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기괴물 물고기

 

 

 

 

 

르네 마그리트  『집합적 발명』 1953년

 

 

우리나라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60년대 초 어느 일간지가 상반신은 물고기, 하반신은 여자의 하체로 이루어진 괴상한 사진을 실었다. 사진은 '기어(奇魚) 발견!'이라는 제목과 함께 해외토픽난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에 웃지 못할 정정기사를 났다. '괴상한 물고기가 아니고 사진작업을 통해 조작한 포토 몽타주였다' 1960년대 신문의 인쇄 상태를 감안한다면 그 당시로서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괴상한 사진을 접한 신문 독자들 그리고 마그리트의 그림을 한 순간에 괴물 물고기로 만들어버린 신문기자까지도. 마그리트의 미술이 소개되지 않은 그 당시로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그리트는 서로 다른 개념의 사물이나 풍경을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의 기이한 풍경으로 바뀐다는 변증법적 방법론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마그리트의 미술은 상식의 세계를 뒤집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예술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익숙한 감각과 관습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생각하는' 화가이자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이성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무능한 지식인들을 '초현실적'으로 비꼰다. 프랑스 지식층을 통칭해 '카르테지앙(cartésien)'이라고 한다. 이성과 합리성의 표상인 데카르트의 자손이라는 긍지도 되고 꽉 막힌 답답한 친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마그리트는 답답한 이성의 아성을 훨훨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의 곡예'를 선보임으로써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함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도 통쾌한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엉뚱하고, 이상한 철학하기

 

 

 

 

 

튜바를 쓴 마그리트

(1960년 촬영, 사진출처: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p 16)

 

 

 

마그리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이상하다', '낯설다', '엉뚱하다' 등의 반응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그리트 특유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난해한 그림으로도 볼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일반적인 화가들과는 달리 관객들에게 일방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불친절하게(?)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고 사유할 것을 제안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그리트의 미술을 '철학'처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철학'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이루어진 총합적 학문이다. 그림으로 표현한 마그리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을 해보자.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철학의 사상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마그리트의 낯선 이미지들 속에 숨겨진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철학을 공부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되고 깊은 사유와 통찰력을 배양할 수 있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미술에서 요구하는 '철학'은 깊은 사유를 통해 이미지를 해석하기 위한 '돋보기'일 뿐이다. 돋보기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미세한 대상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 돋보기는 마그리트 미술의 반을 이루고 있는 사유의 영역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이다. 안 그래도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판에 철학까지 공부한다면 머리만 아파질 수 있다. 오히려 철학과 마그리트, 둘 다 싫어하는 역효과만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그리트의 미술은 기존의 상식과 평범함을 거부하는 실제와 같은 '낯선 세계'를 지향한다. 마그리트가 구축한 이 '낯선 세계' 속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가끔은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엉뚱한 생각도 해봐야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 중절모 대신 커다란 튜바를 쓴 마그리트처럼 직접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실천해봄으로써 그림 속에 숨겨진 그의 의중을 좀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낯설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는 것. 마음만으로는 쉬운 일이지만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게 어렵다. 일탈적인 사고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상'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끔 조언을 해주는 책이 프랑스의 칼럼니스트 로제 폴 드르와가 쓴 『일상에서 철학하기』다. 이 책에는 총 101가지의 철학 체험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는 '체험'이라기보다는 '놀이'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철학 고유의 딱딱하고 진지함이 없을 정도로 '철학 도서' 같지 않는 '철학 도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사상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위대한 사상을 익히거나 철학자들이 지나온 생각의 길을 가보는 대신에 오로지 일상 속에서 '나'만의 철학을 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오줌 누면서 물 마시기', '공원묘지에서 달려보기', '방 안에서 동물이 되어보기', '소리를 줄인 채 TV 화면 보기', '상상으로 사람 죽이기'(!) 등 얼핏 제목만 보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말 엉뚱한 철학 체험들이다.

 

그러나 로제 폴 드르와가 제안하고 있는 이 101가지의 철학 놀이들은 마그리트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창의적인 체험들이다. 이 책은 마그리트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낯설게 하기'를 이해하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엉뚱하지만 깊이 있는 철학 체험을 통해 뇌 속에 갇힌 생각을 해방시키고 단조로운 일상을 탈출하여 마그리트의 세계로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다.

 

 

 

 

 철학 체험 #1 : 그림 속으로 빠져들기

 

 

 

 

 

『끝없는 정찰』 1963년

 

 

일반적으로 미술관에 오는 관객들의 역할은 액자 속에 고정된 이미지만 보는 게 전부다. 미술관에 전시된 수많은 그림들 모두 다 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저 도슨트(Dosent)의 설명대로 그림을 이해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와 비슷하게 그림으로 구현된 상상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들은 늘 당신과 같은 공간 속에 있다. 그리고 운이 좋을 경우, 당신은 갑자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당신을 둘러싼 일상의 공간에 일종의 균열일 발생하면서 당신을 그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로제 폴 드르와 『일상에서 철학하기』p 228)

 

 

 

아무래도 일상의 공간에 균열을 만들어줄 수 있는 화가라면 단언 마그리트라고 말하고 싶다. 마그리트가 관객을 위해 열어주는 이 '균열'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다. 마그리트의 그림『끝없는 정찰』을 주목해보자.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친숙하게 등장하는 중절모 신사 두 명이 서 있다. 그런데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는 하늘 위에 서 있다!  일반적인 관객이라면 그저 재미있는 발상이 돋보이는 그림으로만 볼 것이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이 그림에서 관객들을 위해 은연중에 일상의 현실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균열'을 만들었다. 그림 속 두 명의 중절모 신사들처럼 하얀 구름이 펼쳐진 높고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한 번 들어가보자. 동시에 여러 개의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일상적인 사고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마그리트가 만들어 낸 낯선 세계로 가기 위한 균열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철학 체험 #2 : 풍경을 그림처럼 접어보기

 

 

 

 

 

 

『들판으로의 열쇠』 1936년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한 지점의 풍경을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풍경의 '그림'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접어본다. 아니면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풍경의 장면을 '유리창'으로 생각하고, 과감하게 망치로 그 그림을 깨뜨려보자. 풍경은 산산히 부셔져 파편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풍경의 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풍경을 종이와 유리창으로 만들 수 있는 주관적인 의식과 풍경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성된 객관적이면서도 실제인 세계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철학 체험 #3 : 낱말의 의미에 구멍 내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년

 

 

'낱말의 의미에 구멍을 낸다?', 언뜻 문장만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손에 쥐고 있는 익숙한 사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 사물의 이름을 몇 번 반복해서 불러본다. 시간이 지나면 실체적 대상인 사물과 그것을 뜻했던 낱말이 분리된다. 분리되는 순간,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를 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부르고 있는 사물의 이름은 진정한 실체를 가리고 있는 '낱말'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명제를 구성할 때 그에 상응하는 '그림'을 산출한다. 건축가가 떠올리는 청사진처럼,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떤 '대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름이 뜻을 갖는 것은 이름들 간의 논리적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다. 그래서 사물에 향한 시선과 인식은 본질적인 실체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하나의 파이프를 단순하게 그리고 바로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음으로써 이미지의 묘사 혹은 재현의 모든 과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사고의 혼란이 시작된다. 그림 속 파이프가 단순한 오브제를 나타낼 수도 있고, 잘못된 언어와 결합하면 이미지가 오히려 사물 그 자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마그리트는 회화를 통해 이미지와 단어를 별개로 봤으며 단어는 그 자체를 지칭하는 데만 소용된다고 생각했다. 낱말과 사물의 분리를 통해 일상에서 볼 수 없었던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마그리트처럼 삐딱하게 세상 보기

 

 

 

 

 

 

(왼쪽)『강간』 1934년 

(오른쪽)『빛의 제국』1954년

 

 

잘 짜인 기획들을 망쳐버리고, 예상치 못한 사태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빗나가게 하라. 순응하지 말고 악착같이 이 사회를 역주행하라. (『일상에서 철학하기』p 96)

 

 

 

『일상에서 철학하기』에 소개된 철학 제험 중에 '광대처럼 삐닥하게 세상 보기'라는 것이 있다. 저자는 아예 대놓고 '미친 놈'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정도 '미친 놈'이 되라는 건 아니다. 반복된 일상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일상을 경험해보자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보통 화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그림에 전통적으로 부여하는 회화의 덕목 즉, 원근법과 명암법, 구도, 색채, 질감 그리고 표현의 테크닉 같은 일반 회화의 범주를 거부했다. 덕분에 사실 같은 초현실적인 그림들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었다. 마그리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의 사상가인 조르주 바타유는 『강간』이라는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흥분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여성의 얼굴에서 여성의 토르소가 있는 마그리트의 발상은 삐딱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지 않는 이상 쉽게 나오지 않는다. 여성의 나체를 바라보는 남성 화가와 관람자들의 은근한 욕망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얼굴의 진실을 몸으로 대체해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의 구현으로 완성했다. 마그리트의 대표작 『빛의 제국』에서 나타난 낯과 밤의 동시성은 밝은 낮과 어두운 밤으로 구분짓는 이분법적 허상을 깨뜨리고 있다. 마그리트의 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 상식 파괴)은 철저히 초현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장치만으로 이렇게 경이롭고 낯선 이미지를 구성했다.

 

 

 

 

 

 

 

 

 

 

 

 

 

 

 

 

J. 호이징가는 인간의 삶을 유희, 즉 놀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호이징가는 놀이의 조건을 제시했다. 호이징가가 말하는 '놀이

란 자발적 행위, 비일상적인 것,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에 규정되지 않은 공정한 것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해

 

(중략)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전에 홀딱 삭발을
비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야이야이야이야이야


할일이 쌓였을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
야이야이야이야이야

 

모두 원해 어딘가 도망칠 곳을 모두 원해
무언가 색다른 것을 모두 원해 모두 원해

 

 

 - 자우림 '일탈' 중에서 -

 

 

'일탈' 노랫말에 담긴 발산 욕구는 낯설고도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표출 행위다. 굳이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 돈이 들 필요가 없다. 시간과 비용을 최대한 절약할 수 있는 '철학 놀이'를 통해 일상 속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의 족쇄를 풀어 삶을 즐기고 유연하게 볼 수 있는 여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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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지식채널e - 어느 독서광의 일기

 

 

 

 

Scene #1

 

 

 

 

 

 

 

 

 

 

 

 

 

 



벡곡(栢谷) 김득신은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백이전’(伯夷傳)을 총 11만 3천 번이나 읽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기로 유명한 조선의 문인(文人)이다. 김득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노자처럼 훌륭한 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어린 김득신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제대로 된 내용 하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썩 총명하지 못했다.

 

주위 이웃과 친지들은 김득신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아버지만큼은 아들의 능력을 굳게 믿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믿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김득신은 오로지 책만 읽었다. 이때부터 책 전체의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다. 결국 59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해 아버지가 그렇게 바라던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40년 간 책을 읽고 나서야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김득신의 묘비명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

 

"재주가 남보다 못하다고 해서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보다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그러니 힘쓰는데 달려있을 따름이다."

 


 

 

Scene #2

 

 

 

 

 


 

 

 

 

 

 

김득신의 반복 독서법도 대단하지만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백이전’을 쓴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도 김득신 못지않게 무수한 인고(忍苦)의 노력 끝에 뒤늦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 낸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물이다. 사마천의 아버지는 천문과 역법을 주관하고 황실의 도서 관리를 담당하는 벼슬을 맡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방대한 중국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사마천에게 자신의 작업을 마무리해줄 것을 부탁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마천은 아버지처럼 황실 도서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어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사기>을 편찬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중국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던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하게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그만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사마천은 일생 일대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한 순간에 대역죄인으로 몰리고 말았다. 황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내렸지만 그 당시 중국에서는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벌금을 내야 하는 것, 또 하나는 벌금을 낼 수 없다면 궁형(宮刑)을 받아야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이다. 그 당시 궁형은 중국에서는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 중의 하나였다. 사마천은 어떻게든 사형을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유지를 계속 이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벌금을 낼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어떻게든 벼랑 끝에 몰린 삶을 부지하기 위해서 궁형을 선택했다. 사마천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맡은 벼슬보다 한참 낮은 환관(내시)로 좌천되어야만 했고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아 운신의 폭도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세상의 멸시와 핍박 속에서도 <사기>의 저술을 멈추지 않았으며 마침내 필생의 역작 <사기>를 완성했다. <사기>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 34세 때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5년 만에 완성했다.

 

 

 


Scene #3


김득신과 사마천, 공통적으로 이 두 사람은 아버지의 소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일에만 충실히 노력했으며 오랜 노력의 시간을 통해 하나의 목표를 끝내 이루고 마는 강한 집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주위의 냉담한 시선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그들의 시선에 맞춰 한계를 두지 않았다. 김득신의 묘비명대로 결국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목표의 달성 여부는 그것을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 달려있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계를 스스로 안다면 그것 또한 옳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놓고 애초부터 할 수 없다고 체념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를 해선 안 된다. 그것은 결국 미련하고 게으른 자의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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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8-2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네요. 사마천의 일화는 예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cyrus 2012-08-27 22:07   좋아요 0 | URL
두 사람 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죠. 항상 이런 일화를 접하게 되면 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맥거핀 2012-08-2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득신을 그냥 조선의 문인 중의 하나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배경이야기가 있는 인물이군요. 덕분에 하고자하는 일에 있어서 좀 힘이 생겨나는 듯 합니다. 59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다라...
(cyrus님 잘 지내시죠?)

cyrus 2012-08-27 22:10   좋아요 0 | URL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개학이라서 좀 놀면서(?) 개강 준비하고 있습니다 ^^;;

2012-08-28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르케스 찾기 2016-11-0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광불급... 백곡 김득신의 이 책도 읽으셨군요... 리뷰 찾아 읽다보니 cyrus님의 리뷰들이 눈과 마음에 맴맴 도네요.

cyrus 2016-11-04 14:24   좋아요 1 | URL
《미쳐야 미친다》가 2004년에 나왔으니 저는 그때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 해에 이 책을 읽었고, 전역한 뒤에 또 읽었습니다.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들 중 한 권입니다. ^^
 

                    

 

 

 

                                     

 

 

 

 

 

 

 '나는 죄인이로다', 괴짜 시인 프랑수아 비용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프가 울려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p 150)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를 읽으면서 혹시 이런 시구를 발견하셨는지?  시 속 화자인 '늙은 여인'은 교회에 그려진 천국과 지옥 그림 앞에서 신의 성스러움에 탄복하는 동시에 지난 날의 과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신의 섭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적인 교훈이 깃든 한 편의 종교시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자가 절도와 살인 전과가 있는 범죄자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시를 쓴 시인은 프랑스 중세 말기에 활동했던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 1431~?)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작가일 것이다. 진중권도 책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비용을 '중세 말의 괴짜 시인'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의 일생을 살펴보면 '괴짜'라기보다는 '괴팍스러움'에 가깝다. 

 

비용의 본명은 프랑수아 드 몽코르비에르. '비용'이라는 성(姓)은 어린 시절 그를 길러주었던 기욤 드 비용이라는 신부에게 물려받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나다가 부유한 신부의 양자가 되었다. 비용의 유년시절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대학 석사 자격을 얻을 정도로 머리는 능숙했다. 만약 이러한 재능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비용은 중세의 평범한 대학교수 또는 학자로서의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시절부터 비용은 난폭한 성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젊은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비용은 위험한 장난, 패싸움, 도박, 그리고 민중 봉기 등에 가담했다. 물론 당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직후로서 강토는 황폐되고 도처에 도적과 살인과 방화가 잇따라 민심이 흉흉하던 때이고 당시의 학생들 중에는 부랑자, 불한당이 많았으므로 비용도 그 때까지는 이런 부류에 속하였다. 이 때부터 비용은 중세 말의 아웃사이더(Outsider)로서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0년에 故 송면 연세대 불문과 교수가 번역하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유언시: 비용 시전집』

판형은 문고판과 같은 크기다. 알라딘과 일부 공공도서관 검색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본이 되었다.

 

 

 

비용의 무절제한 성격은 결국에는 피를 부르는 살인에 이르게 되었고 비용은 평생 도망과 방랑 생활을 해아만했다. 1455년에는 여자 문제로 인한 사소한 말다툼 끝에 교회 신부를 죽이고 도망쳤다. 이듬해에 사면령이 내려 파리로 돌아왔으나, 1456년 절도 사건으로 또다시 몸을 피해야만 하였다. 이 무렵 비용은 『유증시』(遺贈詩, Le Lais) 등의 많은 시(발라드, Ballade: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를 썼다. 한 권의 작은 책자를 남긴 채 비용은 파리를 떠나 앙제라는 이름의 소도시로 피신한다. 파리 시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이후부터 그의 신세는 완전한 부랑자, 거지가 되어 여러 도시를 전전한다. 그 후로 비용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남아 있는 문헌들을 통해서 비용은 또다시 감옥에 투옥될 정도로 살인과 절도 행각을 멈추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때마침 왕위에 오른 루이 11세가 모든 죄수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되여 사형수 신세로 감옥에 갇혀있던 비용은 풀려나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32세로도 추정)였지만 그 동안 겪은 가난과 고생과 방랑과 감옥살이로 심신이 모두 병들어 있었다. 이제 죽음의 예감도 깊이 들었던지 그는 그의 생활을 총람하는『유언시』(遺言詩,Le Testament)를 썼다. '유언시집'이라고 불리우는 두 번째 시집은 그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비용의 불행과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우연한 패싸움에 끼여들어 감옥에 투옥된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과가 있었기 때문에 죄가 가중되어 교수형의 선고를 받는다. 비용은 당시의 최고 재판소에 탄원서를 내어 겨우 사형을 면했으나 10년 동안 파리 입성을 금하는 추방령을 받았다.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역사상의 기록이나 사람의 입에서 영영 사라진다. 영국에 가서 살았다고도 하고 지방 소도시에서 신비극을 쓰고 상연했다는 말이 있으나 현재까지도 비용의 최후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비용을 상상할 수도 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비용의 발라드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노여움, 소망 그리고 비웃음이 섞인 슬픈 호소로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신의 자비를 빌고 있다.

 

 

나는 죄인이로다, 그것을 잘 알고 있거늘

그러나 신은 내 죽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죄에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실을 고치고 선하게 살기를 원하도다.

내가 죄로 인하여 죽는다 하더라도

신은 산다고 하셨기에

내 양심이 가책을 느낄 때

그 자비로움은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그리고 저 고귀한 『장미 이야기』의

제1권 첫머리에는

청춘의 미숙한 마음도 노년이 되어

성숙한 마음으로 보일 때는 용서되는 법이라.

분명히 씌어져 있는데

아, 이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그러나 지금 나를 그처럼 가혹하게 비난하는 자들은

성숙한 때의 나를 보려고는 하지 아니하는구나.

 

 

 

 - 『유언시』제14, 15행, 송면 역, 문학과 지성사(p 77~78) -

 

 

 

생전의 비용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각들 그리고 기성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방랑자 신세에 대해서 남몰래 깊은 회한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비용의 범죄 행각은 그 당시 중세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반사회적 행위였다. 신은 온갖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비용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어린 양'으로 인도했을지 몰라도 중세의 사회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던 비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하기에 『유언시』와 『유증시』속에 가난과 실패와 죽음에 부딪친 인간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외치는 절실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유언시』와 『유증시』내용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유언이나 유품 분배에 대한 목록은 문학적 형태로 갖추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시 속에 그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것, 그의 약점과 죄악, 그의 사랑과 즐거움, 그의 소망과 믿음, 인생의 무상, 죽음의 가혹함 등을 꾸밈없이 솔직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 괴짜 화가 카라바조

 

 

 

 

 

 

 

 

 

 

 

 

 

 

 

 

프랑스의 괴짜 시인의 이름이 완전히 잊혀진 지 수백 년이 지난 후, 유럽은 창조성이 무시된 암울한 분위기의 중세를 벗어나 학문과 예술의 창조적 맥박이 뛰게 되는 르네상스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는 꼭 이들만이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하게 9년 후, 또 다른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 데 카라바조(1571~1610)다. 당대 널리 알려진 화가 미켈란젤로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년 시절에 살던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따 붙이게 되었는데 지금의 '카라바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카라바조의 삶과 예술은 비용과 무척 닮았다. 카라바조도 비용처럼 유년 시절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양부모의 보살핌 없이 고아로 유년 시절을 보내야했다. 비용보다는 더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다. 불안정한 유년 시절에 형성된 성격은 카라바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음침한 친구들과의 교류, 반복된 투옥, 살인 혐의, 수년간의 도주생활,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완벽하게 갖춘 가장 찬미 받는 회화의 반항아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적 재능마저도 세상의 빛을 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 비용과는 달리 카라바조는 생전에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마음껏 펼쳤으며 그 당시 기성 예술가들과 차별화된 천부적인 미적 감각을 지녔다. 카라바조의 작업 방식은 캔버스에 직접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기성 예술가들은 그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전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의 그림들이 너무 사실적인데다가 기독교적 교화를 중시하는 교회미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번 퇴짜 맞아 그림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명암법을 독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녔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미켈란젤로 데 카바라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05~1606년

 

 

 

하지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생명의 위협을 여러 번 느껴야했다. 1606년 카라바조는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을 죽여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도주를 한 상황이라 이탈리아 곳곳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수배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작품의 주문을 받았고 단시간내에 훌륭한 그림들을 완성했다. 신의 구원을 받지 못할 지경에 이른 음울한 삶의 종지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문득 깨달았던 것일까?  주문받은 그림들을 하나씩 완성하고 나면 로마 주위 도시를 중심으로 도주 생활을 거듭했다. 카라바조는 사면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마로 가던 길에,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사면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로마 근처 항구에 머무르고 있던 배 안에서 슘어 지내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몰랐지만, 사면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카라바조는 생전에 단 한 점의 자화상을 남지 않았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여러 그림들에 등장하는 살인자 혹은 살해당한 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바꿔치기 했다. 1606~1607년 사이에 제작된 대표작『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카라바조의 청년 시절과 중년 시절, 두 가지 모습을 한 폭의 캔버스 속에 볼 수 있는 이중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속 소년 다윗이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다윗의 얼굴은 청년 카라바조를, 골리앗은 중년 카라바조를 의미한다. 그 당시 르네상스에 살았던 이탈리아 인구 수명이 4, 50대를 넘기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30세에 접어든 카라바조는 르네상스 시대의 수명 기준으로 본다면 중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자루는 악덕을 무찌르는 '정의'를 상징한다. 칼날에는 'HAS O S'라는 수수께끼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약자를 풀이하면 H(UMILIT)AS O(CCIDIT) S(UPEBIAM). 즉 '겸손은 오만을 죽인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표정에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괴롭혔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적군의 잘려진 머리를 연민의 표정으로 바라본다. 인물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은 '후회'와 '슬픔'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는 삶의 말년을 상징하며 '다윗'은 헛된 삶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심정을 담고 있다. 재능만 믿고 오만하고 무절제했던 '카라바조'의 목을 벤 또 하나의 '카라바조'를 그림으로써, 구원에 대한 열망을 나타나고 있다. 순수한 청년 카라바조가 죄 많고 타락한 중년 카라바조를 살해함으로써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던 작가의 깊은 참회가 그림 속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신으로부터 참회의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도주 생활 도중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던 두 명의 보헤미안 예술가를 위한 애도가(哀悼歌)

 

 

 

 

 

 

 

 

 

 

 

 

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는 퀸이라는 존재를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만든 대표곡이다. 감미로운 멜로디와는 다르게 난해하고 절망적인 가사 또한 유명하다. 노랫말은 한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을 죽인 사형수가 엄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죄의식에 몸부림치며 죄값을 치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때가 되자 죽고 싶지 않다며 발버둥친다. 그 후 사형수의 환상 속에서 재판장에서의 격앙된 분위기와 대중들의 비난 혹은 동정이 담긴 외침들(오페라 부분)이 펼쳐진다. 사형이 확정된 후 좌절과 분노로 오히려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죄가 없으면 내게 돌을 던져라'식의 발악을 부려보지만 결국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퀸의 메인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라는 주장과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소년이 결국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죽게 되는데, 그 때 남긴 유서에서 곡을 만들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슬프고도 절망적인 랩소디 속 가사의 의미와 숨겨져 있는 사연을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프레디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MP3에 무한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비용과 카라바조의 삶과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인상에 불과한 것일까?  남들보다 앞서는 영특한 재능을 지녔지만 살인이라는 비인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바람에 한 순간에 사형수로 낙인찍혀 기성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반항아,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참회했으나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신의 구원마저도 받지 못해 파멸의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충동적인 기질을 억누르지 못해 평생의 절반을 방랑과 도주 생활로 보내야만했던 삶의 방식이 보헤미안과 흡사하다. 두 명의 예술가들을 위한 애도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앖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질렀던 수백년 전의 과오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자신들을 옥죄었던 시대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예술가적 광기와 폭력을 감당하지 못했던, 우여곡절의 사연이 있는 이 두 명의 사형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카라바조가 그림을 그렸을 때 즐겨 사용하던 '키아로스큐로'는 '빛과 어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비용과 카바라조. 이들의 삶에는 인간으로서의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 즉, 선과 악이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지니고 있는 이중적인 우리가 그들을 살인자라고 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과연 있을까?

 

 

 

 

 

* P.s  요즘 세상이 전보다 더 흉흉해졌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쓴 주관적인 감상글이 '살인'과 연관되어 있고 글 중간 곳곳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 마지막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은 비인륜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제가 읽고, 보고, 들은 것, 즉 텍스트, 이미지 그리고 음악에서 찾은 연관성 있는 인상을 해석한 텍스트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상대적인 입장의 감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만약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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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4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코 세대'라 쓰고 '삼포 세대'라 읽다

 

 

 

 


지난 주말 인기 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종영했다. 특히 극중 인물인 임메아리(윤진이)는 ‘메앓이 열풍’을 일으키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열일곱 살이나 많은 최윤(김민종)을 사랑하지만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에 눈물 흘릴 때가 많았다. 그래도 열렬한 구애 끝에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최윤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극중 메아리는 1988년생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아닌 현실 속 88년생들에게 결혼은 ‘그림의 떡’이다. 79년에서 92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에코(Echo∙메아리) 세대라고 한다. 전후 베이비부머(1955~63년생) 세대가 결혼해 낳은 2세 들이다. 베이비붐의 메아리와 같아 에코다. 그런데 베이비부머와 달리 에코 세대의 결혼 불능 현상은 심각하다.


최근 통계청이 조사한 ‘베이비부머 및 에코 세대의 인구·사회적 특성분석’에 따르면 기혼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베이비부머가 24.0세, 에코 세대는 25.3세였다. 또 베이비부머의 결혼 비율은 54.5%였지만 에코 세대는 8.3%에 불과했다. 두 세대 간의 결혼 비율의 격차가 크게 나타난 것이다. 기혼 여성의 경우 베이비부머는 평균 2.04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에코 세대는 이에 절반도 못 미치는 1.10명이었다.

베이비부머의 자녀인 에코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결혼은 늦게, 자녀는 적게 낳는 현상은 저출산 분위기에 따른 초고령화 사회로 우리 사회가 더욱 급속하게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나라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저조한 출산율은 고령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는 부양비 증가, 재정지출 부담 확대 등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생산 가능인구 감소는 노동력 저하와 소비 감소를 불러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린다.

에코 세대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경우 베이비부머들이 일으켰던 소비 붐이 다시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다. 하지만 경제 침체가 지속된다면 이들의 구매력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치솟는 물가, 취업난, 집값 등 압박으로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하는 ‘삼포(三抛)세대’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은 돈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빚 때문에 미래를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1903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요정 에코는 미소년 나르키소스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수 없어 사랑을 거절당했고, 이에 상심한 나머지 야위어 가다가 목소리만 남아 메아리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에코들도 절망으로 야위어 가고 있다. 사회적·경제적 환경 때문에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에코 세대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연애와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로 경제적인 부담을 꼽은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8월 18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게재 예정)

 

 

 

 

 

* 지난 주까지만해도 여름방학답게 푹 쉬고 놀기만 했다. 덕분에 책은 많이 읽었지만 블로그 글쓰기는 좀 소홀했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 탓에 컴퓨터 앞에서 글 쓰는 것이 고역이다. 여전히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로 글 쓰는게 편하다. 페이스북을 시작한지 4개월째 접어들었는데 최근에 중앙일보가 페이스북에서 진행하고 있는 '나도칼럼니스트'(줄여서 '나도칼')를 알게 되었다. 매주 나도칼 페이스북에 올려지는 전국 대학생들이 쓴 칼럼들 중에 가장 우수한 글 한 편을 선정하여 토요일에 발행되는 일간지의 오피니언에 '대학생 칼럼' 자격으로 게재하는 혜택이 주어진다. 최대 10편 가량의 칼럼이 나도칼 페이스북에 올려질 정도로 꽤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글 실력을 뽐내고 있다.

 

나는 정확히 8월 12일, 그러니까 '신사의 품격'이 종영되던 그 날에 처음 '나도칼' 공식 페이스북을 알게 되었다. '나도칼'을 보자마자 칼럼 한 편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번 주 내내 고민한 끝에 어설프게나마 칼럼 한 편 완성했다. 본격적으로 칼럼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화요일부터였고 최종적으로 완성한 날은 어제였다. 분량과 형식이 자유로운 인터넷 블로그 서평 쓰기에 길들여져 있다보니 1500자 제한 형식의 칼럼 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썼던 글을 다시 고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문장 하나를 빼면 다음 문장과의 의미 연결상 맥락이 맞지 않기도 했다.

 

몇 시간동안 불필요한 단어나 문장을 수없이 지우고 고친 끝에 총 1378자 정도의 글로 완성되었다. 내가 쓴 칼럼은 에코 세대가 처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경각심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주려는 의도를 중심으로 작성했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칼럼'이라는 글을 썼다보니 신문 논설을 담당하는 분께서 투박하기 짝이 없는 글을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주셨다.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는데 제목도 살짝 고쳐져 있었다.

 

내일 토요일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에코 세대'라 쓰고 '삼포 세대'라 읽다]라는 칼럼이 실릴 것이다. 글 옆에 흑백으로 된 얼굴 사진과 실명(!)도 있다. 안 그래도 못 생긴 얼굴에 흑백으로 처리하게 된다면 더 못 나게 나올텐데...  혹시 내일자 중앙일보를 보다가 내가 쓴 글 아니 내 얼굴을 보고 크게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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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8-17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이런 축하드려용^^

cyrus 2012-08-18 21:23   좋아요 0 | URL
ㅎㅎ 먼저 축하 인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hnine 2012-08-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에코세대, 삼포세대, 전 오늘 처음 알게 된 말이네요.
저는 드라마를 안봐서 잘은 모르지만, 글감을 잘 잡으신 것 같아요.
멋져요! (그리고, 미남이시네요 ^^)

cyrus 2012-08-18 21:24   좋아요 0 | URL
오히려 흑백으로 된 모습이 실물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ㅎㅎㅎ
아직은 부족한 글인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우연히 도서출판 '푸른역사'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서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중남미 정치 및 역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님께서 어제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53세. 생전에 학술 연구뿐만 아니라 대중 독자들을 위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및 역사 관련 책들을 많이 집필하셨고 외서 번역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2003년에 출간했던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이 분이 쓴 저서 중에 유일한 읽은 책입니다. 중학생 시절이었던 제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흥미로운 세계사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난 이후로 제가 알고 있었던 세계사가 유럽 중심 사관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 자리잡았던 유럽 사관의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게 만듦으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한층 더 새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책이 저의 지적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역사책으로 기억이 남습니다.

 

 

 

 

 

 

 

 

 

 

 

 

 

 

 

 

 

故 이성형 교수는 1990년에 <라틴 아메리카 자본주의 논쟁사>를 시작하여 여러 권의 책을 집필 또는 번역을 함으로써 그 당시 생소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문화, 역사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시대의 변화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및 문화에도 변환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출간했던 고인의 책은 현재 절판 상태입니다. 그래서 현재 변모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연구 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시기에 갑작스레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많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고인의 학문적 업적이 다시 한 번 재평가되어 우리나라 라틴 아메리카 연구의 맥이 끊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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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8-0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형 씨 신문칼럼 몇 개를 오려놨는데...이제 나이가 50대 초반이군요.한참 일할 나인데...

cyrus 2012-08-06 19:51   좋아요 0 | URL
그동안 제가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생전에 이대 재임용 때문에 여러 모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군요.
그 일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이성형 씨의 부고를 무척 안타깝게 여겼어요..

아띠 2012-08-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학계의 병폐를 고스란히 당하고만 살았던 것 같아요. 저 세상에서나마 공평한 대우받고 잘 지내시길 바래요

감은빛 2012-08-0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까운 소식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