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학원에서 논술강의를 하던 시절 내가 참고 교재로 애용하던 책은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였다. 주제에 관련한 대목을 복사해서 나눠주고 나대로의 설명을 보탰다(일단 꼭지별 분량이 적당했다). 그리고 가끔씩 유익하게 자료로 쓴 책은 도쿄대 신입생을 위한 교양강의 시리즈인 <지의 기법>, <지의 논리>, <지의 윤리>였다. 도쿄대 교수들이 직접 집필한 덕분인지 나름 수준이 높고 참신한 아이템이 많았다. 하지만 '일본책'이라서 그랬는지 이 책의 유익함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그냥 '몰래 보는 책'이었다. 어제 우연히 이 책들을 거명한 기사를 읽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범'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랄까? 여하튼 곧 대학문을 두드리게 될 학생들이 미리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이 시리즈에 흥미를 느낄 만한 학생이라면 도쿄대 신입생 수준은 된다고 봐도 좋겠다).

교수신문(08. 12. 11) 10년 전 도쿄대의 교양강좌 부교재를 다시 읽으며

책에 대해서 조금 진지한 사람, 책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게 되는 순간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시간 중 하나는 오래된 좋은 책이지만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다.



『지의 윤리』는 내게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지의 윤리』(고바야시 야스오·후나비키 다케오 엮음, 도서출판 경당, 1997)는 1994~1996년까지 3년간 일본 도쿄대 교수들이 문과 신입생 필수강좌의 부교재로 개발한 책으로서, 1권 『지의 기법』, 2권 『지의 논리』에 이어지는 세 번째 책이다. 국내에서는 1997년 세 권이 동시에 번역 소개됐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히 주목받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주목할 내용이 없다면야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대 그렇지 않으니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볼 만한 꺼리가 된다.

책의 기획 의도는 명료하다. 대학의 신입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에 대한 관점 교정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지식을 교과서에 정리돼 ‘누워’있는 어떤 것으로 배웠다면, 대학에서는 그러한 지식을 생산하고 개선해가는 활동의 관점 즉 ‘행위로서의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유념해야할 것은 그런 것으로서의 지식이란 윤리의 차원과 절대 무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왜냐. 만약 지식을 완성돼 있는 정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행위로 받아들인다면, 그때의 지식은 필연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엇,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아직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이른바 ‘他者’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자세, 그것이야말로 윤리적인 문제의 전형이며, 따라서 행위로서의 지식에 대한 해설은 『지의 기법』, 『지의 논리』에서 멈추지 못하고 『지의 윤리』에 이르게 된다. 『지의 윤리』에서 윤리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자 ‘각성’의 문제가 된다. 지식이란 간단히 말해서 ‘보편성의 언어게임’이다. 대상들, 사물들의 개별성이 사상되며 대신 보편적 속성들로 재해석되고, 그들 간의 관계가 법칙으로 정립되는 특별한 언어게임이다. 보편성의 언어게임을 구축함으로써 지식은 특정한 시공간, 개별자에 국한되지 않는 유용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게임이 그 게임 밖의 ‘특수한’ 존재에 대해 위압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식의 관점에서 지식의 언어게임 밖에 있는 존재는 말하자면 언어가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 항변할 수가 없다. 이를 선명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의학 분야다. 많은 환자들이 의사를 두려워하고 경외하지만, 그리해 의사에게 자신의 진짜 소망을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 억압된 존재들에게 언어를 빌려주는 것,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지의 윤리』가 강조하는 윤리적 자세다.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먼저 놀라야 한다. 놀라고 주목해야 한다.

각성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보편성의 게임 가장자리에 서있는 희미한 개별자들을 세심히 주목하지 않고서는, 지식의 보편적 주장이 그들에게 갑작스런 고통일수도 있다는 놀라운 체험 없이는 윤리를 향해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윤리학보다 지식사회학이 더욱 효과적인 윤리적 수단이다. 지식의 어떤 보편성이 사실상 어떤 지적 편협성의 위장일 수 있음을 밝혀주는 것이 지식사회학이기 때문이다. 돌발적인 미적 충격 또한 윤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이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대상으로부터 추함을 감지하는 것, 모두들 참혹하다고 말하는 장면 앞에서 갑자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종의 ‘아둔함’ 역시 윤리적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시점, 대학교육개혁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과제다.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추진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강의실 고급화하기, 국제학술지에 논문 싣기, 저명 외국학자 초청하기, 교수 상대평가하기, 학생들 외국 보내기, 학생들에게 영어 가르치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필요한데, 그 와중에 정작 근본적인 물음들은 더욱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것들을 일사분란하게 추진해야만 하는 그 대학이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지금 시점, 우리대학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대학다운 것, 지적인 것, 그리고 윤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섬세하게 탐색하는, 도쿄대의 10년 전 교양강좌 부교재를 다시 보면서 우리가 이런 주제들을 이 정도의 깊이로 다뤘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본다.(이봉재 서평위원/서울산업대·과학철학)

08. 12. 12.

P.S. 오늘 서점에서 발견한 또다른 도쿄대 강의록은 <문학, 어떻게 읽을까>(민음사, 2008)이다. 원제는 '문학의 방법'이며, 도쿄대 교수 16명이 참여하여 말 그대로 문학작품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을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강의'이다(책은 1996년에 나왔으며 그때 나이로 치면 40대 젊은 교수들이 주로 집필한 책이다). 우리의 경우 <문학이란 무엇인가> 류의 책은 더러 나왔고 또 읽혔지만 이처럼 '실전적인' 문학교재가 있었던가 싶다. 그래서 좀 부럽다. 아무리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고 다치바나 다카시가 질타하더라도 그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너무 멀쩡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우라 마사하루라는 러시아문학 전공의 교수는 파질 이스칸데르(1929- )라는 현대 러시아 작가의 단편 <바라사르의 주연>을 직접 다룬다(러시아어 원문도 직접 제시된다). '이스깐제르' '이스깐데르' 등으로도 표기된 이스칸데르는 국내에도 <체겜의 산드로>(중앙일보사, 1990)를 비롯해 몇몇 작품집이 소개된 작가이다.  

나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는데, 대표작인 <체겜의 산드로 아저씨>(일어본의 표기)는 러시아어판으로 3권, 1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한다. 한데 장편소설은 아니고 30편 정도의 노벨라(중편)를 묶은 작품집 형태. <발타자르의 주연>은 그 중 한 작품의 제목이다. 우라 교수는 이 작품을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의 장에서 다루며 말미에는 세 권의 책을 추천도서로 올려놓았다. 이스칸데르의 작품을 제외한 두 권이 흥미로운데, 하나는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1923)이고, 다른 하나는 쿤데라의 에세이집 <배반당한 유언>(1992).

언젠가 언급한 듯싶은데, 트로츠키의 책은 국내에 두 종의 번역본이 있으며(모두 절판됐지만) 그 중 하나는 소설가 공지영 씨가 공역자로 참여한 <문학과 혁명>(한겨레, 1989)이다. 그리고 쿤데라의 <배반당한 유언>은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청년사, 1994)이라는 '배반당한'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원래의 제목을 찾아서 다시 나오면 좋겠다.

이 두 책에 대한 평: "20세기의 정치와 예술, 혹은 정치와 문학을 이야기할 때 트로츠키의 저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일 겁니다. 혁명이라는 역사의 전환기 속에서 문학의 이상적인 모습을 생각한 진지한 사고가 과격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언어를 푹 뒤집어쓴 다음에는 쿤데라의 에세이로 때를 씻어 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본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쿤데라의 문장은 '서정화의 함정'으로부터 독자를 구원해줍니다. 그에게는 또한 <소설의 기술>도 있습니다."(332쪽) 아마 최근에 씌어졌다면 쿤데라의 신작 에세이 <커튼>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그 정도 읽어주면 도쿄대생들과 얼추 수준을 맞출 수 있겠다. 문제는 나를 포함해 이런 레벨의 강의는 해줘야 할 강사/교수들의 수준이겠다. 

내 '수준'에 맞는 지적을 마저 덧붙이자면, 깔끔한 러시아어 문장들을 일반 교양서에서 읽을 수 있어 반가웠지만 고유명사 표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역시나 일어로 옮겨진 인명을 우리말로 다시 옮겨오는 과정에서 빚어진 착오일 듯싶다. (316쪽) 트루게네프 -> 투르게네프, (320쪽) 베로프와 라스프친 -> 벨로프와 라스푸친, (321쪽) 블라디미르 파페르누이 -> 블라디미르 파페르니, (328쪽) 카리닌 -> 칼리닌, (329쪽) 로자린드 마슈 -> 로잘린드 마슈 (330쪽) '산드로 아저씨와 그의 동료'에 병기된 러시아어 오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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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tzky 2008-12-13 01:44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에 우연히 서점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당시에는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한이네요... 당시 제 관심은 역사였기에...;;;

로쟈 2008-12-13 07:52   좋아요 0 | URL
아, 트로츠키님!^^

무해한모리군 2008-12-13 12:26   좋아요 0 | URL
밀란쿤데라의 커튼이라는 에세이가 있군요. 늘 로쟈님 서재에서 새로운 흥미거리들을 발견하곤합니다. 생투드리고 싶은데, 주말이고 바로읽고 싶어서 서점에 가서 사야겠네요 ^^

로쟈 2008-12-14 09:44   좋아요 0 | URL
나온 지 좀 됐는데요.^^;

릴케 현상 2008-12-14 11:52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 며칠전에 헌책방에서 봤는데 왜 샀는지 몰라요^^

로쟈 2008-12-14 12:03   좋아요 0 | URL
인터넷엔 영역본도 떠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