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신문의 '김우창 칼럼'을 미리 읽어본다. 지난 총선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데,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최소의 조건은 의식주의 확보이다."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언젠가 나도 적은 바 있는데,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대중의 보수화'를 말하기 전에 삶의 근본적 보수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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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8. 04. 24) 삶의 근본적 보수성
이번 총선의 선거 결과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가장 명백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다산연구소의 인터넷 논단 ‘다산포럼’에 실린 김민환 교수의 논평이다. 그것은 여당의 압도적 승리 또는 야당의 참담한 패배 이외의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그 주변부의 당선자들을 포함하면, 여권의 의석수는 185 석에 이른다. 지난번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었던 민주당은 소수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을 이끌 만한 사람들이 대거 낙선하여, 당의 그 조직과 향방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이 완전히 야당을 외면했고, 진보진영은 알아볼 만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김민환 교수는 지금까지 야당의 기반이 되었던 수도권에서 패배한 것을 이번 선거의 전형적인 사례로 든다. 이것이 여당 후보들의 뉴타운 공약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더 확실한 것은 그것을 넘어선 민심의 이반이 원인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뉴타운의 문제를 더 넓은 배경의 한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지 그것이 요인의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것을 조금 자세히 생각해보는 것은 오늘의 정치 판도를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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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수도권 참패는 민심
뉴타운은 적어도 그 정책의 방향에서는 여당의 공약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선거에서 약속되고 있는 것이 개발, 재건축, 부동산 투기 이익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 해온 것이 노무현 정부였다. 그런 점에서, 뉴타운을 포함한 개발 위주의 정책 방향에서는 여야에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시점에서 정책의 추진에 행정부와 서울시를 장악하고 있는 여당이 훨씬 능률적일 것임은 분명하다. 유권자들은 매우 논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토건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도 노무현 정부는 그 정책 전반의 향방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했다. 부동산 가격의 앙등을 억제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했고 또 그에 대한 조처가 있었다. 다만 그러한 조처들이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현실과 수사(修辭)의 모순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 자체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이해를 가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의 토건정책이 표방한 것은 균형 발전이었다. 또 거기에 추가하여 직업 창출의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가 지가 상승과 부동산 투기열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의도가 현실의 움직임을 떠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민환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좋은 정책포럼’이 내놓은 진보의 자구책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념을 줄이고 생활 현실을 존중하는 데로 돌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가상승과 부동산 투기가 없더라도 거대 토건 개발 계획은 그 자체로 국민 생활의 기반을 극도로 불안하게 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것은 발붙이고 사는 땅에 계속적으로 지진이 이는 것과 비슷한 불안정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나 토건이든 다른 것이든 거대 계획은 극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일들이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을 말하면서도 거대 계획들과 실생활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고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소비에트 시대의 여러 개발 계획과 자본주의 체제하의 부동산 사업을 다 같이 권력의 편의를 위하여 국민 생활의 재편성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정치학자가 있다. 정치는 대체로 이러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지만, 그래도 삶의 크고 작은 현실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은 정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미국의 진보주의자 폴 굿먼이 자신을 신석기 보수주의자라고 말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 조건은 사회와 정치의 발전 단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정의된다.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최소의 조건은 의식주의 확보이다. 그런 다음에는 물론 더 나은 의식주와 여가를 삶의 조건으로 생각하게 된다.
삶의 최소 조건의 확보라는 문제에서-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지 간에-그것을 위한 노력과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진보적인 정치 노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정당성을 모두 내세우는 정치 집단은,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최소한 삶의 조건의 보편적 확보를 외면하지 못한다. 생존의 근본적 필요는 당파를 초월하여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을 설복하는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가는 다음 단계에서는 그러한 설득을 위한 압력은 점점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은 상호 이해와 협동 대신 물질적 자원과 사회적 인정을 선취하고자하는 경쟁이 되고, 치열한 투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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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주의 바탕 둔 정치 필요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 동기로서의 두 개의 자아의식을 말한 일이 있다. 하나는 단순한 자기 보존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우열 경쟁에서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기주장의 의식이다. 루소의 생각으로는 전자는 자연 상태의 인간의 심성이고 후자는 사회관계 속에 들어간 인간의 심성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어떤 조건하에서도 인간의 자아의식의 두 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초적인 생존의 필요를 넘어간 다음에, 지배적인 것이 되는 것이 후자이다.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이 경쟁적 자기의식을 자유의 표현으로 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희생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회 발전을 위하여 불가피하다.
바다에서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뜨는 것과 같이 경제의 전반적 향상이 삶의 조건을 고루 향상하게 된다는 말은 이러한 자유 경쟁 또는 상호 투쟁의 이념을 조금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라고 하여, 거기에 따르는 희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여 더욱 잘 사는 사회가 된다고 해도, 경쟁과 투쟁과 질시(嫉視)를 원리로 하는 사회가 참으로 살 만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루소는 경쟁과 투쟁과 질시로 쏠리는 사회의식을 협동적인 것으로 바뀌도록 하는 것이 사회 교육의 기본 과제라고 생각했다.
물질적 진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생활의 물질적 수준의 향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진보주의자들은 거대 사회계획을 통하여 이것의 고른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진보주의의 사명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물론 그것을 넘어 삶의 전반적인 향상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그 노력이 개체적인 필요와 사회적인 협동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넓고 자상한 인간주의의 바탕에 서 있지 않은 진보의 정치는 쉽게 정치권력의 계획으로 끝난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협동과 균형의 도덕적 풍토를 길러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에는 여러 가지 투쟁의 외침은 있어도 인간주의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8. 04. 23.
P.S. 참고로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김민환 교수의 논평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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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포럼(08. 04. 17)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다
총선이 끝났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은데 비해 야당인 민주당은 81석, 민주노동당은 5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유선진당이나 친박연대 같은 보수 여권 당선자를 합하면 여권은 185석에 이른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152석을 얻은 민주당 처지에서 보면 이번 총선 성적은 한 마디로 참담하다.
의석의 절대 열세에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야당의 대표급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한 일이다. 당 대표인 손학규 후보가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게 역부족으로 무릎을 꿇었고, 이명박 후보와 대선에서 겨룬 정동영 후보는 한나라당이 긴급 투입한 정몽준 후보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다. 김근태 김덕규 이상수 유인태 등 여권 거물들도 맥없이 무너졌다. 이제 그 당을 누가 이끌어갈지 걱정할 형편이 되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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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은 야당을 떠났다
수도권을 고스란히 여당에 넘겨준 것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지역별로 극명하게 표심이 갈리는 상황에서 언제나 선거의 승패를 좌우해온 수도권 민심이 미련 없이 야당을 외면하였음을 야권 사람들은 통절한 마음으로 재확인했을 것이다. 뉴타운 공약 때문에 졌다고 느끼는 야당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수도권 민심이 야당을 떠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선거 결과가 이런 지경인데도 어느 신문은 총선 결과를 논평하면서 “절묘한 표심”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이명박 정부가 다수당으로서 지배적인 지위는 누리되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절묘하다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그런 표현이 그럴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야당의 시각에서 보자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견제는 원칙적으로 야당이 하는 것이지 여권 주변부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야당은 81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리고, 작심만 하면 구 여권 당선자를 끌어들여 2백석을 채우는 것도 어렵지 않은 거대 여당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한다. 독재시절에 야당은 의석이 적어도 민심이 뒷받침했다. 그러나 지금 민심은 결코 야당에 우호적이지 않다. 이 어려운 상황을 야당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이런 지난한 물음에 ‘새로운 진보’를 지향하는 지식인 그룹이 좋은 답을 제시했다.
‘좋은 정책포럼’이라는 지식인 모임이 내놓은 계명(誡命)은 열 가지다; 이념이 아닌 실생활에서 출발하자, 이상주의와 근본주의에 빠지지 말자, 국민의 평균적 정서와 동떨어진 정책을 제시하지 말자, 반시장경제 반기업 이미지를 탈각하자, 민주주의 단일차원만으로 사고하지 말자, 민족주의의 틀에 갇히지 말자, 국가안보를 중시하자, 북한 주민의 인권보장을 요구하자, 노동의 권리와 함께 윤리도 주장하자,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을 지향하자. 어느 한 가지도 놓쳐서는 안 될 덕목이다.
세상은 변하는 자의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 자의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세상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변화에 게을렀다면 보수주의자들은 세상을 잃은 시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라는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변화를 지향했다. 공안세력 냄새를 털어 내고 산업세력의 면모를 갖추려 애썼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변화한 보수주의자들이 그 과실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변할 차례다. 80년대 운동권의 낡은 사고는 미련 없이 내팽개쳐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스스로 변해 지금의 끝을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보수주의자의 변화가 진보주의자의 변화를 부르고 진보주의자의 변화가 다시 보수주의자의 변화를 부른다면 그 사회는 희망을 보장할 것이다.(김민환_고려대 언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