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휴먼&북스, 2008)을 들고 있다(책에 대한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28696 참조).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기본적으론 잘 씌어졌기 때문이고, 덧붙여 우리말로 무리없이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움을 지적하자면, 먼저 'Arts of Living'이란 원제를 '인문학의 즐거움'으로 옮긴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 물론 원저의 제목도 그것만 따로놓고 보자면 모호하긴 하다. 부제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어떤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즐거움'이란 국역본의 제목은 그보다 더 애매하다. '인문학이 변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는 나름 '긴박한' 제안서이기에 '즐거움'은 언뜻 한가해 보이는 것이다. 해서 이 책에 대해 더 잘 말해주는 것은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란 부제와 '위기의 인문학을 위한 새로운 모색' 같은 문구이다. 거기에 준해서 책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책이 너무 무겁다. 하드카바의 '튼튼한' 책이 나온 건 아무래도 책에 대한 수요를 소장용이나 도서관 장서용으로 파악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책은 고전명저류가 아니라 '실용적인' 제안서이다. 방대한 자료 검토와 인문적 성찰, 탄탄한 자기주장을 담고 있긴 하나 기본적으론 '보고서'적인 성격의 책이다(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같은 책이 그렇듯이). 저자 자신도 스스로를 '실용주의자'라 칭하고 있고. 하지만 번역본은 너무 묵직하여 가방에 넣고 다니자니 '인문학의 즐거움'보다는 '인문학의 무거움'을 먼저 팔목에 느끼도록 해준다. 이 무게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이기는커녕) "인문학은 이제 밤에 소리 없이 나는 까마귀가 되"었다는 뒷표지의 문제의식과도 맞지 않는다. 정장을 입은 까마귀처럼.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처럼 소프트카바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또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유감스러운 건 색인이 누락됐다는 점. 60여쪽의 주석을 실으면서 색인을 누락시킨 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다(번거로웠을까?). 어쩌다 인문서 한권 낸 것이 아니라 '인문출판사'를 자임하고자 한다면 분명한 자기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출판사 휴먼&북스의 기간 리스트를 보니 <인문학의 즐거움>이 좀 이채롭긴 하다). 만든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뒷마무리를 못 지은 것 같은 찜찜함을 공유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에 더 바란다면 저자가 참고/인용하고 있는 책들의 국역본도 같이 기재해주면 좋았겠다는 것. 물론 이건 필수적인 것은 아니고 그저 독자에 대한 서비스 차원의 것이긴 하나 연계독서를 원하는 독자들에겐 유익한 정보가 된다. 가령 리처드 로티나 에머슨, 윌리엄 제임스, 막스 베버, 베블렌, 앨런 소칼 등 국내에 소개돼 있는 책들을 '링크'시켜주는 것.
예컨대 나는 2장에서 "미국에서는 찰스 이스트먼 같은 사람이 최초의 진정한 현대적 세대 - 한 세상을 상실한 뒤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서는 최초의 세대 - 에 속했다."(66쪽)란 문장을 전후로 하여 서너 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인디언/미국인의 책이 국내에도 소개돼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봤다. '오이예사'(인디언 이름)란 저자명으로 <인디언 숲으로 가다>(지식의풍경, 2000), <삶이란 바람소리일 뿐이다>(거송미디어, 2006)를, 그리고 '오히예사'란 저자명으로 <인디언의 영혼>(오래된미래, 2004)과 <교회로 간 인디언>(도솔, 2007) 등을 찾을 수 있었다. 모두가 엔솔로지여서 아쉽긴 한데, 그래도 나중에 혹여라도 이 책들을 들춰보게 된다면 어떤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번역본에 대한 정보가 병기된다면 말이다.
몇 가지 아쉬움을 적었지만 그럼에도 책은 재미있다(물론 이 '재미'가 대다수 독자에게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저자가 "흥미없던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교수"란 평을 학생들로부터 듣는다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리고 이미 적은 대로 번역 또한 무난하여 읽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 100여 쪽을 읽으면서 '오역'이라고 체크하고 원문을 확인해본 대목은 딱 한 군데이다. 그건 프랑스의 문학사가이자 <영문학의 역사>의 저자 이폴리트 텐느(1828-1893)에 관한 대목이다. 보통 <영문학사>라고 옮겨지는 4권 분량의 방대한 책이 유명한데, 미국에서도 이 책은 많이 읽힌 모양이다. 아래는 갈란드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이다.
"나는 날마다 그 모든 위대한 프랑스인들이 '민족' '환경' 그리고 '추진력'에 대해 말한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가장 광범한 영향력을 미친 작품들 중에는 텐느의 4권짜리 <영문학의 역사>가 있었는데, 이 책에는 각 나라의 문화는 그 고유의 물질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집단적 인격을 표상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76-77쪽)
“I bent to this task, pondering all the great Frenchman had to say of race, environment, and momentum.” Among the most widely influential works of the time, Taine’s four-volume History of English Literature purported to demonstrate that the culture of every nation expresses a collective personality shaped by the nation’s material circumstances.
역자가 잘못 옮긴 부분은 먼저 '위대한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위대한 프랑스인'이라는 것. 물론 '이폴리트 텐느'를 가리키겠다. 그리고 텐느가 문학사를 결정짓는 요소로 들고 있는 세 가지 중 '시대'가 '추진력'으로 잘못 옮겨졌다. 찾아보니 "race, environment, and momentum" 중 'momentum'을 그렇게 옮긴 것인데 여기선 'moment'와 같은 뜻이고 '시간변수'를 말한다. 불어의 'temps(시간)'을 옮긴 것이다. 설사 텐느의 문학사관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더라도 조금만 시간을 내 검색해보았다면 피할 수 있었던 오류이다. 물론 이 정도 오류라면 '옥에 티'라고 해야겠다...
08. 04.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