별함’을 부여할까?       

이 슈퍼노멀의 특별함을 저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용어로 ‘와비사비(侘寂)’와 ‘슈타쿠(手澤)’라고도 표현한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이 시간이 가면서 갖게 되는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용적인 미를 통달한 이후에 나타내는 아름다움이다. 물건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물건 속에 깃든 혼이 자연스레 진가를 드러내고 광채를 나타내지 않는가. ‘슈타쿠’는 ‘손으로 윤을 낸’이란 뜻이다.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만지고 또 만지다 보니 윤기가 흐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모두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발생하고 또 얻게 되는 아름다움이다.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장식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아름다움일 수밖에 없다. 슈퍼노멀은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사용자와 어떤 일체감을 얻게 된다. 주방의 도마가 그렇고 병따개와 스탠드 옷걸이, 종이클립과 디지털카메라가 그렇다. 이런 것들을 우리 생활의 일부로 늘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저자들이 든 예로, 간디가 살았을 적에 그가 기거하던 방에서 사용하던 단출한 물건들, 즉 안경 한 벌과 밥그릇 하나, 옷 하나가 간디에게는 슈퍼노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두 저자가 정의하는 슈퍼노멀은 이렇다. “슈퍼노멀은 우리가 무언가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메아리입니다.”(후카사와) “슈퍼노멀은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와 관계있다고 봅니다. 즉,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사용하다 보니 아름다워지는 아름다움, 매일 일상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볼품없지만 실용적이고 오래가는 아름다움 말예요.”(모리슨) 

이런 슈퍼노멀이 왜 새삼 주목받고 있는가? 그것은 저자들의 지적대로 새롭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특별한 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흔히 기존의 것을 개선하고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지만, 그의 과도한 의욕은 기존의 좋은 다자인마저 무시하거나 간과하도록 만든다. 새롭고 획기적인 것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라면 이미 알고 있고 오래 쓰고 있는 물건들이 평범하고 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즉 노멀만 보고 노멀 안의 존재하는 슈퍼노멀의 가능성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주창한 슈퍼노멀은 지각의 자동화에 맞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미학론과도 닮았다. 후카사와와 모리슨은 슈퍼노멀이 ‘이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자각하는 것”이 슈퍼노멀이라면, 그것은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지각의 과정 그 자체가 미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러시아 이론가 슈클로프스키의 입장과 먼 거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형식주의 예술론에서는 지각과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상을 ‘낯설게 하는’ 예술적 기법과 예술가의 창조적 개입이 중요하지만, 슈퍼노멀은 그런 ‘창조적 자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곧 슈퍼노멀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누가 만들었을까란 궁금증도 갖게 하지 않는다. 디자이너의 생각과 예술가의 손길을 관심 대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바로 슈퍼노멀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특별한 기교나 장인의 솜씨 없이도 특별해질 수 있다는 것, 가장 평범한 것이 비범함을 품고 있다는 슈퍼노멀의 발견은 일상 속에 파묻혀 지내는 우리를 뿌듯하게 한다. 

09. 11. 08. 

P.S. 내 주변에도 '슈퍼노멀'이 없을까 둘러보다가 생각이 미친 건 애용하는 형광펜이다. 풀네임은 모나미 에딩 '슈퍼형광'. 요즘은 태국산으로 판매되는데, 그런 탓인지 가격이 저렴하다. 개당 200-250원. 책을 읽으며 줄을 긋기 위해 주로 활용한 게 몇 년쯤 된 듯싶다(주로 초록색만 쓴다). 가장 저렴하고 가장 단순하지만, 내겐 필수품이어서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 정도면 슈퍼노멀로 손색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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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0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수첩(7x11)과 Petit펜입니다. 칼라티를 살때도 가슴 주머니가 있는 옷을 사죠. 돈과 지갑이 없으면 괜찮아도 수첩이 없으면 되돌아가 챙긴후 외출합니다. '간디'의 '슈퍼노멀'을 보니 '소로'의 '시민불복종'이 생각납니다.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주기 했구요.'소로','간디','톨스토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로쟈 2009-11-09 19:04   좋아요 0 | URL
네, 세 사람을 묶은 책이 나올 법도 한데요...

펠릭스 2009-11-10 17:57   좋아요 0 | URL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킹목사에게 영향을 주었고요.

me-polaris 2009-11-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께 저공비행을 샀습니다.
저에게는 낯선 작가라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열심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여기 제가 사는 버지니아에서 돈을 지불하고 인문계책을 사고 파는 행위는 서점의 주인과
고객에게 어지간히 극적이지요.

로쟈 2009-11-09 19:03   좋아요 0 | URL
버지니아에서 사실 수 있는 <저공비행>이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