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 관련서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영화 연구로서의 영화학이 학제화되면서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지식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제도가 지식을 생산한다!). 그것은 이미 문학연구의 경우에도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이론의 많은 부분이 문학이론의 그것과 겹쳐지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영화사보다는 영화이론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학 서적을 드문드문 사두었지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로선 이 분야의 책들을 개관할 만한 형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도 간간이 출간되는 이 분야의 책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은 분명하기에 대충이라도 정리해둘 필요는 있어 보인다.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현암사)이다.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온 정평있는 '교과서'로서 영화학 관련서로서는 아마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지 않나 싶다. 그런 후에 루돌프 아른하임(<예술로서의 영화>)나 앙드레 바쟁 정도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분야의 초심자로선 충분하다. 그런 초심자에게 적합한 책은 더들리 앤드류의 <현대영화이론The Major Film Theories>(한길사, 1988)이다. 76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영어권에서도 이론사를 정리하고 있는 거의 최초의 책이다. 우리말 번역도 전문 학술어들의 오역을 빼고는(가령 paradigm을 '어형변화'로 옮기는 식) 그런대로 읽을 만하다. 아쉬운 건 절판된 책이라는 점.
이어서 읽을 책은 <현대영화이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영화이론의 개념들>(시각과언어, 1996)이다. 저자는 역시 더들리 앤드류. 그의 책들은 특별히 재미가 있다거나 영감을 준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간의 이론들을 요약해서 잘 정리해준다. 이를테면, 에너지(힘)나 감각을 길러주는 책이 아니라 정보를 전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읽을 만한 책은 얼마전에 나온 신간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시각과언어, 2003)이다. <영화기호학사전New Vocaburaries of Film Semiotics>이라고 예고돼 있던 책이 그렇듯 멋쩍은 제목으로 나온 것도 좀 불만스럽고, 번역도 유치한 대목이 많지만, 책 내용 자체는 유용하다.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리얼리즘(반영의 문제)를 큰 가닥으로 하여 현대 영화이론의 쟁점들을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로버트 스탬 외 2인인데, 스탬이란 이름은 기억해 둘 만하다. 브라질 영화 전문가인 스탬은 두툼한 영화이론입문서의 편집자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영화기호학 파트와 리얼리즘과 상호텍스트성 파트를 서술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신뢰할 만한 이론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의 계기를 만들어준 책은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한나래, 1998)이다. 이런 책은 정보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책에 속하는데, 번역도 좋은 편이다(역자 오세필의 다른 번역인 구로자와의 <감독의 길>도 추천할 만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의 책들이 영화이론과 관련하여 큰 줄기를 이룰 수 있는 책들이다. 거기에 풍족함을 더하기 위해서 로도윅의 <현대영화이론의 궤적The Crisis of Political Modernism>(한나래, 1999)을 읽을 만하다. 손꼽히는 영화이론가의 한 사람인 로도윅은 아직 미번역된 <들뢰즈의 타임머신>의 저자이기도 하다(*2005년에 출간됐다). 번역이 유려하지는 않다.
그리고 들뢰즈. 그의 2권짜리 <시네마> 중에서 제1권 운동-이미지만이 중복 번역돼 있다. 최근 것은 <시네마1>(시각과언어, 2002). 조만간 2권이 마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2005년에 출간됐다). 그리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가장 우수한 비평집인 <뇌는 스크린이다>(이소출판사, 2003). 그레고리 플랙스먼의 편집이고, 10여명이 필자들이 들뢰즈 영화론의 구석구석을 검토하고 있다. 들뢰즈나 영화이론에 관심있는 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다. 역자는 헤겔, 하버마스 전공에서 들뢰즈 영화론 전공으로 방향을 튼 박성수 교수. 아직은 더 나은 역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쉬운 것은 현대영화이론의 문턱에 해당하는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1931-1993)의 저작들이 아직 번역되고 있지 않은 점. 메츠를 기점으로 영화이론은 고전적 시기와 현대이론으로 분할될 수 있을 만큼 그는 중요한 이론가이다. 일반언어학으로 국가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영화'언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당연해 보이는데, 후기에 그는 정신분헉학과 영화쪽으로 관심을 확장한다. 주저인 <영화의 언어>와 <상상적 기표 - 정신분석학과 영화> 정도는 조만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메츠의 구조주의적 영화분석에 대해서 간단하게 참고할 수 있는 책으로는 존 레흐트의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 1996)이 있다. 아주 유용한 현대사상가 사전 혹은 현대사상 매뉴얼인 이 책은 최근에 <한권으로 보는 현대사상 50인>(2003)으로 다시 나왔다. 편제는 약간 바뀌었지만 내용은 그대로인데, 물론 오역이나 오탈자 등도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용하지만.
예컨대, 메츠의 거대 통합체에 관한 해설에서 레흐트는 흔히 shot로 번역되는 불어의 쁠랑plan을 그냥 plan으로 옮겼는데 우리말 역자는 그걸 '계획'으로 옮겼다. 그래서 '자율적인 쇼트'가 '자율적인 계획'으로 탈바꿈했다('계획'이란 영화용어가 어디 있는가?). 그런 거 말고도 책에는 이런저럭 오역이나 부적절한 번역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면, 책은 손때가 묻을 정도를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 세번쯤 읽으면 현대사상의 로드맵이 그려질 것이다...
덧붙임: 지난주에 벨라 발라즈의 <영화의 이론>(동문선)이 번역돼 나왔다('발라슈'라고 읽는 게 맞다고 한다). 40년대 저작이니까 아주 태고적 저작이지만, 나름대로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론서이다. 벨라 발라즈에 대해서는 역시나 더들리 앤드류의 <현대영화이론>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03. 6. 11./ 06. 08. 18.
P.S. 몇 개의 이미지를 추가했지만, 지난 몇 년 사이 더 출간된 책들이 또 꽤 많다. 이 목록도 언젠가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