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헐리우드 영화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로서 주로 TV와 영화, 인터넷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유포되고 생성되는 문화를 가리킨다. 현대생활에서 대중문화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대중들의 삶을 지배한다. 종래 문화의 향수는 지극히 한정된 일부 계급, 계층 사이에서 고급문화라 하였으나, 생활수준의 향상 및 교육보급의 확대에 따른 문화향수 능력의 향상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문화의 자연스러운 향수범위를 확대하여 대중문화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대중사회는 교육의 보급이나 매스 미디어의 발달에 의해 방대한 인구가 문화의 향수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발원지는 미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다른 국가들에 대해 우위를 확립한 국가적 지위를 가졌고 그를 통해 확립된 패권주의를 바탕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풍요는 영화나 TV 같은 대중매체를 통한 문화산업에서 극대화 되면서 대중문화를 양산한다. 특히 미국의 영화산업은 전 세계로 확장되면서 세계 대전 종전 무렵에는 미국영화가 세계영화 생산의 85%를 차지했으며 미국 내에서 상영된 영화의 98%가 자국영화였다.

 

헐리우드 스타일로 불리는 미국영화는 일반 대중들까지 부르주아적 개성의 심리수준에 맞추기 위하여 리얼리즘, 심리주의, 낙관주의 등을 강화하면서 구조화된다. 이와 같은 영화적 상상력의 부르주아는 동일시로서의 투사로 특정 지을 수 있으며 이 심적인 과정에 의해 상상과 현실이 결합된다. 스크린의 흡인력은 바로 관객의 정신적 과정을 동원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제도란 영화산업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친숙해진 관객이 역사적으로 내면화해 왔고 영화의 소비에 자신을 적용시키는 ‘정신적 기계’가 되는 것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누린다는 것은 영화와 관객 수용자 간의 호환적 관계를 의미한다. 영화는 관객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흡수하는 한편 관객 역시 관람상황 자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에 의해 영화를 자신의 심리세계 내부로 흡수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의미작용을 통해 관객을 주체로 위치하게 만들고 그의 욕망이 끝나는 이미지들의 사슬을 환유적으로 미끄러지게 만들면서 특정한 쾌락을 생산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의 핵심적 구조가 ‘동일시’ 개념이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광고 등의 대중문화의 미세한 부분까지 장악하고 환영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문화

 

 

 

 

 

 

 

 

 

 

 

 

 

 

 

 

대중문화는 대중을 기반으로 하여 생산되고 소비되는 속성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중매체를 매개로 한 문화산업의 형태로 수렴된다. 따라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분석은 대중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화 산업의 구조와 방식에 집중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늘날과 같은 독점자본주의 시장체제에서 우리가 무지하게도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심오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파시즘과도 같은 현대의 독점 자본주의 하에 ‘문화’는 실제로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정교하게 합리화시킨 대중조작 현상으로서 이것이 하나의 체계로 작용하는 방식에 관하여 비판한다. 문화산업과 이로 인해 양산되는 ‘긍정적 확신에 찬 문화’는 자본주의가 광고를 통해서 소비자의 욕구를 인위적으로 자극하고 생산성과 순종적 합의의 윤리를 주입시킨다. 개인이 무언가 다르거나 더 나은 것을 상상하는 능력을 가차 없이 약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상품의 다양성이 독점이라는 현실을 은폐하는 것처럼 외견상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은 표현을 양상하고 전달하는 체계의 획일성을 은폐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을 따르면 독점 하에서 모든 대중문화는 동일하며 유행하는 노래나 스타, 드라마들은 주기적으로 순환하고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유형일 뿐이고 오락 자체의 특정한 내용도 이러한 유형으로부터 비롯되며 변화하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문화의 중요한 개별 지점들은 분리하여 상호교환 할 수 있게 되고 심지어는 모든 연관된 실제적 의미로부터 소원화됨으로써 작업 외부에 존재하는 목적에 이바지하게 된다. 이러한 목적의 확장과 관련한 광고에는 자본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독점의 배타적 동력을 강화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 전체를 강화시켜주는 고유의 특별한 정당화 양식을 지닌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체제 하에서 생산되는 대중문화란 ‘검인되지 않은 것은 모두 수상한 것’이 된다.

 

 

 

 구경거리의 사회 속 대중문화

 

광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고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게끔 하는 치밀한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광고에 노출된 사람은 자신을 모델과 동일시하며 광고가 꼬드기는 대로 소비에 동원된다. 광고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소비를 촉진시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만 소비자는 사실이 아닌 광고의 환영적 이미지를 소비하며 자신을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대중문화의 한 속성으로서 기 드보르는 자본주의로 인해 ‘직접 체험하던 모든 것이 재현의 형태로 변모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이미지는 상품의 최종적 형태가 되며’ 그 결과 대중을 상대로 양산된 환영이 질서 유지에 점점 더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구경거리’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문화산업은 ‘폐물’과 같은 타락한 성격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 희생자들이 잠재의식 속에서 현상 유지 상태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사악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검인되지 않은 것 = 모두 수상한 것’으로 연결되는 일반화된 인식은 대중문화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매체의 배후에서 소비를 꼬드기는 자본권력의 체계적 작동방식은 소비에의 유혹을 안달이 난 우리 안의 욕망에 근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억만장자 빌 게이츠는 욕심이 많다. 일전에 미국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한 남학생이 물었다. “만약 당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제일 먼저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책을 빨리 읽고 싶어요.”

어린 시절 책벌레로 통했던 빌 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5월 11일에 시행되었던 제1회 한국독서능력검정 대상을 받은 책벌레가 미래의 빌 게이츠가 된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독서능력검정이었다.”  한국독서능력검정에 처음 응시하는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은 빌 게이츠의 소원을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한국독서능력검정위원회가 선정한 도서를 다 읽어야지 오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 총 100권이다.

주최 측은 이번 독서능력검정을 “대학생들이 독서를 통해 오늘날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력을 함양하고 취업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처음 시행되는 독서능력검정을 두고 기업 채용 담당자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어떤 책을 읽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를 알면 구직자의 지적 수준과 창의력은 물론이고 인성까지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나는 이러한 반응에 동의할 수 없다. 독서능력검정에 참가하는 대학생들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참으로 의아스럽다.

독서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활자로 된 책을 읽는 행위지만, 좀 더 넓게 해석해 보면 지식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독서를 통한 성장은 책을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활자 속에 갇힌 지식이 맞는지 틀렸는지 고르는 과정만으로 한 사람의 지적 성장을 평가할 수 없다.

어릴 적 수영을 배울 때 누구나 기억하는 주의사항이 있다. ‘몸에 물을 묻힌 뒤 들어가라.’ 준비운동이 없으면 자칫 탈이 날 수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스펙을 위해 무턱대고 책 속으로 뛰어들면 머리에 쥐가 난다. 독서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기는커녕 엄청난 부담감만 가질 뿐이다.

 

 

 

 

 

 

 

 

 

 

 

 

 

 

 

 

어린 시절 책벌레 소리 들어 본 대학생들이라면 독서능력검정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진짜 책벌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일본의 책벌레 다치바나 다카시는 왜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느냐는 물음에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100권의 책을 억지로 폭식하고 있는 전국의 책벌레들은 책을 제대로 먹을 줄 모른다. 자신이 ‘스펙’의 불빛에 향하다가 청춘의 시간이 타 죽어가는 나방인지 아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13-05-21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마지막 문장 명언이고!
더운데 잘 지내시죠? 사이러스님~ :)

cyrus 2013-05-21 17:03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죠. 여기 말고 다른 온라인에서도 자주 만나잖아요 :)

blanca 2013-05-2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백권이요? 게다가 문제까지. cyrus님 도전하시는 건가요? 건투를 빕니다.

cyrus 2013-05-21 17:05   좋아요 0 | URL
아니요, 책 읽고 나서 내용 물어보면 기억이 잘 안 나는 편이에요. 독서 능력으로 시험을 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그냥 지금처럼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읽는 자유로운 독서가 좋아요. ^^
 

 

 

♣ "생각해보겠습니다"와 '해보겠습니다"의 차이

 

나는 전공이 행정학과다. 그러나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은 전공 강의만 듣지 않는다. 올해가 졸업반이라서 마지막 대학생활을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타과 전공과목 강의를 듣기로 결심했다. 그 중 듣는 타과 전공 중에 회화과 3학년 전공필수인 현대미술론을 공부하고 있다. 강의를 듣는 학생은 총 40여명. 그 중에 나를 포함한 남학생은 3명이다. 나머지 2명의 남학생은 회화과 소속이다. 나머지 여학생들 중에도 타과 전공이 있다. 실내디자인학과 소속 1, 생명공학과 소속 1명이다. 과 특성상 여초 현상이 있는데다 타과 학생이 듣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 수업에서 유독 눈에 띈다. ‘현대미술론을 가르치는 교수님 또한 여자인데 그렇다고 내가 외모가 출중해서 교수님 눈에 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학교 내에서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 예체능 계열, 그것도 회화과 전공 강의를 듣는 학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서도 나 같은 학생을 처음 봤을 것이다. ‘행정대학이라는 소속의 분류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교수님의 눈에 확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차별화된 이미지로 굳어져서 좋은 점은 있지만 단점도 있다.

 

가끔 교수님은 내가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라서 그런지 미술적 기본지식 수준이 회화과 학생들보다 낮게 볼 때가 있다. 이래봬도 작년 학기에도 같은 회화과 전공과목이며 동일 교수님이 가르치던 서양미술사를 들은 적이 있었으며 그 수업을 듣기 전부터 나름 미술사의 기본적인 흐름을 꿰뚫은 편이다. 잘난 사족 하나 덧붙이지자면 서양미술사수업은 많은 시간 투자하지 않고 공부해서 A+학점을 받기도 했다. 내 성격은 상대방에게 드러내지 못한 또 다른 나의 재능을 은연중에 숨기면서 점층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내 손으로 직접 양파껍질 하나하나 벗기듯이 말이다. 그럴 때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끼는 순간, 기분이 좋다. 하지만 너무 드러나지 않게 되면 이런 오해를 꾹 참고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기본부터 내실을 다진다는 마음으로 임하여 공부를 하게 되면 미술에 대한 생각과 시야를 확장할 수 있어서 좋다. 예전에 책으로만 읽던 공부와는 학문을 습득하는 과정과 그 기분이 차이가 있다. 회화과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화가로 활동하시는 분이라서 최신 현대미술의 트렌드(Trend)를 귀동냥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학습법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과제를 많이 내면서도 현대회화의 흐름에 맞는 주제를 낸다. ‘고전주의 양식을 A4 용지 5장 이상 쓰시오.’라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에 대해서 논하시오,’와 같은 무리하게 미술론을 작성하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과제를 제출하지 않는다. 특정 영화나 미술 관련 다큐 영상을 보여주고 감상문을 쓰라거나 사물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 등을 쓰는 과제를 주로 낸다. ‘현대회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붓과 팔레트를 쥐는데 익숙한 회화과 학생들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편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현대미술론담당 교수님이 과제 어렵기로 유명하다. 갑작스럽게 교수님이 과제 하나를 제출할 때마다 회화과 학생들이 울상과 탄식을 연발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최근에 또 교수님이 과제를 공시했는데 예전에 낸 것보다 한층 더 창의적인 형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대미술의 방식에 근거해서 자신만의 작품을 구상해서 간단하게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교수님은 또 이번 과제에 학생들의 발표까지 요구하셨다. 회화과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 완성해야 한다. 제작하면서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작품을 전공교수에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작업 과정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작품 노트라고 보면 될 것이다.

 

처음에 교수님이 그 과제를 언급했을 때는 비 회화과 학생인 내가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하기 위해 만든다는 취업 포트폴리오 하나라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작품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는가? 이번에는 붓을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불리하게 된 셈이다.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에 갑자기 교수님이 나를 향해 말을 건다.

 

“cyrus은 비 회화과 학생이라서 이번 과제가 생소하겠지만 너한테도 미술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데... 혹시 발표해 볼 생각은 있니?”

 

교수님이 말을 걸기 전까지 발표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짧게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유보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자 교수님의 말. 그래, cyrus가 해보겠단다. 난 네가 발표할 줄 알았어.”

 

생각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교수님은 발표를 하겠다는 의미의 해보겠습니다.”라고 잘못 듣고 만 것이다. 본의 아니게 과제에 대한 부담을 떠안고 말았다. 과제 공지한 날 이틀 뒤에 수업이 있어서 작품을 구상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주어진 시간은 거의 하루뿐이었다. 다행히 그 하루가 강의 한 개도 없는 공강 요일이라서 강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편안하게 집에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고민은 쉽게 풀렸다. 내가 미술 지식이 정말 문외한이었다면 하루 이상 구상하고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화가 한 명을 염두하고 있다는 것도 과제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마그리트를 위한 오마주(Hommage)

 

 

 

 

cyrus  「마그리트의 달걀」 2013년, 포토샵으로 제작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기법에 빌려서 '마그리트의 달걀'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만들었다. 이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데 구상에 공들인 시간이 많았을 뿐 제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밖에 안 들었다. 마그리트는 일상적인 관계의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일탈의 사고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 (dépaysement)이라고 한다.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사물은 일반의 상식과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등장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대상이 결합되어 나타나거나, 사물이 그 고유의 성질을 상실한 채 묘사된다.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의 크기를 변형하여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가 나타난다. 본질적인 사물의 의미가 상실되어도 그의 그림은 아름다우면서도 매혹적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

 

 

내가 만든 그림을 보면 벌써 눈치 챘겠지만 그림의 배경은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피레네의 성」에서 인용했다. 혹자는 이러한 방식을 패러디(parody), 짖궃게 말하면 표절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패러디가 아니라 오마주(hommage)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패러디는 원전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이 안고 있는 의미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희화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오마주는 원작의 존경과 경의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hommage는 프랑스 어로 '존경' '감사', '경의'라는 뜻이다)

 

 

 

♣ 깨지지 일부 직전 달걀의 의미는?

 

 

 

 

 

 

 

 

 

 

 

 

 

 

 

 

 

 

 

 

 

 

그렇다면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커다란 달걀은 무슨 의미일까? 자세히 보면 달걀에 깨진 흔적이 있다. 이제 막 부화할 조짐이 보이는 상태다. 깨지기 직전 상태의 달걀을 보자마자 '아프락사스'(Abraxas)가 연상되었다면 정말 대단한 미적 감성의 소유자라고 칭찬하고 싶다. 그림 속 달걀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를 의미한다.

 

 

 

 

 

 

르네 마그리트  「천리안(투시)」 (1936년)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사실 알의 상징은 마그리트의 또 다른 작품들에도 무수히 등장한다. 그 중 아프락사스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그림이「천리안」이다. 새가 태어나 위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낡은 구세계(알)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아프락사스)로 향해야 한다. 우리는 알의 상태, 즉 자고 있다.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이며 자고 있는 상태인 알(인간)에게 깨어 있는 결과로서의 새(자유, 생명, 목표)가 되어야 한다. 새가 알을 깨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듯, 사람 역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만큼의 고통을 느끼고 인내해야 한다. 새는 아프라삭스라는 신을 향해 날아가듯 사람 역시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상하고 있다. 저 커다란 알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미술이 되는 건 아니다

 

 

 

 

 

 

 

 

 

 

 

 

 

 

 

 

 

 

"뭐야, 이것도 그림이야?"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과제로 한 번 만들어 본 장난스러운 합성사진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다고 좋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현대미술은 붓을 잡고 대상을 똑같이 재현해서 그린 그림을 환영하지 않는다. 고전적인 재현의 그림은 피카소가 괴상한 형태의 인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마르셀 뒤샹이 전시회에 소변기를 출품한 그 순간부터 종말을 고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셀 뒤샹  「샘」 1917년

 

 

1917년 어느날 한 하드웨어 상점에서 구입한 변기에 리처드 머트(R.Mutt)라는 이름을 서명한 뒤 뉴욕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후 심사위원들로부터 배척당한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향방을 결정한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변기 작품 ‘샘’은 여전히 현대미술이 얼마나 기괴하며 현학적인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을 귀히 여기는 것은 천재적 예술가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유일무일한 것이기 때문인데 이 변기작품 ‘샘’처럼 기계로 만들어진 대량 생산품인 변기를 선택한 후 예술가가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한다면 과연 그것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에 반기를 든 뒤샹에게 있어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물건의 실용성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로 돌아가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행위 즉, 아이디어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이라는 그의 이론은 기존미술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며 이것도 작품인가 의아해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일상적 사물을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의자, 병, 조그만 달걀 등등일 뿐이지만 소변기조차도 일상적 사물로서의 인식을 단절하고 순수한 형태적 의미만으로 바라본다면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로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하게 된다. 비루한 내 합성사진 작품도 그렇다. 고정관념의 의미로 구분하려는 사고를 조금만 벗어난다면 또 하나의 미술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미술은 어렵지만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당하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1928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 온다. 올해 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키스하는 대회를 열었다던데 무려 50시간 25분 1초 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간동안 키스를 한다면 입술이 부르트고 호흡이 가빠질텐데 흰색 천을 얼굴에 덮어 씌운 채 키스를 실제로 한다는 건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천을 뒤집어쓴 채 입맞춤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서글프게도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도 그들에게 무의미하고,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 전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런 사랑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숨을 가로막는 것 또한 그 사랑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행복하지만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사랑을, 작품 속 연인들은 알고 있을까? 사랑하지만 전부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림 속 연인들처럼 우리는 소통의 불완전성에 의해 질식 상태에 이르렀다. 편지 등 아날로그 방식에서부터 인터넷, SNS 메신저, 휴대전화 등 디지털 방식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 수단은 점점 발달해왔지만, 타자와의 소통은 의외로 더 불가지론에 빠지는 현실을 반영한 아이러니의 ‘천’인지 모른다. 그런 현실의 사랑을 마그리트는 달달해야 할 연인들의 키스를 삐딱하게 봤던 것이다.

 

 

 

 라디오 같은 찰나의 사랑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시인의 시적 화자 또한 누가 라디오 단추를 누르듯 자신을 눌러줘 소통하길 갈구한다. 누군가에게 ‘전파-의미’가 돼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참된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연의 3행을 보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 찰나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애초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 피우는 꽃 같이 순수한 것이지만, 이 시대는 사랑도 미국식 햄버거처럼 즉흥적이고 편리한 방향으로 진화되었나 보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 같은 편리한 사랑을 마그리트의 연인들과 겹쳐서 본다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은 기업체, 학교, 국가 등 거대한 조직에서 사원증, 학생증, 주민등록증 등의 문서로 소속감을 느끼라고 공식적 추궁을 받으면서 타자와의 접촉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서로를 길들이면서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공리적으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길들여진 척하다 쓸모없어지면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처럼 상대를 사물화·수단화한다.

 

 

 

“이제 우리는 사유재산, 이윤, 힘을 지주(支柱)로 삼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취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이 산업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양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중에서)

 

프롬이 보는 산업화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고 봤다. 상품의 가치는 쓸모가 결정한다. 인간에 대한 판단도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떤 쓸모가 있는가’다. 판단의 계량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결혼정보 회사다.

 

 

 

 

 

 

신랑, 신붓감의 학력과 직업, 연봉과 재산, 신체조건 등 이들의 기준이 대부분 숫자로 이뤄졌다. 결혼이 계량화되고 숫자화 되는 세태 속에 진정한 사랑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까?  결혼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정신적 공유가 없는 조건에 따른 육체적 결합이란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다. 숫자를 앞세운 혼인의 병폐는 가끔 신문 가십을 통해 접할 수 있다. 혼수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고 마는 부부를 볼 때 숫자에 얽매인 결혼의 비참한 말로를 보게 된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거나 사람이 숫자에 함몰될 때 소통에 의한 인간미는 사라지게 된다.


  

 

 타자의 윤리학

 

어떤 이는 속도숭배와 물질만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자연과 교감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생활전선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일상인의 처지에서 시적 화자의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친화적 삶은 배부른 사치이거나 사회 부적응에 대한 도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 타자와의 참된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소통해보아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플라톤 이래 서양은 타자를 ‘어떤 이상(서양적 가치)’으로 융합하는 자기동일시였다고 일갈했다. ‘나/너, 서양/동양, 남자/여자, 백인/유색인, 기독교/비기독교’ 등등의 이항대립 쌍을 상정하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경향이었다는 지적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절대적으로 다른, 나에게로 도무지 환원할 수 없는 ‘무한자’다. 그러므로 내 식대로만 타자를 자기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 타자의 단절과 차이로 인해 공리주의는 좌초하고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배가 닻을 올린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타자성)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중에서)

 

  

구약성경은 과부, 고아, 빈자, 이방인을 대표적인 약자로 그린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그들에게 빗댄다. 타자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단지 ‘나와 다르다’는 사실, 바로 이 ‘타자성’으로 인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자를 사회 약자처럼 ‘나’가 먼저 책임져야 한다는 윤리와 연대의식의 강조다. 타자와 잘 만나는 동기는 ‘주고받기(give and take)’ 같은 공리성이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에 교환이 불가능한 ‘어떤 도덕’이다. 예컨대 물에 빠질 위험에 놓인 아기를 구하거나 기아 난민, 이주노동자, 종군위안부 할머니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혜택이나 명예 등을 바라지 않고 그냥 윤리적 호소에 의해 타자를 배려해야 진정한 타자의 윤리학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하고,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뿌리(근원)는 두 가지 관계(근원어)로 뻗어난다고 한다.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이다. ‘나-너’는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타자(너)를 만나는 인격의 세계다. 주체와 주체가 서로 평등하게 만난다. ‘나’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삶이 더 풍성해진다. 참된 만남이다.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쏟은 시간”이라는 여우와 어린 왕자의 깨달음 같은 서로를 길들이는 참된 소통의 대화다. 현대인들 또한 여우를 만나기 전의 어린 왕자와 같지 않을까.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물질적으로는 날로 풍요로워지고 있는 요즘, 과거 참된 소통의 대화가 오고가는 관계를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 삶이 정말 살 만한 날들로 이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제부터인가 여기저기서 ‘융합의 시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놓곤 한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학문 분야들이 뭉치면서 내는 시너지 효과가 창의적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 보니, 융합에 어울리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노력들도 다양하다.

 

하지만 통섭형 인재가 인문학과 과학의 지식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는 인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Consilience(통섭)'를 처음으로 제시한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을 "지식의 통일은 서로 다른 학문 분과를 넘나들며 인과 설명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보다 어렵겠지만 생물학,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통섭형 인재란 인문학, 과학을 넘어서 다양한 학문의 지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상 통섭형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은 아니다 .이과와 문과로 나눠 가르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서로 저쪽은 몰라도 된다고 판단하는 이런 교육 체계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이과-문과’, ‘과학-인문학’으로 만들어 낸 불신과 단절의 골은 너무나 깊어졌다. 이 골짜기를 매꾸지 않는 이상 통섭형, 융합형 인재는 단시간 내에 나오기가 힘들다.

 

 

 

 

 

 

 

 

 

 

 

 

 

 

 

 

 

 

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의 불신과 몰이해에 대한 이 같은 우려는 이미 반세기 전에 영국에서 제기되었다. 195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유명한 리드 강연에서 C.P. 스노우은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인 문화 간의 단절은 문화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발전에도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강조했다. 50여 년 전의 문제 제기는 그러나 21세기 첨단과학기술혁명을 맞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사회의 특징이 분업과 전문화라고는 하지만, 지나친 전문화는 오히려 영역 간의 단절과 고립을 가져올 수 있다. 원래, 학문이란 진리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 뿌리가 하나였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보통은 자연과학을 가리키지만, 보편적 법칙이나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체계적 지식이라는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나 프랑스어의 ‘science’는 모두 어떤 사물을 안다는 라틴어 ‘scire'에서 연유된 말로 넓은 의미의 학(學)이나 학문(學問)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이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들면서 학문의 분화현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특히 인문학과 과학간의 간극은 엄청나게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단절의 상황에서 스노우가 두 문화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단수로 사용되는 문화를 복수로 표현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같은 지식인이라고는 하지만, 인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자간의 문화적 이질감은 극심했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영국에서 반세기전에 제기했던 두 문화의 괴리 문제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 고등학교에서의 문과와 이과 문화는 이런 극단적인 ‘두 문화’의 전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학문 간의 단절현상이 더욱 심각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유사 인접학문들이 모여 있는 사회과학계만 보더라도 정치학자들은 경제를 모르고,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인 사회학이론조차 모른다. 이웃학문일지라도 학문과 학문 간에 서로 높은 담을 쌓고 지낸다. 교수채용에서 학부·석사·박사의 동일성이 절대적인 요건이 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학문적인 폐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절감할 수 있다.

 

전공의 벽과 상관없이 널리 공유해야 할 고귀한 지적 유산이 많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제도나 교과과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에 아까운 에너지를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태는 아쉬움, 안타까움과 같은 ‘추상적 문제’가 아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린 시절부터 ‘벽’을 실감하고, 무력과 좌절을 품게 돼 분열에 이어 혼란에 빠지는 등의 실체적 문제를 겪는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두 문화’는 나눔이 아니라 융화에서 오히려 더 각자의 진정한 본원성을 찾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닦는 데에 교육이 앞서야 한다.

 

 

 

이제는 소통과 공유를 통해 분야 간의 벽을 허물고 대화해야 한다. 과학계와 인문학계가 대화하고 과학과 사회가 대화해야 하며 정치와 예술이 함께 하고 문화와 기술이 함께 가야 한다. 문화의 힘은 공유에 있다. 함께 하지 않는 문화는 오히려 사회발전의 걸림돌일 뿐이다. 스노우의 두 문화론이 진정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바로 그 점이다.

 

다른 분야와 소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할 필요는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분야와의 대화를 준비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 여권과 비행기표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행자들은 목적지를 소개한 책자를 보고, 간단한 외국말을 공부하는 등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많이 준비할수록 더욱 유익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외국을 여행하게 되면 다양한 외국 음식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는 입맛에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외국의 음식을 나름대로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른 분야와의 만남도 이와 흡사하다. 나의 지식을 고집하고 상대에게 그것을 가르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탐구하는 여행자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16-02-20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의 힘은 공유다 라는 말 참 좋네요. 최근에 <두 문화>를 읽고 알라딘 리뷰와 페이퍼를 보고 있는데 좋은 글들이 많네요ㅎ

cyrus 2016-02-20 09:48   좋아요 1 | URL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보니까 반가우면서도 부끄럽네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2-20 10:25   좋아요 0 | URL
윽.. 저도 부끄러운 글들이 많은데 걱정이네요ㅎㅎ

cyrus 2016-02-20 10:30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글을 많이 남기려면 이런 상황을 각오하셔야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