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의 서재 개편이 며칠 미뤄지는 바람에 '말년휴가'도 머쓱하게 돼버렸다. 지난달말부터 한 주 가량 나는 서재를 접었다가 대략 오늘(6월 6일) '서재2.0'과 함께 컴백할 계획이었는데, 복귀 일정이 2-3일 당겨졌고('주간서재의 달인'이 폐지된 것도 복귀의 빌미가 돼 주었다), 새 서재의 오픈은 최소 2-3일은 늦춰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1.0 알라디너'이다. 그리고 그 알라디너 로쟈의 '고통'도 여전하다. 

종종 서재를 집어치울까 고민하게 만드는 나의 고통은 책을 읽을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너무 부족한 데서 비롯한다. '정상적인' 생활, 곧 본업과 관련한 일들도 잔뜩 쌓여 있건만(이것도 고통이다!) 그 한편에서 '로쟈의 일'도 자꾸만 늘어간다(이건 악순환의 되먹임이어서 더 열심히 할수록 일은 더 많아진다!). 적어도 하루에 2-3가지 아이템을 놓고 나는 포기하거나 연기할 명분을 찾아야 한다(그럴 때 나는 펌글들로 입막음한다). 다 쓸 수 없으니까. '6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 계속 미뤄지고 있고, 어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에이젠슈테인'란 타이틀을 포기했다(다음주에도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흐지부지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알로이스 리글'에 대한 글을 포기하려다가 조금 비틀어서(그러니까 약간 타협해서) 여기에 몇 자 적어두기로 했다(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지탱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나도 이젠 적잖은 나이를 먹었기에).    

계기는 어쩌다 들뢰즈의 <대담>(솔, 1993)에서 한두 페이지를 읽은 것(이 책에서도 통제사회에 대한 푸코와 네그리의 대담을 정리해두는 것 역시 오래전에 포기된/연기된 아이템 중 하나이다). 최근 영화이론서를 읽고 있는지라(읽어야만 하는지라) 겸사겸사 '낙관, 비관, 그리고 여행'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세르쥬 다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잠깐 읽어보려고 펼쳐들었다가 일이 또 번진 것인데,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번 당신의 책 <비탈>(1983)은 <수첩(Cahiers)>지에 기고한 글들을 엮은 것이었지요. 그 글들이 진정한하나의 책을 이룬 것은 당신이 그것들을 <수첩>지가 거쳐온 여러 시대들의 분석에 따라, 그리고 특히 영상 이미지의 여러 가지 기능 분석에 따라 분류해놓았기 때문입니다."(80쪽)

'수첩'지는 물론 저명한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말한다. '까이에 뒤 시네마' '카예 뒤 시네마' 등 다양하게 표기되고 있지만, 이 고유명사를 '수첩'지라고 옮기는 건 드문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대담>은 내 기억에 들뢰즈의 저작으론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92)에 이어서 두번째로 국내에 소개된 책이다. 이때만 해도 들뢰즈는 한국에서 '전설'이었고 '미래의 철학자'였다. 나는 <대담>을 아마도 서점에서 보자마자 집어들었고 한동안 물신적인 애착까지 느꼈던 듯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몇 편의 대담이나 읽었을지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여하튼 당시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에 나는 친구에게 앞으로 '들뢰즈의 책들이 나오게 될 거야'라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장담은 십수 년이 지난 현재 거의 실현된 듯하다(곁들여 독일 철학자로선 니콜라스 루만의 책들이 소개되어야 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그다지 현실화되지 않았다). 말년의 <시네마>까지 완역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모든 끝난 것은 아니며 이제 제대로 된 '교정'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즉,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가 <카프카>(동문선, 2001)로 재번역된 것처럼 시효성을 다한 <대담> 또한 재번역될 필요가 있다. 

언젠가 지적한 한 것 같기도 한데, 책은 적잖은 오역/오류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대로 이후에 축적된 국내의 들뢰즈 이해/연구의 성과들은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국역본은 완역이 아니다. 전체 18편의 대담 꼭지들 가운데 12편이 번역돼 있으니까 2/3 번역이다. 영역본을 기준으로 본문 200쪽이 안되는 책이므로 새로운 번역작업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성싶지도 않다(물론 번역은 들뢰즈에 대한 충분한 사전이해를 필요로 하겠지만). 새 번역이 나와서 <디알로그>(동문선, 2005)와 함께 들뢰즈의 육성을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었으면 한다(나는 영역본과 함께 지난 2004년에 나온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다).

Переговоры. 1972 - 1990

다시 다네로 돌아오면 들뢰즈는 여기서 <카이에>의 편집장까지 지낸 이 걸출한 영화평론가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의 작업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여담을 붙이자면, 나는 '세르주 다네(1944-1992)'란 이름을, 그리고 그가 앙드레 바쟁 이후 프랑스 최고의 영화평론가란 사실을 오래전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통해서 접했다. 작년 가을만 해도 그는 '정성일의 가을영화 산책'이란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는) 산책의 대가들의 명단. 보들레르의 산책. 지가 베르토프의 산책. 모네의 산책. 알베르틴의 산책. 다이스케의 산책. 벤야민의 산책. 로셀리니의 산책. 도미오카와 유키코의 산책. 솔레르의 산책. 차이밍량의 산책. 홍상수의 산책. (고작해야) 그들을 흉내내고 있는 나의 산책. 더 솔직히 말하면 영화에 대한 메모만으로 가득 찬 산책-글쓰기는 내 오랜 꿈이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세르주 다네의 (신문 <리베라시옹>에 1981년 7월18일 프리츠 랑으로 시작해서 1986년 1월24일 펠리니의 <진저와 프레드>로 연재를 마친) ‘영화-일지’(Cine-Journal)를 읽으면서 배웠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아무리 해봐야 다네만큼 높이 상공 비행한 다음 내려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다네가 보여준 더 많이 보려는 욕망. 그는 어떤 영화는 슬로모션처럼 보아야 하며, 어떤 영화는 디졸브하듯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영화를 보는 내가 영화-되기.

지금 모두들 영화비평의 위기를 말한다. 지금 다시 떠올려볼 만한 다네의 유명한 제안, 영화에 관한 평이란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대중은 평 없이도 영화를 보고, 극장은 글 없이도 가득 채울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이란 잉여이다. 그런데 그게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그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관한 평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경험의 연장이며, 보충이며, 대리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평은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겹쳐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를 본 다음 정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핵심은 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만으로 버티는 것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의 중재. 그냥 영화를 본 다음 인상적으로 떠오른 생각들. 수첩을 가득 채운 두서없는 메모. 이 글은 그렇게 쓰여졌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기에 따로 후렴이 필요하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용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르주 다네의 <영화-일지>(1986) 서문이 바로 들뢰즈의 이 글 '세르쥬 다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들 역시 들뢰즈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이 세심하게 따라가며 읽어야 한다. 가령 이 페이퍼의 빌미가 된 미술학자 알로이스 리글(1858-1905)에 대한 언급.

"조형 예술의 저명한 선구자인 리글(Riegl)은 예술의 목적을 자연 미화, 자연 정신화, 자연 필적이라는 세 가지로 나눠놓았지요('미화', '정신화', '필적'이라는 말들은 그에게 있어서 단호한 역사적-논리적 의미를 가지는 것들입니다)."

내가 흥미를 느낀 건 이 한 문장이다(이럴 때 '공부'는 이런 문장에 주석을 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전제된 리글의 미술사관이다(나는 그 주석을 달아보기 위해서 한 시간 정도 웹서핑을 했다). 찾아보니 리글의 책은 국내에 번역/소개된 것이 없다(해서 몇몇 주저들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개인적으론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에서 그의 <양식의 문제>(1893)의 골자 정도를 읽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주저와 관련 논문들 두어 개를 읽어보기 위해 찜해놓았다. 그러면서 내가 스스로에게 내민 타협안이 리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는 것. 

그리고서 책을 덮으려고 하는데 눈에 띈 에이젠슈테인. 아니 국역본대로 하면 '아인슈타인': "당신은 최근 책에서 이 대백과사전의 상징물로서 아인슈타인의 서재, 아인슈타인 박사의 서가를 제안하고 있지요. 한데 당신은 영화가 저절로 죽은 것이 아니라 전쟁이 암살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사실 모스크바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서가는 죽은 곳, 박탈된 곳, 용도 변경된 곳이 되어버렸지요). 시베르버그는 발터 벤야민의 몇몇 생각을 아주 멀리까지 밀고 나가 히틀러를 영화인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말한 바도 있지요..."(81쪽)

'모스크바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서가'라는 말까지 읽게 되면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참고로 영역본을 옮겨놓으면 "In your new book you offer Eisenstein's library, the Cabinet of Doctor Eisenstein, as asymbol of this great encyclopedia. Now, you've pointed out that this form of cinema didn't die a natural death but was killed in the war (Eisenstein's office in Moscow, indeed, became a dead, dispossessed, derelict place). Syberberg extensively developed some remarks of Walter Benjamin's about seeing Hitler as a filmmaker..."(69쪽)

Метод. Том 1. Grundproblem

'한데'('Now')를 기점으로 문단이 나뉘는데, 인용문 이전에 들뢰즈는 영화사의 첫번째 시대가 '몽타주 기법'에 의해 정의될 수 있으며 그것이 지향했던 바는 '세계의 백과사전'이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는 이 인용문의 첫 문장에서, 다네가 그 '대백과사전'의 상징으로 '에이젠슈테인의 서재'를 들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 그 서가를 'the Cabinet of Doctor Eisenstein'이라고 부연하는 것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The Cabinet of Dr. Caligari)>(1919)에 대한 인유인데 그걸 살려주자면 '아인슈타인 박사의 서가'가 아니라 '에이젠슈테인 박사의 밀실'이라고 옮겨야 한다(아마도 '박사'란 말 때문에 역자는 '에이젠슈테인'이 아닌 '아인슈타인'을 먼저 떠올렸을 법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금 영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서재/밀실의 주인은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그의 죽음도 또한 페이퍼 거리지만 참아두기로 한다).

한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시베르버그(Syberberg)'는 '지버베르크'라고 읽는 게 맞다(러시아어로는 '시베르베르그'라고 옮기지만). <히틀러>(1978)를 만든 독일의 영화감독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1935-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에. 그에 대해서는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시울, 2005)을 참조할 수 있다('지버베르크의 히틀러'가 책의 한 장이다)...

07. 06. 06.

P.S. 세 시간 정도를 투자해서 페이퍼를 완성한 다음에 드는 생각. 이런 페이퍼라는 게 책을 읽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 다네의 제안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책에 관한 자질구레한 이런 페이퍼는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대중은 이런 참견 없이도 책을 (안)읽고 삶은 '마시지'를 통해서 오히려 건강하고 윤택해진다. 해서, 리뷰니 페이퍼니 하는 건 모두 잉여이다. 그런데 그게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그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은 다음에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보통 두세 가지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책을 안 읽을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가 이보다 더 좋은 책을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젠장, 언제까지나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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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3-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시간을 투자한 페이퍼를 30분은 들여다봐야할 것 같은 강박감을 느낍니다.^^
하여간 전 이런 류의 페이퍼가 좋습니다. 책에 대한 정보는 기본, 로쟈님의 사변이 주제들인...^^ 어떻게 이런 페이퍼들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비밀 하나 알려드리자면 저의 즐거움 중 하나는 로쟈님의 페이퍼들을 뒤지는 일입니다.-기억력이 제로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취미 입니다. 수고로운-밥벌이도 안 되는데-로쟈님을 생각하면 걍 페이퍼들 접으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러기엔 내가 느끼는 공허감이 좀 클 것 같아서요...^^ 가까이 계시면 커피 대신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사 드릴텐데... 전 홀짝이는 커피값이 젤 아까운 사람이거든요ㅎㅎ 하여간 감사하는 인간 있다는 거 잊지 마시구요 귀찮을 땐 가끔 접으시고 그리고 또 힘도 내시고 그러시길...

로쟈 2008-03-18 13:21   좋아요 0 | URL
ㅎㅎ 덕분에 저도 옛날 얘기를 잠깐 읽어봤습니다.^^

섬나무 2008-03-19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석에 박힌 댓글도 눈에 띄나보군요.^^

청공 2020-06-0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시간 공들여 쓰신 글이라는 걸 의식하지 못한채 매번 당연한 듯, 제가 읽어내려가고 있는건 아닌지...물론 언젠가는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길 바라고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