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을 읽으며 생각했다.
하루키가 변한걸까? 아님 내가 변한걸까?

<어둠의 저편>을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인터넷 서점 독자서평에 "배신과 실망", "늙어버린 하루키" 이런 제목의 글들이
많은 걸 보면, <어둠의 저편>을 읽으며 허탈해 한 건 나만이 아닌 것 같다.

도리스 되리의 [Der Fischer und seine Frau](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보러
설레이는 마음으로 메가 박스에 갔다.
(강남은 메가 박스, 강북은 씨네 큐브에서만 상영중)
"파니 핑크"가 떠올라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런데...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95년에, 그러니까 11년 전, 독일에 어학연수 갔을 때,
독일 할머니랑 일주일에 한번씩 "꽁짜"로 "free talking"을 했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말동무도 할겸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를 했다.
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했다. 한 마디라도 더 듣고,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그런데....한달쯤 지나니까 그 할머니를 만나는 시간이 슬슬 힘들어졌다.
할머니는 만날 때 마다 똑 같은 얘기들을 했다.
말이 "free talking"이지 난 몇번을 들었음에도 놀라는 표정으로
"echt? (really?)" 하며 듣는 것 밖에는 말할 기회도 없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외로우면, 얼마나 말할 사람이 없으면 그럴까...생각하며 열심히 들었다.
누가 자원봉사를 하는 건지 헛갈리는 상황이었다.

오늘 <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보다 그 할머니 생각이 났다.
도리스도 이제....늙은걸까?

<파니핑크>는 1994년, <내 남자의 유통기한>은 2005년.
11년 동안 휙휙 세상이 변했듯이, 도리스도...변했다.
'♬ 사람들은 모두 변화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그래...나도 변했다.
내가 11년 전 <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봤다면,
그저 웃긴 장면에서 킥킥 거리며 즐겁게 봤을지도 모른다.
이것 저것 많이 생각하지 않고...

도리스도 변했다.
11년의 세월만큼 성숙해지고 깊어졌다면 좋으련만,
그런 느낌 보다는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처럼 관객을 가르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또, 전형적인 서양인의 관점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직도 많은 서양인들에게 인도는 명상과 요가의 나라고,
일본은 소박하고 순하고,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나라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에서 일본은 완전 시골이고,
주연급 조연 Yoko(한국계 배우 김영신)는 오직 남자의 사랑을 바라는 일본 여자 캐릭터다.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일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난 긴 한숨을 쉬고 있었다.

p.s) 이 영화의 원제는 [Der Fischer und seine Frau].

그림 형제의 동화 제목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형제의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

어부가 물고기를 잡았다.
그 물고기는 자기가 마술에 걸린 왕자라고 말하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고,
어부는 물고기를 보내줬다.

집에 와서 아내한테 그 말을 하자, 아내는 다시 가서 마술에 걸린 왕자를 불러서
보답으로 새 집을 달라고 하라며 남편을 들볶는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물고기(왕자)를 불러 집을 달라고 말한다.
집이 생기자 더 큰 욕심이 생긴 아내는 성(castle)을 지어 달라고 하고,
성이 생기자 왕이 되고 싶다고 하고,
왕이 되자 하느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

왕이 되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에
어부와 욕심 많은 아내는 성도, 왕관도 다 잃고
다시 헛간에 살게 된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의 제목과 모티브는 바로 이 동화다.
그렇게 구구절절, 친절하게 설명 안해줘도 되는데,
비단잉어 부부(진짜 잉어다!!!)가 나레이션으로 주제를 다 말해준다.

도리스 언니는 너무 친절해진 것 같다.
내겐 너무 친절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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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7-02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자고 뭐해요? ㅋㅋㅋㅋㅋ

로즈마리 2006-07-02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보러갈까 했는데...아닌가? ㅠㅠ

마태우스 2006-07-02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내일 이 영화 볼건데...퍼니펑크의 기대감으로 이걸 본 분들이 많군요. 전 다행히 퍼니를 안봤답니다 근데요 수선님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셨군요!

프레이야 2006-07-0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의 눈을 참고해서 볼게요^^ 좋은 글입니다...

moonnight 2006-07-0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기대만큼 아닌가보네요. 역시 수선님의 맛이 나는 멋진글이세요. ^^

다락방 2006-07-0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보고싶었던 영화예요. 아마 제가 보기도 전에 내려질것 같네요.흐음~

kleinsusun 2006-07-0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매너! 울산에서 술을 넘 많이 마셨어.ㅠㅠ 당분간 술을 못 마실 것 같아... 넌 안자고 뭐했어? 행복한 일요일 보내....^^

로즈마리님, 아니진 않아요. 기대를 넘 많이 해서 실망이 컸을 뿐...^^
<흑설 공주>나 <루비 레드>처럼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동화를 재해석하는 그런 영화거든요. 도리스판 <어부와 그의 아내>라고나 할까요?

마태님, 아...오늘 보시는 군요. 씨네 큐브에서 보시나요?
<파니 핑크> 안 보셨군요. < 내 남자의 유통기한 > 먼저 보고 보세용!^^

혜경님, 감사합니다.^^

달밤님, 전 별로였는데 친구는 재미있었데요. 빨리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영화 오래 안하쟎아요.^^

다락방님, 네... 보시려면 서두르세용. 메가 박스는 14관(젤 작은데), 씨네 큐브 달랑 2군데서만 해요. 언제 끝날지 모르죠.
참! 그림 형제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 읽고 보시면 더 재미있으실 꺼예요.^^

로드무비 2006-07-0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친절하면 부담스러운데.
도리스 언니, 수선님과 저한테는 그러지 마세유.^^

kleinsusun 2006-07-0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직 영화 안보셨죠?
제가 삐딱하게 쓰긴 했지만 그건 넘 애정과잉상태라 그런 거구요,
여전히 도리스만의 뭔가가 있어요. 언제 보실꺼예욤?^^

비로그인 2006-07-03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도리스 되리. 너무너무 보고싶은데 제가 사는 도시에서는 볼 수가 없어요. 그저 보셨다는 그것 하나로 부러워집니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의 <소설에 관한 작은 이야기>를 읽으며
일반인들과 문학전공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 그 깊고 깊은 심연에 대해 절감했다.

회사생활 10년차.
회사를 다니면서 소설 '나부랭이'를 즐겨 읽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20~30대 여자들은 그래도 좀 많이 읽는 편이고,
남자들이 소설을 읽는다면 주로 <삼국지>,<로마인 이야기> 이런 책들이거나,
아님 출장갈 때 지루한 비행시간을 견디기 위한 무협지가 대부분이다.

매일 소설을 읽고 평론을 쓰는 것이 생업인 문학평론가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회사원들의 독서 수준을 가늠하기란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한번은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회의에서 K과장이 엉뚱하면서도 쌩뚱 맞은 말을 하자 K2 과장이 말했다.
" 형! 꼭 황만근 같아."

K과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물었다.
" 황만근? 황만근이 누구야? 개그맨이야? "

K2 과장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자 뻘쭘해 하며 말했다.
" 아...그게...얼마 전에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는데,
그 주인공 황만근 같다구."

사람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 야...너 그런 소설도 읽냐? "

성석제, 은희경, 신경숙, 배수아, 김영하, 박민규, 전경린, 조경란...
이런 소설가들은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들이다.
당연히 문학평론가들은, 문학평론가까지 아니더라도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작가들의 이름 정도는 알겠지...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모른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회사 가서 옆에 앉은 사람한테 물어보라!
(출판사나 신문사 문화부, 이런 회사는 제외)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실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걸 말하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원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마시멜로 이야기>, <블루 오션 전략>, <잭 웰치 위대한 승리>,
<괴짜 경제학>, <경제학 콘서트>.... 이런 책들은 많이 읽는다.

최근에 울 팀장이 읽고 술 마실 때 마다 얘기하며 직원들에게 권한 책은
공병호의 <10년 후 한국>이고,
울 상무님이 읽고 팀장들에게 읽어보라고 한 책은 <양치기 리더십>이다.

2005년 SERI CEO 추천도서 목록에는 소설이 단 한권도 없다.
이게 현실이다. 20권 중에 소설은 단 한권도 없다!

<블루 오션 전략>, <잭 웰치 위대한 승리>, <짐 콜린스의 경영전략>, <미래 기업의 조건>, <톰 피터스의 미래를 경영하라>.....
다 이런 경영/경제서들이다.
그나마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이러니 기업들한테 '문화 경영', '감성 경영'을 바라는 건 웃기는 소리다.
CEO들의 책장을 보라, 소설이 몇권이나 있는지!

회사원들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퍽퍽하고 드라이하다.
이 '드라이'한 환경에서 감수성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면 힘들기만 하다.

그래서 난...신입사원 때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 <삼국지> 빼고.
안 그래도 힘든데, 힘들어 죽겠는데,
읽고 나면 우울해지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을 대하기가 싫었다.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은 1997년,
'드라이'한 인간이 되려고 발악을 했던 해였다.

요즘 문단과 출판사들은 '한국 소설의 위기'를 말한다.
그런데....한국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들 탓만 하지 말고,
소설가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회사원들은 죽어나는데, 소설가들은 너무 뜬금 없는 얘기들만 하고 있는게 아닌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백수이거나, 대학 시간 강사이거나, 출판사 직원인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한가한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아프리카로 떠나는지...

은희경 소설 중에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 여자가 훌쩍 여행을 떠나며
사표를 우체통에 넣어 부치는 '낭만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소설가들이여!
요즘 회사들에 그런 낭만은 없음을 알아주시라.
사표도 다 전자결재다. 시스템에 입력하고 전자결재가 나야 한다.

여름방학에 대학생들이 인턴을 하듯이,
소설가들을 위한 인턴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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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6-1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녔던 회사는 작은 데라, 전자결재란 게 아예 없었고, 당연히 사직서도 전자결재가 아니었는걸요.^^;;

하이드 2006-06-18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백수이거나, 대학 시간 강사이거나, 출판사 직원인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한가한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아프리카로 떠나는지...

한국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물론, 위에 언급하신 작가들의 소설들은 들쳐봤습니다만 ^^;) 위의 말은 참 공감이 가네요.

2006-06-18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18 0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6-18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나 시와 동떨어져 사는 제게 조금 위안이 되는 글이네요. ^^;;

마태우스 2006-06-1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만근은커녕 성석제도 모르는데요 뭐... 은희경을 모르는 친구도 숱하게 있더이다... 문학은요 저 멀리 아프리카에 있는 조그만 나라라고 알더군요.

BRINY 2006-06-1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결재는 아니더라도 미리 얘기 안하고 저런 식으로 사표 던지고 떠나버리면 욕 무지 먹는 거 사실이죠 뭐~~

kleinsusun 2006-06-1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네...제가 대기업 생각을 했네요. 갈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드님, 한국 여자 작가들이 쓴 소설에서 툭하면 여자 주인공들이 인도나 아프리카로 떠날 때 허망하다니깐요.ㅎㅎㅎ

조선인님, 며칠 전에도 <신 기생뎐> 읽으셨쟎아요. 소설이랑 친하신데요 뭐^^

마태님, 맞아요 . 소설 전혀 안 읽는 사람들 많아요. 국어 시간에 나왔던 소설가 아니면 대부분 모르는 게 현실이죠.ㅠㅠ

BRINY님, 네....소설 속 사표는 '낭만적'이긴 한데.... 엄청 욕 먹고, 또한...담 직장 구하기 힘들겠죠? ㅎㅎㅎ

stella.K 2006-06-1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맞는 말씀하시네요. 글치 않아도 엊그제부터 간만에 우리나라 신세대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긴 합니다만, 그게 모문학상 후보에 올랐드리구요. 평도 좋아 읽어 볼 생각을 했습니다만, 묘사는 그럭저럭 좋은데 서사가 없다고나 할까? 수선님 말씀 공감은 가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한숨이 나오네요. ㅜ.ㅜ

kleinsusun 2006-06-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stella님도 밤 새셨어요?^^
소설가 지망생들이 처음부터 문창과 가서 계속 습작만 하지 말고, 뭔가 일을 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소설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는건 좀 허망하쟎아요.ㅎㅎ

2006-06-24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즈마리 2006-07-02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수선님 욜라 동감입니다...ㅋ ㅠㅠ
근데 소설가들이 다 백수거나 시간강사거나 그렇죠 모..ㅋㅋ
악순환인 거 같네요. 회사다니는 사람은 독자가 아니고, 소설가는 백수독자를 위해서만..쓰는 듯..ㅋ ㅠㅠ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kleinsusun 2006-07-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네...요즘 문학상 수상작들도 다 소재가 "백수" 더군요.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자전적 경험"을 참고해서 썼다는데....
정말 악순환인 것 같아요. ㅠㅠ
 

작년 가을,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 "홍세화 ‘나는 더 이상 한국 택시운전사와 얘기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이 기사로 홍세화는 택시운전사들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후에 <한겨레 21>의 홍세화 칼럼을 보니 홍세화는 자신이 그런 발언을 하게 된 맥락과 절박한 문제의식을 뒤로 한채, '택시운전사와 얘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발췌해 제목으로 쓴 <데일리 서프라이즈>의 기사를  '어느 진보매체의 조선일보스러움’이라는 표현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며칠 전, 회식을 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데 택시 아저씨가 계속 말을 시켰다. 선거 전날이었기에 당연히 화제는 선거 얘기였다. 나한테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물어 보기에 난 "잘 모르겠어요."하며 대답을 피했다. 한밤의 택시에서 운전사의 의견에 반대되는, 또는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아저씨는요?" 하고 물었더니 "당연히 오세훈을 뽑아야지." 하며 강금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말투도 '반말'로 바껴 있었다. 택시 기사들이 자기 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들에게 은근히 말을 놓는 건 친절한 택시 기사를 만나는 것 보다 흔한 일이다. 그 아저씨는 강금실을 '씨족사회를 붕괴하는 나쁜 여자'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비난했다. 난 어이가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 아저씨의 길고 긴 연설의 요지는 이렇다.
첫째, 강금실은 이혼녀다. 가정 하나 못 지키는 여자가 무슨 정치를 하냐? 요즘 여자들 잘났다고 이혼하는 거 정말 재수 없다.
둘째, 강금실은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다. 호주제가 폐지돼서 이제 씨족사회가 붕괴될 판이다. 이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냐? 친남매들끼리 결혼할 수도 있다. 인간이 짐승처럼 살게 생겼다.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애써 심호흡까지 하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그런데 왜 친남매들끼리 결혼을 해요? 그게...호주제 폐지하고 상관이 있나요? "
아저씨는 나의 질문에 열과 성을 다해서 설명했다. 교단에 선 후로 처음 질문을 받아 본 비인기 과목 교사처럼.
" 호주제가 폐지되면 어떻게 돼? 여자들이 이혼하고 애를 데리고 다른 남자랑 재혼하면 성이 바뀌쟎아. 이혼한 남편이 아들을 키우고, 여자가 딸을 키운다고 생각해봐. 보통 아들은 여자한테 안주지. 그럼 남매끼리 성이 다르쟎아. 그 남매가 어른이 되서 만난다고 쳐봐. 성이 다르니까 지들이 남매라는 것도 모르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도대체 짐승하고 다른 게 뭐가 있어?"

    난 회사생활 10년차의 숙련된 '인내심'을 발휘하여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질문을 하나 더했다. 아주아주 공손하게.
" 저....그런데요. 부모가 이혼을 해도 남매들끼리는 계속 만날텐데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 아가씨, 참...세상 물정 모르는구만. 여자들이 남자 생기고 재혼해봐. 옛날 남편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지 알아? 자식 새끼도 다 까먹고 산다고."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침묵모드로 일관했다. 만약 내가 술 취해서 그 아저씨가 하는 말에 반박이라도 했다면 위험할 뻔 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건 정말이지 멍청한 일이다. 우발적 범죄의 대부분이 상대방의 '말'에 열 받아서 일어난다고 한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 만큼 쓸데 없고 미련한 짓도 없다. 홍세화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을 했는지 절절히 공감했다.

    인간은 잘못된 믿음일지라도, 한 번 믿은 건 계속 믿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평생 그렇게 믿을 꺼다. 그 아저씨를 페미니스트 100명이 날마다 찾아가 아무리 쉽게 설명한다 해도 그 아저씨의 믿음은 달라지지 않을 꺼다. <올드 보이>처럼 최면이라도 걸지 않는 한 그 아저씨는 달라지지 않을 꺼다. 참...씁쓸하고 또 슬펐다. 대한민국에 그 아저씨처럼 생각하는 중년 남자들이 어디 한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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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6-03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생각에는 중년 남성.. 이 아니라 중년 여성.. 심지어는 그보다 어린 여성중에도 저와 유사한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 그게 더 답답해. --;;

kleinsusun 2006-06-03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러게, 정말 답답해. 그들의 생각은 거의 바뀌지 않을텐데 말이얌.
오늘 혹시.......출근했어?

nada 2006-06-0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씨 아주 드라마를 쓰시네요, 어디서 씨족사회라는 말은 주워들어가지고는..흥!

kleinsusun 2006-06-0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말이예요. 아마도 호주제 옹호에 앞장서는 불어터진 짬뽕 같은 단체 회원이 승객으로 타서 한 얘기들 듣고 듬성듬성 외운게 아닐까요? ㅎㅎㅎ

로드무비 2006-06-0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아자씨가 너무 많아서 무서운 세상이에요.
꼭 뭐 아자씨들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강금실 씨 얼굴이 반쪽이 됐더군요.
마음이 좀 아팠어요.

kleinsusun 2006-06-03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거 하루 전날 강금실이 삼성본관 앞에서 유세를 했어요.
패배할께 확실한데도, 승리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마지막까지 정말 열심히 하더군요. 제가 다 가슴이 뛰더라구요. 동시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구요.
세상에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넘 많아요.ㅠㅠ

BRINY 2006-06-03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청동기 시대랍니까?

kleinsusun 2006-06-03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말이예요.ㅎㅎㅎㅎㅎ 정말 어디서 "씨족사회"란 말을 주워 들었는지 몰라요.

이리스 2006-06-0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출근 안했어.. 이런데다 나쁜말 쓰면 곤란한데 문득.. 씨족사회는 커녕 저런 사람들 때문에 씨x 사회가 되가는거 같아. -_-;;

kleinsusun 2006-06-0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빙고! 항상 내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낡은구두,쵝~오! ^^

플레져 2006-06-03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선거 전날 한밤중에 택시 타고 왔는데,
아저씨가 2번 찍으라고 난리더군요. 저역시...위험해질까봐
공손모드로 앉아 있느라 죽을뻔했어요. 택시에서 내린다음에야 쳇, 겨우 한마디 뱉어냈답니다. 무셔워요...덜덜...

kleinsusun 2006-06-0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잘하셨어요. 택시에서 권력은 기사에게 있쟎아요. 괜히 심기를 건드리는 대답을 하면 위험해요.ㅠ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게 최곤 것 같아요.

세벌식자판 2006-06-0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는 조심히 또 조심히 해야 제일 좋은거 같아요. 제가 지금 대구 사는데... 헐헐헐 분위기는 안봐도 비주얼이겠지요?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침묵모드로 일관합니다. 그래도 묵묵히 그런 이야기를 듣는게 쉽지는 않더라구요.

kleinsusun 2006-06-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판님! 맞아요, 침묵모드가 최고예요. 특히 윗사람들하고 얘기할 때는...회사 생활 팍팍해져요.ㅎㅎㅎ

2006-06-04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가 결혼하려는 이유는 사회적인 거예요.독신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더 이상 독신 여성으로 살기 불편해서죠.세 걸음에 한 번씩은 독신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편견들과 제도적 불합리함에 발이 걸리죠.그것이 사실이든 제 과민 반응이든 간에, 제가 사는 데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개선하려고요."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주인공 세진의 대사다. 결혼을 하려는 이유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서도 아니고, 더 행복해 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불편"해서란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불편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사랑하니까 결혼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결혼한다. 외롭거나 또는 불편해서.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자랑스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30대 싱글, 그것도 여자로 살아 가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결코 만만하지 않은 일이다.

화~금, 3박 4일간 신임과장 교육을 받고 어제 왔다. 교육 차수별로 인원이 다른데 이번 차수는 127명, 그 중 여자는 7명이었다. 10개 조로 나누어 분임토의를 했다. 한 조에 12~13명.

첫 날, 조별로 분임토의장에 모여 자기소개를 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고, 한 명이 소개를 마칠 때 마다 박수를 치고 하는 전형적인 시간이었다.내가 속한 10조는 모두 12명. 12명의 구성은?
"11명의 남자 + 1명의 여자" , " 11명의 기혼자 + 1명의 미혼자".
난...이래도 저래도, 어떻게 구분해도 완벽하게 혼자였다. 이런걸 "마이너리티", "소수자 집단" 이라고 하나?

"결혼을 안한 30대 여자"는 소수자 집단에 속한다.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또는 "더 늦기 전에 좋은 사람 만나야죠." 하는 말을 "오랜만이네요.잘 지냈어요?"하는 인사처럼 자주 들어야 한다.더 심한 경우엔 "애를 낳을 생각이면 결혼을 서둘러야죠,더 이상 늦장 부릴 여유가 없어요." 하는 주제 넘은 말까지 들어야 한다.

김형경의 소설 속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듣는 건 정말이지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다.

분임토의장에서 옆에,앞에 앉은 남자들의 넷째 손가락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눈부신 결혼반지들을 보면서 내가 외계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생김새도 다르고, 처음 지구에 와서 매 순간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외계인.가만히 있어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튈 수 밖에 없는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 가끔은 아줌마가 되고 싶을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같은 귀찮은 질문에 "했죠."하며 허접한 대화를 단칼에 끝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 난 지금의 내가 좋다.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함과 외로움에 흔들릴 때도 있지만, 내가 꼭 궤도를 벗어나 떠돌고 있는 인공위성처럼 느껴져 두려울 때도 있지만, 난 지금의 내가 좋다. 가끔 주위에서 들이대는 "평균의 잣대"에 기가 죽어 가라앉기도 하지만, "의무" 보다 "꿈"에 설레여 하는 나만의 일상이 소중하다.

"소수자 집단"에 속한 다는 건 분명 불편한 일이다.스스로가 외계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한 쪽 다리가 흔들리는 테이블처럼 불안정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불편함을 개선(?)하려고 결혼하는 것도 미친 짓이다.결혼 자체가 미친 짓이라지만, 결혼을 "식스 시그마"로 착각하고 개선 활동을 하려는 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짓이 아닐까? 결혼은 개선활동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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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5-2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이지만 결혼을 식스 시그마에 접목한다면 김형경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define단계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씀같기도 합니다.ㅎㅎ
근데, 개선활동, 식스 시그마에서 느껴지는 이 동질감이란...

hnine 2006-05-2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으로 자기 인생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결정, 개선 될 것으로 생각하는 미혼 여성들을 가끔 볼 때가 있어요. 개선이라기보다 나 자신의 '개조'를 요구할 때가 많은 것이 결혼 생활인데 말이지요.

2006-05-28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5-2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맞아요."Define"부터 다시 해야 해요.음하하하.
잉크님도 시그마 땜에 스트레스 받으세요? 전 6월말까지 완료해야 하는데, 아직 M까지 밖에 안했어요.ㅠㅠ

hnine님,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어요. 결혼을 하면 인생이 정리되어 굴러갈 것 같은....ㅎㅎㅎ 제가 아직 철이 없어요. 인생 선배로서 hnine님의 조언과 지도편달이 필요해요.^^

잉크냄새 2006-05-2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작년에 시그마 프로젝트를 수행했어요. 제가 리더였는데 리더뿐 아니라 팀원들도 웃기는 인간들이라 지도위원으로부터 시그마팀이 아니라 시트콤팀이라는 불명예를 받았죠. 막판에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효과금액 부문에서는 팀원들의 교육비를 겨우 만회하는 허접한 효과를 달성해서 전사발표때 진땀 꽤나 흘렸답니다. 이제 M 단계시라면 아직도 가시밭길일텐데...힘내세요.^^

nada 2006-05-2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명의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당당한 수선님이 멋져 보입니다. 제가 예전에 다니던 회사는 반대였죠. 여자들만 바글바글, 남자 한두명. 것도 그리 좋진 않더라구요. 뭐든지 균형이 제일 좋은 듯해요.^^

다락방 2006-05-28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시간이 흐를수록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불편한건 사실이예요. 정말 싫어요.

kleinsusun 2006-05-28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저희는 1년에 인당 하나씩 해야 해요.ㅠㅠ
이번주 목표는 "A" 완료! 안하면 디따 볶이거든요. 6월에는 2주간 BB교육도 받는답니다. 아....시그마, 시그마! 누가 대신해 주면 좋겠어요.ㅎㅎㅎ

꽃양배추님, 전 항상 남자들만 있는 조직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힘든 일도 많았고, 문화적 충격도 있었고...그랬죠.^^ "홍일점" 이런 말 참 듣기 싫었는데, 요즘엔 여자 후배들이 많이 들어온답니다. 주말이 끝나가는 소리가 들리네요. 월욜이 오기 전에 실컷 놀자구요. 마지막 순간까지, 아자!

다락방님, 네....뭐 "불편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예요. 주위에서 우리들의 평화를 자꾸만 깨뜨리죠. 그래도...결혼에는 결혼의 불편함이 있을꺼예요.이렇게 위로하자구요.ㅎㅎ

2006-05-28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6-05-2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반 회사 다닐 때 '최초의 여자**'라는 수식어가 너무 싫었다...기 보다는 부담스러웠어요. 결국 그걸 이겨내지 못했지만...

kleinsusun 2006-05-28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Briny님, 그러셨군요. 저는 아직도 "최초의 여자**"를 쭈~욱 듣고 있어요.이게 사람 엄청 부담스럽게 하는건데...그죠?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moonnight 2006-05-29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삼십대의 독신여성. 살기 힘들죠. ^^;;;; 이런 '불편함' 때문에 결혼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또 문제겠지만요. -_-; 흐흐. 지금의 수선님이 저도 좋아용. ^^

DJ뽀스 2006-06-0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십대 독신여성으로서 100%공감합니다. 오죽하면 30대후반의 독신녀인 지인은 "대한민국사회에선 독신녀보다 이혼녀가 살기편하다"라고 하더군요. 결혼을 실패할 순 있지만 결혼을 안한건 용납하지 않는 이상한 사회, 정말 웃기네요. (스트레스 만땅입니다. ㅠ.ㅠ)

kleinsusun 2006-06-02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밤님, 네...아직은 "불편함" 때문에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는 의지가 만땅! ㅎㅎㅎ

DJ뽀스님, 아.....맞아요. 결혼을 안하면 "문제 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저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답니다. ㅠㅠ

2006-06-03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요일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내가 신입사원 때 결혼한 절친한 친구 H는
모대학의 겸임교수이며, 어엿한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학부형이다.
큰 애가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라니....시간 한번 정말 빠르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H와 함께 삼총사였던 친구 B는
세 아이의 엄마다.
쌍둥이 엄마가 되서 주위를 놀라게 한게 엊그제 같은데,
얼마 전 귀여운 쌍둥이들의 동생을 낳았다.

H와 B를 만나면 물론 반갑다.
중학교 때부터 같이 자란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런데....H와 B를 만나면 내 자신이 작아 보인다.
솔직히...불안함을 느낀다.

H와 B는 이미 오래 전에 한 일들이
내겐 숙제로 남아 있다.

결혼하기, 엄마 되기, 부자 되기 등등...

물론 내가 꼭 해야 할 숙제는 아니다. 선택하지 않는다면.
모두 다 똑 같은 길을 걸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언제까지 이렇게 혼자서
쿨한 척, 멋있는 척 하며 살기도 버거운 게 사실이다.

일이란 게, 물론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버겁고 힘들 때도 많다.
정말 확~ 때려 치고 싶을 때도 많다.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주위에서는 출장 자주 다니고, 겉 보기 화려해 보이니까
"멋있어요!"
"피오리나 같은 CEO가 될꺼예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사,회계사,변리사 같은 든든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엔지니어나 연구원 같은 전문인력도 아니고,
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 밖에 없는 평범한 회사원 입장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에겐 한 능력하면서 집도 부자인 남편이 있다.
친구들에겐 벌써 뛰어 다니는 애들이 있다.
친구들이 소유한 부동산은 고공행진을 하며 쉴새 없이 오르고 있다.

"비교"라는 게 마음의 평화에 가장 나쁘다는 걸 안다.
"비교"라는 게 얼마나 부질 없고, 파괴적인 건지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솔직히 불안하다.

친구들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우뚝 서있는 저택이라면,
난 낯선 바다를 떠돌고 있는 유리로 만든 배 같다.

너무 self-esteem이 부족한걸까?

토요일에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와서 습관적으로 노트북을 켰다.
한시간, 아니면 두시간 후?
난 쌩뚱 맞은 site들에서 헤엄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난....몇몇 대학의 MBA 입학 과정을 보고 있었다.

주위에 퇴근하고 대학원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느낀 불안감이 보태지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부채질 했나 보다.

내가 졸업한 학교를 비롯한 2~3 대학의 MBA 입학과정, 지원절차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 지금....뭘 하고 있는 거지?
왜 항상....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왜 항상....스스로를 좀 편하게 놔두지 못하는 거지?

자기계발은 좋지만 MBA는 뭔 MBA냐?
하고 싶은 공부가 얼마나 많은데...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공부를 하려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 말은 진실이다.
쓸데 없이 불안에 떨지 말자.
불안 때문에, 쓸데 없는 일을 벌이지 말자.

수~금 상하이 출장이다.
월요일 아침부터 정신 못 차리지 말고, 출장 준비를 잘하자.
현재 주어진 일에 충실하자.
쓸데 없는 감상, 쓸데 없는 불안에 휩쓸리지 말자.

48시간 후면 상하이로 날아가는데,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구.오키?

불안~ 꺼져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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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6-04-17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케. 불안~ 꺼져버려!!!

마늘빵 2006-04-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으세요 (이런 쌩뚱맞은 멘트를 하다니! )

이리스 2006-04-1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백배 공감하고 갑니다! 추천 누르고 화이팅 외쳐드려요~

마태우스 2006-04-1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날에 대한 불안은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잘릴까봐 늘 불안해하구... 주위에선 니가 왜 잘리냐고 하지만, 저 스스로는 그렇거든요. 수선님도 주위에서는 피오리나처럼 될거라 하지만, 님 스스로 너무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신 듯... 그게 인간의 속성이겠지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아무리 앞서 있어도 불안하고, 조금만 뒤지면 :"오늘 졌네" 이러잖아요.

비연 2006-04-1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하이, 잘 다녀오세요^^
비교한다는 건, 제 인생에서 남의 인생을 사는 참 소용없는 시간들입니당
출장지에서 더욱 님을 찾는 경험들 많이 하시길 바라며..^^
참고로 상하이, 재밌슴다~^^ 구경도 실컷 하세요~~

다락방 2006-04-1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같은 월요일은 수선님 앞에 앉아 소주잔을 부딪치고 싶네요. 맑은 소주가 마음을 달래주려나요..휴~

kleinsusun 2006-04-17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그래도 아침에 "꺼져버려!" 소리치고 났더니 슬슬 기분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당.

아프락사스님, <불안> 사서 책장에 꽂아둔지가 벌써 작년이네요.
읽어볼께요. 근데....이 책이 불안을 잠식시키는데 도움이 되나요?

낡은구두, 아.... 낡은구두님도 이런 기분 느끼신 적이 있군요. 위안이 됩니당.
우리 빨리....곱창 먹으러 가요. 곱~창!

마태님, 잘리실까봐 걱정하시는거....정말이었어요? 전 농담 또는 겸손함인지 알았는데....
마태님 같은 슈퍼스타도 불안해 하신다니....위안이 되네요. 언제나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연님, 맞아요. 비교 한다는거 참 부질 없고, 소용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예요.
알면서 못하니깐 문제지만....
제 자신에 좀더 다가가는 좋은 시간 보내고 올께요. 감사합니다, 비연님^^

다락방, 날씨가 참 꾸물꾸물하네요.
다락방님도 약간 우울모드? 아님 저를 위해 소주 한잔?
우와....다락방님, 감동이예요. 저 상하이 같다 와서 한잔 하자구요.
직장이 강남역 근처라 하셨죠? ^^

혜덕화 2006-04-1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장이 수선님, 불안은 사라졌나요?
불안이 어디에 있었죠? 마음 속에? 아니면 마음 밖에?
마음 속에 있었다면 꺼내서 던져 버리면 되고, 마음 밖에 있는 거였다면, 마음 밖은 수선님이 아니니 상관없겠죠?
저는 그렇게 자기 일 잘하고 글 잘 쓰고 여행도 많이 다니는 수선님이 대단하게 보이는데요. 상하이 잘 다녀오세요._()_

mannerist 2006-04-17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사다줘요. 씨익 앤드 화알짝 ^_^o-

(버르장머리 없는 매너놈 다녀와서 사정없이 두들겨 패셈... 불안 날아갈때까지. ㅎㅎ)

kleinsusun 2006-04-18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욕심장이"라고 부르시니 꼭 선생님 앞에서 떼쓰다 다독거려지는 어린이가 된 것 같아요.ㅎㅎㅎ 글쎄요...불안이 제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걸까요, 아님 마음 바깥을 떠돌던 불안이 제가 약해졌을 때 침투한 걸까요? 음....요걸 생각해 봐야 겠네요. 마음 속에 있는 불안이면 툭툭 먼지털 듯 털어내게요.^^
혜덕화님 댓글은 언제나 제게 힘이 된답니다. 잘 다녀올께요, 감사합니당.

매너야, 헉....정말 때려도 되는거얌? ㅎㅎㅎㅎㅎㅎㅎㅎ
내 어찌 연애하는 알흠다운 청년을 때릴 수 있겠어?^^

2006-04-18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4-22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