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근대란 무엇인가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강, 2009)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니 책의 역자가 필자이므로 '역자 후기'라고 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 바우만은 리차드 세넷과 함께 개인적으론 '올해의 발견'이라고 꼽을 만한 사회학자이지만 아직 <액체근대>는 완독하지 못했다. 정독할 시간이 얼른 생기면 좋겠다(바우만의 <유동적 사랑>도 새물결의 근간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데, 이 또한 빨리 출간됐으면 싶고).  

  

교수신문(09. 10. 26) 사회관계와 힘에 관한 엄중하고도 온기있는 통찰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때로 숱한 생각과 느낌을 비워낸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는 행운이 있었다. 책 내용이 무한질주 궤도에 불가피하게 오른 액체근대 세상을 다루니만큼, 멈춰 서서 과연 그러한가를 짚어볼 순간을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액체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쇼핑목록을 들고 운동기구, 자동차, 주말여행, 더 나아가 교양, 친분,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구매하고 있어야 제대로 하루를 산다고 느낄 지경이다.

오늘을 사는 개인들의 하루 일과들은 일견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에는 나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독한 숙제처럼 비쳐지는 것들도 있다. 연구 작업과 일상의 숙제들이 보편적으로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둘이 동시에 흔쾌하고도 희망에 찬 일정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측면에서인지, 별개의 것처럼 따로 돌아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점검하는 계기를 준다는 점에서 『액체근대』가 해독해낸 세상을 접해볼 필요가 있겠다.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액체근대』에는 현대인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게 된 근대의 속성,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리는’ 근대의 징후가 어느 정도까지 관철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 비평이 담겨있다. 집단적 유대와 결속으로 관계를 만들고 노동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며 공간확장과 그를 통한 정치사회적 우위를 다투는 고전적 근대, 고체근대 혹은 무거운 근대는 종말을 고했다. 고체근대를 연 주체라 할 근대시민은 이제, 그 도착과 실현이 불확실한 근대적 이상을 이정표삼아 무한질주를 해야 하는, 고군분투하는 개인으로 탈바꿈했다.

구체제로부터 해방된 개인은 그 모든 과거의 속박과 억압이 무너져 내리면, 과거보다는 훨씬 진보되고 향상된 새 삶이 보장될 것이라 예상했다. 참정권이 각자의 손에 쥐어졌고, 자유경쟁의 원리에 따라 삶의 복지와 안녕을 스스로 일굴 수 있는 세상. 그런데 실감은 더 잘 살게 된 것 같지 않고 문전박대당하는 일은 더 뼈저리다. 이윽고 구시대의 견고했던 신분제와 지배이념이 근대의 힘에 의해 녹아버리던 그 과정을 찬찬히 거슬러 살펴본 결과 그 거스를 수 없는 액화의 힘이 그들의 행복에 필수불가결한 다른 것들마저 함께 휩쓸어갔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이 삶의 실현을 위한 절박한 쇼핑에 나서는 액체근대 세상에서, 그 쇼핑이 절박한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상품화된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경신되고 그만큼 기회가 무궁무진해지는 만큼이나 개인의 자원이 더욱 더 한정된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자원 중에서 으뜸은 시간이겠다. 고전적 근대, 무거운 근대 세상을 지배한 것이 방대한 규모와 육중함을 자랑하는 생산설비, 공간적 지리적 확장을 통한 시장개척이었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벼운 근대, 액체화된 근대 세상에서는 지리적 영토적 고려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본과 인력에 가장 큰 힘이 실리게 된다. 

액체근대 세상의 공간은 과거 그 안에 거주하는 거주민과의 견고한 결속이 녹아버리고, 수많은 일회적이고 비전통적인 공간들을 양산해냈다. 여기서 저자는 인류학적 통찰을 빌어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이 여타집단을 동화시키거나 퇴출시키는 전략이 액체근대의 주요한 공간지배 전략임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교통수송의 발전과 일일지구촌 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액체 근대의 시간확보의 노력은 가히 전대미문의 범위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현대적 공간, 지하철 역사, 공항 대합실, 자본의 위용을 과시하는 고층건물들이 자아내는 공동화된 도심의 공간들, 이들은 모두 액체근대가 벌이고 있는 시간확보의 질주가 파생시킨 非공간들 혹은 빈 공간들이다. 이 공간들을 함께 묶어주는 공통점은 그것이 지극히 일회적이며, 그 안에 잠시 또는 특정기간 거주하는 거주민들과의 어떠한 지속적 유대나 공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간은 오히려 그 안에서 자본과 노동력의 화합을 조율해내야 하는 비용과 부담을 물린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인 고려대상이 된다. 값싼 노동력과 자본에 우호적인 시장을 창출해줄 국가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자본은 어디든지 이동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다. 문제는 그를 위한 이동을 할 때 누가 더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무거운 근대 세상의 전통적 관계와 힘을 녹이고 폐기해 이윤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맹 질주에는 종래의 종신계약이나 평생직장, 혹은 노사간의 인간적 유대와 상호의존 등은 지극히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

담장쌓는 공동체에 대한 비판
바우만이 일컫는 액체근대는 19세기 계몽주의 근대, 무거운 근대, 고체 근대에서 비롯된 근대의 ‘녹이는 힘’이 점차로 삶의 온갖 영역과 요소를 파고들어 모든 영속적이고 지속하는 힘과 관계를 녹여버린 결과, 모든 사회관계가 일회성과 결속탈피를 특징으로 한다. 다른 대상과 결속할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있는 상황에서 이전 대상과의 우직한 연대나 신뢰는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부르는 현실이라는 말이겠다.

액체근대 세상은 결국 근대의 심화, 더 나아가 근대의 편향일로라 부름직하다. 그의 질문의 요체는 이러하다. 액체근대 세상에서 ‘견고한 모든 것들을 녹이는’ 힘이 양날의 칼이라면, 그 칼끝이 과연 어디를 겨냥해왔고 어떻게 고쳐 잡아야 하는가라는 반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해방을 향해 일치단결했던 민주주의의 발전적 동력이 그 또한 액화돼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지는 않은가, 대문자 역사가 장담해왔던 진보에도 기실 수많은 갈래길이 있어서 힘을 쥔 자의 진보와 그렇지 못한 자의 진보가 그 내용을 달리할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조정할 의사일정을 각 집단들이 활발히 내어놓고 있는가, 동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언어로 결속한 민족공동체의 의식이 여타집단을 뱉어내고 차단하는 단절의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면 이를 감시하는 공공영역과 그 속에서의 논의가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의 학제를 뛰어넘는 포괄적 영역에 걸쳐 수행될 수 있겠다. 

액체근대의 으뜸가는 속성이 시간에 대한 자본의 지배권이라는 그의 진단을 돌이켜보자면, 근대의 액화라는 지구촌의 대세가 타고 흐를 물길이 향후 어떠한 굴곡을 지어낼 지에 대한 논의와 조정 역시 조급한 결론을 최대한 지양하고 충분한 시간과 검증노력이 곁들여진 시간과의 끈기 있는 승부라 여겨진다. 바우만의 『액체근대』가 각 연구영역에서 독창적이고도 파생적 질문들을 배양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이에 근거한다.(이일수 용인대·영문학)  

09. 10. 26.  

P.S. '액체근대' 혹은 '유동적 근대'란 다르게 말하면 '가벼운 근대'이기도 하다. 바우만의 책에는 '무거운 근대로부터 가벼운 근대로'란 절제목도 포함돼 있는데, 자연스레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된다(소설의 1부 제목이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개인적으론 이번주에 강의를 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실제로 바우만의 책에도 쿤데라가 두 차례 언급된다. 내달에는 이 두 책을 소재로 무거움과 가벼움을 주제로 한 글을 하나 써봐야겠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1-27 17:19 
    (책) 지그문트 바우만, :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 via 로쟈
 
 
돈케빈 2009-10-27 03:08   좋아요 0 | URL
출간 예정인 <유동적 사랑>은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과 함께 읽으면 좋겠는걸요?

펠릭스 2009-10-27 10:18   좋아요 0 | URL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철학(베르트랑 베르줄리)'도 생각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