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으로 우산을 챙겨서 나왔는데 햇빛이 드는 걸 보니 비가 오긴 글른 것 같다. 마치 읽지 못할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 같다. 시간 나면 읽어볼 심사로 아침에 챙겨넣지만 그대로 귀가하는 책. 이제 그런 책이 만권이 훌쩍 넘어간다면? 내가 구입하거나 손에 들어본 책은 수만 권이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 들고 다니는 우산 같은 책들이다. 갑작스런 소나기라도 온다면 보란듯이 펼쳐들겠지만 십중팔구 인연이 닿지 않을 책들.

체력과 의욕이 떨어지면서 책들과도 작별할 궁리를 한다.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이 책들과 동거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다. 분산보관도 근본대책은 아니다. 읽은 책들에 대해서 글을 쓰거나 책을 내는 것이 좋은 방도이지만 노아의 방주 같아서 극히 일부만 구제할 수 있을 따름이다(신의 대홍수는 얼마나 무자비했던가!). 가끔 들를 수 있는 도서관 정도를 어딘가에 세우거나, 더 현실적으로는 기증하는 게 차선이다. 책들과 작별하면 몸이 좀 가벼워지려나. 어차피 모든 인연과의 작별은 필연인 것이니.

러시아나 중국에서는 기술적으로 인공강우를 내리게도 한다는데 우리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강의가 일상이다 보니 나는 읽으려는 책을 강의 커리로 삼는 일이 많다. 강제독서다. 때로는 자기혹사로 여겨질 때도 있다. 읽은 책과 읽어야 하는 책의 안배가 무너지면 일주일에 다섯 권을 새로 읽어야 할 때도 있어서다. 그런 고비들을 넘겨야 일년에 한두번 정도 휴가를 갖게 된다(문학기행을 제외하고). 이런 만감을 적는 것도 휴가 분위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만감이라 적으니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이 떠오른다. 첫 작품집을 유작이라 생각하고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치기이지만 놀랍게도 다자이는 그런 치기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조금 바뀌게 될까. 일본의 아베에게 추천해줄 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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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9-07-30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쌤, 책 정리는 70세부터요...
아무 것도 안하는 휴가가 끝나면 공간이 떠억 생기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 일을 시작하면서 주로 혼자 있으니까 책 서핑하고 많이 샀지요...
언젠가 자의든 타의든 일 그만두면 구입량이 줄어들거라고 믿습니다^^*
그땐 책들을 집어야겠죠. 눈이 피로하면 자연주의 요리책, 흐린 날엔 얇은 소설,
심심하면 추리물, 화가 날 땐 과학과 철학서를~~

허걱, 제가 다자이 오사무를 하나도 안읽었네요!^^

로쟈 2019-07-31 17:46   좋아요 1 | URL
저는 이미 포화상태라 그렇게 미루기가 어렵네요. 책정리가 인생정리 같아요..

2019-07-30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31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1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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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2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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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2 0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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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2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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