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니 정확하게는 어젯밤에 읽은 칼럼 중의 하나는 '한겨레 프리즘'에 실린 고명섭 기자의 '죽은 권력의 사회'이다. 현 정세를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듯싶다. 내친 김에 지나간 칼럼들도 몇 편 읽어보고 옮겨놓는다. 지난 두어 달의 추이가 그려진다.

 

한겨레(08. 06. 03) 죽은 권력의 사회

청와대를 저만치 두고 광화문 앞에서 수만명의 시민과 중무장한 공권력이 대치했다. 세종로 그 큰길을 좌우로 틀어막은 전경버스는 불통과 폐색과 단절의 상징물이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아무리 애타게 호소해도 버스로 둘러친 장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참다 못한 시민들은 장벽을 밀어붙이고 기어오른다. 불통이 된 권력은 그 안간힘을 향해 할론 소화기를 분사하고 물대포를 쏜다. 방패로 내리찍고 군홧발로 짓이긴다. 그러나 폭력이 커질수록 권력은 약해진다.

살아 있는 권력은 영향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영향받을 줄 아는 권력만이 살아 있다. 들뢰즈도 말하지 않았던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그는 더 많은 방식으로 영향받을 수 있다.” 영향을 줄 생각만 하고 영향을 받을 생각은 하지 못하는 권력은 그러므로 무능한 권력이다. 입력된 프로그램의 명령을 끝없이 반복하는 기계와도 같아서 망가지고 난 다음에야 멈춘다.

한의학에서 쓰는 ‘불인’(不仁)이라는 말은 인체의 마비를 가리킨다. 인(仁)이 없는 상태, 느낄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는 상태, 요컨대, 감수성이 말라붙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불인이다. 어질지 못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불도저에게 앞에 놓인 모든 것은 장애물일 뿐이다. 건물을 부수고 땅을 파헤치는 데 익숙한 불도저는 밀고 나가면 되는 줄 안다. 그것은 추진력이 아니라 무사유다. 현명한 스피노자는 말한다. “가장 큰 오만은 가장 큰 무지이며 가장 큰 무능이다.”

권력은 태풍과 같아서 민심의 바다 위에 떠 있을 때만 권력이다. 후끈거리는 대양의 열기와 습기를 빨아들이며 태풍은 힘을 키운다. 그러나 바다를 잃어버린 순간 태풍은 열대성저기압으로 변해 흩어지고 만다. 지금 민심의 대양은 인터넷에 떠 있다. 그런데도 낡은 관념에 붙들린 이 정부는 권부의 요직에 자기 식구를 앉히면 되는 줄 안다. 방송을 장악하고 신문을 들러리 세우고 사정기관을 틀어쥐면 일사천리일 줄 안다. 국민의 마음을 내다버린 권력기관은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껍데기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또 이런 말을 한다. “대중이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 대중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하면서 겸손과 후회와 외경을 그토록 장려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그 대중을 위해 <에티카> 뒤편에 이런 말을 써 놓았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가장 유익하고 가장 끈끈한 우애로 결합한다. 그들은 똑같은 사랑의 노력으로 서로 친절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감사한다.”

촛불을 나눠 켜고 우비를 나눠 쓰고 김밥을 나눠 먹으며 불인의 권력과 맞서는 대중이야말로 우애의 공동체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인사도 하기 전에 벌써 오랜 친구가 되는 만남, 그 자유인들의 공동체야말로 현실로 나타난 이상이다. 반면에 낡은 권력의 장벽 뒤에서, 이 시련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야말로 허망한 권력에 사로잡힌 예속인이다. 광화문의 대치는 자유인 대 예속인의 대치다. 정부가 마지못해 ‘쇠고기 고시 연기’를 발표한 것은 말하자면, 시민들의 힘으로 전경 버스 몇 대가 끌려 나온 것과 같다. 그 버스들이, 장벽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 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08. 05. 13) 대중지성과 촛불 민주주의

대중은 20세기 현상이다. 정치의 지각을 뚫고 일어선 대중의 출현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귀스타브 르 봉은 <군중심리>에서 대중의 맹목성과 수동성을 분석했다. 대중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경멸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역>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대중이 정치의 주체이자 주인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때의 대중은 익명성과 평균성을 본질로 하는 대중이다. 대중은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괴력의 존재이지만 그 존재 안에는 지성이 결여돼 있었다. 뇌는 없고 힘만 있는 괴물이 그가 발견한 대중이었다.

오늘 우리는 대중과 지성의 결합, 곧 대중지성의 등장을 본다. 대중지성이라는 새로운 현상 앞에서는 르 봉의 설명도 가세트의 해석도 낡은 것이 돼 버린다. 촛불을 켜 들고 자기 얼굴을 비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맹목의 군중, 사나운 폭도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작은 불꽃들이 모여 어둠을 밝힌다. ‘촛불 민주주의’라고 해도 좋을 현상이다.

대중지성은 말하자면, 촛불의 네트워크다. 청계천에서 3만 개의 촛불이 타오르기 전에 인터넷에서 수십만, 수백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한국 정부의 졸속협상·자화자찬·감언이설, 은폐와 변명을 낱낱이 적발·해부해 퍼뜨린 것은 인터넷 대중이다. 어떤 이는 광우병 위험을 알리고 어떤 이는 검역주권을 문제삼고 어떤 이는 합의문 내용을 분석하고 어떤 이는 정부의 앞뒤 안 맞는 해명을 추적한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퍼 나르고 댓글을 달고 문자를 보낸다. 지도부도 없고 관제탑도 없지만, 촛불만한 관심과 열정과 분노가 모여 거역할 수 없는 집합적 지성을 이룬다. 우리 뇌가 수없이 많은 뉴런의 집단 활동으로 창조성의 불꽃을 피우듯이, 인터넷상의 수많은 뉴런들이, 수많은 촛불들이 하나로 연결돼 거대한 지성을 산출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네그리와 하트는 말한다. “만약 천재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대중의 천재성이다.”

그 지성의 힘이 현실의 정치권력을 흔들어 놓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누리집이 초토화되고, 대통령 탄핵 서명자가 130만 명을 넘어섰다. 대중지성의 위력에 당황한 정부는 배후를 찾는다고 법석을 떨었다. 배후 세력도 없고, 음모의 중심도 없다. 음모자가 있다면, 인터넷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음모자다. 인터넷을 통째로 철거하지 않는 한, 분노한 시민의 마음을 모조리 적출하지 않는 한, 음모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중지성은 네트워크 지성이다. 네트워크는 체로 걸러내듯 오류를 스스로 걸러내며 진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지성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뉴런의 총합인 우리 뇌가 총기를 잃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하듯이, 대중지성이 자기 정화의 긴장을 놓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촛불이다. 촛불은 세상을 밝히기에 앞서 자기 얼굴을 밝힌다. 자기를 먼저 투명하게 내보인다. 그 투명함에선 거짓도 기만도 자라지 않는다. 정치가 앨 스미스는 이런 말을 했다. “민주주의의 해악을 치료하는 유일한 치료제는 더 많은 민주주의다.” 이명박 정부를 낳은 것도 민주주의이고 거기에 대항해 일어선 것도 민주주의다. 제도 민주주의의 결함을 메우고 극복하는 것은 촛불 민주주의다. 국가지성이 구멍 숭숭 뚫려 멋대로 날뛰고 고꾸라지는 걸 막으려면 대중지성이 더 많은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08. 04. 22) 윤리적 정치를 위하여

정치의 영토에서 진리를 추방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와 진리는 섞여 앉으면 둘 중 하나가 죽는 상극이다.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독배를 받아 마신 소크라테스는 진리의 무력함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정치는 진리를 실현하는 장이 아니라 진리를 죽이는 장이다. 반대로 진리가 정치를 장악했을 때 ‘진리의 폭정’이 시작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주장하는 이런저런 의견들은 진리의 눈으로 보면 무가치하다. 이 의견들을 쳐내고 제압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의 독재다. 어떤 경우든 진리는 정치와 화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리와 가족유사성 관계에 있는 윤리는 어떨까. 진리를 추방한 아렌트도 ‘진실성’을 추방하진 못했다. 뻔뻔스런 거짓말이 정치적 효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지만, 길게 보면 끝내 진실성의 힘을 이기진 못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진실성을 포함한 윤리는 정치를 정치답게 만들어주는 필수 조건이다. 아렌트의 이런 견해를 욕망의 문제로 풀 수도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윤리적 욕망도 있다. 물질적 향유를 넘어 자신의 삶을 윤리적으로 높이고 누리려는 욕망도 있다. 정치의 장에서도 이 욕망이 작동한다.

지난 몇년의 한국 정치는 바로 이 윤리적 욕망을 한없이 부추겼다가 끝없이 좌절시킨 과정이었다. 참여정부의 탄생은 이 윤리적 욕망의 한 극점이었다. 윤리적으로 하자 많은 후보를 제치고 또 ‘후보 단일화’ 약속을 선거 직전 파기한 비윤리적 일탈을 딛고 탄생한 것이 참여정부였다. 승리의 감격에는 윤리적으로 성숙한 정치에 대한 짙은 열망이 담겨 있었다. 참여정부 5년 동안 이 열망은 쉼없이 주저앉고 찌그러졌다.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살해될 때, 대통령 핵심 측근은 “사람 한 명 잡혀갔다고 파병철회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냉정하게 무시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참수 장면을 보면서 국민은 깊은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 국가가, 정치가 그 외상을 돌봐주기는커녕 되레 덧냈다. 윤리적 좌절감이 번졌다. 정권 초기 거셌던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은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1년 뒤 대통령은 야당에게 연정을 제안하는 폭탄 선언을 했다. 태생 자체가 반윤리적인 정당을 향해 동거하자고 내민 구애의 손은 참여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이들의 윤리 감각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윤리적 허무의 자리에 남는 것은 물질적 욕망이다. 이후 선거가 윤리의 제어를 받지 못하는 물질적 욕망의 적나라한 전시장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민은 윤리적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후보를 눈 딱 감고 대통령으로 뽑았다. 새 정부 인사들의 윤리적 결격조차 대부분 용인했다. 지난 4·9총선은 그 대선판도의 재연이었다. 집값 상승 기대로 서울 시민들은 ‘뉴타운 사기공약’에 몰표를 던졌다. 지난 정권 시기에 윤리적 트라우마를 깊게 입은 사람들은 투표장을 외면했다.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는 여당 유력 정치인의 말이 유사-윤리적 쟁점을 이루었을 뿐이다. 통합민주당을 포함한 민주·진보권은 이 쟁점 바깥에서 맴돌았다. 지난 총선은 우리 정치의 윤리적 욕망의 한 저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민의 이번 선택이 조만간 회복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결과인지 아니면 향후 한국 정치를 규정할 구조적 조건을 보여준 것인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사람 하기 나름이다. 국민이 각성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민주·진보파 정치가 각성해야 한다.(고명섭/책·지성팀장)

08.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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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德不孤 必有隣, 1인용 게임에는 Virtual 이 없다
    from 암흑의마법에서정의의칼로 2008-06-06 07:33 
    德不孤 必有隣 제1 해석: 덕을 가진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그에겐 반드시 이웃이 있기(따르기) 때문이다. A virtuous man is never lonely, He has neighbors. => 덕은 사회에 앞서 따로 존재한다. 목적이 된 덕. 제2 해석: 덕은 고립되어선 안된다. 반드시 이웃이(과) 있어야(소통해야) 한다. Virtue should not be isolated, it must be with neighbors. => 사회적..
 
 
게슴츠레 2008-06-05 13:54   좋아요 0 | URL
"윤리적 허무의 자리에 남는 것은 물질적 욕망이다."라는 문장을 보니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기억나는군요. "고집스런 희망 뒤에 찾아온 것은 맥빠진 이기심이다."-<<냉소적 이성 비판 1>>

로쟈 2008-06-06 20:24   좋아요 0 | URL
덕분에 생각났는데, <냉소적 이성비판> 2권은 언제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요. 아니면 냉소해야 하는 건지...

노이에자이트 2008-06-05 23:53   좋아요 0 | URL
인터넷 대중의 두 얼굴...황우석 사태 때의 네티즌들은 르봉이나 가세트의 대중관이 설득력이 있음을 실증했지요.당시 진중권 씨,PD수첩과 한겨레가 당했던 비난을 최근의 찬사와 비교해보면 참...진중권 씨가 당시의 황빠들을 파시즘 민족주의에 가깝다고 했죠.

로쟈 2008-06-06 20:23   좋아요 0 | URL
대중의 다면성에 대해서는 진중권씨 자신도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 대중은 어리석다, 하지만 그들은 신이다, 라고 인용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