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신문을 소리 내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책을 소리 내서 읽어본 경험은 하나씩 다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문을 소리 내서 읽어보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매일 아침 조간신문을 소리 내서 읽는 우리의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솔직히 신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서 읽는 사람을 만나기란 드문 일이니까요.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신문을 눈으로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는 신문을 보는 이들을 자주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20대에게 신문은 여전히 낯선 인쇄매체입니다. 스마트폰, 인터넷 서핑에 익숙한 우리는 그나마 인터넷 신문을 읽긴 합니다. 하지만 종이신문을 꼼꼼히 읽는 20대는 많지 않습니다. 지하철에 탔을 때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보세요. 종이신문을 읽고 있는 중후한 연세의 어르신 옆에는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대학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제 주변에 있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매일 종이신문을 읽거나 신문 기사 내용을 주제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게다가 집에서 종이신문을 정기 구독하는 친구도 보기 어렵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들은 신문 읽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문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신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거죠. 신문 읽기는 나이 든 사람의 습관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대신에 종이신문을 들여다보는 20대를 어디 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젊은 친구들에게 신문 읽기를 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문을 읽어야 지식이 축적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혀질 것이라는 식으로 장점을 말로 열거한다고 해서 네모난 스마트폰 화면 속에 갇혀버린 그들의 생각을 구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종이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종이신문 대신에 스마트폰 화면 안에 있는 인터넷 뉴스를 보라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으로 한눈에 수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확인한 정보의 기억은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요?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습득한다고 해서 우리의 뇌가 '스마트'(smart)하게 되진 못합니다. 그냥 눈으로 인터넷 신문을 훑어보는 것은 수박 겉핥기식 정보 습득에 불과합니다.

 

매스미디어 홍수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수많은 매체들로부터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정보매체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인터넷 독자들은 대개 관심 있는 것만 골라서 보기 때문에 사고의 극단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폰 이용의 부작용을 연구한 학자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읽더라도 종이책이 아닌 컴퓨터 화면으로 읽으면 기억이나 성찰 능력이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랑, 정의, 배려, 경청, 관용, 도덕과 같은 가치를 성찰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스마트폰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신문과 책을 많이 읽은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을 만들었는데, 스마트폰 이용자, 특히 젊은 세대는 신문과 책 읽기 장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양한 시각과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는 신문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신문 읽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일부 신문 기사들 중에는 공정하지 못하고 올바른 내용이 없는 영양가 불량인 것이 많다고요. 이에 대해서 주류 언론에 할 말이 많았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나라 없는 사람>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매체인 신문과 TV는 오늘날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부실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비겁하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

 

 

 

 

 

 

 

 

 

 

 

 

 

 

 

 

 

 

사실 종이신문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는 합니다. 특히 나쁜 신문의 그릇된 기사는 신문을 맹목적으로 읽는 젊은 독자의 상식 습득의 과정과 양심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읽는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가 선택한 신문의 기사 내용과 논조를 그대로 믿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특정한 신문을 선택한 바로 그 이유가 자신이 그 신문에 보내는 신뢰의 결과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일단 선택한 뒤에는 스스로 어떠한 의심이나 비판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신문 읽기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중요합니다. 저학년 어린이나 청소년들 대부분은 NIE 교육을 많이 배우게 됩니다. NIE 교육은 무조건 이제 막 성장하려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닙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 위해 걸음마하기 시작하는 대학생들도 NIE 교육을 받으면 좋습니다.

 

신문은 단순한 정보와 지식을 나열한 종잇조각이 아닙니다. 신문 속에는 많은 지혜,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와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게 됩니다. 또한 세상을 바르고 반듯하게 살아가기 위한 진리와 가치와 정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한 삶의 방법과 우리의 생활을 한층 윤택하게 해 주는 구실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한 단순 검색이나 뉴스 검색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하여 해설 기사나 사설, 칼럼 등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생각하며, 표현하는 기능을 길러주는지 종이 신문을 찬찬히 읽으며 정리해야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힘을 통해 광범위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인생의 길잡이로서 신문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매일 아침에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종이신문을 눈으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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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출판사 '열린책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진짜 고전 돋는 고전게임 <위대한 개츠비>! shift와 z키만 누르면 될 정도로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줄거리에 맞춰 게임이 진행된다. 개츠비는 옛 연인 데이지와의 재회를 위해서 주류 밀매로 막대한 부를 가진 재벌이 되지만 결국에는 끝내 사랑에 실패하고 어이없이 죽음을 맞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배경은 원작과 똑같이 1920년대 미국. 그런데 게임 캐릭터는 닉 캘러웨이다. 레벨 1의 첫 스테이지부터 닉은 개츠비를 만나기 위해서 온갖 적들을 무찌른다. 게임을 클리어하면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소설 속 장면이 나온다. 게임이 허접해 보이지만 나름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게임 속에 200점짜리 ‘황금 모자’가 나오는데 개츠비가 이걸 먹으면 황금색 옷을 입으면서 변신한다. 무기도 장거리에 있는 적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업그레이드된다. 여기서 '황금모자'의 유래가 재미있다. 피츠제럴드는 원래 소설 제목을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로 정하려고 했다.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라는 허구의 인물이 쓴 짧은 시가 나온다. 시에 언급되는 ‘그녀’는 개츠비가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 데이지를 가리킨다. 오직 사랑하는 연인을 차지하기 위해 상류 사회로 진출하는 개츠비를 상징한다. (그런데 게임상에서는 '황금 모자를 쓴 닉 캘러웨이'가 된다. 개츠비를 주인공으로 설정해서 게임을 만들었다면 진짜 원작 싱크로율 100%였을텐데...)

 

“그럼 황금 모자를 쓰려무나.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높이 뛰어오를 수 있거들랑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오르려무나.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사랑하는 이여, 황금 모자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차지해야겠어요!”

 

모든 게임이 클리어하면 엔딩 장면에 소설 결말에 나오는 문장이 영어로 나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소설 엔딩 장면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래 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민음사, p 255)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을 한 번이라고 읽은 사람이라면 게임 화면 속에 숨겨진 '개츠비 코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미국판 게임 <The Great Gatsby>를 할 수 있는 링크

 

http://greatgatsbygame.com/

 

 

 

 

 

게임 오프닝. 게임을 시작하려면 Enter키를 누르면 된다.

 

 

 

 

 

게임 첫 번째 스테이지. Gatsby's Party.

소설을 읽어보면 개츠비는 자신의 저택에서 수백명의 손님들과 함께

호화스러운 파티를 여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게임 속 닉은 파티를 준비하는 웨이터와 파티에 온 손님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한다.

 

 

 

 

황금 모자 보너스 먹고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가 아니라 '닉 캘러웨이'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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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3-2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픽을 보니 상당히 오래전 게임 같네요^^

cyrus 2013-03-24 19:26   좋아요 0 | URL
ㅎㅎ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게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어요 ㅋㅋㅋ
 

 

 

 미소년을 향한 '반쪽' 요정의 무모한 욕정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본래 양성을 지녔는데, 신이 반쪽으로 분리한 후부터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라고 썼다. 곧 사랑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사랑과 욕망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순수한 감정보다 집착의 욕망이 더 앞선다면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는커녕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야기는 욕망이 앞선 사랑이 부른 슬픈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어느 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호수에 오게 되었는데, 그 호수에는 살마키스라는 님프(Nymph, 요정)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멋진 외모의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눈에 반하여 구혼하였다. 그러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사랑을 몰랐다. 요정의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 번 퇴짜 맞은 살마키스의 심장에는 미소년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거절은 욕망으로 지펴진 사랑의 불꽃을 더욱더 피어오르게 하였다.

 

어느 날, 살마키스는 혼자 호수에서 물놀이하고 있었는데 그를 지켜보던 살마키스는 이때를 틈 타서 알몸의 미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자신을 부둥켜안은 살마키스를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살마키스는 자신과 헤르마프로디토스가 한몸이 되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이 기도가 이루어져 둘의 몸의 하나가 되었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의 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영어에서 ‘암수한몸’, ‘자웅동체’를 뜻하는 ‘Hermaphrodite'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만약에 살마키스가 헤르마프로디토스로부터 퇴짜를 맞은 이후에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펼쳤다면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었을까. 헤르마프로디토스 당사자가 살마키스를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났을 것이다. 다만 상대방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섣부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욕망의 몸으로 그를 껴안은 살마키스의 행동이 아쉽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가 묘사한 살마키스를 보라. 강한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 옷을 벗어 던지며 소년을 안으려는 교태 가득한 몸짓을 하고 있다. 그녀의 몸짓을 보니 살마키스의 사랑을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살마키스에게는 헤르마프로디토스와의 짧은 만남이 달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그날 사건은 한낮의 봉변이었을 것이며, 살마키스는 욕정에 사로잡힌 여인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반쪽을 찾는데도 '사랑의 기술'이 필요한가요?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서문 첫 장부터 우리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기술인가?”(p 13)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원인으로 사랑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 대상의 문제,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의 혼돈 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이론을 습득 후 실천을 통해서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데, 우리는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성공, 위신, 돈, 권력 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프롬은 우리가 쉽게 범하는 사랑의 오류를 지적한다. 사랑을 능력에 의해서가 아닌 대상에 의해 성립된다는 점을 믿고, 오직 사랑을 받는 대상 한 명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사랑이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오직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고 나머지는 무시하기 때문에 오류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를 향한 살마키스의 사랑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폭발적인 경험과 성애(性愛)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러나 성애에 진짜 '사랑'이 결여된 상태라면 분리 후에 심한 격리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에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자웅동체 신화를 프롬이 봤다면 공서적(共棲的) 합일이 만들어낸 비극적 사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을 사랑의 미숙한 형태로 보고 있다. (<사랑의 기술> p 36)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 - 마조히즘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가 피학대 음란증, 즉 마조히즘(Masochism)이라고 말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보호하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학대를 가하면서도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의 일부에 귀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무조건 복종, 의존함으로써 고립감에 빠지지 않지만, 독립성이 부족하다.

 

프롬이 보는 마조히즘의 모습은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빗대어 욕망에 점철된 사랑을 은유한다.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작가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만큼 사도-마조히즘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현대 포르노그래피의 효시 격인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성애 묘사보다는 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과 젊은 미망인 파니 폰 피스토르와의 주종 관계를 모델로 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주종 관계를 증명해주는 두 장의 계약서도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작성해서 보낸 계약서 내용만 봐도 소설의 줄거리와 프롬이 정의한 마조히즘을 짐작할 수 있다.

 

 

파니 폰 피스토르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사이의 계약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는 폰 피스토르 여사의 노예가 되어 그녀의 모든 지시나 명령을 여섯 달 동안 무조건 따를 것임을 맹세한다. (중략) 그녀의 종인 그레고르(=자허마조흐)는 노예로서 여주인을 공손하게 받들어야 하며 그녀가 내리는 어떤 호의도 기쁜 선물이라 여기며 받아야 한다. 또한 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하거나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파니 폰 피스토르는 되도록 자주 모피를 입을 것을 약속한다. 특히 잔인한 행동을 할 때 그렇게 한다.

 

(자허마조흐가 폰 피스토르에게 보낸 계약서, <모피를 입은 비너스> p 230~231)

 

 

 

나의 노예 앞!

내가 귀하를 노예로 받아들여 내 곁에 둠에 있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자신을 무조건 버린다.

귀하는 내 의지 외에는 어떤 의지도 갖지 못한다.

귀하는 내 손아귀에 든 눈먼 도구로서 어떤 거역도 없이 내 명령을 모두 이행해야 한다. 귀하가 나의 노예임을 망각하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든지 무조건 복종을 하지 않을 경우 나는 귀하를 완전히 내 임의로 처벌하고 징계할 권리를 갖는다. 이때 귀하는 어떤 불평불만도 해서는 안 된다. (하략)

 

(폰 피스토르가 자허마조프에게 보낸 계약서, 같은 책, p 232)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 - 사디즘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가학성 음란증인 사디즘(Sadism)이다. 앞에서 언급한 ‘피학성 음란증-마조히즘’과 대응되며 마조히스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귀속해서 명령, 복종하려고 한다. 자신을 숭배하고 복종하는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며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 역시 이러한 관계를 통해 고독감을 피하려고 한다. 사디즘은 악명 높은 소설가 마르키드 데 사드 후작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유명하다. 마조히스트의 원형은 자허마조흐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사실 사드의 소설 속 등장하는 비이성적인 인물들은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과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이다.

 

<사랑의 범죄>에 수록된 사드의 단편소설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는 불운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끔찍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인 팍스랑즈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기병대 장교 고에가 있음에도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빼어난 외모를 지닌 프랑로 남작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결혼의 축복을 받으며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사실은 프랑로 남작이 치밀하게 꾸민 간계의 함정이었다. 프랑로 남작은 잔인하게 인질을 살해하는 도적 떼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도적의 소굴에 갇혀버린 팍스랑즈는 그곳에서 끔찍한 경험과 수모를 겪는다. 프랑로가 부재일 경우 그녀가 대신 인질을 살해해야 한다. 프랑로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임무를 팍스랑즈에게 강요한다.

 

나는 당신을 매우 사랑합니다. 부인, 그러나 우리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감정이라는 것은 의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직업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우월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망각하지 않는 직업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이 지상의 어떤 여인도 우리의 직분을 소홀히 하도록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직분을 수행하는 방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죄악>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 중에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무조건 완벽한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에서 나오는 이 빠진 동그라미와 같다. 빠진 동그라미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 여행을 다닌다. 동그라미는 이가 빠졌기 때문에 떼굴떼굴 빨리 구를 수 없어서 벌레를 만나면 잠시 멈춰 이야기하고 꽃을 만나면 향기를 맡기도 하고 둥실둥실 바다도 건너며 꿈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결국 자기에게 꼭 맞는 조각을 찾게 되지만 완벽한 원이 된 동그라미는 너무 빨리 구르게 돼서 노래를 부르며 여행을 할 수도, 뜻대로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다른 조각을 찾아 나서게 된다.

 

완전한 형태의 원과 같은 사랑이 무조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랑이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찾지 못했을 뿐이다. 즉, 쉽게 말하면 성숙한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사랑과 대조되는 것을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의 사랑이라고 했다. 프롬이 말하는 긍정적 상태의 ‘완전한 사랑’은 바로 남녀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관하여 - 성 역할, 섹슈얼리티,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마리 루티는 동등한 남녀 관계 성립을 강조하는 아주 흥미로운 반응을 소개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성 친구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다. 여자친구나 아내가 전구 가는 모습을 본다면 매력이 떨어질 것 같으냐는 질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이성 친구의 답장은 의외였다. 마리의 이성 친구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에게 매력이 있다고 밝혔다. 오히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며 그들을 무능력자로 여기길 좋아하는 보수주의적 남자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p 50~53)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다. 사랑을 논하는 데 강자는 뭐고 약자는 뭐냐 싶겠으나, 실제로 어떤 이들은 연인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를 자처하곤 한다. 스스로의 열등감, 낮은 자존감이 관계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라, 한쪽이 기울면 균형은 깨진다. 그리하여 그 숭고하다는 사랑에도 권력 구도는 형성되고, 감정의 문제는 욕망의 해소로 무게 중심을 옮겨간다. 그리고 연인 관계의 본질은 왜곡된다.

  

부부간의 사랑을 비유하는 말에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조(比翼鳥)라는 새와 연리지(連理枝)라는 나무를 합친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천이 지은 <장한가>(長恨歌)에 나온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어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한밤중 아무도 없을 때 서로 속삭이며                          夜半無人私語時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했었네                               在地願爲連理枝

영원한 하늘과 땅도 언제가 없어질 때가 있겠지만          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끊임없어 끊어질 때가 없으리라                       比恨緜緜無絶期

 

              (<당시선 下> '장한가' 중에서, p 271)

 

 

두 개의 나뭇가지가 하나로 연결된 연리지를 보면 한쪽 나무가 말라 죽은 상태를 본 적이 있는가. 신기하게도 하나의 나무줄기로 합쳐져도 두 개의 나무의 상태는 멀쩡하다. 백낙천과 프롬이 말한 완전한 사랑은 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 만들어낸 사랑이리라.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는 '연리지 사랑'을 주목하자.

 

아름다운 길을 찾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결혼에 대한 오해, 배우자에 대한 기대, 자기중심적 대화 등으로 소리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서로 다른 환경, 성격이더라도 한 몸을 이루어 사랑으로 서로 부족한 점은 채워주고 나누고 베푸는 감정의 공명이 필요하다. 상대의 이야기에 서로 무반응이나 독백하지 말고 상대가 듣고 싶은 답변으로 반응하는 공감만 있으면 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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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삽화, 귀스타브 도레, 1861년

 

 

 

책이여, 그대가 신중한 태도로
훌륭한 사람들 곁에 다가간다면
세상 물정 모르면서 우쭐대는 사람은
그대의 생각을 알지 못해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 넘어가
매우 조급하게 다루어진다면
비록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짐짓 꾸밀지라도

그대는 이내 알게 될 것이오.
그가 정곡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오.

(p 18)

 

 

 

현실의 정곡을 너무 벗어나면 허상과 광기만 남을 뿐이다. 기사도 소설에 탐독하다가 자신을 기사라고 착각하는 라만차의 늙은 귀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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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영화 '타워'를 극장에서 보면서 훌쩍 거리는 몇몇 사람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궁금한 점. 과연 '타워'를 보면서 눈물 흘렸던 사람들 중에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채 순직한 소방관들의 뉴스에 진정 눈물을 흘리는 이가 과연 몇 명이 있을까? 작년에 일간지 오피니언에 실렸던 내 아는 동생이 쓴 칼럼의 내용이 생각난다.

 

 

 

눈물 흘릴 때만 격려하지 말라  

(윤석현 /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3학년)

# “소방관은 보험을 제대로 드는 것도 어렵데이.” 의무 소방원으로 배치받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한 소방관이 말했다. 정작 보험에 가입되더라도 혜택의 제한이 많거나 보험료가 비싼 경우가 허다하단다. “하긴 하루에도 몇 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직업인데 누가 보험을 받아주겠노.” 보험도 들기 힘들다는 그의 말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 모든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올림픽 참가 선수를 응원하고 있던 지난 1일 오후 10시. 50대 소방관이 화재가 난 부산 신발 공장에서 추락사했다. 그는 3남매의 자랑스러운 아버지이자 80대 노모를 모시던 효자였다. "이번 여름에는 꼭 가족 여행 가자”는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혹시라도 대피하지 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간 영웅은 돌아나오지 못했다.

올해만 벌써 두 명의 소방관이 순직했다. 의무소방원으로서 현장에서 소방관을 보조하는 필자에게 이런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남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아프다. 또한 이런 일이 짤막한 기사 한 줄로 소개되고, 대중들의 관심이 반짝 일다가 사라지는 것 같아 더욱 슬프다.

현장에서 바라본 소방관의 복지 실태는 밖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심각했다. 많은 소방관이 목숨을 걸고 매일 화재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도 이들을 위한 위험수당은 고작 월 5만원에 불과하다. 이들의 열악한 상황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유일한 기회는 동료 소방관이 순직했을 때 잠시뿐이다.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복지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국민을 보호하는 ‘소방’, 그리고 그 책임을 수행하는 ‘소방관’들을 위한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방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낮기에 정치권에서도 따로 정책을 세우지 않는 듯하다.

얼마 전 이기환 소방방재청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방공무원 예산 2조4000억원 가운데 1.8%만이 중앙정부의 지원”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 수준에선 한계가 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소방 분야에 대한 장기적인 예산 지원과 소방관에 대한 복지 확대가 시급하다.

어디선가 생명을 바쳐 불을 끄는 소방관도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아들이다. 그들의 무거운 방화복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는 방법은 잠시의 박수가 아니다. 더 이상 눈물 흘릴 때만 격려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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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2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끔합니다...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네요.

cyrus 2013-02-03 21:5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고 계시죠? ^^ 저도 아는 동생이 쓴 글 읽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oren 2013-01-29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타워' 보면서 알바하던 대학생이 뉴스 전광판으로 '청소부 엄마'를 떠올리던 장면에서 눈물을 왈칵 흘렸더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방관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이 많이 쓰이더군요. 제 고향 친구들 가운데 특히나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바로 119 구조대 소속이었거든요. 그 친구는 대구농고를 졸업하자말자 공수부대에서 10년 가까이 직업군인 생활을 마친 뒤 다시 소방공무원으로 20 년쯤 근무했답니다. 오랫동안 '일이 너무 힘들고 위험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친구는 정말 무사히 안전하게 희망퇴직을 했어요. 그리고 꿈에 그리던 '귀농'을 해서 지금은 '고향'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http://blog.aladin.co.kr/oren/5903921

그 친구가 서울에서 근무할 때 참 자주 술잔도 나누고 전화통화도 자주 했는데, 걸핏하면 전화 통화 중에도 느닷없이 사이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출동이다'를 외치며 전화를 끊곤 현장으로 달려가곤 했어요. 저도 그 친구 덕분에 소방서에도 몇번 가보고 다른 소방관들과 술잔을 나눈 적도 가끔씩 있었답니다.

저는 그래서 '타워' 속에 등장하는 소방관들이 제가 듣고 알아 왔던 '실제'보다 너무 '영화적'이어서 오히려 몰입이 덜 되더라구요.


cyrus 2013-02-03 21:5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영화 보면서 주연보다는 조연에 눈이 가더군요. 그리고 소방관 관련 칼럼을 쓴 동생이 지금 의무소방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로부터 소방관의 실제 모습을 듣고 영화를 보고나니 오렌님처럼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