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더위가 기승이다. 밤공기는 많이 서늘해졌지만 실내의 후덥지근한 기운은 여전하다. 순전히 더위를 식힐 겸 릴케의 시를 잠시 둘러보다가 예전에 모스크바통신에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호출하여 창고에 넣어둔다(모스크바통신은 비공개로 돼 있다). 작년 여름에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http://blog.aladin.co.kr/mramor/929287)이라고 축약본을 올려놓았었는데 그 풀버전이다.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 3년 전 여름으로 잠시 되돌아가본다.

요즘 한국은 전국이 열대야라고 하지만, 모스크바의 여름 더위는, 과연 그런 게 어떤 건지 아직도 궁금할 정도이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여름 햇볕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그래 봐야 한국 날씨로는 좀 더운 5월 날씨 정도인 듯싶다. 7월도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어느새 이 주에는 중복도 끼어 있지만(초복은 언제 지나갔단 말인가?), 모스크바의 ‘복날’은 이름이 좀 무색하다. 그러니 한두 시간쯤 바람을 쐬는 걸 제외하고는(인터넷카페에 들르고, 서점들을 돌아다니고),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지만, 그저 조용한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자위해도 (자기)기만은 아닌 셈이다. 애써서 러시아까지 날아오는 한국 관광객들도 많잖은가?

대개 그 관광코스에는 모스크바대학 구경도 포함돼 있는바, 관광버스를 타고 이 스탈린식 건축양식의 기념비적인 건물인 본관 건물을 한번 둘러보는 정도인데, 그 건물 안에서 ‘방콕’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니 나의 ‘일상’을 ‘내적-관광’이라 불러도 과장은 아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관광지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번역에 매달려 있는 갑갑한 일상이 다소 구제된다. 하긴, 1일 감옥체험이란 것도 일종의 ‘감옥-관광’이 아닐는지? 덧붙여 말하자면, 번역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감옥’이다. 지난주에 다녀간 한 후배는 이곳 기숙사 방을 일제 때의 형무소에 비유했는데(아무렴 호텔에 있는 줄 알았을까!), 그래도 감옥으로 치자면, 아주 고상하고 호사스러운 감옥이다(이게 또 위안이 될 만하군). 게다가 산책시간은 물론이거니와 노트북까지 제공돼 있는.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달려든 번역이지만 진도는 생각만큼 빠지지 않고 있다. 곧 견적을 수정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주업인 번역에만 목을 매달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부업으로 ‘바람’도 핀다. 그건 릴케의 시들을 읽는 일이다. 특히 <두이노의 비가>(릴케는 이 시의 첫 구절을 바람결에 들었다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보드카의 안주로 맥주나 주스를 마시듯이, 나는 번역거리의 안주로 릴케의 시들을 옮겨 적고, 러시아어로 음미해 보고 있다. 그것들이 나의 일과 휴식이며, 빵과 포도주이다.

Стихотворения (пер. с нем. Микушевича В.Б.) (на нем., русс.яз.) Серия:

릴케의 시집은 지난주에 막심네 가게에서 샀다. 러시아어로 릴케 전집은 3권짜리가 나와 있다고 하는데, 그걸 찾으러 고서점을 돌아다닐 여력도 없거니와 재정적인 여유도 없다. 대신에 내가 산 건, 칸딘스키의 그림들이 표지와 삽화를 장식하고 있는 손바닥만한 릴케 선집이다. 정확하게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가는 책인데, 그래도 하드카바에 전체 334쪽이고, 2000년에 나온 이 책의 값은 3,500원 가량이다. 러시아에서는 유명 시집들의 경우 이런 식의 포켓북들이 많이 나와 있다. 릴케의 다른 선집도 있었지만,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다른 책과 달리 <두이노의 비가> 10편이 모두 번역돼 있다는 점. 릴케 자신의 평가도 그렇지만, 나는 <비가>가 릴케 시의 정점이자 ‘비가(엘레지)’라는 장르의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감’이자 ‘견문’일 따름이고, 나는 아직 <비가>를 통독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기회도 없었지만, 여건도 따르지 않았는바 한국어로 <비가>를 읽는 일은 장갑을 끼고 애무하는 것만큼이나 감질나는 것이어서(그것도 번역이 안 좋을 경우는 장갑도 ‘벙어리 장갑’이다), <비가>의 진가를 음미하기가 쉽지 않았다. 독어로 읽으면 좋겠지만(학부시절에 놀면서라도 해둘 일은 제 2외국어를 2-3개 정도 학습하는 것이다. 나는 알면서도 그러질 않았는데, 30대 이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게도), 아쉽게도 독어에는 까막눈이기 때문에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번역본들뿐이다.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두이노의 비가>는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한기찬 번역본이며, 나는 이 번역을 통해서 <비가>에 입문했다. 그게 17년 전이다. 무엇보다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1>의 시작부분이다. 이와 관련하여 8년 전에 쓴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릴케를 읽은 것은 대학 1학년의 여름. 고작 <두이노의 비가>를 번역으로 읽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릴케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그래서 이번에 좀 읽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감동 이상의 것이다. 그걸 잘 말할 수 있을까? 하여간에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번역(*당시에는 청하출판사본에 이어서 문학과지성사본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번역/출간됐었다)을 동시에 옮겨보면 이렇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뉘라서,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랴, 천사들의 질서로부터?”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눈물나게는 아니었지만, 오직 <장자>를 읽었을 때의 감동이 여기에 비견할 만하다. 둘 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듯하다. 내게 릴케와 장자는, 그래서 동급이다. 또한 똑같이 비주류적이면서도 각기 서양과 동양의 시적 형이상학의 한 극점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비록 사유의 양태와 정조는 다르지만). 그리고 사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가 무얼 인식하거나 이해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것이다. 시이면서 시 이상인 어떤 것(울부짖음!). 울부짖음은 독어나 한국어 같은 개별 언어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주관적인 감동으로 이 시구의 이해를 대신하는 것이 어찌 결례가 될까, 망발이 될까…


내가 17년이 지난 지금도 이 <비가>에 매혹되는 것은 일단 릴케의 시구이면서 그 자신의 것만도 아닌(그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 적었다고 했다) 이 첫 시구 때문이다. 내게 익숙한 건 물론 한기찬 번역이다(일부 오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이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 이후에 이 <비가>는 책세상 릴케 전집과 민음사 릴케 전집으로 더 번역/출간되었기 때문에, 우리말 <비가>는 내가 아는 한,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한, 모두 네 종이다. 나는 한때 영역본 <두이노의 비가>도 구했었지만,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만을 구하고 말았었다. 지금이라면 구해볼 수 있을 텐데, 몇 년 전에 한창 구하러 다닐 때는 의외로 눈에 띄질 않았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본을 갖고 있다. 네 종의 번역본을 대조해 가면서 읽는다면(그런 걸 나는 ‘바꿔 말하면-효과’라고 부른다), 얼추 <비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현지사정상’ 당장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내가 모스크바에서 릴케를 읽을 생각을 하게 된 건 룸메이트가 들고 온 책세상판 릴케 전집2권 때문이다(거기에 물론 <두이노의 비가>가 실려 있다). 해서 내가 읽는 건 주로, 김재혁 번역의 한국어 <두이노의 비가>와 미쿠세비치의 번역의 러시아어 <두이노의 비가>이다.

 

 

 



러시아본은 대역본이어서 왼쪽 페이지에는 독어 원시가 씌어져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 러시아어 번역이 씌어져 있다. 나는 비록 읽을 수 없더라도 그런 식의 대역본을 좋아하며, 번역시집은 가급적/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번역 시집들 가운데는 민음사의 세계시인선과 솔출판사의 세계시인선이 그런 편제를 갖추고 있다(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시인선도 그랬던 것 같다). 설사 읽을 수 없는 언어라 하더라도, 대역본 체제는 시의 번역이란 것이 원초적인 번역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왜 번역 불가능한가? 시의 언어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기 때문이고, ‘뜻’이 아니라 ‘글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성이 역설적으로 번역의 조건이기도 하다. 즉 시는 번역될 수 없기 때문에 번역되며, 그때 번역되는 것은 번역불가능성이다. 하긴 이런 번역불가능성은 동일언어 사용자라고 해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자연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로트만에 따르면, 시는 ‘2차 모델화 체계’이다). 가령, 당신은 김수영의 시에 대해서, 이성복의 시에 대해서, 기형도의 시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시 원론을 늘어놓을 수는 없고, 다시 릴케로 돌아가자면, 하여간에 ‘좋은’ 룸메이트를 둔 덕분에 <히치콕>에 이이서 <릴케>도 읽게 됐다(가을에는 <니체>도 읽을 생각이다). 그런데, 시 읽기의 전제는 말 그대로 ‘읽어내기’이다. 시에 대한 어떠한 해석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읽어내기’인바(물론 이때의 해석과 읽어내기는 ‘해석학적 순환’을 구성한다), ‘읽어내기’로서의 읽기란 번역과 마찬가지로, 비유컨대 ‘낮은 포복’이다. 번역은 줄거리만 옮긴다거나 재미있는 장면만 발췌하는 작업이 아니라,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짚어가며 그걸 다른 기호학적 체계의 구조물로 변형/구축하는 작업이다(그래서 낮은 포복이다! 이 여름에!). 시 읽기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바, 2차 모델화 체계, 즉 시를 1차 모델화 체계, 즉 자연언어로 옮겨주는 작업이 그 읽기, 즉 ‘읽어내기’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해서, 그러한 ‘읽기’가 빠진, 해석이나 비평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해석/비평은 대개 시의 한두 구절이나 한두 연을 떼다 놓고 거기에 이런저런 관념을 버무려서 ‘체념의 시학’이니 ‘달관의 시학’이니 하는 이름들을 그럴 듯하게 붙여놓는바, 그런 건 ‘그의 요리’이되, 내가 음미하고픈 시의 본래 맛과는 거리가 멀다. 요컨대, 시의 경우엔 해석이나 비평보다 일차적인 읽기와 주석이 더 필요하고 요긴하다. 내가 김화영 교수의 미당 시 읽기나 권영민 교수의 정지용 시 읽기 같은 작업을 존중하는 것은 그런 판단에서이다. 물론 번역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본적인 ‘읽기’이자 ‘읽어내기’이며, 내가 번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번역은 ‘낮은 포복’이자 ‘바닥 청소’(=걸레로 바닥 닦기)이다. 오, 성자들이여! 물론, 대충 닦거나 엉터리로 닦으면 안된다. 더구나 성자들이!).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의 경우에도 아마 독일어로는 많은 주석과 ‘읽기’가 이미 나와 있을 거라고 짐작되지만, 아쉽게도 한국어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기본적인 ‘읽기’로서 네 종의 번역이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그렇다. 주석이 필요하고 ‘읽어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래서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불충분성 속에서도 내가 <비가>로부터 감동을 받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는 인간적 ‘울부짖음’에 관한 것이며, 그 울부짖음이 어떤 식으로 구제/위로 받는가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이미 적은바, “울부짖음은 독어나 한국어 같은 개별 언어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래서 8년 전에 나는 “그러니 나의 주관적인 감동으로 이 시구의 이해를 대신하는 것이 어찌 결례가 될까, 망발이 될까.”라고 또 적었지만, 이번에는 ‘주관적 감동’이 아닌 ‘객관적 논리’로써 <비가>를 읽고자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다(내가 읽고 싶은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런 식의 임시방편으로라도 때우는 수밖에 없겠다).



릴케는 사실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인이다. 그는 젊었을 때 루 살로메와 함께 두 차례인가 러시아 여행을 감행하며, 톨스토이를 직접 방문한 적도 있다. 파스테르나크의 <어느 시인의 죽음>(원제는 ‘안전통행증’)에는 톨스토이를 방문했던 이 ‘젊은 시인’에 대한 기억이 살짝 묘사돼 있다(파스테르나크 집안은 톨스토이와 친분이 있었던바, 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는 <부활>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미지는 그가 스케치한 릴케). 그리고 러시아 시인들의 시들을 독어로 번역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릴케의 ‘파리 시절’ 그리고 로댕과의 만남 이전에 러시아의 자연과의 만남은 그의 시작(詩作)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얼마전 <러시아에서의 릴케>란 두툼한 책을 이곳 서점에서 봤는데, 무게와 가격 때문에 사지는 못했지만(돈줄을 구해야겠다), ‘릴케와 러시아’란 주제가 생소한 것은 아니란 사실을 입증한다(이 주제만큼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릴케와 발레리’인데, 릴케는 발레리의 시들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서로 친분을 나눈바 있다. 나중에 찾아봐야겠지만, 이런 주제는 누가 책을 써줬으면 좋겠다).

나의 릴케 읽기는 일단 후기시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그 후기시라는 건 뮈조트성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처음 씌어지기 시작하는 1912년부터의 시이다. 그가 10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를 완성하는 것은 1922년이며, 그는 이 해에 또 다른 대표작인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쓴다. 그리고 <두이노의 비가>를 쓰기 직전 같은 해에 쓴 시가 연작시 <마리아의 탄생>이다. 내가 이 여름에 읽어볼 계획으로 있는 것은 이 세 작품이며, 집중적인 ‘읽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단 <두이노의 비가>이다. 물론 주업인 번역 진도에 따라서, 부업인 시 읽기가 얼마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으며, 중간에 지젝의 <이라크>나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비평과 진단> 읽기가 끼어들 가능성도 있다(나는 삶을 계획하지만, 통제하지는 못한다). 하여간에, 이런 것이 나의 바캉스 계획이다(나는 당신들의 바캉스를 질투하는 한편으로, 당신들이 나의 바캉스를 질투해주길 바란다. 그게 공평하니까).



일단 시작은 하고 보자. 이미 인용한 바 있지만, <비가>의 첫 시구를 (민음사본을 제외한) 세 번역본에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현재 안 갖고 있는 번역본의 인용은 이전에 쓴 글에서 따온 것이다). (1)“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청하), (2)“뉘라서, 내 울부짖은들, 들어주랴, 천사들의 질서로부터?”(문학과지성사), (3)“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책세상) 이에 대한 원시를 내 짐작대로(나는 독어 수업을 두 시간 청강했을 뿐이다) 음역하면 “베어, 벤 이히 슈리에, 회르테 미흐 덴 아우스 데어 앙겔 오어드눈겐?”이다(역시 발음하기 어려운데, 내 경험상 음역하기에, 그리고 발음하기에 가장 좋은 건 스페인어이다). 더불어 내 마음대로 영역하면, “Whoever listens to my cry, from the order of angels?”쯤이 될 듯하다(이 음역/번역에 대해서는 잘 아시는 분들의 지적/교정을 바란다).

짐작에는 릴케가 도치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듯하며(그리고 ‘오어드눈겐’에서 행이 바뀐다. 그래서 그걸 따라 우리말 번역 중 일부도 행을 바꿔주지만, 그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알리바이’일 뿐이다), 문학과지성사본이 가장 직역에 가까운 듯하다. 하지만, 시 번역은 단어와 구문을 단순하게 다른 언어로 바꿔주는 게 아니다. 같은 인도-유럽어족의 굴절어끼리는 각운까지 맞춰주는바, 그러한 형식적 고려 때문에 ‘내용’은 다소간 변형된다(물론 교착어인 한국어는 이런 일에 젬병이다). 즉 시는 ‘내용’의 직접적인 번역이 아니라는 얘기이며, 이 때문에 영역된 시들을 읽기도 쉽지 않다(영역된 릴케도 마찬가지일 거라 짐작된다).

문외한이 보기에 <비가>는 특별히 각운 등을 맞추고 있지는 않으며, 덕분에 러시아어 번역 또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좀더 편하게 돼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옮기는 데 있어서 내가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번역은 청하본이다. 사실 이 번역에 내가 익숙해 있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우리말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참고로, 우리의 경우 번역시의 걸작으로 자주 회자되는 건 일제 때 오장환이 번역한 러시아 ‘농민시인’ 예세닌 번역시이다. 그런 사례에서 알 수 있는바, 시 번역은 번역이면서 번안이다).

이 대목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건 두 가지이다. 첫째, 영어로는 ‘cry’에 해당하는 걸 어떻게 옮길 것인가? 둘째, ‘the order of angels’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내가 독어를 모르기 때문에, 편의상 임의로 옮긴 영어를 사용한다.) 알다시피, ‘cry’는 동사와 명사로 다 쓰이며, 동사로는 ‘소리치다’ ‘부르짖다’ ‘울다’ 등의 뜻이다. 세 번역에서 모두 동사로 옮기고 있는데(명사로라면 ‘외침’이나 ‘절규’가 후보로 떠오르는데, 뭉크의 그림 제목처럼 이 <비가>에도 더 적합한 것은 ‘절규’이다. ‘외침’은 너무 중성적이다), 나는 ‘소리친들’이란 번역은 너무 약하다고 생각한다. 천상계에까지 호소할 만한 정념 혹은 비탄은 ‘소리치다’란 동사로 다 표현되지 않는다(“누가 들어줄까?” 그런 건 안 들어주는 게 당연하다). 천사들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도 할 만큼은 해야 하니까 ‘울부짖다’라고는 옮겨줘야 한다(울부짖는 데도 안 들어주는 건 못된 것들이다). 해서 낙착은 “울부짖은들”.

그리고, 두 번째로 ‘the order of angels’에서의 ‘order’(오어드눈겐)의 번역인데, 우리말 번역은 각각 ‘열’ ‘질서’ ‘계열’로 옮기고 있다. 물론 셋 다 가능한 번역이다. 문제는 이 시의 문맥에 가장 적합한 번역어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걸 결정하는 건, 일단 독어에서 ‘오어드눈겐’의 용례이다. ‘천사들의 열’이란 말은 ‘천사들의 질서’나 ‘천사들의 계열’보다는 우리말로 자연스럽다. 즉 무표적이다(‘유표적/무표적 marked/unmarked’은 야콥슨의 용어이다). 거꾸로 말해서, ‘천사들의 질서’나 ‘천사들의 계열’이라고 할 때는 한국어 화자의 관심이 ‘천사’가 아니라 보다 유표적인 ‘질서’나 ‘계열’로 가게 된다. 하지만, ‘오어드눈겐’이 얼마나 튀는 말인지 나로선 판별할 수 없다. 내가 고려할 수 있는 건, 이 시구에서 방점이 과연 ‘천사’에 두어져야 하느냐, 아니면 ‘오어드눈겐’에 두어져야 하느냐이며, 나는 전자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러시아어 번역은 ‘천사군(軍)’(이때의 軍은 ‘구세군(救世軍)’의 ‘군’이다). 해서, 나라면 ‘천사들의 열’을 선택하겠다.

천사들의 열, 즉 ‘오어드눈겐’이 우리에겐 다소 낯설지만, 천사들도 서열이 있고 짬밥이 있다. 그래서 대천사 혹은 천사장이 있고, 그 아랫것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자세한 서열을 알지 못하지만, 치품천사(熾品天使), 지품천사(智品天使) 하는 식으로 내려간다(가령 미스코리아 진-선-미 하는 식으로). 이런 수직적 서열관계를 표시하는 단어로는 ‘질서’란 말이 ‘열’보다는 낫다(‘열’은 보다 ‘수평적’이다. ‘계열’은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차이(장점)가 ‘대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해서, 결론은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이다. 물론 약간의 변형은 가능하다. “내 울부짖은들 뉘라서 들어주랴, 천사의 열에서.”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 다음 구절. 행 가름 없이 나열하면, (1)“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힘찬 존재 때문에 나는 사라지고 말리라.”(청하), (2)“어느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해도, 나는 사라지고 말걸, 보다 강한 그의 현존재로 말미암아.”(문학과지성사), (3)”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책세상) 이 대목부터는 독어 음역을 생략한다(잘 모르면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다).

공통적인 ‘내용’은 이렇다. “한 천사가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면, 나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너무나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 번역이란 이 ‘내용’을 이제 한국어로 ‘작문’하는 것이다. 먼저, 구문 (1), (2)는 “-한다 해도”라는 양보구문이고, (3)은 “-한다면”이라는 가정법구문이다. 러시아어본은 가정법구문으로 돼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하지만’이란 접속사가 앞에서 이끄는 가정법구문이다(청하본에서는 ‘설마’라는 문두의 부사가 이에 대응한다). 즉 “하지만, -한다면”이란 식인데, 이건 “-한다 해도”와 유사한 의미효과를 갖는다. 내가 좀 어색하게 생각하는 건 (2)와 (3)에서의 종결어미이다. “나는 사라지고 말걸”이나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정도로는 이 시 화자의 비애감이나 비장함을 전달하기에 역부족이다(전자에 대한 반문은 “그러냐?”이고 후자에 대한 반문은 “그래서?”이다). 해서 “-말리라.”

대신에 “사라지고 말리라”보다는 “스러지고 말리라”란 번역이 더 적합하다. 러시아어번역은 ‘바스러지다’. 천사라는 ‘강력한 존재’가 우리를 가슴에 껴안으면 너무도 ‘연약한’ 우리는 그의 품안에서 바스러질 거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어디로 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스러지다’란 동사는 ‘사라지다’(=죽다)와 ‘바스러지다’를 동시에 포괄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적합하다고 한 것이다.

나머지. ‘갑자기’와 ‘느닷없이’는 알다시피 같은 말이고 ‘취향’의 문제이긴 한데, 나라면 ‘갑자기’를 고르겠다. 그건 ‘천사가’ ‘나를’ ‘가슴에’ 등의 ‘아’음과 더 잘 호응하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보다 리드미컬하게 된다). 그런 리듬의 관점에서 보자면, ‘느닷없이’는 느닷없다(즉 유표적이다. 쉽게 말해서, 튄다). 이 역시 해당 독일어가 얼마나 유표적-무표적인지를 참조하여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껴안다’와 ‘끌어안다’. 안는 거야 각자가 알아서 할 문제이지만, 이 경우에도 나는 ‘다수’보다는 ‘소수’의 편을 들겠다. ‘바스러지기’에 더 적합한 것은 ‘끌어안다’보다는 ‘껴안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1)‘힘찬 존재’ (2)‘보다 강한 그의 현존재’ (3)‘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 일단 ‘현존재’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해당 독일어는 ‘Dasein’이고, 하이데거 철학에서 보통 ‘현존재’라고 번역되는 단어이지만,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인간인 반면에 여기선 ‘천사’를 가리키므로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 건 아니며 특칭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현존재’라고 옮길 경우, 한국어 화자의 관심은 ‘강한’이 아니라 ‘현존재’로 가게 된다(물론 이 문맥에서 더 중요한 건 ‘(현)존재’가 아니라 ‘강한’이란 형용사이다). ‘힘찬’과 ‘강한’은 선택적이지만, 독어에서 비교급이 사용되고 있다면 더 적합한 것은 ‘강한’이다.

결론적으로, (1)을 중심으로 종합하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여기서도 직역투인 (2)는 도치구문을 사용하고 있는데, 첫째로, 릴케의 도치구문이 독일어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유표적인 구문인가? 둘째로, 시의 운율을 고려한 도치구문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 전달을 의도한 도치구문인가?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일 경우에만 한국어 도치구문이 유의미하며 정당화된다. 한데, 정상어순인 (3)으로 봐서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그렇다면, (2)는 독일시 수업시간의 강독용 번역으로서나 유용해 보인다). 그리하여, 내가 재조합한 번역은 이렇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대충 마음에 든다. 부족하다 싶은 건 나중에 손을 좀 보면 될 것이다. 사실 이 두 문장에는 <두이노의 비가> 전체를 이끌고 가는 핵심적인 모티브들이 포함돼 있다. 물론 ‘천사’는 핵심 중의 핵심인데, 릴케 존재론의 기본축은 ‘강한 천사’와 ‘연약한 인간’의 대비이다. 흔히 말해지듯이, 인간은 짐승도 아니지만, 천사도 아니다(못 된다). 유한한 존재이자, 필멸적 존재인 인간, 그래서 맨날(은 아니더라도) ‘울부짖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그 ‘어중간함’이 릴케 시의 숙고의 대상이다(죽음의 관점에서는 ‘너무 이른 죽음’. 릴케는 그걸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어중간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 받는가.

지상적 존재인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더라도 천상적 존재인 천사들은, 혹은 신은 눈도 꿈쩍하지 않으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노장철학에서 말하듯이, ‘天地不仁’인 것이다). 그건 ‘계’가 다르고 ‘질서’가 다르며, 존재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사들의 무관심을 탓하고, 천지의 ‘어질지 않음’(不仁)을 원망하는 것은 유치하다(다시 말해서 유아적이다. 인격화 혹은 의인화는 사물화만큼이나 ‘편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으로 더 무서워할 만한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이고 ‘어짊’이다(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이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불쌍히 여겨 설혹 한 천사가 우리를 껴안아준다고 해도 문제는 우리가 그걸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브한 비유를 들자면, 백일도 안 지난 아이한테 보약을 먹이는 격이다.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며, 아이가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관심과 사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실제로 엄마의 젖가슴에 눌려 질식사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니 어찌 함부로 관심을 구하겠는가, 사랑을 구걸하겠는가? 간혹 밥 먹듯이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정말로 사랑을 견딜 수 있는 건지? 가슴이 터질 듯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터져 스러지지 않(았)을까? 사랑이란 ‘연약한’ 우리가 견뎌내기에는 너무 강한 정념이기 때문이다(나는 밥 먹으면서 사랑하고, 이 닦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는, 그런 사랑”(혜은이)은 얼마나 무서운/두려운 사랑인가?

그건 ‘진리’나 ‘복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맨정신으로 대문자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진리’를 견딜 수 있을까?(“살아남는 일은 많은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공연히 있겠는가?) 곧, 진리는 죽음이다(이러한 명제의 톨스토이 버전은 “죽음이 곧 진리이다”이다. ‘릴케와 톨스토이’도 한 편의 글이 될 만한 주제인데, 두 사람의 공통적인 화두는 ‘죽음’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매 학기마다 강의시간에 떠들어대곤 했다). 그럼, 성도들이여, 복음은 어떤가? 만약에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은 ‘복음’을 견딜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견딜 수 있는가? 그의 ‘기적’은 어떤가? 혹은 ‘재림’은? ‘종말’은?

내가 피치 못할 이유로 몇 번 다녀본 교회에서는 예배 시작 때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던데(나는 아직도 못 외운다. 머리가 나쁘기도 하지만, 외워지질 않는다), “-믿사오며, -믿사오며, -영원히 믿사옵나이다”란 구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믿음’을 정말로 견딜 수 있는 것인지? ‘공포와 전율’을 느끼지 않으면서, 그래서 기절하지 않으면서, 그 숨막힐 듯한 ‘믿음’에 질식사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견딜 수 있는 것인지? 해서, 밥 먹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그건 ‘믿음’이 아니라 일상이거나 비즈니스일 것이다). 왜냐고?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설혹 한 천사가 있어 갑자기 나를 가슴에 껴안는다 해도,
그 강한 존재로 말미암아 나는 스러지고 말리라.


해서 이 두 구절은 많은 걸 ‘평정’하게 해준다. 내가 17년 전에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건 릴케의 이 시 구절을 읽은 덕분이다. 이미 앞에서 적지 않았던가?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눈물나게 감동적이었고 아직도 감동적이다.”

당신도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 감상(感傷)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끔은 골방에서 이 시구를 되뇌어보라. 아니면 호프집에서라도. 다소간 위로가 되고, 구제가 될는지 모른다(물론 구원은 턱도 없다. 우리는 연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천박하기도 하므로). 그리고, 하여간에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는 공연한 관심과 사랑, 진리와 복음을 구걸하지 말고, 그저 대충 울부짖는 데 만족할 일이다. 울다 보면 속이 후련해지고(당신도 알지 모르겠지만, 기뻐지기까지 한다), 내가 또 언제 울어보겠냐는 생각도 들 테니까(인생이 잠시이듯이 우는 것도 잠시이다).

“나는 이런 걸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내가 앞의 세 줄의 시 구절을 들고 날밤을 샌 것은 이젠 좀 이해해 보고자 해서이다. 17년 전에는 ‘무지’가 용납/용서될 수도 있었지만, 이젠 나이도 꽤 먹었고, 사회적 체면상 알 건 알아야 하며, 아는 체도 해야 한다. 그래서, 적어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두이노의 비가> 읽기는 그래서 계획된 것이다(나는 언젠가 이 시에 대해서 이런 막된 글이 아닌, 정갈한 주석/해석을 쓰고 싶다. 나를 눈물나게 한 것들은 이런 식으로 다 갚아줄 거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어떻게 되는가?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그러니까, 다음 번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아니, ‘무서움’부터인가?.. 

P.S. 6시간 넘게 이 글을 붙들고 있었는바, 덕분에 공친 번역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번역(주업)이 가족에 대한 나의 사랑(=에로스)에 의지하고 있다면, 이런 읽기(부업)는 죽음에 대한 동경(=타나노스)에 의존하고 있다(혹은 ‘의무감’ 때문에 미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릴케는 그러한 읽기에 가장 적합한바,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해석자이기 때문이다(반면, 릴케와 함께 20세기 독일시를 대표할 만한 고트프리트 벤의 시적 주제는 ‘시체’이다).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처음 구상한 이 글의 원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혹은 삶을 감상에서 구제하는 법”이다. 그게 너무 긴 듯하여, 뒷부분으로만 제목을 삼았다. 밀린 번역에 허덕이는 주제에 남들 번역에 참견하는 듯하여 멋쩍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의무’ 따로, ‘권리’ 따로라고 해야겠다.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해서, 몇 마디 참견하는 건 나의 권리이다(더구나 공짜로 얻은 책들도 아니고, 다 내 돈 주고 산 책들이다).

<두이노의 비가> 읽기는 언제 다시 시간을 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읽고 싶어한다는 것이고, 결국은 읽게 될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다. 끝으로, 릴케의 시들 가운데, (내가 읽은바) 한국어 번역이 가장 뛰어난 시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이 정도면 한국어로도 ‘시’이다). 제목은 <이별의 꽃>인데, 릴케에게서 ‘이별’은 거의 ‘죽음’과 동의어이다. 나는 다시 한동안 죽어지내도록 하겠다. 빠까!..

이 세상 어디선가 이별의 꽃은 피어나
우리를 향해 끝없이 꽃가루를 뿌리고
우리는 그 꽃가루를 마시며 산다.
가장 가까이 부는 바람결에서도
이별을 호흡하는 우리.

04. 07. 26/ 07. 08. 28. 

P.S. 내용을 약간 교정한 '담비' 버전은 http://www.dambee.net/news/read.php?idxno=5521&rsec=MAIN&section=MAIN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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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8-2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가끔(아주아주 가끔) 원서로 읽어요. 독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때는 그 때밖에 없답니다.

로쟈 2007-08-29 19:32   좋아요 0 | URL
잘 하셨네요.^^ 저는 칸트나 헤겔을 독어로 읽는 건 별로 부럽지 않은데, 하이데거나 릴케를 독어를 읽는 건 좀 부럽더군요...

2007-08-29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29 19:33   좋아요 0 | URL
아주 '고전적인' 번역으로 읽으신 거 같은데요.^^ '어디로 사라진' 책들은 제가 나중에 도서관을 뒤져봐야겠네요...

섬나무 2007-08-2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감동적인지 모르겠는데 감동적인 글입니다라고 남기고 싶습니다.
로쟈님의 바캉스와 안주에 질투보단 절망감을 느낍니다.

로쟈 2007-08-29 19:34   좋아요 0 | URL
제 바캉스가 그토록 절망적인가요?^^;

섬나무 2007-08-30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흉내낼 수 없는 열정과 에너지에 대한 질투이자 절망감이지요.

로쟈 2007-08-30 19:39   좋아요 0 | URL
과도한 절망이신데요.^^ 열정이야 다들 갖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껴둘 따름이겠죠...

Permanent rumor 2007-08-30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블로그로 퍼가도 될지요...
릴케의 싯구가 가슴을 울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