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신간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책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이다. 이건 이 서재를 자주 드나드는 분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는 '지젝 전도사' 비슷한 일을 그간에 해왔기 때문이다. 두께가 만만찮지만 지젝 '전문' 번역자의 솜씨인 만큼 읽기는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반가운 마음으로 리뷰기사도 챙겨놓는다.  

 

경향신문(09. 09. 05) 자본주의 시대, 다시 혁명을 말하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징후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근 20~30년 동안 자본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실질적’으로 흔적을 감췄다는 사실이다. 몇몇 고루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빼곤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반(反)세계화 혹은 반신자유주의라는 용어에 바통을 넘겨준 형국이다. 반세계화는 제국주의를 겨눈다. 노동착취 같은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타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 미국’을 적으로 삼는 경향이 농후하다.  



저자는 이러한 반세계화를 자본주의의 교묘한 기획으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돌아올 칼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좌파로 분류되는 철학자 상당수도 자본주의 전략의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자의 해부로 드러난다. 자크 랑시에르와 안토니오 네그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개념을 비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향은 ‘후쿠야마적’이다”라는 지젝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유토피아 논의를 압도하는 듯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논의가 자본주의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현실에서 지젝은 ‘혁명’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혁명은 우리가 잃어버린 ‘대의(Cause)’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책은 자본주의의 실질적 비판이 여전히 필요하며 혁명의 중요성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저자는 ‘디카페인화된 혁명’ 즉 ‘혁명 없는 혁명’을 제시하는 어설픈 좌파나 자유주의자의 논리적 무기력함을 예리하게 간파한다. 지젝은 마르크스 사상과 로베스피에르의 ‘폭력적 혁명’을 옹호한다. 폭력은 유혈 충돌이나 물리적 테러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폭력은 단번에 비민주적인 것을 제압할 수 있는 방식에 다름아니다.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하듯이 말이다.

자유주의적 관용보다 적대감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책은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한 모색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신이 서있는 자리, 즉 계급적 시선을 거두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하다.(서영찬기자) 

09.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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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0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블랙홀에서 흥미(과거픽션)을 풀어내는 소설가처럼
자본주의라는 블랙홀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을 구출하려는 "지젝"의 "혁명"
(대의중 하나,비민주주의 단번 제압용)은 미래픽션(유토피아의 논의) 이라
생각됩니다.

로쟈 2009-09-05 09:16   좋아요 0 | URL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는 게 혁명의 요구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