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국학계의 거두였던 제임스 팔레 교수의 주저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산처럼, 2008)이 번역돼 나왔다. 반계 유형원과 조선 후기에 관한 연구서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 2007)의 저자 김범 씨가 역자다. 책은 작년 이맘때 예고됐는데, 1년만에 약속이 이루어진 셈(http://blog.aladin.co.kr/mramor/1800757). 도이힐러 교수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 2007)과 함께 해외 한국학의 수준을 일별해볼 수 있는 저작이 아닌가 싶다(알라딘에는 아직 이미지가 올라와 있지 않다).

경향신문(08. 11. 26) “유형원 등 조선의 실학자들 진보적 평가는 절반의 진실” 

미국에서 한국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역사학자 제임스 B 팔레 전 워싱턴대 명예교수(1938~2006년)의 주저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 후기>(산처럼)가 번역·출간됐다. 1996년 나온 이 책은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퍼센트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당시 한국학계를 풍미한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부정하는 주장이어서 ‘식민지 근대화론자’ ‘정체성론자’라고 비판받았다. 팔레 교수는 이에 대해 “나를 비판하려거든 내 논저를 다 읽고 하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1·2권 합해 1500쪽이 넘는 책은 반계 유형원(1623~1673년)의 <반계수록>에 나타난 경세사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유교적 경세론의 실체를 추적했다. 특히 민족주의적 시각이나 진보에 대한 현재적 관점이 투영된 연구에서 벗어나 방대한 사료와 연구성과를 치밀하게 섭렵하고 유형원의 사상과 조선시대 제도를 촘촘히 묘사했다.



팔레 교수는 “유형원을 비롯, 실학자들을 근대성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이는 유교적 경세론의 핵심을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실증과학으로 잘못 해석한 시대착오적 판단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유형원의 경제사상은 16세기의 상대적으로 퇴보적이었던 조선의 상황과 비교하면 진보적이었지만 서양은 물론 명이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발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경세사상의 중심은 중국 고대의 제도에 머물러 있었다”면서 “현실적 경세론의 실천에서 중요한 지혜의 원천은 중국의 역사와 제도를 서술한 방대한 문헌이었으며 조선의 안전을 유지한 주요한 버팀목은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이 제공한 보호”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교적 경세론을 해석하는 태도를 극복”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학문적인 경세론과 역사적 현실의 관계, 그리고 그 둘의 상호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건국부터 강화도조약까지 조선 사회에서 일어났던 주요 변화의 본질을 탐구했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 대한 최근 연구가 비농업적 상업 분야의 성장, 노비제도의 축소, 조세제도의 전환 등 ‘조선이 스스로 변화와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찾음으로써 그 사회의 근본적인 양상의 일부를 잘못 이해했다고 비판한다. ‘진보를 입증하려는 열망’이 농업의 지배와 양반 권력의 유지, 지식계층의 사고에 준 유교적 경세론의 영향에서는 관심을 거둬들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역자인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저자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때로는 너무 경직되거나 엄격하게 적용해서 유연하거나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줄였고 그 결과 풍요롭게 재구성할 수도 있는 사실을 때로는 너무 앙상하게 형해화시킨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김진우기자)

08. 11. 26.

P.S. 말이 나온 김에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관련기사도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7. 04. 12) "서구학자 객관적 논증 한국학 비교 틀 만들어”

“숫자 하나 확인하는 데 몇 개월이 걸렸습니다. 글 자체를 옮기기 위한 번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훈상(53) 동아대 사학과 교수가 에드워드 와그너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조선 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일조각)을 최근 번역·출간했다. 1993년 제임스 팔레의 ‘전통 한국의 정치와 정책’, 2004년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을 번역한 데 이어 와그너까지 번역함으로써 서구 한국학 대가의 주요 저서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우리말로 옮겨지게 됐다.

한때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을 영어로 번역한 와그너 교수는 옌칭도서관 내에 한국학 자료실을 만드는 등 35년간 하버드대에서 한국학 개척과 발전에 헌신해온 인물이다. 완전을 기하기 위해 10년씩 걸려 번역서가 출간되는 동안 팔레 교수와 와그너 교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유일하게 도이힐러 교수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서구에서 한국학은 명함조차 꺼낼 수 없던 변두리 학문이었다. “이들의 성과가 없었다면 현재의 한국학이 이 정도 위치에 오를 수 없었겠죠. 요즘 한국학을 문화산업과 연결하는데 사실 외국에서 한국학의 발언권은 지극히 낮습니다.”

서구 한국학자들과의 인연은 이 교수가 대학원 재학 시절 팔레 교수의 책을 처음 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한국 사학계에서 보이지 않았던 치밀한 고증 작업이 외국인의 손에 의해 데이터베이스화되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는 그는 서구 한국학 대가의 책들을 탐독하게 됐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이론이 아니라 사실 있는 그대로의 논증, 이것이 우리가 이 서구 한국학 학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들이 단단하게 쌓아 올린 한국학 기초자료들은 국내 사학자들도 인용할 정도로 견고합니다.”

이 교수는 와그너 교수가 조선왕조 전 시기 동안 진행된 748회의 문화시험 급제자의 인맥지도를 만들고도 조선시대 양반을 모르겠다며 중인 연구까지 폭을 넓힌 것을 그 예로 든다. 통계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이론’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타자의 시선이라는 의미 외에도 비교사적 의미도 함께 부여한다. 사회과학은 비교에서 출발하는 데 반해 한국사에서는 아직도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외국 것을 알아야 한국학이 어떻게 호소력을 가지고 어떻게 치환해서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 있죠. 이들이 그런 한국학의 비교사적 틀을 만든 셈입니다.”
이 교수는 와그너 교수가 쓴 화원(畵員·궁중 도화서 소속 직업화가) 일람표를 원본 대조하면서 미술사학 관련 연구서까지 영역을 넓혔다. 3년 동안 고문서를 찾아다니면서 얻은 결과다. “서구의 한국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계 유형원의 대가로 불리는 팔레 교수의 저서도 한국 사학자들의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맹목적인 추종도, 배타적인 경계도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구 한국학을 제대로 알고 이를 통해 한국학의 지평을 넓히는 것입니다.”(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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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25 23:49   좋아요 0 | URL
내재적 발전론이 수탈론과 연결되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제국주의 옹호론이라는 이분법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제임스 팔레나 카터 에커트의 주장 중 내재적 발전론 비판은 곰곰이 되씹어 볼 만합니다.내재적 발전론-수탈론 주장자들중 그 논리를 군사정권 정당화에 이용하면서 박정희 전두환 앞잡이 노릇한 인간말종들이 수두룩했습니다.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면서 마치 내재적 발전론-수탈론이 정의인양 난리치는 자칭 타칭 진보파들을 보면 진짜 얼치기 진보들이 여러가지 하는구나....하는 생각 뿐.제임스 팔레는 군사정권에서 연구비라면서 주는 돈은 받기 거부한 지조라도 있었습니다.

로쟈 2008-11-26 21:49   좋아요 0 | URL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6 00:01   좋아요 0 | URL
와그너,도이힐러,팔레 외에 도날드 베이커도 추천합니다.조선에서 유교와 천주교의 갈등을 연구한 학자입니다.그리고 이런 책을 번역한 이훈상 씨같은 학자가 있어야지요.언어장벽때문에 원저를 못 읽었다면 한국사학자들은 번역본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맨날 애국심 팔아서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갈 생각하지 말구요.

로쟈 2008-11-26 21:49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연구서도 있었군요. 아무튼 이들 일급 한국학자들의 성과는 좀 놀랍습니다...

evol 2008-11-27 04:26   좋아요 0 | URL
서구 한국학의 거장으로서 최근에 번역된 안드레 슈미드도 빼놓을 수 없겟죠?

노이에자이트 2008-11-27 14:14   좋아요 0 | URL
슈미드는 한국독립운동을 도와준다고 생각한 헐버트나 매켄지가 사실은 백인우월주의자로서 일본이 식민지 쟁탈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을 규탄했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켰죠.그리고 신채호에 대한 해석은 박노자와 비교해 보고 싶었는데 아직 게을러서 멈칫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