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이 출간됐다. <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이 그것인데,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 이후 4년만이란다. 그 정도 터울이 마음에 든다. 게으르지 않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첫시집인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로부터 얼추 20년이다. 그렇게 시인도 독자도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싶다. 여러 평자가 지적하는 '관능미'를 나는 잘 모르겠고(마광수나 고종석, 그리고 이번에 발문을 쓴 김정환 같은 예찬론자가 아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통통 튀는 그녀의 시어들을 나는 좋아한다. 혹은 아래 서평에 나오는 '익살'이라고 해도 좋겠다. '리스본行 기차'를 탈 만한 여력이 없을 때 집어들 만한 시집이다.

세계일보(07. 12. 15) 황인숙 신작 시집‘리스본행 야간열차’

“지난밤,/ 리스본의 첫 밤이자 마지막 밤/ 파두 카페에 갔었다/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라는 말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 거듭거듭 노래했다/ 눈 밑살에 주름이 쩌억, 가는 듯했다”(‘파두―Dear Johnny’에서)

온건한 탐미주의자 황인숙(49) 시인이 이번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자명한 산책’(2003) 이후 4년만에 펴낸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에서는 포르투갈 민속음악 파두의 쓸쓸한 가락이 새어나온다. 수록된 57개의 가편(佳篇) 중 ‘파두’란 제목이 붙은 시는 세 편뿐이지만, 시가 비추는 리스본의 뒷골목 풍경과 파두의 애잔함 덕분에 가장 도드라진다.

파두는 포르투갈어로 ‘숙명, 운명’이란 의미다. 이름 뜻에서 감지되듯, 구슬픈 정조에는 귀족의 풍류가 아닌 서민의 애환이 담겨 있다. 시인은 파두를 들으며 이름 모를 포르투갈 시인의 운명을 상상한다. 시인 자신이 감내할 운명이기도 하다.

“마감 닥친 쪽글을 쓰느라 낑낑거리며/ 잡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부르짖는/ 가난하고 게으른 시인이/ 그 동네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비탈 좁은 계단길/ 한 좁은 아파트의/ 지붕 밑 좁은 방에서// (…) 다시 오를 길이라면, 내려가지 말자.”(‘파두―비바, 알파마!’에서)

생계 때문에 쓰고 싶지 않은 잡문을 쓰는 시인의 비애를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하지만, 좁은 계단길, 좁은 아파트, 좁은 방으로 상징되는 생활의 고단함은 익살에 섞인 자조를 들춘다. 시에 한생을 바치고 싶어도, 빵을 위해선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시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시인은 시를 포기하지 못한다. 시를 떠나려해도 결국 좁고, 거친 시인의 길을 다시 오른다. 그것이 시 쓰는 자의 ‘파두’다.

고양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면모는 여전하다. 황 시인은 ‘고양이 시인’으로 불릴 만큼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그는 1984년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했고, 전작에서도 ‘밤과 고양이’란 시를 선보였다. 그 속편 격인 ‘詩와 고양이와 나’에서는 “고양이는 몸을 비틀어 빼며/ 오직 권태뿐인 말간 눈으로/ 또 밥을 조르나/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하는데!”라며 직설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뜨거운 사랑 앞에선 시적 은유와 상징도 뒷전이다. 시인의 고양이 사랑은 프랑스 철학가 장 그르니에의 글귀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그르니에도 수필 ‘고양이 물루’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인용하며 고양이를 예찬했다.

시인은 ‘고양이를 부탁해’ ‘란아, 내 고양이였던’ ‘〈손대지 마시오〉’등에서 ‘영혼의 동반자’ 고양이에 대한 애착을 이어간다. 그는 노숙묘라 불리는 떠돌이 고양이까지 끌어안는다.

“잔인하고 무정한 이 거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가는 고양이들.// (…)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 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 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 그러면, 좋을까요?”(‘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예민한 침봉으로 세상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짚어낸다. 시집은 파두, 고양이의 아름다움 곁에 자잘한 일상의 눈부심까지 배치했다. 황 시인은 “이젠 ‘고양이 시인’이란 별칭이 지겹다”면서도 대화 중 고양이 이야기를 빠뜨리는 법이 없다.

“파두, 고양이 둘 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에요. 파두는 형체가 없는 노래이기 때문에 생명체인 고양이와 비교할 수는 없어요. 사귀어보면 알겠지만, 고양이는 정말 아름다운 동물이에요. 고양이 한번 키워보세요.”(심재천 기자)

한겨레(07. 12. 15) 고양이와의 공존을 부탁해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앞부분)

황인숙(49)의 1984년 신춘문예 등단작은 말하자면 ‘황인숙표 고양이’의 탄생 선언과도 같았다. 조정래가 태백산맥을, 신경림이 남한강을, 김용택이 섬진강을 ‘전유’했듯이 황인숙은 고양이를 오롯이 제것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들은 그에게 시를 주었고 그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었다. 새로 나온 여섯 번째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고양이에 대한 시인의 동경과 찬탄은 잦아들 줄을 모른다.

처음 보는 새끼고양이에게 “어디서 왔니, 새끼고양아?”(<그 참 견고한 외계>)라고 말을 걸거나 홈리스 고양이의 새끼들을 보며 “고양아, 예쁜이들아!”(<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뜰>) 외치는 시인에게서는 어쩐지 철부지 엄마 고양이의 면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고양이에 대한 매혹은 고양이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기하학을 구현하는 내 고양이의 몸”(<란아, 내 고양이였던>)이 감탄을 빚어내는가 하면, “고양이는 기다리지 않으면서/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다”(<<손대지 마시오>>)에서 보듯 그 초연한 정신이 경외의 염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고양이는 매혹과 경외 이전에 인간들의 편견과 위협에 익숙해 있다. 고양이와 공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그래서 시인은 묻는다.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 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 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 그러면, 좋을까요?”(<고양이를 부탁해> 마지막 부분)(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12. 17.

P.S. 시집의 부제를 '고양이를 부탁해'라고 붙여도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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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1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인숙 시인은 은밀하면서도 발랄한, 고양이스러운 사람인 것 같아요.
'고양이를 부탁해'란 영화도 참 좋게 봤어요.^^

로쟈 2007-12-17 15:48   좋아요 0 | URL
네 영화도 재미있었지요.^^

마립간 2007-12-1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몰라 여쭤보는 것인데, 시 '고양이를 부탁해'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등에 나오는 고양이의 공통적 이미지나 의미가 있나요?

로쟈 2007-12-17 15:48   좋아요 0 | URL
관계는 없던데요.^^

베토벤 2007-12-1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나온 소설과 이름이 같군요. (완전 바람의 그림자 분위기) ^^; 예전에 고종석씨의 에세이에 보면 고종석, 황인숙, 강금실 세 사람이 포르투갈에 같이 가서 파두를 들었다 그런 구절도 있더군요.

로쟈 2007-12-18 00:12   좋아요 0 | URL
네, 고종석씨는 <인숙만필>의 발문도 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