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젊은 작가들의 '근황'에 대해서 점검하고 있는 글을 옮겨온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 김중혁 등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상상력과 질펀한 입담을 '작두 탄 구라의 향연'으로 정리하고 있는 글인데, '작두 탄 구라'란 표현보다 내게 직접적인 것은 '총알 탄 구라'이다(그래서 제목은 '총알 탄 소설가들'로 단다). 필자는 '에세이스트' 정여울씨이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의 저자인데, 문화평론가 혹은 문학평론가가 어울림직한 직함이지만 그걸 통칭해서 저널에서는 '에세이스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여하튼 젊은 작가들의 '입담'에 애정을 주어봄 직하다. 그게 한국문학의 장래에 대한 '투자'이기에. 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겨레21(06. 11. 17) 펴들기만 하면 내 웃을 줄 알았지~

이기호·박민규·박형서가 보여주는 한국소설 유머의 심상찮은 변화…질펀한 입담의 약장수, 고독의 복화술,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을 즐겨라

요즘 <개그야>의 ‘사모님’을 보며 한국 코미디의 경이로운 진화를 실감한다. ‘사모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무대장치의 과감한 생략이다. 의자 하나 달랑 놓고 모든 무대장치를 제거하니, 그 텅 빈 암흑의 공간은 시청자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운전해’, ‘어서’라는 짧은 대사는 그때마다 다른 뉘앙스로 변주되며,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사모님의 권태와 고독, 그녀의 못 말리는 백치미를 구현한다. ‘아마데우스’라는 코너는 더욱 놀랍다.


△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에 유머의 경제성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이런 한국 소설 유머에 드디어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왼쪽부터)는 그 대표적 소설가이다.(사진/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장욱,문학과지성사 제공)

이 코너를 보면 인간의 표정 안에 숨겨진 소우주, 그 코믹성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언어도 무대장치도 그 무엇도 없이 오직 삼총사의 표정만으로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 세 사람은 가히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로 우주를 연주해내는 기막힌 내공을 보여준다. 이렇듯 무대 위의 개그는 표정만으로도 시청자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스탠딩 코미디가 굳이 ‘의미’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은 이런 표현의 경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소설의 유머도 드디어 심상치 않은 지각변동을 시작한 것 같다.

애들은 가라? 꼰대들은 저리 가!

이기호식 유머의 키워드는 친밀성이다. 그의 유머는 흔히 구어체적 현장성에서 발원한다. 그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꾼과 청자의 온기’로 극복하곤 한다. 그의 문체는 강한 구어성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머릿속에서나마 묵독의 폐쇄성을 지우며, 동네 남녀노소를 잔뜩 모아놓고 질펀한 입담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과장된 몸짓과 신명난 목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이기호식 유머의 에너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의도와 목적과 진심을 매번 배반하는 시트콤적 상황의 무한 연쇄들. 이기호의 인물들은 우연의 퍼레이드에 온몸을 맡긴 채 기꺼이 ‘하느님의 코미디 채널’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호는 작품에서 ‘독자의 상상력’을 유난히 강조한다. 옛날옛적 입담 좋은 약장수들은 온갖 구라를 읊조리며 ‘애들은 저리 가!’라고 외쳤지만,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약장수 이기호는 ‘꼰대들은 저리 가!’ 혹은 ‘애들만 이리 와!’라고 외치는 듯하다.

여기서 꼰대와 애들을 가르는 기준은 ‘상상력’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바쁜 일상에 저당 잡힌 어른들은 주눅들기 쉽다. 그러나 그 상상력의 울타리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에 이기호식 유머의 ‘친밀성’이 자리한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좀처럼 걷지 않던 후미진 샛길을 문득 걸어보고, 평소에는 서먹한 사람에게 실없는 농담을 훌쩍 건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의 코마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박민규 소설의 독자는 가끔 자신의 ‘조로’를 의심하게 된다.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대책 없는 유아적 순수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매번 ‘너무 닳고 닳은 어른들’이 되어버린다. 읽을 때는 키득키득 웃지만 읽고 나면 문득 자신의 길들여진 일상이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이 박민규식 유머의 빛깔이다. <핑퐁>의 왕따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엔 못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못이라면, 일생에 한 번만 맞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의 유머는 동화적 무구함과 아릿한 슬픔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이 유아적 순수에는 왕따 아닌 모든 인간들을 향한 서늘한 저주가 묻어 있다. 핼리혜성이 지구에 와서 충돌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그곳에 드나들며 왕따 소년은 교실에서만 ‘다수결로 묵인되는 왕따’가 자행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결정은 승자의 몫이란다.” 이 중차대한 인류의 운명을 왕따 소년들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박민규식 유머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유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인류가 내팽개친, 인류가 ‘깜빡’한 존재들의 필연적 복수혈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민규의 유머는 정서와 문체 사이, 욕망과 표현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에서 탄생한다. 그의 작품 표면에 드러난 유머가 빙산의 1%라면, 독자는 보이지 않는 99%의 빙산, 그 거대한 스케일의 고독과 슬픔의 복화술을 읽어낸다. 그의 유머는 일단 독자를 웃겨놓은 다음 그 웃음을 애도하게 만드는 성찰적 유머다. 상큼한 유머 뒤에 드리운 짙은 비애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없이 이지적인 블랙유머

아마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낯선 유머는 박형서식 유머일 것이다. <자정의 픽션>에 실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박형서식 유머의 코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엄격한 먹물적 수사학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면서도 능란하게 이용하는 이중적 태도가 유쾌상쾌통쾌하다. 화자는 선행연구에 대한 분노를 무시무시한 공격적 수사학으로 과격하게 표현하는가 하면(“그는 가금류의 뇌를 가진 비평가이며 문장은 흑사병 수준이라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리카르도 호킨스의 <못된 유전자>라는 식으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 이 작가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

수많은 탁상공론에 맞서는 더 많은 탁상공론을 조롱하는 이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통과될 수 없는 ‘논문’이지만 더없이 이지적인 블랙 유머로 가득한 흥미만점의 ‘소설’이다. “필자와 같이 잘난 연구자”가 “요새 좀 바쁘긴 하지만” 써낸 이 장대한 스케일의 논문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범람한다. ‘닭알’을 ‘불알’과 동격에 놓은 다음,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수십 번 등장하는 달걀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남근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듯 천연덕스레 자신의 ‘독창적’ 학설을 읊어대는 능청이 배꼽을 잡는다(*'논문'으로서 이 작품의 결함을 한 가지 지적하자면, 각주에서 제시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에 '춢판사'가 모두 빠져 있다. 즉, 논문의 기본적인 작성요령을 지키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논문의 내용은 독창적이며 훌륭하다. 가금류의 뇌를 가진 기득권 학자들이 아니라면 그 독창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잡설·요설·독설들이 논문의 테마를 요리하는 데 너무나 ‘논리적으로’ 복무한 나머지, 독자들은 깜빡, 혹은 기꺼이, 이 ‘논문’에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가고프다. 이 논문의 핵심 가설은 옥희가 6살이 아니라 가임기의 “처녀애”이며 아저씨와 옥희의 성교로 인해 질투에 눈먼 어머니가 아저씨를 내쫓는다는 것. 결국 외할머니-어머니-옥희는 “음란삼각편대”이며 옥희의 집은 “한 남성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매음굴”이란다. 박형서는 우리가 가장 도전하기 어려운 습속과 제도와 상식들을 한낱 유희의 장난감으로 만듦으로써, 사소함과 중요함이 서로 전복된 ‘픽션 언리미티드’의 세계를 창조한다.

모든 진정성의 강박이 사라진 세계, 진실은 몽둥이와 발길질과 전기고문으로 조작되는 세계, 존재나 고통이나 사랑 따위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는 세계. 여기서 박형서적 그로테스크 유머가 탄생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악동적 기괴함이 가득한 문체에 강력한 거부감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그 ‘싸가지와 재수가 동시에 외출한’, 잘난 척하는 말투를 모방하고 싶어진다. 그의 주인공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지적인 악마성과 <사탄의 인형> 주인공 처키의 악동적·요괴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캐릭터들이다.

박형서 유머의 핵심은 갈 데까지 간다는 것, 한없이 막 나간다는 것이다. 끝간 데 없는 기괴한 허구의 파노라마가 박형서식 유머를 수놓는다. 그의 소설은 인과성의 제어로부터 완전히 탈주한,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이다. 게다가 그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유머를 구사한다. 자신의 두뇌 속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독자들에게 거의 MRI 촬영의 해상도로 보여주는 뻔뻔함이 그의 매력이다.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최근의 단편소설 중에는 김중혁의 <유리방패>가 새로운 유머의 경지를 보여준다. 김중혁은 읽는 이를 공격적 웃음의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의 천진함 앞에 독자를 뼛속 깊이 무장해제시킨다. 그의 유머는 공격성도 방어성도 없으며, 이 질긴 생의 링 밖으로 잠시 뛰쳐나와 마음의 모든 매듭을 잠시나마 풀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소주 한잔 나누고 싶어지는, ‘비움’의 유머다.

그러나 위의 작가들의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자체이지 유머코드는 아니다. 이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하는 것뿐이다. 상상력이 뜻하지 않게 유머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유머 자체가 상상력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마음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말초적 유머는 가독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유머의 첫맛과 뒷맛이 일치하는 유머는 독자의 상상력을 간질이지 못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박완서의 걸쭉하고도 새침한 구식 유머가 좋다.)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문학적 유머의 원천기술은 의미를 삭제한 쾌락이 아니라, 의미 자체와 질펀하게 놀아나는, 예술과 지성과 상상력의 비빔밥이다.(정여울 에세이스트) 

06. 11. 19.

P.S.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원제는 <벌거벗은 총(Naked Gun)>이다. 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벌거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천진함' 같은 것을 읽는다(그것이 가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들려주는 발랄한 이야기들은 때로 <개그야>나 <개그콘서트>의 뺨을 치며 우리의 배꼽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쏜 '총알들'이 현실의 과녁을 제대로 맞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해서, 이 천진한 악동들의 반항과 일탈이 미더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반복하자면,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아니, 경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의 '총알 탄 소설가들'은 구두끈을 더 바짝 조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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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11-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그야의 '사모님'은 정말 기발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마지막 글이 참 많이 와 닿는군요.^^

로쟈 2006-11-2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데, 하도 입소문이 돌아서 '사모님'은 두어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동네도 살기 힘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