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일정은 온전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무대인 베츨라 방문에 할애되었다. 베츨라는 프랑크푸르트로부터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독일 기준으로는 작지만은 않은 도시다) 현재 인구는 5만 6천명 가량이라고 한다. 도시로서는 작지만 마을로서는 크다고 할까. 괴테 시대에는 제국법원이 위치하고 있었고(지금도 건물이 보존돼 있다) 괴테는 1772년 5월에 법률가로서의 실습(일종의 인턴)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당시에는 인구가 5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괴테와 로테(샤를로테 부프)와의 만남은 작품속에 잘 묘사돼 있다. 지인인 케스트너(소설에서는 알베르트)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낙심하면서 물러나게 되는데 괴테에게 어차피 가망성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같은 해 9월 10일에 괴테는 케스트너와 로테에게 각각 한 통씩의 편지를 남기고 베츨라를 떠난다. 이별의 편지를 읽으며 로테는 울었다고 전해지는데 케스트너와의 결혼 이후에 자식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는 뒷이야기를 알고 보면 오히려 다행한 결말이었다고도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실연의 경험에서 <베르테르>가 탄생한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는 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베츨라를 떠난 괴테는 프랑크푸르트로 바로 귀향하지 않고 지인을 만나러 라인 강변의 코블렌츠에 들르는데 거기서 여성작가 소피 폰 라 로쉬의 딸 막시밀리아네를 만나 또 다른 사랑에 빠진다. 괴테 자신이 <시와 진실>에서 로테의 모델이 여러 여성이라고 토로한 바 있는데, 최소한 샤를로테 부프와 함께 막심밀리아네 폰 라 로쉬는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작품 속 로테의 검은 눈동자는 막시밀리아네의 눈동자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가 하면 베르테르의 모델 역시 괴테 자신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시 <시와 진실>에서 고백한 바에 따르면 베츨라의 동료였던 예루살렘의 자살이 결정적이었다(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으로 유명한 베르테르의 옷차림은 예루살렘이 즐겨 입었던 차림이다). 상관의 아내를 연모했던 예루살렘은 1772년 10월 30일 케스트너에게 빌린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괴테의 부탁으로 케스트너는 매우 상세한 보고서를 괴테에게 건네준다. 11월에 괴테는 베츨라를 다시 찾아 이 사건의 현장답사까지 했다. 그렇지만 괴테가 소설을 집필하는 것은 1774년 2월부터 3월까지의 4주간이었다. 집필 착수가 늦어진 건은 막시밀리아네와 관계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녀가 유복한 상인 브렌타노와 결혼한 뒤 신혼생활을 하던 프랑크푸르트를 완전히 떠난 뒤에야 괴테는 <베르테르>를 쓰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베르테르>에서 주인공 베르테르와 로테의 모델은 적어도 두 명씩을 지목할 수 있다. 베츨라에서 ‘베르테르 투어‘로 방문하게 되는 곳이 로테하우스와 예루살렘하우스인 것은 그런 면에서 타당하지만 사실 뭔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로테가 로테의 모델이고 예루살렘이 베르테르의 모델이지만 정작 로테와 예루살렘, 두 사람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은가! 로테가 이별을 아쉬워 한 남자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루살렘이 상심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 여자는 로테가 아니다. 그런 로테와 예루살렘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작품이 <베르테르>이고 그 주선자가 괴테다.

괴테와 예루살렘은 라이프치히대학의 동문이었지만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심지어 예루살렘은 괴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물평을 남겨놓고 있다. 베르테르에게 괴테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다면, 베르테르-괴테와 베르테르-예루살렘은 과연 매끈하게 통합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고 가믄 듯하지만 같지 않은 둘 사이에는 어떤 거리감이 있다. 그것이 괴테와 베르테르 사이의 거리다. 그렇기에 베르테르는 자살하지만 괴테는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고는 하나 자살하지 않는다. <베르테르>에서 독자의 전범은 베르테르인가, 괴테인가?

작품은 더 많은 분석과 해명거리를 갖고 있지만 짧은 방문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하여간에 로테하우스를 방문했고(1774년 판본의 <베르테르>를 기념으로 구입했다) 예루살렘하우스도 찾아가(오후 2-5시가 개방시간이어서 점심을 먹고 자유시간을 가진 후에 방문했다)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도 서 보았다. 베르테르(예루살렘)의 책상에는 군총과 함께 레싱의 희곡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 놓여져 있었다. 베츨라에서 보고자 했던 것들이다.

베츨라는 아직 중국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미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주말이어서 광장에는 맥주와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북적거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전시간에 로테하우스를 찾은 관람객은 우리 일행뿐이었고 오후에 예루살렘하우스를 찾았을 때는 우리의 뒤를 이어서 독일 관람객이 한 팀 대기하고 있었다. 헤세의 고향 칼브도 그랬지만 관광객이 넘쳐나는 여느 관광도시들과는 달라서 한가하고 편안했다. 베츨라를 떠나면서 이제 독일문학기행도 반고비를 넘어섰다. 이제 우리는 아침을 먹은 뒤에 괴테가 그랬듯이 프랑크푸르트에서(정확하게는 인근의 애쉬본에서) 바이마르로 이동한다. 3시간 반의 소요시간 동안 괴테의 시간은 1775년에서 1776년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제트50 2018-10-2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스트너가 그 에밀과 탐정들의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 일까요?@@

로쟈 2018-10-21 13:18   좋아요 0 | URL
수많은 케스트너가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