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에 나온 영화이론서 세 권을 소개한다. 소개라기보다는 올여름의 독서목록에 올려놓은 책들에 대한 나대로의 워밍업이다. 두 권은 읽기 시작했고 한권은 재정적인 여유가 좀 생기는 대로 읽어볼 참이다. 세 권 모두 80년대 중반 이후 영화이론의 비교적 최근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 않나 싶다. '딱딱한' 이론서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돌고래들의 서핑을 감상해본다(이들은 전생에 나보다 훨씬 많은 공덕을 쌓았음에 틀림없다!)...    

 

현대영화이론에 대한 입문격의 소개(http://blog.aladin.co.kr/mramor/429967)는 오래전에 페이퍼로 올려둔 바 있다. 그런 영화이론의 끄트머리 '포스트-이론'을 대표하는 흐름을 '인지주의'라고 하는데, 데이비드 보드웰은 그 대표격인 영화학자이다(홍상수와의 대담은 http://blog.aladin.co.kr/mramor/1102718 참조). 그가 노엘 캐롤과 함께 편집한 책 <포스트-이론>(1996)은 영화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 주축을 이루었던 '이론'의 종언과 인지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하는 책이다(그래서 영화연구 자체를 재구축하고자 한다). 해서 이 인지주의자들은 '포스트-이론가'라고도 불린다.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키에슬롭스키'란 부제를 달고 있는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영어판 2001)는 키에슬롭스키론이면서 동시에 이 포스트-이론가들에 대한 논박을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그 서론에서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포스트-이론>의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을 통일하고 있는 원리는, 여기에 실린 모든 연구들이 영화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적 틀에 의존하지 않는 영화연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론' 자체가 거의 소개돼 있지 않은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 크리스티앙 메츠의 책이 한권도 소개돼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까). 

 

 

 

 

 

 

 

포스트-이론에서 기호학/정신분석학의 배제는 영화학에서 크리스티앙 메츠, 혹은 더 확장해서 프랑스산 영화이론에 대한 배제를 함축한다. 절반 정도만 국역돼 나온 <영화의 내레이션>(시각과언어, 2007; 영어본 1985)에서도 이미 이러한 '포스트-이론'적 시각은 확인된다. <진짜 눈물의 공포>을 우리말로도 옮긴 역자는 이렇게 정리해준다.

"영화의 내레이션 과정에 대한 보드웰의 작업은 7,80년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대이론의 난점을 공략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시선 위에서 영화이론을 새롭게 기획하고 재구성하려는 지적 노력의 소산이다."(417쪽)

반면에 "거대이론은, 영화로 한정시켜 말하자면, 영화와 사회, 인간 주체의 관계를 더욱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수준에서 사고했던 이론적 움직임으로서, 구조주의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를 모체로 하면서, 영화의 이미작용에 내재하는 의미와 질서, 그리고 그것에 연계되어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이론화한 바 있다."

하지만 "관객의 경험이 낳은 개별적인 의미를 희생시킨 채 관객 주체를 집합적 단수로 보고 규정적으로 파악한다든디, 주체의 존재를 단지 구조의 효과 정도로만 이해한다든지, 개별 텍스트들이 지닌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고 영화의 의미작용 과정을 통일되게 설명해내려는 지나친 전일화(totalization)에의 열망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거대이론이 안고 있던 피할 수 없는 난제들이었다."(418쪽)

"이에 대해 보드웰은 1950년대부터 영미를 중심으로 발달한 인지주의와 신형식주의를 자신의 이론의 모태로 삼으면서, 거대이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이론화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문제의식이 얽혀 있다고 하겠는데, 그 첫번째는 실제 관람자가가 아닌 이상적 관객을 다루고 있는 정신분석적 영화이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다.(...) 두번째는, 영화의 의미화 과정에 주목했던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영화 텍스트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구조주의 영화이론이 너무 결정론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다양한 텍스트들을 동질화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비판의 출판점이다."(418-9쪽)  

흥미로운 것은 보드웰이 영미의 인지주의와 함께 192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들을 자신의 이론적 모태로 삼는다는 점인데(그래서 그는 '신형식주의자'로도 불린다), 내러티브를 다루면서 자신이 왜 러시아 이론가들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책의 주제를 생각한다면 1920년대의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즉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와, 유리 티냐노프, 보리스 아이헨바움 같은 이들의 작업에 의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예외로 치더라도 위의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 이론가들이다."(12쪽)

곁가지로 지적하자면, '아이헨바움(Boris Eichenbaum)'은 '에이헨바움'이라고 읽어야 한다. 형식주의자들의 용어인 'syuzhet'도 '수제'가 아니라 '슈제트(슈젯)'라고 읽어야 한다(불어식으로 '수제' 혹은 '슈제'라고 읽는 건 '상상력'의 소산이다). 서사학 관련서들에서 자주 범하는 실수들이다. 러시아어 고유명사 표기의 오류들은 대부분들의 번억서들에서 '관행화' 돼버렸는데, 이 번역서도 예외는 아니다(가령 영화제목에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종말>과 <전함 포촘킨>이란 표기가 나란히 등장하는 건 넌센스이다. 아무런 표기의 원칙도 없다는 뜻이기에). 정도가 심한 건 아니지만 가령 199쪽에서 러시아 비평가 '세르게이 발루카티(Sergei Balukhatyi)'는 '세르게이 발루하트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런 음역표기가 난해한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역자나 출판사들이 무신경한 탓이다.

이 형식주의자들의 영화론을 담은 가장 중요한 선집은 <포에티카 키노>, 곧 <영화시학>(1927)이다(이미지는 독역본이다. 대역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말로는 <영화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1995)라고 부분 번역돼 있는 책(<러시아 형식주의 영화이론>이라고 영역돼 있다).

보드웰이 인용하고 있는 에이헨바움의 지적: "견고한 입장의 전통적인 사고를 위반하는 원리를 형식주의자들이 옹호한다는 생각은 문학연구만이 아니라 예술 일반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명했다'. 형식주의자들은 자신의 원리들을 매우 엄격하게 고집하면서, 문학이론의 특수한 문제들과 미학의 일반적인 문제들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놓았다. 그들의 사고와 원리는 상당한 구체성을 띠며 일반적인 미학이론을 지향한다."(12쪽)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는 ''형식적 방법'의 이론'이란 에이헨바움의 글로부터의 인용인데(국역본은 <러시아 형식주의>(이화여대출판부)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이대출판부본은 불어본에서 중역한 것이다). 첫문장은 오역이다. 보드웰의 책에서 원문을 옮기면 "The Formalist advocated principles which violated solidly entrenched traditional notions, notions which had appeared to be 'axiomatic' not only in the study of literature but in the study of art generally." 

여기서 '자명하게' 보인 것은 '형식주의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전통적인 사고'이다. 다시 옮기면,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연구뿐만 아니라 예술연구 일반에서 자명한 것처럼 보였던, 견고한 전통적인 관념들을 위반하는 윈리들을 옹호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문예학과 미학 사이의 거리를 좁혀놓았다는 것. 이러한 형식주의의 작업을 보드웰은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의 프로젝트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내레이션 연구에 한정돼 있긴 하지만 왜 그런가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확인해볼 수 있겠다.  

이어서 두번째 책은 '영화이해의 인지과학적 전환을 위하여'란 부제를 달고 있는 <영화인지기호학>(커뮤니케이션, 2007; 영어본 2000)이다. 저자인 워런 벅랜드는 이미 <영화연구>(현대미학사, 2002)란 책으로 소개된 바 있는, 영화인지기호학 분야의 선두주자이다. 잠시 소개를 옮겨보면, "영화인지기호학'이란 한마디로 영화를 인지학 혹은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기호학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영화인지기호학의 연구 현황을 살피고, 미국의 인지적 영화이론의 취약점을 조명함으로써, 영화연구에서 후기이론(Post-Theory)의 등장을 예고한다."

'영화연구에서 후기이론의 등장을 예고한다'는 마지막 멘트는 얼핏 이해되지 않는데, 이미 살펴본 대로 '포스트-이론'은 벅랜드보다 앞서서 보드웰 등이 주창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드웰이 소위 대문자 이론을 비판하면서 192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로 되돌아가는 '포스트-이론'적 자세를 취했다면, 벅랜드의 기본 입장은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절충, 혹은 종합이다(더 멋있게 말하자면 '변증법적 지양'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오늘날 '언어분석전통'과 '주체철학' 사이의 갈등은 언어학과 인지과학의 갈등으로 이해된다. 이 갈등은 1980년대 이래 영화이론에서 인지영화이론가들(예를 들면 보드웰)과 언어학과 기호학에 토대를 둔 현대영화 이론가들(예를 들면 메츠)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가 보기에 보다 생산적인 것은 그러한 '대립'이 아니라 종합이다. "이 책은 '인지영화이론'과 '현대영화이론' 간에 전면적인 대립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인지과학의 통찰과 언어학, 그리고 기호학을 통합하는 현대영화이론의 영역을 자세히 다룬다." 이 통합적인 현대영화이론의 이름이 '영화인지기호학'이다(말 그대로 '기호학'과 '인지과학'을 통합한 것이다). 이 정도면 구도는 대충 나온 셈인데, 앞서 다룬 보드웰의 <영화의 내레이션>을 다룬 대목을 호기심 삼아 읽어본다.

"보드웰이 메츠의 '거대 통합체'와 같은 초기의 기호학 작업을 <픽션적 영화에서의 서술>에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지주의자들은 형대영화이론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보드웰은 같은 책 2장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서 이것을 강조한다."(5쪽)

<픽션적 영화에서의 서술>이 바로 <영화의 내레이션>의 원제이다. 한데 이 대목의 번역은 좀 부정확하다. 원문은 "The cognitivists find very little of value or interest in modern film theory, although in Narration in the Fiction Film Bordwell acknowledges the value of some early semiotic work, such as Christian Metz's grande syntagmatique. Yet Bordwell undermines this acknowledgement in Chater 2 of the same book when he asks the following questions."(4-5쪽)  

번역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강조하다'라고 옮겨진 'undermine'은 '침식하다'란 뜻이다(그러니까 자기말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다시 옮기면, "인지주의자들은 현대영화이론에서 아무런 가치도, 흥미도 발견하지 못했다. 비록 <영화의 내레이션>에서 보드웰은 메츠의 '거대통합체' 같은 기호학적 초기 작업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보드웰도 바로 같은 책의 2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자신의 인정을 무효화한다." 

보충하자면, 보드웰의 인정은 이런 것이다: "내러티브의 구조적 양상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더 풍성한 편이었다. 특히 그러한 연구는 프랑스 구조주의의 시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크리스티앙 메츠의 거대통합체는 이 부분에서 가장 뚜럿한 성취라 하겠다."(<영화의 내레이션>, 14쪽) 그리고 이러한 '인정'을 다시 집어삼키는 질문들이란 "왜 언어학 개념들의 사용이 영화의 나레이션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이다.

역시나 벅랙드의 번역본도 이런저런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가령 'paradigmatic'을 '화용론적'(서문 4쪽)이라고 옮기거나 'poetics' 같은 말을 '시학'이 아닌 '시론'(6쪽)이라고 옮기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다. 고유명사 표기에 있어서도 '에이젠슈테인'을 '아이젠슈타인'으로 옮기거나(<영화의 내레이션>에서는 '에이젠쉬테인'이라고 옮겼다) 폴란드의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Malinowski)'를 '멜리노브스키'로, 독일의 영화이론가 크라카우어(Kracauer)를 '크라카우'로, '알튀세르(Althusser)'는 '알튜세'로 '주네트(Genette)'는 '제네트'로 옮기는 것 등등은 역자의 무관심을 넘어 식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영화잡지 <스크린(Screen)>은 왜 <씬>이라고 옮기는 것일까?). 값싼 책도 아니건만... 

끝으로 아직 손에 들지 않은 그레고리 커리의 <이미지와 마음>(한울, 2007; 영어본 1995). 부제는 '영화, 철학, 그리고 인지과학'이고 저자는 영화이론가가 아니라 철학자이다(과학철학쪽의 경력을 쌓고서 예술철학쪽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있는 듯하다). 벅랜드의 책보다 먼저 출간되었기에 순서상 먼저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루어진 ‘인지주의 혁명’은 모든 매체에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창조, 해석, 감상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이런 새로운 탐구 영역을 영화예술에 적용하여 어떤 식으로 문제 해결이 기술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텍스트"라고 하니까.

영화적 재현과 내러티브의 문제를 다루면서, "소설과 영화의 해석에 대해 명료하고 정확하게 그 윤곽과 주요 논점을 제기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문학과 영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게 덧붙은 소개말이다. 나로선 빠져나가기가 어렵다...

07.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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