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워리어' 한윤형의 두번째 책이 나왔다.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란 부제를 달고 있는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 2009). 하루종일 원고를 쓰는 날이라 진빼는 시간을 보내는 틈에 잠시 숨을 돌려 이 <사용후기>의 매뉴얼을 읽어본다. '뉴라이트 뜯기, 꺼내기, 맛보기'가 책의 서문이며 알라딘에서는 미리보기를 통해서 읽어볼 수 있다. 한윤형의 블로그에서 옮겨놓는다.   

  

뉴라이트 뜯기, 꺼내기, 맛보기

1.
뉴라이트 논쟁은 역사전쟁이면서 정치논쟁이다. 단순하게는 8․15를 ‘광복절’로 부를 것인가 ‘건국절’로 부를 것인가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일제 식민지기와 대한민국 건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관점을 둘러싼 역사전쟁의 차원이 있다. 하지만 그 전쟁의 이면엔 현존하는 정치세력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와 대한민국의 향후 과제는 무엇인지를 둘러싼 정치논쟁의 차원도 겹쳐 있다. 

뉴라이트 논쟁의 이러한 양면성은 그것에 대한 적절한 개입을 어렵게 만든다. 역사학 전공자들은 자신의 발언이 어떤 정치적 맥락의 프리즘을 거쳐 어느 한쪽의 견해를 편드는 것으로 해석될까봐 소신 있게 얘기하기가 어렵다. 반면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이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나친 당파적 해석을 통해 이 논쟁을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기 일쑤다. 그래서 이 논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쉬운 논쟁이다. 이를 보다 못해 아마추어가 겁없이 이 논쟁에 뛰어들기로 했지만, 역사학에도 정치학에도 전문적 지식이 없는 나는 물론 이 문제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몇몇 2차 자료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이 논쟁을 정리해가다 보니, 적어도 상식인의 눈에 이 문제가 어떻게 비치는지 정도는 또렷이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청소에 비유한다면 어지러이 놓여 있는 큼직큼직한 물건들을 있어야 할 곳에 가져다놓는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논의 이후에 필자의 무지와 오해를 지적하면서 좀 더 세밀한 빗질과 걸레질을 하는 상식인이나 지식인의 논의가 이어진다면 그보다 더 반가울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잡고 있는 스탠스를 먼저 고백한다면, 나는 이 논쟁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들을 둘 다 비판할 생각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이유 하나는 논리적 필요성이다. 말하자면 양쪽 다 틀린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 둘은 정치적 필요성이다. 한국 사회가 ‘단일 민족국가’ 운운할 때는 이미 지났다고 본다. 이제는 다민족주의 공화국의 유지를 위한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오히려 ‘탈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이런 문제의식이 엉뚱하게 떠밀려 묻혀버린 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뉴라이트를 일컬어 ‘탈민족주의에 대한 지능적 안티 세력’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뉴라이트를 비판하기 위해 기존의 민족주의 담론을 그대로 끌어온다면 이 논쟁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퇴행적인 논쟁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이 책은 뉴라이트를 비판하는 책이다. 민족주의자 비판은 뉴라이트에 대한 정밀한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즉, 기존의 민족주의 방식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뉴라이트의 문제들을 세밀하게 잡아내 보겠다는 것이 내 의도이다. 좀 더 단순화시키면, “탈민족주의자는 뉴라이트를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 책의 주제의식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을 ‘뉴라이트 사용후기’라고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뉴라이트를 비판하지만, 비유하자면 포장지도 뜯어보지 않고 제품을 욕하는 수준이 대부분이다. 몇몇 개혁진영 역사학자들 역시 포장지만 겨우 뜯어보고 상자 모양을 보고 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뉴라이트라는 ‘담론’에 대한 성실한 구매 리뷰를 쓸 것을 약속한다. 제품을 실제로 사용해 보고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보이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을 것이다.

2.
하고많은 주제들 가운데 사학 전공자도 아닌 나는 왜 하필 뉴라이트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을까? 나는 두 가지 계기를 설명해야겠다. 하나는 지난 십년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정치평론들이 결국엔 한국 현대사 문제로 수렴되더란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1999년부터 이른바 ‘안티조선 운동’이란 것을 계기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흘러 흘러 민주노동당원도 되고 진보신당원도 되면서 이럭저럭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여러 세대들, 즉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우리 아버지 세대와 특히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386세대를 많이 만났다. 나는 이들과 오랜 시간 동안 대화하면서 이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틀이 결국 그 세대에 고유한 하나의 판타지로 수렴된다는 것을 느꼈으며, 그 틀이 오늘날의 사회를 바라보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이 양측의 감수성이 부딪히면 대한민국은 ‘두 개의 나라’가 된다. 386세대는 독재정권의 지지자들과 뉴라이트를 ‘민주헌정을 부인하는 이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 반대측에서는 진보개혁 진영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양측 다 상대방을 비-국민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양측 다 ‘혁명세력’인 셈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를 만들 때 한번 그렇게 ‘좌익 청소’를 했던 것처럼 지금도 상대방을 숙청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한 것 같다. 반면 개혁진영도 ‘한 번도 왕의 목을 베어보지 못한 역사’ 운운하며 역시 언젠가 좋은 날이 있어 우리가 승리하여 그들을 몽땅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죽이겠다는 건 아니고 저들의 정치적 목줄을 끊어버려야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로 발돋움하는 기틀(완성도 아니고!!)이 되겠다는 소망이지만, 그렇게 얘기해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양쪽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그걸 결국 실현해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저들은 ‘보수’도 아니다, 저들은 ‘진보’도 아니다, 그런 식의 앵앵거림이 많지만 여기는 다른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이니까, 대한민국에서 보수라고 불리는 이들과 진보라고 불리는 이들을 그냥 보수와 진보라고 불러보자.(나도 꼭 이런 규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닌데, 실은 계속 늘여 쓰기가 귀찮아서 그렇다.)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보수!’,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진보!’의 이상형을 공책에 덕지덕지 그려놓고 그 공책에 그린 그로테스크한 그림에 들어맞는 사람이 나오기 전까진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폐증적 사춘기 소년 소녀들과 같다. 보수와 진보 모두 변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양 진영의 상호비판은 물론 타당하기도 하고 맥락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이 “그러므로, 나와 얘기할 수 있는 보수/진보는 없다!!”는 심리의 알리바이가 된다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얘기를 해야 변하든 말든 할텐데 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부부라도 이렇게 서로가 미우면 이혼하고 새 짝을 찾을 수 있겠지만,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버리고 어느 나라에 가서 짝을 찾아 정치를 할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이 이제 그만 사춘기 감성의 증표인 공책을 덮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거울도 봤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이 부족한 책을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계기 하나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운동 비스무리한 걸 하는 이들을 만나보니, 특히나 좌파 운동권들은 “민족, 그딴 건 없다”는 걸 아예 교리처럼 외우고 있더란 것이다. 청소년 시절 흔히 ‘환빠’(<환단고기>빠)라 불리는 울트라 민족주의자였다가 거기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던 나로서는. 그들이 사실 민족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없다고 하면 쿨해 보일 것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들이 ‘민족’이란 것에 애착을 가진다면 이를 존중하고 거기서부터 평론을 시작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이 있다, 혹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서로가 인정해야 할 역사적 사실의 기본이란 건 있을 게다. 그리고 민족론이라는 게 어떤 맥락에서 도움이 되고, 또 어떤 맥락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것일 테다. 특히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런 작업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여지껏 민족주의 담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관심이 자연스럽게 뉴라이트 논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3.
다시 이 책에 대해 말한다면, 읽기가 어렵진 않겠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의 담론 지형이 제법 복잡미묘해서 소략한 안내도지만 잠시나마 이를 펼쳐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이 책의 1부는 일제 식민지기에 관련된 역사논쟁들을 친일파 문제라는 정치논쟁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1장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상식인들에게 과도하게 비난받는 이유를 고민한 나는 친일파 논쟁이 역사논쟁과 정치투쟁을 매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 논쟁에 개입하여 2장과 3장에 걸쳐 복거일의 친일파 옹호론을 검토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4장과 5장에 걸쳐 식민지 근대화론과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의 정확한 입장에 대해 요약하여 세간의 섣부른 오해를 넘어선 비판의 지점을 탐색한다. 6장에서는 뉴라이트 역사관이 지닌 맹점의 실례로 북한의 경제성장 문제를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뉴라이트의 문제를 명확하게 인지하기 위해서는 좌파 담론이 복권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할 것이며, 그 관점으로 7장에서 민족주의적 친일파 청산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 검토의 과정에서 나는 탈민족주의적 친일파 옹호론을 끌어들일 것인데, 8장에서는 이 관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모색하고, 친일파 논쟁과 일제 식민지기 논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정리를 할 것이다.

이 책의 2부는 대한민국 건국의 문제에서부터 현재의 정치평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뉴라이트와 개혁진영 양자가 논쟁하는 문제들을 다룬다. 2부의 내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개혁세력의 정치적 판타지를 스스로 극복하지 않고는 뉴라이트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뉴라이트에 대해서는, 뉴라이트의 ‘민족주의 비판’의 내용을 수긍할 경우(나는 그것에 대해 충분히 수긍하는데) 그들이 바라는 정치적인 결과는 파생하지 않음을 증명해볼 것이다. 1장에서, 나는 뉴라이트와 개혁세력이 자기들 좋을 대로 조금씩 활용해먹는 임시정부 정통성론 그 자체를 비판하면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 노선의 의미에 대해 복권을 시도한다. 여기서 친일파 논쟁의 맥락을 이어와 김구와 이승만의 대립을 숙청론과 속죄론으로 규정하고, 그것들이 둘 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2장에서는, 김구를 테러리스트라 규정하는 뉴라이트에 분노하는 자세가 과연 선조 독립운동가들을 공대하는 자세인지를 문제 삼을 것이다. 3장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김구주의’와 ‘이승만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뉴라이트가 반탁운동을 옹호할 경우 그것은 민족주의 과잉을 우려하는 그들의 담론과 모순될 수밖에 없음을 밝힐 것이다. 4장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정당했는가라는 일명 ‘정통성 논쟁’에 개입하면서 표준적인 뉴라이트와 개혁세력이 잘못 생각하는 부분을 역사적 전거와 민주주의 정치학의 논리로 드러내고자 한다. 5장에서는 ‘탈민족주의자는 통일, 혹은 햇볕정책에 반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통일 담론과 남북관계에 대한 정치적인 주장을 비평하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선진화’ 담론의 전제조건으로서 ‘민주화 완성론’을 논박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민주주의 정치철학의 기본을 돌이켜볼 것이다.  

 

4.
대중들에게 좀 더 쉽게 지식을 전달하려는 교양도서 저자들의 노력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쓸 수 있었다. 1차 사료를 보지 않고도 대략의 맥락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책들이 나와 있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작업에 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대한민국 교양도서의 질이 두터워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몇 사람에게는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언론학자 강준만 선생님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문외한이 역사의 미로에서 헤매지 않도록 도와주는 사실관계와 정보가 빼곡한 거대한 지도였다. 역사학자 윤해동 선생님의 저서들, 특히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는 뉴라이트와는 다른 탈민족주의자의 역사적 식견을 깔끔하게 보여주면서 또한 그 자체로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주는 책이었다. 윤해동의 견해를 인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책의 논변을 구성하는 데 훨씬 애를 먹었을 것이다. 『대한민국史』(한홍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과 『대한민국 이야기』(이영훈) 같은 책들도 서로 다른 의미에서 내게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 책에는 비록 마지막에서야 조금 인용되지만,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이 있다. 정치학자 고(故) 전인권 선생님이다. 그는 『남자의 탄생』에서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자신의 정체성의 탄생과정에 대한 그의 해명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 남자 일반의 것이기도 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일 게다. 그 지점에서 『남자의 탄생』의 인문학적 논의는 역사적인 것이 되고, 정치성을 지니게 된다. 『남자의 탄생』에 나오는 ‘고아의식’이란 개념에 대한 한 주석을 보면 전인권은 그 사실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박정희 평전』은 박정희를 ‘심리적 고아’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남자의 탄생』에 나오는 ‘고아의식’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왕성한 활동을 시작할 즈음 돌연 사망함으로써 그 작업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이를테면 정치학과 역사학을 넘나드는 나의 이 책은, 그가 하고 싶었던 작업 중의 극히 일부를 계승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전인권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그의 사후에야 그의 저서들을 군대 내무반에 읽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역시 너무 일찍 돌아가신 내 작은아버지와 생몰연대가 일치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죽음을 예감한 작은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책으로 정리해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이 책의 내용은 그가 하고 싶었던 말과 관련이 없겠지만, 나는 왠지 이 책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한국 현대사는 죽음과 그것에 대한 망각이 반복되는 장(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압도적인 정서적 흐름에 공명해서는 논쟁을 정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매우 논변적으로 때로는 공격적으로 사태를 정리해야만 했다. 그러한 문체가 한국 현대사에 대한 내 무거운 존중의 마음을 가리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이 책을 내 작은아버지와, 전인권 박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를 몸으로 살아낸 모든 어른들에게 바치고자 한다. 

09.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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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07 23:03   좋아요 0 | URL
'뉴라이터(New Right)의 개념', '뉴라이터는 탈민족주의를 위한 지능적인 안티세력', '진보.보수 모두 변해야한다', '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다', '식민지 근대의 페러독스는 초민족주의 및 전 지구적 공시성 강조', '나는 왠지 이 책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등이 눈에 들어 옵니다.

로쟈 2009-08-09 12:16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도 '신자유주의' 마냥 허울만 내세운 '프레임' 같은데, 실상에 대해선 잘 정리해줄 것 같은 기대가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8-07 22:50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가 탈식민,탈민족주의의 일부를 차용한 것에 대해서 단순히 애국적 시각으로만 비판해서는 안되지요.작년에 뉴라이트가 건국논쟁 임시정부 법통 논쟁을 제기했을 때 반 뉴라이트 진영이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반론을 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로쟈 2009-08-09 12:14   좋아요 0 | URL
'사용후기'라고 돼 있지만, 이슈가 묻힌 감도 있습니다. 한땐 '역사전쟁'을 방불케 했는데요...

bam 2009-08-09 04:42   좋아요 0 | URL
그의 블로그와 달리, 겸손해보이는 서문이 인상적이네요. 뭐랄까, 공격적이란 느낌이 상당히 강했는데, 재고해봐야겠네요.

로쟈 2009-08-09 12:13   좋아요 0 | URL
대개 그렇지만, 전사들에겐 여린 부분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