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읽기의 계속이다.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시간을 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다루어야 할, 혹은 다루고 싶은 아이템들이 많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보면 대부분 사장되고 만다(하루에도 서너 가지의 아이템들이 떠오르는 것이니 어차피 모두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연휴가 지나면 사정이 더욱 나빠질 것 같아서 익사 직전의 아이템 몇 가지는 건져놓으려고 한다. 두 주 정도 미뤄진 이 페이퍼도 그 중 한 가지다.  

 

 

 

 

읽고자 하는 대목은 11장의 서두 부분이다. 일견 평이해보이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난해하게' 읽은 대목이다. 그건 국역본들의 번역이 중구난방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그러니까 나만 애를 먹은 건 아니겠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상식적인 발언들인데 벤야민의 원문 자체가 약간 꼬여 있는 듯하다. 어제 차봉희 편역의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도 눈에 띄기에 학교에서 들고 왔는데, 첫 대목을 네 가지 국역본 버전으로 옮겨보면 이렇다.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 장면을 보면 이전에는 결코 어디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볼 수 있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최성만, 131쪽)

"영화,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은 지금까지 그 어느 곳 어느 시기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광경은 어떤 사건의 진행과정의 묘사인데, 여기에서는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게 마련이다.(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반성완, 219쪽)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는 예전엔 도저히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비록 구경꾼의 시점이 촬영기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할지라도)."(차봉희, 72쪽)

"영화, 그리고 특히 유성영화촬영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그리고 어느 시기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준다.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관객의 눈의 위치가 촬영기구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으면.)"(강유원, 13쪽)

이 첫대목에서 얘기되고 있는 것은 영화촬영 장면의 독특성인데, 간단히 말하면 연기 과정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구경꾼)의 시야에 모두 다 들어오게 마련인 것이 그 독특성이다. 그렇잖은가? 촬영현장에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과 촬영, 조명 등의 스태프들, 그리고 갖가지 기구들이 잔뜩 모여있는 것이니 말이다. 곧이어 언급이 되지만 이러한 '광경'이 깔끔한 연극무대와는 전혀 다른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다.

반성완본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은 '연기진행에 속하지 않는' 정도로 교정되어야 한다(현장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이해하기엔 가장 편안한 문장이 되는데, 벤야민의 원문은 좀 꼬여 있고 이것을 그대로 옮긴 것인 최성만본이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 

이해가 되시는지? 오역은 아니다. 다만 아주 여러번 읽어야 한다('보는 사람'을 '구경꾼'으로 읽으면 조금 이해가 용이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촬영현장을 '보는 사람'이니까). 요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즉, 그런 걸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차봉희본은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전혀 엉뚱한 요령부득의 번역이다. 80년대에나 통용됐을 법한. 강유원본은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옮겼는데, 논리적으론 오역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다. 가령 "영화는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이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어떠한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한다."라고 재구성해놓으면 '직역'한 꼴은 되지만 우리말 문장은 아닌 것이다.

괄호안에 덧붙여진 내용도 최성만본을 제외하면 모두 오역이다. 반성완본에서 "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는 거꾸로 옮긴 것이다. "물론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이라고 옮겨야 한다. 카메라와 동일한 시점에서 연기 장면을 본다면 촬영이나 조명장치, 스태프 등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만약에 보인다면 NG인 것이고). 차봉희본과 강유원본도 말뜻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다만 최성만본의 "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에서도 '눈동자'는 오독을 유발하기 쉽다. 대개는 "보는 사람의 눈동자와 촬영장치의 시점이 일치하는 경우"를 둘이 마주치는 경우로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나부터도 그랬다). '시점'이라고 해야 가장 명료해지는 게 아닌가 한다. 이제 이어지는 대목이다.

"다른 어떤 상황도 아닌 바로 이런 상황이 영화제작소에서의 장면과 연극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하찮은 유사성으로 만든다. 연극에는 원칙적으로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함부로 환영적인 것으로서 꿰뚫어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촬영 장면의 경우에는 이러한 지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은 2차적 성격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이다."(최성만)

"바로 이러한 면이 그 어떠한 다른 면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한 장면 사이의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의 경우, 우리는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곧 바로 환상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성격은 이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반성완)

"그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황이, 영화촬영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유사성을 피상적이며 중요치 않은 것으로 만든다. 연극에서는 원칙적으로, 무대 위의 사건을 별 어려움 없이 그냥 환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촬영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없다. 영화가 지닌 환상적인 성격은 제 2단계의 것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차봉희) 

"이러한 상황은 어떤 다른 상황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성립하는 이른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는 원칙적으로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이 즉시 허상으로 간파될 수 없는 장소임을 알고 있다. 이에 반해서 영화에서의 촬영장면에는 이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허상적인 본질은 2차적 [후속 작업에서 생겨난] 본질이다; 그것은 편집의 산물이다."(강유원)

첫문장의 요점은 앞에서 묘사한 영화촬영장(스튜디오)의 특징이 연극무대와의 큰 차이점이라는 것. 그에 비하면 같은 '연기 장면'이라는 공통점(유사성)은 피상적이며 사소하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연극적 환상'과 '영화적 환상'을 대비하고 있는 대목인데, 이때 '환상'이란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현실'로서 인지하는 걸 말한다(이런 장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흥분한다거나 하는 모든 정서적 반응은 그러한 환영적 효과의 산물인 것이고). 때문에 번역문들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벤야민의 논점은 연극무대에서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음에 반해서 영화촬영 장면에서는 전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영화촬영을 '보는 사람'은 카메라와 배우를 동시에 보게 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배우와 상황에 대한 전적인 몰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연극무대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있고 영화촬영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없다(물론 연극적 환상을 폭로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예외이겠다). 영화적 환상은 편집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이차적 성격의 산물이다. 번역은 이러한 요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다(통상적인 환상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대목의 '환상'은 '현실이라는 환상'으로 풀어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이란 "영화속 이미지들을 정말로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성격"을 가리킨다...

08. 02. 05.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8-02-1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해설을 읽어보니 사실 별것 아닌 내용인데..번역문만 놓고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았을 만한 내용이네요. 덕분에 벤야민 글 독해에 도움되는 유용한 팁 하나를 더 얻어갑니다. ^^

로쟈 2008-02-10 19:52   좋아요 0 | URL
뒷부분에도 복병들이 나오더군요. 요약정리는 간단하지만 읽기는 난감한 텍스트입니다.--;

느림보 2009-06-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번역된 영화 관련 이론서적들을 읽다보면, 특히 동문선 책들이 그런 경우인데, 심하게 말하자면 그냥 번역기에 돌린걸 문맥 파악도 하지 않고 책으로 내 버린건 아닌가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영화 이론 서는 관련 지식도 좀 있고 현장이 기본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번역하는것이 좋겠지만, 또 그렇게 모두를 아우르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까지 가능한 경우는 희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감수자를 통해서 내용을 점검하던가 하는 절차도 필요할 텐데, 그런식으로 책임있는 책만들기가 진행된 경우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괜히 짧은 영어 실력에 원서를 읽어 볼까 생각이 드는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로쟈님께서 친절히 지적해주신 부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