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책 두 권이 번역돼 나왔다는 단신을 접하고 귀가길에 서점에 들러봤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았단다. 직원의 말을 보다 정확하게 옮기자면, "새물결 책은 따로 주문하셔야 합니다." 비록 대형서점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규모는 되는 2층 건물의 서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은 아니었다(하지만 내가 자주 듣는 종류의 답변이다. 하긴 어지간한 문학잡지들도 들어오지 않으니). 멋쩍어서 책세상문고가 어디 있는지 물어서 역시나 신간인 벤담의 <파놉티콘>(책세상, 2007)이나 집어들고는 계산대로 갔다...

집에 돌아와 벤야민의 신간에 관한 리뷰가 떠 있나 싶어 한겨레의 북리뷰로 들어갔다가 어떨결에 읽은 건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과 '천태산인' 김태준의 평전들이다. '좌파 혁명운동가'란 공통점이 있을까? 동시대를 살아간 두 빨치산/지식인의 행로가 두툼하게 재현돼 있는 듯해서 반갑다(<김태준 평전>은 아직 알라딘에 입고가 되지 않은 듯하다). 두 리뷰기사를 모아놓는다.  

한겨레(07. 08. 04) 빨치산 대장 이현상 생애와 투쟁 복원

장편소설 <파업>(1989)으로 80년대 노동문학의 한 획을 그었던 작가 안재성(47)씨. 2000년대 이후 그는 식민 시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김삼룡과 이현상 등이 전개한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을 재조명한 <경성 트로이카>(2004)에서부터 시작된 작업은 지난해의 〈이관술 1902~1950〉을 거쳐 이번에 새로 낸 <이현상 평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현상 평전>은 1948년 여순사건을 계기로 결성되어 전쟁 직후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인 남부군 대장 이현상(1905~1953)의 생애와 유산을 꼼꼼하게 더듬는다. 특히 남부군의 존재를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역사의 미아’로 묘사한, 남부군 기관지 <승리의 길> 기자 출신 이우태(필명 ‘이태’)의 논픽션 <남부군> 등의 관점을 강하게 반박한다. 이현상이 북에서 보낸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는 설을 부인함은 물론이다.

전북(지금은 충남) 금산의 유복한 양반가의 막내로 태어난 이현상은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될 때까지 총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전향하거나 변절하지 않았다. 빨치산 시절 그는 나이와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존대했으며, 포로나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는 것을 엄금했고, 오락시간이면 북에서 배운 탭댄스로 흥을 돋우곤 했다.

그런 그를 대원들은 한결같이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과 호감을 표했다. 과묵하고 온후했던 그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전황이 낙동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에 빠졌던 1950년 8월에는 90여 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두 달 동안 미군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의 퇴로가 막힌 채 산에 갇히게 되고부터 마지막 순간을 맞기까지의 3년 동안이 그의 생애의 절정이자 <…평전>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는다’는 빨치산의 운명은 이 시기를 다룬 평전의 마지막 세 장에서 비극적 광휘를 한껏 내뿜는다. 이 시기의 유격 투쟁은 분명 불가피한 몰락을 향해 가는 하강 운동이었지만, 이현상의 인간적 면모는 몰락의 드라마를 배경으로 오히려 상승하는 듯 보인다.

마침내 그가 수긍하기 어려운 죄목을 뒤집어쓰고 평당원으로 강등된 뒤 의문의 죽음을 맞을 때에도 그는 끝내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책 말미에는 선배 소설가 김성동씨의 장문의 발문이 곁들여졌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겨레(07. 08. 04) "신념과 죽음 맞바꾼 지식인 제대로 평가하고 싶었다”

한국 현대시를 연구해 온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사진)가 다소 뜻밖의 책을 펴냈다. <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일지사). 국문학자이자 일제 강점기·해방공간의 대표적인 좌파 혁명 운동가의 삶을 꼼꼼히 들여다본 것이다. 사상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김태준(1905~1949)이란 이름 석자는 여전히 드러내놓고 논하기에 부담스런 존재다.

경성제대 중국어문학과 출신인 그는 25살인 학부 3학년 때, 우리 문학의 근대적인 개별양식사로는 최초 저작인 <조선소설사> 원고를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31년엔 또 다른 양식사인 <조선한문학사>를 펴냈다. 이어 <조선가요>(1934)를 출간했고, 한국사, 민속, 종교, 한국고전 관계 논문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30살 이전에 대부분의 기성 연구자들보다 많은 저서를 내면서 강렬한 주목을 받았다. 문단과 학계의 총아가 된 것이다. 이런 업적을 토대로 그는 34살 때 경성제대 문학부에서 전공 강의를 가르치는 최초의 조선인 학자가 됐다.

그의 삶은 1년 뒤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위원회(경성콤그룹)에 가담하면서 격랑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이 당시 맺은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 이현상과의 인연은 이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진다. 삶의 비극적인 종지부도 공유했다.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신념’을 지킨 것도 마찬가지다. 경성콤그룹 지하운동으로 2년 동안 옥살이를 한 뒤 1943년 세상 밖으로 나온 김태준은 노모와 아내, 어린 아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된다. 해방을 1년 남기고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탈출을 시도한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연안행’이다. 해방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의 행보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남로당 특수정보부장으로 49년 11월 수색의 군처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김 교수는 “왜 김태준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지식인으로서 그가 가진 신념이 좋든 나쁘든 (그것을) 일관되게 지키고 또 (그것을 위해) 죽음까지 무릅써야 했던 것은 평가되어야 한다.” “대학교수급 (지식인) 가운데 김태준처럼 총살형을 당한 경우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가 유일하다”고도 했다. “신념 속에 죽었다”는 아우라보다 더 절실한 이유는 그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분’이 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와 이데올로기가 같은 북한 문학사에서 김태준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 그는 그쪽에서는 틀림없이 애국자다.”

곧 <북한문학사>를 펴내는 김 교수는 문학과 정치 관련 각종 북한 사서를 들춰보았으나 단 한차례도 김태준이란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남한의 연구도 미흡하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전집이 없다. 기존 저작의 복사판 수준의 전집만 나와 있다. “김태준이 쓴 모든 자료를 엮어서 전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의 글이 굉장히 거칠다. 앞뒤 논리가 안 맞는 예도 부지기수다. 자료를 모두 모아 교정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김태준에 대해 적어 놔야겠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그에게 김태준의 공과는 뚜렷이 갈린다. 혁명가로서 김태준은 해방 이전까지는 반제투쟁의 투사였다. 그 당시 계급투쟁은 반제투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남로당 노선에는 비판적이다.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로 수많은 인명이 결과적으로 살상당했다고 본다. 남로당의 문화공작 책임자였던 김태준이 직접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지시로 지리산 문화공작대로 파견된 시인 유진오 등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그는 적었다.

학자로서의 연구 업적에도 자신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조선소설사> 등에서 나타나는 ‘성급한 계급사관’이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 이유로 다산 정약용을 소외시키거나, ‘비과학적’이라면서 단군 건국신화를 제외시킨 판단은 수긍하기 힘들다고 썼다. 하지만 △고려시대 패관문학을 소설의 갈래로 포함시킨 점 △박지원의 <양반전> <허생전> <호질>의 발굴 소개 △허균 <홍길동전>, 김만중 <구운몽>을 부각시킨 점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의 소설사 등록 등은 굵직한 업적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교수의 뇌리에 인간 김태준이 각인된 시기는, 14살이던 1946년이다. 당시 문학가 동맹 기관지 <문학>에서 김태준이 쓴 ‘연안행’을 읽었다. 반제투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 포위망을 뚫고 연안으로 탈출한 이야기가 “독서 능력이 보잘것없었던” 시절에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이 수기는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이 격화되면서 끝을 맺지 못한다.

김 교수는 김태준이 신념 때문에 연구를 계속하지 못한점을 몹시 아쉬워했다. “서울대에 남았으면 한국과 중국문학의 주인이 됐을 것이다. 업적이 괜찮다. 연안에서 귀국할 때도 서울에 가면 ‘난 이제 다른 것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총살당하기 직전에도 ‘안정되면 고려시대 문학사를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연구자·학자로 남기에는 속된 말로 피가 너무 끓었다.”

신념을 저세상에 가져간 한 지식인의 남다른 행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생각을 밝혔다. “하나님에게 운명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있다. 자기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다. 지식인은 많이 안다. 고문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신념에 따라 살기가) 더 어렵다. 그의 신념·사상에는 여러 결함이 있다. 그럼에도 그런 신념 속에 죽으니까 평가되었다.”

07. 08. 03.

P.S. <김태준 평전>의 저자인 김용직 교수에게서 오래전 '해방기 시문학사'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교재가 <해방기 한국시문학사>였는데, 지금 찾아보니 개정판마저도 절판된 상태이다. 아마도 15-6년 전인 듯싶다. <임화 문학연구>의 초판도 그맘때 나왔던 것 같고. 강단에서 주로 시를 가르친 저자의 관심이 의외로 지식인과 이념(신념)의 문제에 많이 쏠려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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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8-04 18:10   좋아요 0 | URL
강조하실 때 분홍색 대신 노랑색을 쓰니까 눈이 덜 피로하고 좋네요.

로쟈 2007-08-04 18:24   좋아요 0 | URL
주로 연한 색을 쓰는데, 분홍색을 너무 많이 썼나요?^^;

심술 2007-08-04 18:30   좋아요 0 | URL
네, 주로 분홍색을 많이 쓰셔서 그 동안 눈이 좀 아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