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독자라면 제목에서 조지 스타이너란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요즘은 어지간한 독자들이 드물어졌지만). "영미 비평계에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조지 스타이너(1929- )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이 바로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1959, 1996)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만 서른에 발표한 책이니까 20대에 쓴 것이고 거의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고전적인 연구'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요즘은 저자가 자처하고 있는 '구비평'이라고 무시하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이만한 '에세이'를 쓰는 건 드문 열정과 재능의 소산이다). 지난 1996년 예일대출판부에서 2판이 출간된 이 책이 '오늘의 책'이다.

2판의 서문 말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의 기원은 본문의 첫문장이다: "문학비평은 사랑을 빚진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Literary criticism should arise out of a debt of love.) 어떤 사랑인가? "위대한 예술작품은 폭풍처럼 우리의 마음을 휩쓸어, 지각의 문을 열어젖히고, 그 변형력으로 우리의 신념 체계에 압박을 가한다. 우리는 그 작품의 영향을 기록하고, 우리의 뒤흔들린 정신세계를 새 질서로 정비하려고 한다." 이것이 첫 단계로서 위대한 예술작품의 사랑(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이겠다.

이어지는 두번째 단계는 그러한 영향 혹은 충격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것: "의사를 전달하려는 본연의 충동에 끌려, 우리는 타인에게 우리 경험의 성질과 힘을 전해주려 한다.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싶은 것이다. 이 설득하려는 기도에서 비평이 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통찰이 비롯된다."(국역본, 3쪽) 그가 이 '비평적 에세이'에서 전달하고자, 혹은 설득하고자 애쓰는 '가장 진실한 통찰'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위대한 두 소설가"(6쪽)라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공유하기 어렵다(젠장, 여기서 두 문단을 날려먹고 다시 쓴다). 일단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의 국역본을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그의 책으론 <하이데거>(지성의샘)만이 대형서점에 남아있는 정도이다). 해서 도서관에 의존하거나 헌책방을 전전해야 할 터인데, 80년대에 두 종의 번역본이 출간됐던 걸 고려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두 종의 국역본이란 건 윤지관본(종로서적, 1983)과 김석희본(심지, 1983)을 말한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윤지관본이고 1983년 초판이다(역자 또한 20대에 번역한 책이군). 이후에 두 작가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서가 별로 소개된 바도 없으므로 이 책이라도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1996년에 2판이 나온 사실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묵혀두기엔 아까운 책이다.  

저자인 스타이너는 영어권 유수의 대학들에서 학위를 했지만 프랑스 태생이고 영어, 불어, 독어 '트리링구얼'이라고 한다.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에서 비교문학 교수로 오래 봉직했지만 저술목록을 보면 언어와 번역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역자에 따르면 (1983년 시점에서) "스타이너의 비평 작업은 현대 문명의 패러독소 - 이 고도의 문명이 수많은 야만행위들, 예들 들어 강제수용소, 정치적 탄압, 대규모의 전쟁 등을 자행하고 있다는 -를 의식하고 여기에 대결하려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비평가의 역할을 현대문학이 과연 이러한 시대에 쇠퇴해가는 도덕적 지성의 힘을 고양시켜 나가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라고 본다."(310쪽) 말 그대로 '고전적인' 비평가의 임무를 상기시켜준다.  

그의 책들 가운데 <비극의 죽음>(1961), <언어와 침묵>(1967), <바벨 이후>(1975) 등이 유명한데 예전에 국내에서 쉽게 원서를 구할 수 있었던 책들이다(나도 소장하고 있다). 물론 그밖에도 최근까지 20여 권 이상의 책이 더 출간됐고, 그 중에서 내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은 <안티고네들>(1984).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비극의 죽음> 등과 함께 1996년에 보급판으로 다시 출간된 이 책은 부제대로 '서구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상에 나타난 안티고네 전설'을 다루고 있다. <안티고네>에 대한 강의를 맡는다면 가장 먼저 참조해볼 만한 책이다.

스타이너가 '고전적인 비평가'라고 적었는데,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구식 비평가'이다(2판의 부제 자체가 'An Essay in the Old Criticism'으로 돼 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3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영미비평을 주도한 신비평(New Criticism)일 터인데, 그가 차지하고 있는 '특이한 위치'라는 건 그의 '시대를 거스르는' 비평관과 무관하지 않겠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현대비평은 조롱조이며 궤변조인 동시에, 철학적 연원과 복잡한 도구를 광범하게 파악하고 있어서, 대개 칭찬하기보다는 매장한다. 사실상, 건강한 언어, 건강한 감수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매장되어야 할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수많은 작품이 의식을 풍부하게 하거나 생명의 원천이 되지 못하고, 용이하고 천박하며 일시적 위안을 주는 세계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을 다루는 일은 서평가가 맡아야 하는 기능이지, 명상하고 재창조하는 비평가의 기술이 관여할 바는 아니다."(3-4쪽)

그렇다면, 비평가의 역할을 무엇인가? "서평가나 문학사가와는 달리, 비평가는 걸작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일차적 기능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일이 아니라 좋은 것과 최상의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In distinction from both the reviewer and the literary historian, the critic should be concerned with masterpieces. His primary function is to distinguish not between the good and the bad, but between the good and the best.)

"문학비평은 사랑을 빚진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에 이어서 확실한 밑줄긋기가 필요한 대목이다. 내가 마음에 드는 대목은 '좋은 것과 최상의 것을 구별'하는 것이 비평가의 주된 기능이라는 단언. 좋은 작가나 작품을 식별/선별하는 일은 리뷰어(서평가나 서평꾼)에게 맡기고 비평가는 오직 최고의 작품들하고만 씨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겠다(그러고 보면 정작 우리 주변에 '비평가'는 아주 드물다는 걸 알게 된다).  

스타이너 자신이 젊은 날에 쓴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평관은 아주 확고하다. 걸작의 기준에 있어서도 그렇다. "비평은 우리에게 위대한 계보의 기억과, 호머에서 밀턴까지 이어지는 고서사시(high epic)의 무쌍의 전통과 아테네, 엘리자베드조, 신고전주의 연극의 찬란함과 소설의 대가들을 환기시켜야 한다." '무쌍의 전통'은 'matchless tradition'을 옮긴 것이다. '버금하거나 견줄 만한 것이 없는 전통'이란 뜻이겠다. 특별히 그가 부각시키고 있는 계보/전통은 '서사시'와 '비극'인데,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이지만, 그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이 두 전통의 적통으로 이해하며 평가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을 호머의 작품에 비교하"는데, "조이스의 <율리시즈>보다 훨씬 엄밀한 의미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는 서사 양식의 부활을 구체화하였고"(8쪽)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그의 천재는 희곡적 성격으로, 중요한 점에서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포괄적이고 자연스런 희곡적 기질로 이해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비극 시인의 한 사람이다." 즉 톨스토이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의 호머(호메로스)이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셰익스피어다.

그런 맥락에서도 스타이너가 보기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단순히 '좋은(good)' 작가가 아니다(지적한 대로 '좋은 작가들'은 리뷰어들이 다룬다). 그들은 '최고의(the best)' 작가들이다. 그는 인용하고 있는 영국 작가 E. M. 포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영국 소설가도 톨스토이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은 가정적인 면이든 영웅적인 면이든, 그처럼 완벽하게 그린 사람은 없다. 또한 어떤 영국 소설가도 도스토예프스키만큼 인간의 영혼을 깊이 파헤친 사람은 없다." 스타이너는 한술 더 떠서 이러한 판단이 영문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예 소설문학을 통틀어서 그렇다는 것이다(물론 그의 말대로 이러한 판단은 증명 불가능하다. 대신에 그는 '청력'의 문제라고 말한다. 귀 있는 자는 들어보라, 는 것이다). 참고로 포스터의 인용출처는 <소설의 제 양상(Aspects of the Novel)>(1950)이다. <소설의 이해>(문예출판사)라고 번역돼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제 왜 제목이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Tolstoy or Dostoevsky)"인가를 물을 차례다. 이미 서사시/비극이라는 문학사의 양대 전통에 대한 언급에서 시사된 것인지만, "그것은 대비를 통해 그들의 업적을 살피고 각각의 천재의 성격을 규정하려 하기 때문이다."(9쪽) 러시아 철학자 베르자예프를 인용하자면, "인간 영혼의 두 양식, 즉 톨스토이적인 정신과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정신을 규정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작가와 대면하는 일은 인간 영혼/정신의 두 가지 양식, 더 나아가 두 가지 상이한 세계관과 조우하는 일이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중의 택일은 실존주의자들이 앙가주망이라고 부름 직한 것을 예시하고 있다. 그 선택은 상상력을 인간의 운명, 역사적 미래, 신의 신비에 대한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두 해석 중 하나에다 위임해버리는 일이다." 다시 베르자예프의 표현을 빌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종류의 가정, 존재의 두 기본 개념이 서로 충돌하는 해결 없는 논쟁"의 본보기이다.  

Николай Бердяев Миросозерцание Достоевского

스타이너가 인용하고 있는 베르자예프는 불어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L'esprit de Dostoievski)>(1946)인데, 국내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이란 타이틀로 이경식본(현대사상사, 1975), 류준수본(한양대출판부, 1982), 이종진본(범조사, 1987) 등이 나와 있었다(앞의 두 권은 영역본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이종진 역의 범조사 문고본이다). 물론 요즘은 구하기 힘든 책이 돼버렸지만. 이미지는 가장 저렴한 러시아어 문고본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  

 

 

 

 

자, 이제 해야 할일은 보다 본격적으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를 읽는 것이다. 톨스토이를 읽는다면 그의 데뷔작이자 자전 3부작의 첫 작품인 <어린시절>(1852)부터 읽어야겠다. 최근 다시 나오기 시작한 새 톨스토이전집의 1권 <소년시절-청소년시절-청년시절>(작가정신, 2007)을 따르자면 '소년시절'이 될 테지만 관례적으로 '어린시절' 내지는 '유년시절'('유년시대')로 번역된 작품이다(영어로는 'The Childhood').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라면 데뷔작인 <가난한 사람들>(1846)로부터.

 

 

 

 

각각 <부활>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최근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

  

 

 

 

길잡이가 될 만한 책들이 많지는 않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나란히 다루고 있는 책으로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자연사랑, 2001)을 들 수 있겠다. 츠바이크가 그런 타이틀의 단행본을 쓴 건 아니고 그의 <천재와 광기>(예하, 1993)에서 두 작가에 관한 대목만 따로 묶은 것이다(교열상태는 상당히 불량하다). 러시아 상징주의 작가 D. 메레지코프스키의 책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금문, 1996)로 소개되었었지만 절판됐다. 스타이너의 표현을 빌면 "변덕스럽고 신용이 없지만, 많은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국역본 각주에는 '메레즈프스키'라고 표기돼 있는데 착오이다).

그리고 인디북에서 나온 박형규판 톨스토이 선집의 서론격인 <톨스토이>(인디북, 2004). 두툼한 책이니 사전 정도로 활용할 수 있겠다.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다룬 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비전비앤피, 2007)도 읽어둘 만한 고급한 에세이지만 국역본은 교열상태가 좋지 않다(게다가 러시아사와 톨스토이에 대한 무지가 너무 도드라지는 번역이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연구서로 모출스키의 평전과 (절판된)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 등을 제외하면 시중에 나와 있는 건 국내 전공자들의 연구서이다. 권철근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연구>(한국외대출판부, 2006)와 조주관 교수의 <죄와 벌의 현대적 해석>(연세대출판부, 2007)이 최근에 나온 대표적인 저작들인데, 일반 독자라면 굳이 참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대학 강의'가 궁금한 독자라면 읽어볼 만하다. 여타의 많은 참고문헌들은 이런 연구서들의 부록을 참조하시길...

07. 09.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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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9-24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쉬는데 로쟈님만 바쁘시군요. 한가위 잘 보내세요. 안타깝게도 전 어지간한 독자는 못 되는군요.

심술 2007-09-2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도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인문학이 참 깊고도 어려운 거구나 하는 건 올려 주시는 글 읽으며 깨닫고 있습니다.

로쟈 2007-09-2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가 저에겐 '쉰다'는 의미입니다.^^; '어지간한 독자' 같은 얘기는, 아시겠지만, 좀더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죠. '인문학이 참 깊고도 어려운 거'라는 인식을 심어드렸다면 제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인문학의 '대중화'에 한몫한다면서 이러고 있는데 말이죠...

심술 2007-09-2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망과 함께 자극과 관심,흥미도 주시니까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