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없이 쓴 글은 대게 감흥 없이 읽힌다.

 

- 새뮤얼 존슨 -  

 

 

 

올해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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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창작 본능을 발산하고 싶은 분들은 여기 SNS 유일 대한민국 청춘들을 위한 창작 소셜 페이지 브라이터(B_Writer)를 주목해주세요!

여기서 브라이터란?

'Bright'(밝히다)와 'Writer'(작가, 저술가)를 결합한 신조어로써, 창작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여 따분하고 지루한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크리에이티브(creative)한 사람을 뜻합니다. 창작을 사랑하는 각 분야의 청춘 아마추어들, 우리는 그들을 '브라이터'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무언가 쓰고 싶고,
무언가 그리고 싶고,
무언가 만들고 싶다면,
당신이 바로 브라이터입니다.

글, 그림, 사진, 동영상 등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물, 좋습니다. 누구나 오셔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업로드하고 공유하면서 서로 칭찬해요. 자신의 창작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분들, 환영합니다. ^_^

http://www.facebook.com/B2writer

 

 

P.s) 2013년에 같은 학교 다니는 지인과 같이 야침차게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입니다. 개설된지 얼마 안 되어서 많이 미흡하지만 대학생들의 무한한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20대 청춘' 알라디너 또는 이제 곧 대학 새내기가 될 예비 청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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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슈미트의 『근대회화의 혁명』를 읽다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1808~1879)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도미에는 대상의 특정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하거나 변형시키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 기법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어둡고도 진실된 면을 신랄하게 묘사했다. 슈미트는 도미에의 회화적 기법을 기존의 관습을 탈피하는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근대회화의 선구자 또는 시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미술사가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근대회화 또는 근대미술의 시점 역시 의견이 분분한데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성립된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이 때 등장한 미술사조가 바로 인상주의다. 인상주의 미술을 지향하는 일명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다.

 

 

 

 

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 1872년

 

 

전통적인 회화기법과 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색채ㆍ색조ㆍ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데, 특히 시간의 변화에 따른 색채의 변화와 자연에서 순식간적으로 일어나는 인상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래서 인상주의의 본질은 서양미술의 뿌리인 ‘대상 재현적 사실주의’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모방론의 원리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클로드 모네가  「인상 : 해돋이」를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서 출품된 시점, 다시 말하자면 인상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이 시기를 근대회화의 출발점과 동등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에두아르 마네  「팔레트를 든 자화상」 1879년

 

 

하지만 나는 근대회화의 진정한 선구자를 도미에, 모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위대한 작품을 먼저 남긴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이다. 마네가 1863년에 살롱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프랑스 미술계를 떠들석하게 할 정도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 때야말로 근대회화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마네는 도미에와 모네에 비해 제작 활동을 빨리 한 편이며 이들보다 먼저 유명세를 탔다. 모네가 1874년 인상파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에 비하면 마네는 이미 9년 전에 화가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살롱에서 보수적인 프랑스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도미에는 1830년에 시사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의 삽화가 활동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했지만 판화, 유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1879년이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년

 

 

재미있게도 마네는 인상파전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그림을 출품한 적이 없다. 모네와 일부 화가들과의 약간의 교류만 있을 뿐 마네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살롱전 출품을 고집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기성회화를 압축하고 있는 살롱에서 그 당시 새로운 근대적 회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1863년 살롱전에 출품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당시 미술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정장 차림의 두 남자들 사이에 한 여인이 벌거벗고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그 도발적인 모습은 비평가들은 물론 관람객들까지 몹시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 그림에 말할 수 없는 혹평이 쏟아졌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별 것 아닌지만, 아카데미 풍의 작품들을 선호하던 19세기 중반의 보수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 그림은 전통 양식에 대한 불손한 도전이자 보는 이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외설에 지나지 않았다. 살롱에서 낙선한 이후 마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림은 '목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시회에 선보여졌지만, 이번에는 대중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 그림에서 핵심은 나체 여인이다. 하지만 아카데미풍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가 아니라, 균형감 없는 몸매로 투박하고 천한 느낌을 주는 누드라서 우선 불쾌감을 주었다. 고전적인 누드화처럼 서 있거나 누워있지도 않고 제멋대로 앉아 있는 자세도 왠지 선정적이어서 호감을 주지 못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여체의 모습이 아닌 사실적인 여인의 나체가 불쾌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장 차림의 신사들을 등장시킨,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구도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음란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파문을 몰고 왔지만, 실은 부르주아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면서 비난은 더욱 증폭되었다. 일견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매춘을 즐기는 부르주아의 가식과 이중성에 대한 마네의 고발이라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구도 보다 화가의 의도라는 비평이 주를 이루면서 마네는 부르주아를 자극해서 유명세를 타고 싶어한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따라서 당대에 이 그림은 매우 '부적절하고 위험한 욕구'를 지닌 그림으로 평가되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마네가 근대회화의 선구자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풀밭 위의 점심 식사」논란이 종식된 지 얼마 안 되어 마네는 자신이 그린 누드화 한 점으로 '이슈메이커'가 되었다. 이슈의 중심이 된 그 작품이 바로 「올랭피아」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여성 누드의 스타일을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출품한 지 2년 후,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했는데 2년 전 논란에 맞먹을 정도로 대형 스캔들이 일어났다. 마네는 「올랭피아」를 제작하기 위해 과거 고전주의 화가들의 누드화를 참고했는데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티치아노(1488?~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앵그르(1780~1867)의 「그랑 오달리스크」등이 있다. 그러나 마네는 선배 화가들의 도상학적 주제를 참고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누드화를 선보였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마네 이전의 나체는 신화와 역사 속 인물인 비너스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는 현실의 나체이기보다는 인간이 이상으로 삼아야 할 추상적 존재의 나체상인 것이다. 마네는 이런 고정관념이 지배하는 경직된 사회에서 남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동시대 여성의 누드화를 그린 것이다. 이상과 추상적 존재의 전통 누드화인 비너스와는 확연히 다른 세속적인 나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마네는 현실 속 여성, 즉 매춘부를 통하여 차갑고 세속적인 프랑스 사회의 리얼리티를 선사했다.

 

이 두 작품 때문에 미적 양식을 고양하고 아름다움에 심취하려던 사람들의 심리를 거스르고 되레 그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당대에 마네는 퇴폐적이고 불경스런 화가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회화 양식으로 인해 오늘날 그는 '최초의 근대 화가' 내지는 '현대 회화의 시조'로 평가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고전적 구조를 벗어나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올랭피아」는 근대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야외 회화에 대한 마네의 선구자적 안목으로 인해「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모네보다 먼저 인상주의 출현을 예고한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마네는 신화나 관념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일상의 가치를 환기시키며 회화 전통과도 결별을 고했다. 그의 업적은 '근대회화의 혁명을 알린 선구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해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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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1 2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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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1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르네상스 미술의 정의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 또는 ‘부활’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15~16세기 유럽에서 고전 학문과 그 가치에 대한 관심이 미술로 확대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 미술과 문학을 재평가하였고, 해부학이나 투시원근법과 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체와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당시 봉건제의 몰락, 상업의 성장, 인쇄술․항해술 등과 같은 혁신적인 신기술의 등장 및 발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관심은 점차 식어가고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지며 새로운 인문주의 정신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미술가들은 미술의 소재를 인간에서 구하여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등 세 사람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융합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르네상스 미술

 

 

 

 

 

 

 

 

 

 

 

 

 

 

 

 

 

특히 메디치 가문은 금융업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화가, 조각가, 건축가, 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가와 과학자들을 후원했다. 또한 이들이 피렌체에서 만나 서로 전문지식을 교류하면서 공동 작업을 할 수 있게 지원했다. 그 결과 피렌체는 여러 학문과 문화가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예술가와 학자들을 아낌없이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데 기여한 메디치 가문의 혜안과 통찰력은 개방을 통한 ‘융합’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융합의 원리는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작품에서도 읽을 수 있다. 르네상스의 미술은 단순히 회화 한 분야에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분야의 학문들의 융합을 통해 매우 독창적인 표현이 창출되었다.

 

 

 

 과학과 미술의 융합,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에 따른 인체 비례도> 1487년경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B.C. 80년경~B.C 15년경)의 저서를 접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를 드로잉으로 그린 것이다.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선 남성의 인체를 원과 정사각형의 선으로 둘러 그 안에 인체가 완벽히 합치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드로잉을 통해 인체 비례에 대한 관심과 인간을 우주의 원리와 연결시키려는 과학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에 가장 이상적인 인체를 담아내기 위해 아름다움을 정확한 수학적 비례를 통해 규명하고자 했다. 훗날 르네상스의 과학적 사고는 원근법과 명암법 탄생의 근간이 되었다. 인체를 만물의 척도로 바라보는 관점은 르네상스의 인간 중심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이 드로잉은 인간 중심의 과학이 예술과 어떻게 융합되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문학과 미술의 융합, 보티첼리

 

 

 

 

 

 

 

 

 

 

 

 

 

 

 

 

 

 

 

 

 

 

 

 

 

 

 

 

 

 

 

 

 

 

 

 

 

 

 

 

 

 

 

 

 

 

 

르네상스 미술 작품들 대부분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 많다. 하지만 그 당시에 출판되어 유행한 문학 작품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다. 총 4개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문학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첫 번째 그림, 1483년경

 

 

그림 속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스타조란 청년은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해 크게 실의에 빠진다. 그림에는 두 명의 나스타조가 등장하는데 가장 왼쪽에 이제 막 숲에 들어선 나스타조는 젊은 시절 모습이고, 옆의 나스타조는 시간이 약간 지난 후 모습이다. 그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숲속을 산책하면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백마를 탄 기사가 칼을 들고 한 여자를 쫓아오고, 사냥개들이 여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있다. 나스타조는 급한 대로 나뭇가지라도 들고 그녀를 도와주려 한다. (첫 번째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두 번째 그림, 1483년경

 

 

 

 

결국 여자는 땅에 쓰러지고 기사는 말에서 내려 그녀의 등을 갈라서 내장을 꺼낸다. 그리고 개들에게 그녀의 내장을 던져준다. 왼쪽에는 질겁하고 도망가는 나스타조가 있다. 그러나 나스타조가 목격한 장면은 환상이다. 그 여인이 살아있을 때 그 기사의 청혼을 거절했다가 그 벌로 매일같이 기사에게 쫓기며 개들에게 내장을 뜯기는 저주에 걸린 것이다. (두 번째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세 번째 그림, 1483년경

 

 

 

 

나스타조는 꾀를 내서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여자와 그녀의 가족들을 초대한다. 장소는 바로 잔인한 장면이 벌어졌던 그 숲이다. 어김없이 쫓기는 여자와 기사, 사냥개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나스타조가 바라보는 여성이 짝사랑한 여자이고 둘은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 즉 나스타조는 “너도 나랑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이 꼴로 만들어주겠다”라는 일종의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세 번째 그림)

 

 

 

 

 

 

 

산드로 보티첼리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네 번째 그림, 1483년경

 

 

결국 나스타조는 원하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린다. 신부는 바로 왼쪽 테이블에 나스타조와 마주보고 앉아있다. (네 번째 그림)

이 그림은 원래 명문가의 부탁을 받고 그린 것으로 신혼부부의 방에 걸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림 속에 나타나 있는 이야기의 주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신부를 위한 그림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이라도 참고 견뎌야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의 도상을 중심으로 회개를 강조하는 그림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인간적 삶의 교훈을 전달하는 그림들이 등장했다.

 

 

 

 철학과 미술의 융합, 라파엘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드로 성당의 '서명(署名)의 방'을 꾸미기 위해 철학, 신학, 시학(詩學), 법학 등 당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4개 분야의 학문을 주제로 하는 벽화 제작을 라파엘로에게 주문했다. 그 중에 철학 즉 '인간의 학문'을 주제로 하는 그림이 바로 <아테네 학당>이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10~1511년

 

 

 

길이가 8m에 달하는 거대한 이 작품에는 54명의 고대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들이 등장한다. 화면 중앙의 두 인물은 서구 문화사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가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은 왼손에는 그의 저서 『티마이오스』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플라톤이 들고 있는 책은 세계의 본질을 논하는 형이상학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운 처신을 논하는 윤리학이다. 플라톤이 현상을 초월하는 본질인 이데아(idea)를 추구했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은 현상에 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이 취한 자세는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철인의 철학을 상징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대의 걸출한 사상가들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특징적인 상황설정과 함께 묘사했다. 주요 인물만 예를 들어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서 녹색 옷의 소크라테스가 무리들 틈에서 열심히 토론하고 있고, 맨 앞줄 좌측에는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수학자 피타고라스다. 오른쪽에는 컴퍼스로 도형을 그리는 유클리드가 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와 고대 그리스를 서로 대응시켜 두 시대의 위인들을 향한 작가의 존경심을 표현하면서 고대의 부활에 의한 인문주의의 찬미를 드러내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찾는 창조적 역량

 

최근 우리 사회에 각광받고 있는 키워드는 융합이다. ‘통섭’(統攝)이라 불리기도 하는 융합은 하나의 분야에 다른 것들을 접목하고, 섞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융합은 이미 수백 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의 진원지인 피렌체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융합의 사고를 지닌 인물을 ‘르네상스 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르네상스 맨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우리는 그를 미술가로 알고 있기도 하지만 천재적인 과학기술자로도 알고 있다. 실제로 그는 미술, 수학, 물리학, 공학을 망라한 다양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시대에 앞선 천부적인 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융합의 사고는 꼭 학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술 분야에서도 필요하다.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해결해야 할 새로운 융합주제는 끊임없이 늘어난다. 어려서부터 복합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릴 줄 아는 훈련이 된다면 창조적 예술 역량을 이끌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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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1-2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뜬금없지만) 혹시 <데카메론>을 읽었나요? 우리 같이 시작, 하고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읽어보는 게 어때요? 혼자는 시작을 못하겠어요(!) 자주 와요. 자주!!!

cyrus 2012-11-23 18:23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연말 학교 생활이 더 바빠서 글도 자주 올리지 못하게 되었네요. ^^;; 데카메론은 아직 안 읽어봤어요. 아이리시스님과 같이 읽는다면 당장 책 구입해서 읽을 수 있어요~!! ㅎ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11-27 00:59   좋아요 0 | URL
그럼 우리 내년에 해요ㅎㅎㅎ(미루기 대마왕!!)

cyrus 2012-11-27 11: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내년 1월 1일부터 시작해요!
 

 

 

 

 

 

 

 

 

 

 

 

 

 

 

 

가난한 대학교 국문과 시간강사인 지섭은 논술강사와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다. 철학책 읽기를 좋아하는 철학과 대학생 민우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한다. 심상대의 중편소설 ≪단추≫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은 우리 시대 젊은 비정규직 인문학도의 초상화다. 소설가 심상대는 젊은이들, 특히 '문사철' 공부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앞날을 향해 살아가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올해 부산 BEXCO에서 11월 1일부터 3일, 사흘동안 제2회 세계인문학포럼이 진행되었다. 올해는 유독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를 책, TV 심지어 대선판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단어가 되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웰빙'(Well-being) 열풍의 데자부가 느껴진다.  그 때는 '잘 먹고 잘 사자'는 것이었는데 올해는 잘 살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것도 중요해진 것이다. 세계인문학포럼도 올해 주제를 '치유의 인문학'으로 정했다. 이 행사에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 강연을 펼쳤다. 이들은 무한경쟁 사회에 지치고 상처 입은 현대들을 위해 인문학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참된 자아를 찾자고 입을 모았다.

 

나는 이번 세계인문학포럼에 대학생 자격으로 자원 참가했다. 석학들의 강연이 대학생 이상의 지식 수준을 요구하는 내용이라서 대학생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대학생들이 포럼에 참석했다. 참여한 학생 일부는 이력서 한 줄을 채우기 위해서 온 것도 있었지만 나처럼 순수하게 인문학에 관심 있어서 온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포럼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는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을 위한 '차세대 리더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이 곳에서 나는 포럼 주제인 '치유의 인문학'과 관련하여 100여 명쯤 되는 학생들 앞에서 학생 대표로 발표를 했다. 발표가 끝나면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토크 콘서트'과 비슷한 형태로 진행했다. 몇 몇 학생들 중에는 내가 대답을 못 할 정도로 수준 높은 질문을 하기도 했으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문학을 기피하는 사회에 아쉬워하는 공대생도 만날 수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곳에서 인문학에 관심 많은 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석학 단 한 명도 이 자리에 없었지만(<나의 서양미술순례>의 저자인 서중식 선생님만이 이 행사에 유일하게 참석하여 강연을 했다) 대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특히 인문학도 대학생들을 위한 인문학 포럼이 너무나도 좋았다.

 

포럼의 모든 행사가 끝나고 난 뒤, BEXCO 건물을 빠져 나오는 인문학도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했다. 과연 그들도 나처럼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모습은 마치 밤 12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려 재투성이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와 같았다.  사흘간의 인문학의 향연이 끝나면 전국의 인문학도들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토익, 자격증을 공부하거나 학비를 모으기 위해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한다.  미래 준비를 위해서 치열한 삶의 시간에 파묻힐수록 좋아했던 인문학 공부는 점점 잊혀져만 간다.  

 

 

 

 

 

 

 

 

 

 

 

 

 

 

 

 

 

 

최근 불어오는 인문학 열풍은 ‘풍요 속의 빈곤’이다. 미래의 인문학을 책임질 젊은 인문학도들은 ‘휴머니타리아트’(Humanitariat)로 전락했다. ‘인문학’(Humanities)을 공부하면서도 취업의 벽에 막혀 계약직, 아르바이트 등의 비정규직 노동을 하는 ‘노동 계급’(Proletariat)이다.

이들은 인문학의 필요성을 자각하지만, 사회가 그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저조한 취업률을 기록한 인문학과는 대학 내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했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 중 과반수는 전공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기업이 인문학을 사랑한다고해도 모든 인문학도를 사랑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기업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창의적 인재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기업은 인문학을 많이 찾기 때문이다. 기업 환경이 기존 정보산업을 넘어 창조산업 중심으로 바뀌며 효율성 중심의 경영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인문학에서 찾고 있다. 대학교에서 찬밥 신세가 된 교수들은 기업으로 옮겨 최고경영자와 직원들 앞에서 인문학을 강연한다. 기업이 인문학을 지원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올해 우리나라에 열린 슬라보예 지젝의 '인문학 콘서트'다. 인문학 강연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온 아트앤스터디와 모 의류 브랜드 기업과의 공동 개최로 이루어졌는데 지젝이 우리나라에 오기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인문학이 취업 전선에 죽 쑤고, 사회 내 인지도가 떨어진다고해서 기업에게 동냥하듯이 의지한다고해서 인문학도들이 회생할 수 있는 돌파구가 있을지 의문이다. 기업의 옷을 입은 인문학은 '실용적 학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삶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진짜 인문학이 살아남아야 한다.  

 

인문학자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인문학을 통해 치유하자고 주장하지만 정작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은 휴머니타리아트다. 인문학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성과주의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상처받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휴머니타리아트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을까?  과거, 교양의 성전이었던 대학교가 이 가엾은 학문의 영혼들을 구제하기에는 이미 시대는 과거로의 회귀가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휴머니타리아트들은 정부, 기업의 관심과 지원을 기다린 채 불안과 자조감에 시달려야만 하는가. 아니면 휴머니타리아트가 살아남는 법을 이들의 손에 쥐고 있을 철학책에 찾아야하는 것인가.

 

그들로부터 위로받기를 기대하는 인문학도의 자세는 인문학의 위기를 지속하게 만들 뿐이다. 현실과 괴리된 철학에 심취하는 것만이 휴머니타리아트가 추구해야 하는 인문학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에 나오는 아웃사이더처럼 하이데거의 책을 손에 쥔다고 해서 위안이 될 수 없다. 그 모습은 인문학도의 자존심이 아니라 혼자만의 고독의 몸부림이다.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하여 다 함께 미래를 고민하고 소통하는 인문학이 있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망치는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라고 말했다. 낡고 추상적인 우상(偶像)의 철학을 망치로 깨뜨려 인간적 품성을 회복할 것을 역설했다. 휴머니타리아트는 철학책이라는 근사한 소품을 잠시 내려놓고 공감과 소통을 위한 망치질을 해보자. 인문학을 하면 먹고살기 어렵다는 편견의 벽을 휴머니타리아트가 허물어야 한다. 벽 너머에는 수많은 휴머니타리아트가 있다.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진솔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 그리고 이제 대학과 기업 속에 갇힌 인문학을 구출하여 되돌려받자. '차세대 리더 워크숍'처럼 휴머니타리아트를 위한, 휴머니타리아트가 만드는 인문학 행사가 필요하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유용한 인문적 지식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의 가장 큰 힘은 폭넓은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기를 사유하는 데 있다. 인문학을 주체적으로 공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먹고살기 어려워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아도 인문학 공부를 다 함께 해보자.

한국의 휴머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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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11-1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업 안 되는 대학생도 괴롭지만 얼마 전 기사를 보니 취업 안 되는 학과 교수들도 고생이더군요.기업체 찾아다니며 '우리 학생들 좀 뽑아주세요' 하면서 아쉬운 인사하러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니는 이들도 있더라고요.

cyrus 2012-11-21 18:53   좋아요 0 | URL
학과 학생들 취업률 높여야 자신들 업무성과에 반영되고, 심지어 학생들은 교수를 취업 알선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니.. 과거의 교양인들을 양성하는 대학의 모습을 되찾기가 어려워보입니다..

맥거핀 2012-11-12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보니 기업중에 인문학을 취업에 반영하겠다는 기업도 있기는 하더군요. 어떤 식으로 반영하는지도 궁금하고, 그게 과연 좋은걸까...하는 생각도 들지만요.(인문학마저 '스펙'이 되면 안될텐데요.) 그건 그렇고 휴머니타리아트라는 말이 누가 만든 말이에요? 혹시 cyrus님?

cyrus 2012-11-21 18:54   좋아요 0 | URL
네, 휴머니타리아트는 제가 한 번 만들어봤어요. ^^

루쉰P 2012-11-2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여전히 인문학도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계시네요. ^^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인문학 공부의 열성적인 팬 역시 저입니다.
후후 저 오랜만에 글 하나 올렸어요. ㅋ 살아 돌아 왔습니다. ㅋ

cyrus 2012-11-21 18:55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루쉰님. 잘 지내고 계시죠? 이제 또 추운 겨울이 찾아왔는데 여전히 경비일을 하시는지요? 저는 요즘 대학생활하느라 예전처럼 알라딘에 놀 시간이 없네요, 책 읽고 글 쓰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고,, 그래도 조용한 제 서재에 찾아오셔서 반가운 댓글 인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