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연재를 시작한 경향신문의 '작가와 문학 사이' 꼭지는 매번 챙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김연수에 이어서 이번주는 평론가 신형철씨가 쓴 시인 문태준의 스케치이다. 문태준 시인과 관련한 페이퍼들은 두어 번 쓴 바 있고, 아래글에서 '문사마의 시대'란 말도 기억엔 내가 쓴 말 같다(내가 그리는 젊은 시인들의 구도는 '문사마와 바퀴벌레들'이다). 그러니 인연이 없지 않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백석-장석남의 계보를 잇는 적자인데(유사 계보에 백석-안도현도 있다), 젊은 나이에 너무 노숙한 경지에 이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시를 잘 쓰는 게 시인의 미덕이면서 또한 약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말도 안되는 트집인가?). 여하튼 '대가급'을 이미 예약해놓고 있는 시인의 묵묵한 '소걸음'을 따라가보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일들 중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경향신문(07. 01. 13) [작가와 문학사이](2) 문태준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시인이 되었다. 세 권의 시집을 펴냈고 여섯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받은 상보다 받지 않은 상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혹자는 ‘문사마의 시대’라고 했다. 욘사마만큼 인기 있겠는가마는 욘사마만큼 노곤할 일도 많겠다.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그의 고교동창이다. 김연수가 도서관 타입이고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라면 문태준은 마을회관 타입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고양이’과라면 그는 비슷한 연배인데도 ‘소’과에 가깝다. 그는 소처럼 ‘마실’ 다니며 끔뻑끔뻑 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답다.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시적 혈연관계다. 그는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어떤 말이 팽팽한 긴장을 품어 읽는 이를 한동안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사전에서 구출해 개인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런거리다’나 ‘뒤란’ 같은 말들이 그렇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이후 이 말들은 시인 문태준의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듯 이 말들은 이제 문태준만을 사랑한다. ‘맨발’과 ‘가재미’를 거치면서 그런 말들 점점 많아졌다.

부럽다. 자신의 마음을 ‘뒤란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에게 몽땅 내주는 방심(放心)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의 존재를 혼신으로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들이 단지 ‘있다’는 사실만을 지극하게 기록한다. 깨달음의 발설을 자제하고, 감탄문이나 느낌표를 아낀다. 혹은 그럴 때 아름다워진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평등해지듯, 그가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고 그 존재를 호명해 줄 때 만물은 서정적 사해동포주의로 느릿느릿 물든다.

그가 ‘나’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감응하고 해석하고 교설하는 ‘나’가 겸손하다. “낮과 밤과 새벽에 쓴 시도 그대들에게서 얻어온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이런 겸허함은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의 습관 같은 것이라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실제로도 그렇게 씌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감동적이다. 시를 대하는 태도와 시를 쓰는 원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시를 얻어온 ‘그대들’의 목록은 다채롭지만 특히 ‘나무’에 진 빚이 커 보인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호두나무와의 사랑’)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개복숭아나무’)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매화나무의 해산’) 세 권의 시집에서 한 편씩 골랐다. 모아놓고 보니 꽤나 닮아있다.

이 세 편의 시에서 그의 근본 중 하나를 짐작한다. 그의 시는 여자를 슬퍼하는 남자의 시다. 그는 나무에게서 하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잃은 여자, 아이를 낳은 여자를 본다. 이 여자들은 어머니라기보다는 출가한 누이에 가깝고, 시인은 고단한 그녀들 앞에서 조용히 아파한다. 혹자는 그의 시에서 장자(長子) 의식을 읽어냈다. 나는 차라리 철든 막내를 볼 때 누나들이 느끼는 애처로움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따뜻하고 슬프다. 이를 자비(慈悲)라 한다. 그는 불교방송 프로듀서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多情)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문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휑하고 빤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그래서 돌연 아연하여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患候)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말아라. 그래야 우리도 산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1. 13.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놔키스트 2007-01-13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치유되지 말았으면 하는 질병들이 꽤 있군요. 형이상학적 질병도 그렇고, 다정증도 그렇고.. 남의 병이 낫지 않기를, 심지어 깊어지기를 이렇게 바라도 되는 건지..

로쟈 2007-01-1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란 종 자체가 '생태학적 박테리아'라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좀 인간적인/낙관적인 병들이 아닐까요...

kleinsusun 2007-01-1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문태준이 불교방송 PD였군요.^^
근데...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란 건 어떤 뜻일까요?

로쟈 2007-01-1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용지물 박물관'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나비80 2007-01-1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평을 존중하시는 모양이군요.^^ 문태준 시인은 동년배 젊은 시인들이 가닿을 수 없는 삶의 절창을 줄곧 보여주곤 합니다. 저는 비슷한 의미에서 손택수 시인을 아낍니다.

로쟈 2007-01-1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택수 시인도 많이 거명되는 걸 들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소이부답님의 의견을 참고하지요.^^

다크아이즈 2007-01-1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벼파는 시, 이면을 꿰뚫는 시,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리게 하는 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책꽂이의 문태준에게 무덤덤합니다.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나머지 병적으로 그 ' 배열'에만 집착하는 몇몇 시인들의 언행불일치가 저로하여금 '착한 시' 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하나 봅니다.

우쒸, 저로서는 문태준의 시보다 신형철의 해석이 더 탐나는데요.

로쟈 2007-01-1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씨한데 전해드리죠.^^

다크아이즈 2007-01-2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쒸, 더 열 받네. 로쟈님만 신형철님 측근이라는 게!
하지만 로쟈님은 모든 ~디너들의 측근이니 용서할게요.

로쟈 2007-01-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에 비평집이 나온다니까 그때 한권 사시고 싸인도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