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약속이 있어서 광화문쪽에 나갔다가 오랜만에 교보에 들렀다. 일차적인 목표는 얼마전 번역돼 나온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경상대학교출판부, 2007)를 구입하는 것이었는데(기다려봤지만 알라딘에는 입고가 되지 않는다) 짐작대로 서가에 꽂혀 있었다.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2007)과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동문선, 2007) 등의 신간들도 눈에 띄었다(이 책들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것이다). 역시나 책구경도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의 실물 구경이 훨씬 '리얼'하고 '인간적'이란 생각을 다시 했다(무엇보다도 만질 수 있다는 것!).


이런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풀어놓기로 하고 잠깐 리뷰를 검색하게 만든 책은 정혜윤의 <침대와 책>(웅진지식하우스, 2007). 라디오를 듣지 않는지라(운전을 하지 않는 탓이 크겠다) CBS PD라는 저자의 직함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독서광이라는 것과 YES24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는 것 정도가 '내가 들은 모든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란 부제는 물론 '침대'라는 타이틀에서 연상할 수 있는 '어떤 것'(어떤?)일 테지만, 잠시 훑어본 책과는 무관해 보인다. '관능적인'이란 말이 '쾌락주의적'이란 말의 동의어로 쓰인다면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쾌락인가? "나는 마지막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7쪽)란 구절이 말해주는 쾌락이다. 즉, '잡히는 대로' 혹은 '닥치는 대로' 읽기. 그리고 '독서기'도 마찬가지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로 쓰기. 그게 침대에서 누워/엎드려/뒹굴며 책읽기의 노하우이다.

저자가 서두에 싣고 있는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방>(1931)이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호텔방> 그림 속엔 홀로 있는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는 여행중인 듯 침대 옆에는 여행가방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녀는 여행가방을 풀지도 않은 채 붉은 속옷만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걸터앉은 그녀가 하는 일은 두툼한 책 한권을 읽는 것이었다. 책읽기에 꽤 몰두한 그녀의 방은 어두웠고 가구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고개 숙인 목선만큼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오롯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그림에 몹시 끌렸다. 여행지의 낯선 호텔에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 속의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버리는 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버릇이니까."(6쪽) 그래서 '침대와 책'이다(당신의 기대와는 좀 다른 것 아닌가?). '관능'은 책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고. 

저자가 싣고 있지 않지만 호퍼의 <호텔방>과 짝을 이루는 그림은 아마도 <객차>(1938)일 듯싶다. 여기서는 객차에서 여행중인 한 여인이 정장에 모자를 쓴 채로 책을 읽고 있다. 굳이 책을 읽는 포즈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로선 침대보다는 객차를 고르겠다(개인적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여행중이라는 것, 혼자라는 것, 그리고 얼마간 익명적이라는 것(우리는 두 여인의 정확한 인상을 알지 못한다) 등이 두 그림의 공통점이다. 책이 두 인물을 더 외로워 보이게 만드는지, 아니면 그래도 덜 외로워 보이게 하는지는 판별하기 어렵다. 여하튼, 삶이라는 여정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책 한권씩 손에 들고 각자의 외로움을 견디거나잠시 잊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시간이다...

0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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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둑 2007-11-13 09:15   좋아요 0 | URL
객차 그림도 만만치 않은 아우라가....누구 그림인가요? 이것도 역시 호퍼?

로쟈 2007-11-13 17:14   좋아요 0 | URL
물론 호퍼입니다...

2007-11-13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11-13 20:24   좋아요 0 | URL
제 책읽기 방식과 흡사해요. 침대에서 앉았다 누웠다 엎드렸다 하면서..
관능은 책의 안에 있다,,,
시사인에 소개된 님의 서재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사진이 아주 자연스럽게 잘 나왔어요.^^ 괜히 반가웠습니다.

로쟈 2007-11-13 20:49   좋아요 0 | URL
저도 아침에 읽었습니다.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수유 2007-11-13 21:09   좋아요 0 | URL
책을 읽기 위해서는 풍경에서 멀어져야 하는군요.^^

로쟈 2007-11-13 21:13   좋아요 0 | URL
사실 모든 외부와 '차단'해야 하는 것이니 독서만큼 이기적인 행위도 드물지요.^^;

Mephistopheles 2007-11-14 03:10   좋아요 0 | URL
그림 속의 여인처럼 자세 잡고 침대에서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3분이 채 되기도 전에 바로 드러눕는 자세로 돌변해버리는군요..

로쟈 2007-11-14 08:27   좋아요 0 | URL
지속가능한 포즈는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