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썸남과 있었던 일이다. 아직 연인이 되기 전 썸을 타고 있을 때, 퇴근길에 여느날처럼 통화를 하는데, 그가 어찌저찌 알게된 여자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는 말을 내게 전해왔다. 내 머릿속은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세상의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다, 학교를 다니든 직장을 다니든 우리는 숱하게 많은 남자와 여자들과 아는 사이가 되고, 그러다보면 이 사람과도 저 사람과도 밥을 먹게 되는데, 그 때마다 일일이 '그 사람이랑 어떤 관계가 될까'를 걱정할 순 없다. 나 역시 업무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남자사람들과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그냥 밥 한 끼 먹는거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멀리 있고 그 여자는 그의 가까이에 있는데, 물리적 거리에서 내가 지고 들어가는데, 나에게도 어느 정도 그의 연인이 될 가능성이 열려있는 상황이라면 그 여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열려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여자쪽에서 밥을 먹자고 한 건 여자쪽에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그여자에게 훨씬 더 크게 열려있지 않은가, 나는 그가 그여자랑 밥을 안먹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그의 애인도 아닌데 다른 여자랑 밥먹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럴 순 없다, 그러면 그냥 먹게 둬야 하고, 그러다가 어떤 일이 벌어지면 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가, 감당하자, 그런데 감당하기 싫다, 졸라 아프겠지...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격렬한 질투가 끓어오르고 말았다. 이 감정은, 상대에게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감정을 감출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되질 못했고, 그래서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응, 세상의 반이 남자고 세상의 반이 여잔데, 뭐 밥을 먹을 수도 있지, 먹어요' 라고 했지만, 이미 내 목소리와 말투 억양에서 내 질투는 다 표출되고 있었고, 그래서 그에게도 전해져버리고 말았다. 그는 내 질투를 짐작하고 내게 물었는데도 나는 아니야 괜찮아, 라고 말했지만, 곧 울 것 같은 감정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아, 이 미친 질투여...




나는 집착과 질투를 타도해야 할 감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질투만큼 자발적인 고통도 없다. 질투가 어리석다는 것을 몰라서 질투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질투에 대한 잠언이나 충고처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나 역시 <질투는 나의 힘>의 원상(박해일 분)과 비슷한 상태로 오랫동안 고통을 찾아다녔다. 나중에는 지쳐서 질투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 평온한 마음조차,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부대끼고 바닥에 패대기쳐진 것 같은 비참한 감정이 나를 찾아오면, '그래, 너 왔구나' 하며 인사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질투에 시달리는 나를 포기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더는 나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무릎 꿇고 빌수밖에 없다. 어차피 나는 '연적'만큼 매력적일 수 없었다. 매력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므로, 내 매력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p.144-145)



집착과 질투가 없는 사랑은 '수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절실하지 않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나의 감정이 타인의 가슴으로 옮겨 가는 것인데,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비운다면 아마 마음이 없어지는 거겠지. (p.144)



질투는 자기 증오이며 자기 몰두이자 결국 자기 도취다. 질투와 성찰은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성찰은 한자[省察] 로도 영어[reflexible]로도 모두 재귀적(再歸的) 의미를 갖는다.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하는 것, 자신에게로 돌아가 스스로 수정하는 사유 과정이다. (p.148)


















나는 나의 이 질투에 당혹스러웠다. 그간 '나는 질투 따위 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쿨해'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내가 이토록 깊은 질투를 이토록 뜨겁게 타오르게 하다니, 나 자신에게 당황스러웠다.


물론,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저 때의 질투는 그가 아직 나의 연인이라는 포지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너무도 연인이 되고 싶은데, 그 연인이 될 가능성이 내게 열려있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찾아온 질투라는 것을 안다. 만약 내가 그와 연인이었다면, 그 뒤에 그가 어떤 여자와 식사를 한다고 해도, '응 다녀와'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때의 나, 아직 내가 그의 옆자리에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위치에 있으면서 질투를 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만약 저 때의 내가 질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 테다. 질투는 분명 괴로운 감정이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내가 느끼지 않는 것이 좋았겠지만, 그러나 어정쩡한 포지션에서라면 어떤 감정이든 휘몰아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썸남은 다음날 아침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회사에 출근했고 아직 업무를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고, 그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너 왜 오늘 출근한다고 연락안해?"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원래 출근한다고 매일 말했었나? 잠시 갸웃하고 있는데, 그가 연이어 내게 말했다.



"나 밥 안먹을거야. 그 여자랑 밥 안먹을 거니까 연락해!"



아 나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빵터져서 어찌나 웃었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사실 그 날 아침의 내가 연락을 안했다는 거 잘 모르고 있었고, 내가 매일 했었는지도 모르겠고, '그 남자 다른 여자랑 밥먹는다니 빡치니까 연락하지 말자'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남자는 내게 전화를 걸어 '다른 여자랑 밥 안먹을 테니까 연락해' 라고 한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너무 좋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질투는 할만한 것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질투라는 감정이 내게 찾아들었다면, 그것은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생각하니까 또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 그와 나는 연인이 되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But it's over now.





나는 <하얀 궁전>의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사람이 필요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나타난 적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나의 영원한 판타지다.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누구나 특정 시기에 절실히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토록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제는 필요한 관계를 얻으려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 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너무 절실하게 필요하면 분별력이 사라져서, '아무나'가 상대가 되고 그 상처로 다시 절실한 필요가 더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p.38-39)




위의 부분을 읽고 부랴부랴 하얀 궁전이란 영화를 옥수수에서 다운 받아 놓았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나 역시 위의 부분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주 많이 아프고 외로웠었을 때, 어떻게든 자존심을 꼿꼿이 다시 일으키고 싶었을 때, 마침 한 남자가 다가왔고, 나는 그에 대한 내 마음에 대해 어떤 것도 질문하지 않은 채로 그와 연인이 된 적이 있다. 어떻게든 이 시기를 벗어나야겠고, 그 때에 그는 내게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그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나의 상대가 되었지만, 사실, '아무나' 였다. 그 시기에 다가오는 사람은 그가 아니어도 되었다. 결국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나에게 지독한 후회만을 남겼다.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수차례 생각했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주 크고 또 죄책감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내가 지워버리고 싶은 실수에 해당하는데, 그래서 나는 이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에 또 결심을 했다. 이 일을 또 만들어서 악순환을 반복시키고 싶지도 않고, 또 상대를 위해서도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혼자만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또 흔들리게 되는 경우가 몇 번 더 찾아왔다. '나는 과거에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내 감정만 중요하게 생각해 선택했다가 크게 후회한 적이 있다'는 것을 자꾸만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오래전에 써둔 일기도 도움이 되었다. 같은 고민을 똑같이 몇 해전에 해두었더라.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조심, 또 조심해야지.





아주 오래전 KBS 와 MBC 가 토요일에 영화를 보여주었다면 SBS 는 금요일에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나는 당시에 그 모든 영화를 거의 챙겨보려고 했던 사람이라, 그 때, '킴 베신저'와 '리처드 기어' 주연의 영화, 《노 머시》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본다면 까댈 것 투성일 것 같은데, 중학교시절의 나는 아주 재미있게 봤더랬다.




아주 오래된 영화라 기억은 희미한데, 리처드 기어는 형사였고 킴 베신저는 어느 폭력배 조직 보스의 여자였다. 리처드 기어가 무슨 클럽인가에 가서 보스의 여자에 대한 얘기를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데, 그 때 바로 대화상대가 '저 여자다' 라고 하고, 킴 베신저의 뒷모습이 비춰진다. 아직 얼굴을 보기 전, 등이 파진 원피스를 입었던 킴 베신저의 어깨에는 문신이 있었다. 내 기억엔 한 쪽 어깨에 새 문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목 뒤에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연스레 리처드 기어와 나 둘다, '어깨에 문신 있는 여자 보스의 여자' 같은 걸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 무슨 사정이 있어 보스의 여자와 형사는 조직에게 함께 쫓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 빠지고....



이 영화에서 킴 베신저가 글을 읽지 못했다는 것과 등의 문신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지난 번 하노이에 갔을 때, 호텔 앞에 '타투'라고 쓰여진 가게가 있었다. 그간 타투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던 나는, 갑자기, '저기 들어가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게 됐고, 그러다 이내 포기했다. '뭘 하려고 해도 짧은 영어로 어떻게 설명하겠냐... ' 싶었던 것. 그전까지 타투를 할 생각도 아니었기에 절실한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놀랍게도 머릿속에 타투만 생각나는 거다. 그리고 타투한 사람만 보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타투를 한 것 같은 거다. 아아, 안되겠어, 이 생각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투를 내가 직접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하고는, 그래,



나는,

지난 토요일에 타투를 했다.




하하하하하. 하는 동안에 너무 아파서, 한 군데 더 하려다가 포기했다. 아, 나의 타투는 이것으로 끝내자, 하고. 그렇게 내가 타투를 했다는 이야기.

크, 페이퍼의 제목은 질투와 타투. 라임이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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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g 2018-03-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락방 2018-03-13 06:2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술 2018-03-13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투족이 되셨군요.
근데 첫 타투 글 인터넷에 올리시는 분들은 흔히 타투 사진이랑 같이 올리시던데
락방님 타투는 뭘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언제 공개할 마음의 준비가 되시면 타투 사진도 올려주시길.

다락방 2018-03-13 21:33   좋아요 0 | URL
저도 공개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 육신이 비루하여 예쁜 사진을 건질 수가 없더라고요 ㅋㅋㅋㅋㅋ 해서, 오프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만 보여주기로 했답니다. 으하하하핫

2018-03-15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6 0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가진 취미라고는 책읽기와 글쓰기가 전부인데, 이것들은 그렇게 큰 돈이 들지 않는다. 음...아닌가...책 사는 데 돈 너무 많이 드나... (곰곰) 큰 돈이 들지 않는게 이 취미의 큰 장점이긴 하지만, 사실 책읽기가 좋은 가장 큰 이유, 처음부터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계속 꾸준히 할 수 있는 건, 아주 재미있다는 데 있다. 책 속에 담긴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나는 주로 잘 쓰여진 글, 문장이 꽉꽉 찬 글, 그리고 사유가 엄청 담긴 글들을 보면 무척 흥분이 된다. 으앗, 이래서 책읽기를 하는 거야, 하고 온 몸이 짜릿짜릿해지는 것이다. 아아, 나는 어쩌자고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이래서 좋아한다!! 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런 책을 만나게 되면 몹시 흥분해서 주변에 막 얘기를 하고 싶어지는 거다. 이 책을 읽어봐 이렇게나 재미있어, 이렇게나 똑똑해! 사람을 흥분시킨다니까!! 하고 말이다. 일전에 '엘리자베스 워런'의 《싸울 기회》를 읽고서도 그랬었는데, 지난 주에 정희진의 신간, 《혼자서 본 영화》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서문부터 너무 똑똑해서  ㅠㅠ 흥분했어. 아, 책읽기 너무 좋다, 책읽기는 멈출 수가 없어, 책 읽기가 짱이닷!! 나는 몹시 흥분하여, 금요일 저녁에 친구와 밥을 먹으면서, 나 요즘 이 책 읽는데, 너무 좋아, 완전 흥분돼, 하면서 또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이야기가 주는 흥분, 그 이야기가 가져오는 재미로 느끼는 흥분도 좋지만, 나는 이렇게 똑똑하고 잘 쓰여진 글을 만나서 나를 자극시켜주는 글이 정말 좋은 것이다.

















외로움과 혼자인 상태는 다르다. 혼자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것은 아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는 외롭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충만한 시간은 외롭지 않다. 인간이 외로울 때는 상대방(사회)과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외부를 지향하는 경우이다. (p.9)


계속되는 미투운동의 폭로들을 접하면서, 최근에는 '아, 너무 외롭다' 하는 감정을 느꼈더랬다. 가장 처음 떠오른 단어가 '외롭다'였는데, 그런데 내가 피해자들의 그 두려움과 분노를 앞에 두고 '외롭다'고 느끼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외로움'이 아닌 다른 어떤 감정 혹은 단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갈등을 겪은 것이다. 그런데 정희진의 위의 문장을 읽고나니, 내가 느끼는 그 외로움이 바로 적확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 그래서 외로움을 느낀거였어. 나는 이 사회가,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와 남성위주의 사회가, 남성들만이 권력을 쥔 이 사회가, 여자들과 대화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거기서부터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거다. 그동안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고.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서로 대화가 통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여자들이 그동안 두려워하며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와 말하는 것, 그것에는 바로 그런 의미 또한 담겨있는 게 아닌가. 남성중심의 사회가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여자들은 두렵고 아프고 화가 나면서, 그리고 외로웠던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숱하게 피해자였고, 또 피해자임을 얘기하는 많은 여자들 앞에서 함께 분노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할 때의 두려움에 대해 알고있다.



몇 해전에, 나는 이 공간에 나의 어릴 적 성추행 피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이제는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므로 그걸 말하기 위해 썼고, 또 다른 사람들 역시 어딘가에서 자신을 자책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내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 그것을 세상에 말하는 것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내 생각보다 강하지 못했던 걸까. 글을 올려놓고 전전긍긍하다가, 열두시간도 안돼 재빨리 감춰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루를 꼬박 앓았다. 잠도 자지 못했고, 아, 나는 아직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했던 거다.


그 글을 그렇게 감춰두고는 결국 두번째 책에 쓰게 됐는데, 그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 나는 그전보다 조금 더 강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의 엄마는 아니었다. 책으로 그걸 읽고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사람들이 니 책을 안읽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인쇄된 거 다 살게, 라고도 했었다. 나는 준비됐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에겐 날벼락이었다. 너 어떡하려고 그걸 썼냐고, 너 이제 어떡하냐고 안타까워 하셨고, 또 그 어린날 나를 지켜주지 못했음에 스스로를 자책하셨다. 엄마 나는 괜찮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라고 엄마한테 수차례 얘기했지만, 나보다 훨씬 이전세대를 살아온 엄마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다. 그 일을 당한 것과, 당한 것을 밝히는 일은. 그 일은 아주 오래, 피해자인 내 잘못이었고, 또 피해를 당한 날 지켜주지 못한 엄마의 잘못이 되었다. 잘못은 가해자가 한 것인데도.



그런데 많은 피해자들이 이제 세상에 대고 얘기를 한다. 아마 텔레비젼에 나와 인터뷰를 하는 피해자들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들 모두 목소리를 떨었다. 목소리를 떨면서도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가해자에게 죗값을 받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더이상은 자신처럼 피해받는 사람이 없기를 원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밝힘으로써, 이미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를 말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이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용기를 내고 발언해야 함에 있어서, 얼마나 큰 두려움과 분노가 그 안에 있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연이어 폭로되는 그 아픈 경험들 앞에, 나는 하염없이 외로워졌던 거다. 외로움은 내가 혼자이기 때문에 느낀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여자들을 혼자라고 느끼게 만들어서 느낀 것이었다.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은 당연히 내가 푹 빠진 영화다. 이 영화에서 '수배자의 여자'로 나오는 전도연은 신분을 숨기고 접근한 경찰(김남길 분)과 도주 중인 연인(박성웅 분) 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남길은 전도연에게 강박적으로 말한다. "(너는 이용당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용한 게 아냐, (나는 경찰로서) 내 일을 했을 뿐이야!" 두 사람은 한때 사랑했으므로, 이 대사는 변명이 아니라 죄의식의 표현이다. 내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생에서 "내 일을 했을 뿐"으로 정당화되는 일은 없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데, 이런 말은 인간을 혼자 살게 내버려둔다. 이 말에 '나의 전도연'은 깊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나도 상처받았다. 그녀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 나는 외로움을 원하지, 외로움을 '당하고 싶지 않다.' (p.22-23)



나는 속수무책으로 외로움을 당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여러차례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이제는 숫제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주는, 그 특성상 여전히 보수적인 성격을 띤 것 같다. 나만의 사주가 남자를 만나면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중심이 남자가 됨을 의미하고, 또 앞으로 진행될 삶에 있어서도 그 길을 막을 수 있는 대상이 여자는 남자가 중심이고 남자는 자식이 중심이 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러니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학문을 공부함과 동시에 세상의 변화도 빠르게 읽어내야 더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일텐데, 일전에 사주를 보러 갔을 때 나는 남성적 성향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다. 그것이 평소에 남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는 성질을 말한다고 했는데, 이 성질은 남성적으로 불리고 있었다. 평소에 이해심 있고 배려를 잘하고 포용하려는 성격이지만, 어떤 공격이 들어왔을 때 참지 못하고 상대를 이기려고 하는 타입이라는데, 내가 이 얘기를 듣고는 '딱 한국남자들이 싫어하는 타입이네요' 라고 되물었더니, 쌤은 내게 '싫어한다기 보다는..... 니가 한국남자를 우습게 봐' 라고 하는 거다. 아 그 말 듣고 진짜 빵터져서 웃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너는 한국남자랑 좋은 친구도 될 수 있고 대화상대도 될 수 있고 동료도 될 수 있고 잘 지낼 수 있는데, 니 연인이 된다고 하면 한국남자가 너무 우스워' 라고 하는 게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이 쌤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째서... 이렇게 말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면서 '그리고 너의 그 성질 때문에 주변에 여자들이 많다, 여자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는 거다. '요즘 말로는 걸크러쉬라고 하죠' 라고 하시면서.... 네, 제가 여자친구가 훨씬, 훨씬 많아요..... 아, 저기 아닌 다른 데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었다. 너는 이야기 상대로서의 남자가 끊이지 않는데, 그러다가 그들 중에 하나가 니 애인 되겠다고 나서면 '안돼, 니 자리 거기 아니야' 라고 할 사람이라고 .. 그거슨 아마도 내가 재이슨 스태덤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인가봉가.....




섹스와 섹스의 쾌락을 배우는 최선의 방법은 마음이 열린 연인을 만나는 일이다. 이성애자 여성, 게다가 페미니스트라면 이 문제는 절박하다. 하긴, 그걸 누가 모르나? 여성들의 괴로움은 가부장제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그런 남성을 찾기 힘들다는 데 있다. (p.46)



내가 바로 그 이성애자 여성이며 페미니스트이다. '그런 남성'? ... 없다 없어. 이 땅에 없어.... 한 친구는 내게 '너는 이성애자이면서 꼴페미라 너무 힘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안그래도 숱하게 갈등을 겪고는 한다. 매일, 매순간의 갈등의 연속이고 또 외로움과 분노와 절망이 수시로 찾아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는 길을 멈추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멈추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그 길에 내가 혼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러나 소속감과 연대감도 느낀다. 나를 외롭게 하는 게 남성중심의 사회라면, 나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건, 네 잘못이 아니라 말해주는 숱한 이 땅의 여자들이다. 내 친구들은 끊임없이 분노하고 소리치며 또 계속 공부한다. 외로움만 느낀다면 지내기 힘들었겠지만, 이렇게 소속감과 연대를 느낄 수 있어서 또 한걸음 앞으로 나갈 수도 있다.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쓰려고 한건데 쓰다보니 구석구석 분노와 외로움이 묻어나네.


이 책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데,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막고자, 또 전혀 다른 주제로 얘기를 할 것이므로, 페이퍼를 쪼개 쓰기로 한다.


이 책으로 자극받아 연달아 정희진의 다른 책을 출근길에 들고 왔다. 일전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시인데,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다시 읽고 여러가지로 복잡한 감정이 되었다. 같이 읽고싶어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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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03-1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혼자서 본 영화, 읽다가 그냥읽기 아까워서 언급되는 영화 봐가면서 읽고 있어요. .... (영화를 잘 안봐서 힘드네요)
정희진은 진리입니다. 와락!!

다락방 2018-03-12 17:40   좋아요 1 | URL
저는 읽으면서 [하얀 궁전]과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다운받아 놓았는데, 제가 이걸 언제볼지는 모르겠어요...
이거 다 읽고 나니까 뭔가 목마른 느낌이어서 저는 연이어 정희진을 읽기로 했습니다. 우하하하.
공장쟝님, 꼭꼭 씹어 읽으세요! >.<

꼬마요정 2018-03-1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는 질리지 않아서 좋아요. 가끔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란 강박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뭐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이러고 읽고 있죠. 요즘은 잘 읽지도 못해요ㅠㅠㅠㅠ

세상이 유독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해서 피해자를 몰아가는 때가 있어요. 자기들이 가해자가 될 것도 아니고, 그게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제발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가해자들에게 수치와 벌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락방 2018-03-12 17:44   좋아요 2 | URL
저도 요즘에 책읽기가 뜸했어요. 이제 다시 재미를 붙여보자 하는 참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책을 만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도 정희진의 책이 좋다보니 그 다음 연달아 정희진을 또 읽자! 하고 집어 들었으니까요.

냉정하라, 객관적이 되어라, 중립을 지켜라, 라는 말이 왜 유독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피해자로 살면서 아주 오래 제 탓을 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한마디 말, ‘니가 잘못한 거 아니야?‘라는 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요. 스스로도 검열을 숱하게 해야하고, 그런데도 늘 피해자를 향한 시선은 따갑죠. 저 역시도 가해자들이 죗값을 치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해요.

비연 2018-03-1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이 글... 마지막 가서 섬찟. 했어요...

제 사주에도, 남자를 우습게 여긴다고... 전 그냥 우습게 보일 만한 남자를 우습게 보는 거겠지 라고 넘겨 버렸지만,
사실.. 얘기하다보면 ... 말이 통하는 남자를 만나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이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책이 있어서 살 수 있다. 수많은 좋은 책들. 나를 감동시키고 기분좋게 하는 책들.

다락방 2018-03-12 17:46   좋아요 1 | URL
저는 예전에 저 시를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읽었던가...처음에 꽃을 받았다고 해서 아름다운 시인줄 알았다가 너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어요. 어휴..

비연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말이 통하는 남자를 만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예요. 전 그 점에 있어서라면 포기하고 살려고 해요. 특히나 이 나라에서는요. 남자들보다야 책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저를 흥분시키고 달뜨게 하고 또 즐겁게 해주는 그 모든 건 다 책이 하는 일이에요. 우리 열심히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도록 해요!!

단발머리 2018-03-12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 책이 좋아 단숨에 읽었거든요.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듯이 그렇게 읽었어요.
줄도 안 긋고, 마구마구 읽었는데요.
오늘 다락방님 페이퍼 읽으면서 차분히 이 책을 느끼니까... 역시나 좋으네요.
역시 정희진쌤, 역시 다락방님^^
<싸울 기회> 두꺼워서 포기했었는데, 다시 도전해야될까봐요. 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8-03-12 17:53   좋아요 0 | URL
저도 씐나서 읽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지 않는 영화를 극찬했을 때에는, 아 이걸 이런 식으로 볼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고요. 보고 싶은 영화도 생겨서 다운도 받게 됐고요. 그런데 책 분량이 너무 적어요. 너무 얇아요 ㅠㅠ 뭔가 갈증 해소가 안되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연이어 정희진을 읽으려고 한거랍니다. 하핫.

단발머리님, 싸울기회는 진짜 강추예요. 엄청, 엄청 사람을 흥분시키는 책입니다. 진짜 좋아요!! >.<

비연 2018-03-12 18:46   좋아요 0 | URL
싸울 기회는 저도 강추!

단발머리 2018-03-12 20:21   좋아요 1 | URL
책이 얇다는데 저도 동감이요.
얇고 작고요~~~
그나저나 나는 이렇게 두 분에게 설득되어 <싸울 기회>를 잡으러 가게 되는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운동에 앞장서는 언니들 얘기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나 힘들게 돈을 벌어 아주 좋은 대학에 보내놨더니 데모를 해서 경찰에게 끌려가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입장이 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여러가지 갈등을 하게 되는데, 나는 나의 조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조카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고 부당한 일에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다가 혹여 다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안할 수가 없다. 내가 좀 더 앞 선 시대를 살아 내 조카가 이 책의 등장인물들처럼 잘못된 정부에 맞서 싸우려고 한다면 나는 온전히 조카를 지지할 수 있을까. 나는 차라리 내가 나가서 싸울지언정 조카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하게 두고 너는 가만 있어' 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이 정말 조카를 위한 길일까. 아픈 조카를 보고싶지 않은 나를 위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조카가 하고자 하는 걸 하게 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어떨까... 막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감옥에 있는 딸에게 쓴 엄마의 편지를 보면 눈물이 왈칵 고이는 거다. 어휴... 더러운 세상이었어.......



위에 사진 찍어 올린 부분들을 읽다가 티비 시리즈와 책이 생각났다. 152페이지, 악몽을 꾸다 깬 장면에서는 아주 오래전,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일요일마다 텔레비젼에서 보여주었던 《V》 생각이 났다. 지구인으로는 '도노반' 과 '줄리엣'이 주인공이고 물론 그들과 함께 하는 로빈도 있고 또 누구더라...아무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고, 파충류로는 '다이아나'가 주인공인 시리즈였다. 당시에 아주 재미있게 본 시리즈여서 일요일에 가족들이 외출할 일 있어도 공부하겠다는 핑계로 집에 있으면서 나는 그 프로를 보았던 거다. 그리고 도노반과 얼마나 사랑에 빠졌던지! 나는 꿈에서 여러차례 지구를 구하곤 했다.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주생명 파충류가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인간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 지구인에게 우호적인 듯 보였고 또 지구인과 같은 모습이라 생각했지만, 실상 쥐 같은 것들을 꿀꺽 삼키는 파충류였다는 거다. 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그걸 막으려믄 지구 방위대(?) 같은 게 생기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도노반과 줄리엣이었던 거다. 이야기가 흐르고 후반으로 갈수록 파충류의 힘은 더 거세지고 더 많이 지구를 장악하는 것 같은데, 그 과정에서 줄리엣이 파충류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어떤 기계 안으로 들어가 몸에 밀착되는 옷을 입고 전기고문 같은 걸 당하게 되는데, 그 후로 줄리엣은 악몽을 꾸고 몸에 이상증상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그러면서 도노반에게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그후로 자꾸 왼손을 쓰게 된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거다.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을 쓰게 된 걸수도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에 고문당한 그 순간이 자꾸 떠오르게 되는 것.


어제 저 책의 152페이지를 읽는데, 그 고문의 후유증에 갑자기 줄리엣이 생각나는 거다. 어휴..



줄리엣은 그 시리즈 말고 보지 못했다가, 아마도 이름이 '페이예 그란트' 였을텐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영화 《오멘》에서 만난 기억이 있다. 도노반은 '마크 싱거' 였던가.. 그 사람도 어딘가에서 보긴 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저 책의 153페이지에서는 '조지 오웰'의 책 《1984》가 생각났다. 연애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가 상부에 보고되어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답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버티다가, 그만, 쥐를 풀어버리는 데서 다 불어버리고 마는 거다. 쥐를 너무 싫어했는데 쥐로 고문을 해서. 너무 끔찍해서 불어버리고 말았어. 영초 언니도 벌레를 아주 징그러워하고 싫어했는데, 아마도 그걸 알고 그런 식으로 고문을 했던 것 같다.


고문이라면, 답을 들어야 하니, 그러니 아마도 상대의 가장 약한 점을 노린거겠지만, 너무... 치사스럽지 않나. 치사스럽다는 말은 사실 적합하지 않을거다. 고문 자체가 잔인한 행위이니까.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끌려가고 고문을 당하고, 내가 너무 싫어하는 것들을 내 앞에 풀어놓는다는 것, 거기에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그 시간이 지나고난 뒤에도 그 시간에 대한 악몽을 꾸고 자꾸만 그 시간을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몇 개의 이미지라도 가져오려고 네이버에 V 검색했는데 포스터 하나만 딸랑 나오네. 이미지를 눌렀더니 사람들이 손으로 브이자 모양하고 사진 찍은 거만 주루룩 나온다 ㅎㅎㅎㅎㅎ 인생... 시간이여.... 시간은 정녕 이렇게 흐르는 것입니까... 넷플릭스 안하는데, 거기에 브이 있나? 뭔가 말하다 보니까 다시 보고싶네.



거기에 '엘리자베스'라는 등장인물이 극중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이 인물이 또 되게 신비로웠다. 기억에 의지해서 글을 쓰는 거라 이름들이 다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구의 전사 여자 '로빈'과 착한 파충류 '윌리엄'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거다. 그게 엘리자베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다들 안도하는 데, 혓바닥을 내미는데 뱀혓바닥 이었던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놀라는데, 이 아이의 성장 속도가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빠른 거다. 아주 쑥쑥 자라서 금방 소녀에서 어른이 되는 거다. 지구인과 우주파충류의 혼혈이어서인지, 엘리자베스에겐 초능력이 생긴다. 아, 근데 그 초능력이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염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엘리자베스는 나중에 '칼'이라는 지구인 남자랑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의 막이 내리는데, 엘리자베스는 우주선을 타고 파충류와 함께 지구를 떠나는 것. 그래서 칼과 헤어지게 되는데, 칼은 우주선에 몰래 숨어들어 엘리자베스를 따라가는 거다. 음...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네.....


아..사랑 뭐지.... 내가 살던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되는, 그런 사랑...뭐지..... 졸 위대하네?



그러고보니 이 책, 《영초 언니》에도 사랑한다고 하고 사귀기로 하고서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연인이 등장한다. '명숙'과 '주웅'이 그들인데, 주웅이 데모를 주도하다 걸려서 감옥에 가게 되어서 그들은 자주 만날 수가 없게 되는 것. 그래서 그들은 주웅의 여동생을 통해 서로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누이가 되어서 교도소로 속칭 '비둘기'를 날렸고, 그는 누이 이름 앞으로 내게 '비둘기'를 날렸다. 우리는 교도관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편지 속에서 오빠와 동생 코스프레를 하면서도, 우리끼리만 통하는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았다. 평범한 안부 편지, 집안 소식 속에 슬쩍 숨겨놓은 비밀 메시지를 발견해낼 때의 그 기쁨이란! 잦은 만남과 소통 속에 오가는 달콤한 구애만 사랑이 아니었다. 얼굴조차 못 보는 절대빈곤도 사랑을 키워나가는 또다른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p.115)



보지 않아도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계속 소통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소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편지란 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기다리고, 믿고, 또 대화할 수 있었던 것. 내가 여기 있고 네가 거기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고 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확실히 보이지 않음에도 사랑을 키워나가는 데 필요하며 중요한 일인 것이다.


칼은 지구인이었고 엘리자베스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 가야하는 상황. 만약 칼과 엘리자베스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돈만 있으면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칼은 그 우주선에 숨어탈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라도 주고받는 게 가능했다면, 전화통화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우주선에 타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야. 그러나 지금 엘리자베스를 다른 행성으로 보내고 나면 그 뒤는 엘리자베스를 전혀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전화도 편지도 안돼... 그러니 그 우주선에 타는 게 아니고서는 그녀에게 닿을 수가 없는 거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움직이고 행동한다는 것. 그것만큼 확실하게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 어디있을까. 칼은 제대로된 선택을 했다고 새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우주선에 숨어드는 것. 이것말고 삶에 있어서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라는데, 나는 고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칼은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할 때만해도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안중에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칼이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 왜죠? 왜 때문이죠? 또 내가 아닌 누가 이 글을 쓴것이냐.... 다른 자아, 들어가.... 지금 나오는 거 아니야, 들어가....어디서 또 튀어나온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왜 이렇게 된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줄리엣 얘기 하려고 했는데 왜 칼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엊그제.

내가 지난 가을 런던에서 보낸 엽서를 받았다는 친구의 연락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10월 초에 런던에서 보낸 엽서를 엊그제야 받았다는 것.

항상 잘 받았다고 말해주는 친구인데 그런 말을 안하길래, 아 못받았나보다, 중간에 분실됐나보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낸지 한달도 안되었을 때 받았다고 말해준 친구들이 많았는데, 말을 안한 친구들이 몇 있어서, 어쩌면 다른 우체통에서 보낸 친구들 것이 도착을 안했나보다, 통째로 다 분실된거야, 그 우체통은 진짜 우체통이 아닌 것인가....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 시간이 오래 지나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받았다는 거다. 거의 반년이 다 된 지금!!

한 친구가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다른 친구들 둘도 받았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작년 10월초에 보낸 걸 올해 3월초에 받았다는 것. 이게 무슨 일이지? 그동안 대체 엽서들아, 어디 갔다온거야?


받은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서프라이즈라 기뻐했고, 나는 나대로 기뻤다.

그것들이 돌고 돌아 결국은 목적지까지 닿았다는 생각에. 어쨌든 가 닿았어. 다른 엽서들보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래서 그 사이에 대체 어디를 갔다가 또 어디에서 머무르다 이제야 오게 된건지는 모르지만, 닿았어, 닿았다고!!


나는 항상 시간이 우리를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닿아야 할 곳이 거기라면, 언제가 됐든 거기에 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가을의 엽서는 내 말에 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 엽서들이, 자신들이 닿아야 할 곳에, 어떻게든, 기어코, 닿고야 말았으니까.


좋았다. 좋은 일이야.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다.

결국 닿아야 할 곳에 닿는 이야기.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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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8-03-0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초언니> 읽었고 <V>를 봤죠.

시사IN 주진우 기자 책 <정의사제 악마기자>에 서명숙 편집장이 ‘찰진 욕설로 날 단련시켜주셨다‘고 나오죠.
뭐 지금도 갈 길 먼 대한민국이지만 그 때는 정말 더했다는 걸 실감했어요.

락방님 주소가 fallen77이라 락방님을 77년생으로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요.
아니면 77년생 맞는데 <V> 1992년에 재방송됐을 때 보셨던 거겠네요.
첨엔 1985년인가 1986년에 방영했고 1992년에 대규모 방송사 노사분규 일었을 때 재방송했죠.
어릴 때 하도 재밌게 봐서 중학생 때인 92년에도 기대를 갖고 봤는데 막상 보니 그 새 낡아보이더라고요.
제 또래 사람들이랑 얘기하다보면 국딩 때 줄리엣 고문받는 장면 보고 뭔가 모를 야릇함을 느꼈는데
자라서 알고 보니 그게 싸도마조히즘 첫 맛보기였더라는 얘기가 많이 나와요.
도노반,줄리엣,다이아나,엘리자베쓰,카일 모두 기억납니다. 락방님이 칼로 기억한 사람 이름이 카일입니다.
햄 테일러도 기억나요. ‘지구방위대‘ 일원인데 거칠고 쌈 잘하는 마초 역할이죠.
이 드라마 배우들 가운데 다른 작품에서도 본 배우들이 드문데
햄 테일러를 맡았던 마이클 아이언싸이드만큼은 그 뒤로도 자주 만났죠.
대표적으로 오리지날 <토탈 리콜>에서 아놀드 괴롭히는 악당 역으로 나왔고
<엑쓰멘 퍼쓰트클라쓰>에서도 미군 전투선 함장으로 짧지만 강렬한 모습을 보였죠.

카일이 마지막에 외계인우주선에 밀항하는 장면은 저도 잘 기억해요. 어릴 때 보면서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멋지다는 생각만 할 뿐 그렇게 멋진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찌질남이 돼 버렸지만..
부작용으로 ‘배에 무단승선을 언젠가 해 봐야지‘ 하는 헛꿈을 꾸기도 했죠.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진 무단승선 해 본 적이 없네요.

그러고보니 지금은 망해버린 지도 오랜 김우중 할배의 대우전자에서 ‘재믹스‘라는 게임기를 만들어 팔았는데
V가 인기를 얻자 재믹스 디자인을 외계인 우주선처럼 바꾼 ‘재믹스V‘도 나왔죠. 제 첫 게임기가 재믹스V였죠.

엽서 실종 사건은 정말 신기하네요. 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
영화 <캐쓰트어웨이>처럼 엽서를 실은 화물선이 난파됐다가 나중에 구조된 걸까?
그러나저러나 엽서들이 늦었을 망정 주인 찾아왔으니 다행이군요.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네요. 요새 왜 이럴까?
혹독했던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왔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다락방 2018-03-09 16:02   좋아요 0 | URL
우와 심술님.
댓글읽고 막 웃었네요. ㅋㅋㅋㅋㅋ

일단, 칼이 아니라 카일이었군요! 아아.. 역시 오래되어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얼굴만 기억하고 이름을 기억못한 사람이 햄 테일러 였는가봐요.
아, 그 사람도 있는데..하면서 얼굴은 떠올랐는데 이름이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그리고 저 국민학교때 처음 보고, 중학교때 재방송 본 거 맞습니다. 국민학교때 엄청 재미있게 봤고 중학교 때 그걸 재방송 한다 그래서 너무 흥분해가지고 빠지지 않고 다시 봤더랬죠. 저는 중학교때 봤을 때도 진짜 너무 재미있었어요. 맨날 도노반 도노반 이러면서 꿈에 도노반이랑 막 끌어안고 지구도 구하고... 뭐, 그랬습니다. 하하하하.

다이애나 역으로 나왔던 배우는 나중에 토요일마다 해줬던 드라마 [제5전선] 에도 나왔었어요. 제5전선도 제가 중학교때 방송했던 건데, 이건...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아마도 스파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였던 것 같아요. 아니야..무슨 요원이었던 것 같은데... 그 드라마 상에서도 유일한 여자요원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내용은 하나도 생각안나는데 다이애나가 나온다고 해서 봤던 기억이 나요. 크-

그런데 심술님, 굉장히 상세히 기억하시네요!! 저는 게임에 관심이 1도 없어서, 그런 게임기가 있는지도 몰라서 완전 생소하네요. ㅋㅋㅋㅋㅋ


얼른 봄이 오라고 빌었어요. 지금은 얼른 여름 오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저는 여름이 좋아요. 여름 엄청 기다리고 있어요. 여름 오겠죠.

2018-03-09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술 2018-03-10 16:06   좋아요 0 | URL
정작 중요한 건 잘 잊고 쓸데없는 것만 잘 기억합니다.
다이아나 배우가 <제5전선>에도 나왔군요.
<제5전선>은 많이 안 봐서 다이아나 배우가 나왔는지도 몰랐어요.

저도 봄과 여름을 좋아합니다. 추위는 못 견디고 더위는 잘 견디기에.

다락방 2018-03-10 16:07   좋아요 0 | URL
저도 봄과 여름이 좋은데 특히 여름이 좋아요! 덥고 땀나는데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별족 2018-05-09 06:40   좋아요 0 | URL
제5전선,이 미션 임파서블,의 전신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나의 아빠는 49년생 이시다. 그리고 지금은 경비 일을 하시고. 간혹 친구들에게 나의 아빠에 대해 얘길하면 '니네 아빠 너무 좋으시다'라는 말을 엄청 듣는다. 엄마 역시 '와, 남편이 너무 좋네' 하는 얘기를 듣고. 여동생에게는 아빠가 '언제나 힘들 때 늘 곁에 있어준 사람'으로 존재한다. 나에겐 딱히 그렇진 않지만... 나 힘들 때 나는 내가 다 알아서 혼자 다 잘했던 것 같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빠가 날 도와준 느낌은 1도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어쨌든.


어릴 때부터 아빠랑 사이가 좋았다. 집은 대화가 끊일 날이 없었고, 아빠가 '대화를 하는 게 중요하다' 고 말하면, 남동생이 '우리 집은 대화좀 그만해야 해' 라고 말하는 지경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태 함께 살고 있으니 아빠와의 기억나는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아무튼, 오늘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부엌에 이런 쪽지가 있었다.





ㅎㅎㅎㅎㅎㅎㅎ 아고 우리 아빠 귀여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끔 나 역시 아빠에게 쪽지를 써두고 자기도 한다. 이를테면 간식 챙겨가라는 말들 같은 거. 아빠, 식탁 위에 있는 빵 내일 간식 가져가세요, 라는 쪽지를 써두곤 하는데, 아빠 역시 이렇게 나한테 우산 챙기라고 쪽지로 말해준 것. ㅋㅋㅋㅋㅋ 물론, 쪽지보다는 문자 메세지로 더 많이 전달하긴 한다.






이렇게 보니까 나는 세상 건조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아빠는 우리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너무 많이 해줘서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그만좀 해, 그놈의 사랑'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한 번은 친구가 '너네 아빠가 감정 표현을 너무 잘하는 분이셔서 너도 감정표현을 잘하게 된 것 같아' 라고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물론 아빠랑 싸울 때도 많다. 무엇보다 나는 대들기를 잘하고,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는 버럭버럭 아빠한테 화도 낸다. 그래도 평소엔 이렇게나 다정하게 지내는 편인데, 그래서 친구들은 내게 의문을 표했었다.


"너네 아빠는 너무 좋고 너랑 친하고 다정한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꼴페미가 된거야?"



그러게? 하하하하. 그러네?

내가 나도 모르겠는데 하는데, 다른 친구가 나중에 그랬다. 자기 아빠도 누구보다 다정하고 자기랑 친하다고. 그런데 자기는 꼴페미가 되었다고. 이 친구는 나보다 더 훨씬 전에 꼴페미가 되었지. 우리의 아빠들이 다정해도, 우리랑 친해도, 우리는 가부장제가 어떤 문제를 가져오는지 알고, 이렇게 다정하고 친한 아빠여도 가정 내에서 무수한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꾸 대들어야 할 일들은 생기기 마련이야... 그리고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그 많은 남자들.......

꼴페미가 될 수밖에 없어...




나는 아빠에게 '아빠, 나는 아빠보다 타미를 사랑해, 이건 어쩔 수가 없어' 라고 말하곤 한다...




친구에게 방금전에 문자메세지가 왔는데, 여성의 날인데 차 한잔 하자며 스벅카드를 보내온 것이었다.

어떻게 내 주변엔 이렇게 센스있는 친구들이 가득하지?

나도 따라해야지!! 이거 너무 좋은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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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2018-03-0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락방 2018-03-08 15:08   좋아요 0 | URL
흐흣

프레이야 2018-03-0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찡해요, 다락방님.
다정다감하신 아빠네요.

다락방 2018-03-08 15:08   좋아요 0 | URL
네 엄청 다정하시고 엄청 사랑이 넘치세요. 단, 가족에게만 그렇습니다. 하핫

단발머리 2018-03-08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아빠의 다정다감함과
친구의 따뜻한 센스가 더해져 다락방님은..
오늘날 이 다락방님이 되었네요~~
기뻐요~~~^^

다락방 2018-03-08 15:09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아빠의 어떤 성격, 어떤 부분들을 무척 싫어하지만, 제가 그런 점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요..
왜 싫어하는 걸 닮는지, 원 ㅠㅠ

2018-03-08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3-09 09:0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제가 가족에 있어서라면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오후즈음 2018-03-08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버님 넘 스윗하신 분이신가봐요. 짧은 문자에도 다정함이!!!

다락방 2018-03-09 09:10   좋아요 0 | URL
네 다정함과 스윗함이 넘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ㅋㅋㅋㅋㅋ

2018-03-08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9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3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4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에 [윤식당 2]를 1회부터 무려 1,500원씩 결제하며 보고 있고, 그렇게 4편까지 봤다. 보면서 나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 비포 시리즈 생각이 자꾸 난다.


비포 선라이즈 에서 여자와 남자는 각자의 목적 있는 여행을 마치고 기차 안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 틈 사이에서 서로를 발견해낸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조심조심 서로에게 말을 걸고.


비포 선셋 에서 여자와 남자는 9년 후에 재회한다. 이제 둘에게 다른 사람 다른 공간은 중요치 않아서, 영화 한 편이 오롯이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진행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포 미드나잇 에서 여자와 남자는 다시 또 9년후, 함께 살고 있어서 때로는 지쳐있기 까지 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제 그들에겐 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다함께 존재하고 또 섞여든다. 어느 게 제일 좋으냐 하면 나는 비포 선셋이라 말하겠지만, 그러나 선라이즈가 없었다면 선셋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는 미드나잇. 분명히 선셋이 존재했는데 우리는 미드나잇을 함꼐 살아가는 거다.



나는 텔레비젼을 잘 보지 않아서 사실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성격이 어떤지도 잘 모른다. 윤식당 재미있다고 주변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거들떠도 보질 않았었다. 그러다가 얼마전에 지나가면서 잠깐 윤식당2를 보았는데, 스페인이 너무 아름다운 거다. 나는 집에서 혼자 술 마실 때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다시 틀어두고 보곤 하는데, 이게 계속 결방중이라 볼 게 없어, 뭘 볼까, 하다가, 아 맞다!! 윤식당의 스페인을 볼까? 하고는 처음으로 1회를 결제했다. 그러니까, 순전히 여행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내 취향 때문에 그 프로를 선택한 것이었다. 스페인을 보자, 그 아름다움을 보자! 하고 선택한 것이었는데, 내가 그것을 보기로 한 이유가 이국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었다면, 좋아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 1회부터 보기 시작하니까, 서준이가 스페인어 공부하는 게 나오는 거다. 서준이가 맡은 건 서빙이었는데, 비행기 안에서도 스페인어 공부하고 출발하기 전에도 스페인어를 공부해서, 손님을 응대하는 게 잘 되는 거다. 영어도 되고 스페인어도 되고, 이게 보다보면 일본 사람에게는 일본어로 인사도 건네준다. 그래서 일본 손님도 '저 사람 외국어를 잘하네'라고 놀라기도 한다. 나는 늘상 공부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왔으므로, 이런 서준에게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아니, 너는 누구냐,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이지... 이렇게 됐다가, 아니 글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먼 스페인의 어느 섬에 가서 피곤한 그 날, 다른 사람들은 다 쉬는데, 서준이는 밤에 클럽을 갔다왔다고 하는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젊다 젊어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같으면 기절했을텐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그래서 서준에게 반해가지고 있었는데, 아니 글쎄, 클럽도 갔다왔다면서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는거야!!! >.< 아 졸 멋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녀석은, 뭐지?  (내가 이거 보기 시작했다고 하자 나를 잘아는 내 친구는 '너 서준이 운동하는 거 보고 반했지?' 라고 물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외국어와 운동하는 서준에게 반해 있었는데, 아니, 윤여정은 어쩜 그렇게 영어를 잘하지?! 나는 완전 놀라버린 것이다. 이 사람들 ... 대체 뭐야??



윤여정은 굉장히 힘들어 보여서, 야, 저렇게 일시켜도 되냐, 싶었다. 그래서 프로필을 검색해 봤는데, 어휴, 나이 많으셔. 다른 일행들이 (서준이와 유미) 항상 먼저 식당에 도착해 준비를 하고 또 일하는 중에도 윤여정을 배려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어 보인다. 굳이 저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나..라고 수차례 생각하게 되는 건, 그 힘든 모습이 그대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힘들어 보여. 그러다가 잠깐 다른 식의 생각을 하게 된 건, 윤여정이 굉장히 능력있는 여성이라는 게 보여서다. 영어도 잘하고 또 프로그램의 특성이지만 요리를 한다. 그래서 윤여정은 요리를 하다가는 궁금해서 바깥에 나가 손님들을 상대하며 묻는다. 음식 어떠니, 괜찮아? 이거 먹어 봤니? 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데, 그 모습이 진짜 자지러지게 좋은 거다. 그러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미 가진 자원이 있어서, 그것이 나의 지식과 육체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그것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서도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거다. 손님들은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는데,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는 손님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는 손님들을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되게 보람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지금 내가 맡은 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조만간 끝나버릴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나는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더 오래 계속할 수 있는, 혼자 살면서도 나를 계속해서 단단히 버텨내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그건 무얼까에 대한 진로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는데, 윤여정은 거기에 좋은 롤모델이 되는 것 같다. 외국어를 하는 게 이렇게나 좋은 거야. 알라딘에 m 님이 수차례 내게 영어 공부 하라고 조언해주셨는데, 네, 정말 꿀같은 조언입니다. 가진 자원이 많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아지겠지. 그리고 이미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더이상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내능력을 어떻게든 발휘하면서 살고 싶어.... 내 능력을 발휘하며 살고 싶다면, 일단 내 '능력'이란 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외국어 공부가 답이야!!



물론 프로그램에서 보여지는 거겠지만, 윤여정을 다른 일원들이 깍듯이 대한다. 그런데 윤여정이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과 존경을 받으며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건, 스스로가 겸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음식의 맛을 결정해야 했을 때 본인의 주장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서는, '자 고치자' 고 말하는 거다. 사람이 나이가 얼마가 됐든간에, 어느 지위에 있든 간에, 내가 한 말이 틀렸다는 걸 잘못됐다는 걸 인식하고 또 인정하기는 너무나 어려운데 윤여정이 그걸 하는 거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성격들이 본인이 가진 자원과 맞물려 저렇게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다니, 나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이 들어서도 일을 하는 여성을 보노라니, 자연스레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생각났다. 내가 이 영화 2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지. 부자 남자가 나를 위해 뭐도 사주고 뭐도 사주고 돈도 주고 막 그러는 게 좋아보이겠지만, 만약 나에 대한 그 남자의 관심이 끝나면?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 혼자 서기가 너무 어려워진다. 자기 능력이 있어야 되는거다!! 라는 생각의 끝에 닿았는데, 윤여정은 그걸 실천하는 사람이야..



아, 그러니까 이 윤식당을 보게 된 계기는 스페인이었고 매력을 느낀 건 서준과 윤여정의 외국어 실력이었는데, 그렇게 2회를 지나고나서 부터 이 프로그램은 완전히 다른 매력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이제 그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이야기가 너무 좋은 거다. 어떤 손님이 오나, 무얼 먹고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세상 기다려지는 거다.


손님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찾아드는데, 하하하하,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여행을 많이 한다는 게 너무 씐나는 거다. 가족 단위로 들어오기도 하고 연인들이 찾아들기도 하는데, 식당 앞에 멈춰 서서 메뉴판을 기웃거리며, 여기 갈까 여기 어때 물으며 들어오는 게 너무 좋고, 커플끼리 와서는 나는 맥주 나는 와인 이러면서 다른 메뉴 시키는 걸 보는 건 또 왜이렇게 좋은지. 그리고 서로 다른 음식을 시켜서는, 오 이 음식 맛있어 건강한 느낌이야, 하면서 서로에게 건네는 걸 보는 게 너무 좋은 거다. 그리고 꽃집 사장님 부부는 벌써 윤식당에 두 번째 찾아드는데, 서로 먹는 걸 보며 '사진 찍어줄게' 이러고 사진 찍는 거 보는 것도 너무 좋고.

세상엔 진짜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해서, 나였으면 그냥 식당에서 밥만 먹었을텐데, 누군가는 쉐프를 만나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굳이 쉐프랑 대화하고 싶어해. 아, 어떤 나라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음식 블로거인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음식들의 사진을 찍고 쉐프랑 대화하고 싶어하니까, 남자친구가 그걸 다 이해하는 거다. 그러니까, 내 여자친구는 음식 블로거, 식당에서 쉐프를 만나보고 싶어해, 라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야할까. 이거 되게 중요한 포인트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식당에서 보면 음식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고 되게 귀찮다는 듯이 '아 빨리 찍어' 이러면서 좀 음식 사진 찍는 거 한심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누군가는 찍고 싶어하고 누군가는 찍는 거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응, 너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를 인정하고 함께 가는 건 너무 좋게 보이는 거다. 다양한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은 또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섞여서 오기도 한다.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해서 한국사람과 찾는 것 뿐만 아니라 한국사람이 스페인 사람하고 같이 오기도 하고, 일본 사람이 영어권 사람과 같이 오기도 하고, 또 필리핀 사람이 영국인가 아무튼 다른 나라 사람하고 같이 오기도 하고. 세상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모여 살면서 다양한 나라를 다니고 있어!!



이렇게 커플들이 외국에 식당에 들러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걸 가만히 보노라니, 비포 시리즈 생각이 나는 거다. 특히나 비포 미드나잇. 둘이 연인이 되기 전까지는 당연히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에서, 그들이 다른 얘기는 일절 없이 서로가 서로에 관련된 얘기로만 책 한 권을 꽉 채우는 걸 보지 않았는가. 비포 선셋에서 9년만에 재회한 그들은 다른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 서로만을 보고 서로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둘이 함께하는 연인이 되었다면, 이제 '내'가 아닌 '연인'의 형태로도 세상 속에 들어가게 돼.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그리스로 놀러간 이 커플이, 그리스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식사를 하고 술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거다. 많은 사람들 속에 '나'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많은 사람들 속에 '우리'이기도 한 것. 그래서 윤식당을 찾는 손님들을 보노라니, 비포 미드나잇이 너무 생각나는 거다!!!



내가 이거 돈 내고 보는 거 보고 엄마가 옆에서 '그게 그렇게 재밌냐' 하셨는데, 이제는 옆에 앉아서 계속 나랑 수다 떨면서 같이 보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야, 저거 비빔밥인데 안비비고 먹어 어떡해, 야, 고추장을 잘도 먹네, 쟤네는 그냥 일단 앉으면 맥주를 시키네? 이러면서 세상 즐겁게 보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이거 보고 있으면 남동생이 들어와서 싫어하면서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자고 한다........ 녀석은 숲으로 가길 원하고 나는 세계로 가길 원한다... 인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놓고 페미니즘 영화인 [더 포스트] 에서, 캐서린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다. 당연히 '남자'인 벤은, 자신 역시 잃는 게 많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벤의 '아내'는 정확히 궤뚫어 봤다. 아니, 너는 다른 데 취직할 수도 있고 또 명예가 너에게 남겠지. 그러나 캐서린은 지금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잃게 돼, 그간 그녀가 거기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말만 들어왔고 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는데, 그러면서도 버텨왔어. 사람은 자꾸 그렇게 없는 사람 취급받으면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게 돼, 그런 그녀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아내는 이걸 다 알고 보고 있었던 거다. (정확한 워딩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내 기억에 의한 뉘앙스로 옮겨온 문장이다) 또한 캐서린은 결정적 순간에 자신에게 조언이랍시고 내뱉는 남자에게 '지금 이 회사는 우리 아버지 회사도 아니고 내 남편의 회사도 아니고 내 회사이다' 고 말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고, 공부도 많이 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또 그것에 대한 법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 모든 기자들은 뉴욕타임즈의 회장에게만 달려들어 인터뷰를 시도한다. 같은 결정, 같은 판결을 받은 캐서린에게는 아무도 인터뷰를 요청하지 않는다. 물론 뉴욕타임즈가 더 큰 언론사였지만, 캐서린은 조용한 퇴장을 한다. 그러나 그녀가 가는 길에 아주 많은 여자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녀가 한걸음씩 옮길 때마다 그녀들은 길을 열어준다. 조용히. 이 영화속 의미 있는 말과 행동은 모두다 여자들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없는 사람 취급당하고 고통을 받는 것도 다 여자들의 몫이었고. 나는 특히나 그 위기의 순간, 급박한 순간에 벤이 자신의 집으로 기자들을 불러모아 큰 뉴스를 터뜨리려고 자료를 조사하고 취합하는 과정에서, 여자 기자인 '멕'이 너무 불편해 보였다. 방 안에 촤르륵 보고서를 늘어놓고 이건 어딨어, 저건 어딨어 찾는 과정에서 당연히 엎드리고 쪼그리고 그런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그녀는 스커트를 입고서 그 모든 과정을 다른 남자기자들과 함께 하는 거다. 스커트 입고 그러기 진짜 세상 힘들텐데.. 어휴... 우리 집이었다면 내가 트레이닝복 바지라도 줬을 거야.... 아니면 수면 바지라도.... 자, 이거 입고 하자, 하고...... 아직도 그녀가 너무 불편했던 것 같아 ㅠㅠ




영화가 끝나고 지하에 있는 마트에 갔다. 비빔국수를 해먹고 싶어서 소면을 사려고 한거였다. 마침 캔맥주 6개를 싸게 파네, 해서 맥주도 집어 들었는데, 얼라리여~ 온 김에 와인을 안사가면 서운하지... 무거우니까 딱 하나만 사자, 하고는 집어들었다. 마트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이번에 사온 게 끼안띠 와인이어서, 이제 내 방에는 멜롯, 까베르네 쇼비뇽, 끼안띠가 모두 있다. 마음이 여유로워졌어..




이야..너무 좋다..... 내가 나였어도 나랑 살고 싶었을 것 같아... 나는 나랑 살아서 너무 좋아..... 이렇게 술 쟁여놓는 거 세상 좋은 습관이야.....



어쨌든 그래서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요리의 감을 믿고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김치를 이케이케 썰고 소면 삶아 넣고 고추장 넣고 참기름 넣고 설탕 약간 뿌려가지고 이케이케 비벼주면...겁나 맛있는 비빔국수가 되겠지?




먹어보고 맛없어서 당황했다... 왜 머릿속에서 만드는 거랑 실제 결과물은 이렇게 다르지? 왜죠? 왜 때문이죠? 내 머릿속에서는 진짜 입에 침고이는 비빔국수가 만들어졌는데 왜 때문에 먹으면 누구에게도 만들어 줄 수 없는 맛이 되어버리는거지??



후루룩후루룩 비빔국수를 먹고 있는데 남동생이 마른안주를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마침 엄마가 사둔 황태포 생각이 난다. 국 끓인다고 사두셨던 거.. .야, 귀찮은데 나가지마, 황태 먹어, 내가 소스 요리해줄게, 하고는 안주를 차려냈다.





누나 이거 그냥 집에 있는 간장에다가 마요네즈 넣는 거 아니냐? 이게 무슨 소스 요리한다는 거냐??? 라고 남동생이 물어서, 고추 썰어서 넣었잖아.... 했다.....


비빔국수 맛을 보면 나랑 살지 않는 게 현명하겠지만, 또 이렇게 소스를 근사하게 만들어 내놓는 걸 보면 역시 나랑 사는 게 답인 것 같다. 무엇보다 술 쟁여놓는 나.... 넘나 만족스러운 것. 후후훗.





[더 포스트]에서 캐서린은 수차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사회 에서도 그녀는 많은 자료를 준비했지만 그녀가 작게 내뱉는 말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당신이 보여요' 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다. 제목은 그래서 나온 것. 이 대사는 영화 [아바타]에서 나온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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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8-03-0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 공부 세션1 후에 다락방님 페이퍼로 잠시 휴식하는 거 넘나 좋다.....너무 좋아.... 청량고추는 꼭 넣어야해요.....

다락방 2018-03-05 09:55   좋아요 1 | URL
스윗듀님이 제 페이퍼를 좋아해주셔서 저는 넘나 좋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읽고 써야징 ㅋㅋㅋㅋㅋ
청량고추 만쉐이~~

유부만두 2018-03-05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빔국수 찌찌뽕!

다락방 2018-03-05 10:00   좋아요 1 | URL
저도 유부만두님 페이퍼 뫘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같은 메뉴일지언정 맛은 다를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없는 맛 ㅠㅠ

유부만두 2018-03-05 14:3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사진에 있었는데요? 팔도비빔 양념!!!

다락방 2018-03-05 17:27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양념을 살까요? (몹시 흔들림) 그렇지만.... ㅠㅠ

[그장소] 2018-03-05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요일 활기차게 다락방 님이.차려주는 글의 식탁에서 아주 맛나게 즐겁게 글 맛을 느끼고 가요!
읽는 내내 웃음이 벙그러졌어요! 덕분에 행복해졌고요!! 다락방 님도 굿굿한 하루 되세요!^^

다락방 2018-03-05 17:27   좋아요 1 | URL
으하하하. 즐겁게 읽으셨다니 제가 더 기쁩니다. 사소한 것들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참 괜찮은 인생인 것 같아요.
:)

[그장소] 2018-03-05 17:30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 님 글은 전혀 사소하지 않지만 즐거워요! 비타민 D같고요!^^

비로그인 2018-03-05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긴 글 너무 좋고요...
더 포스트 보고 싶어지네요-
그리고 와인을 사러 가야겠다고 결심.
언제나 실천의지를 주는 다락방님 포스트...^^

다락방 2018-03-05 18:44   좋아요 0 | URL
아이다호피쉬님 ㅠㅠ 안그래도 써놓고 또 너무 길었네 ㅠㅠ 중간에 못끊네...라고 생각했었는데... 긴 글 너무 좋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흙흙

와인 사오세요!! 사다 쟁여두세요!! 행복하게 삽시다 우리 ㅋㅋㅋㅋㅋ 아프지 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18-03-05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식당1편을 봤을때 저도 윤여정씨에게 반해버려~~2편을 꼬박은 아녀도 꼭 챙겨보곤 했죠^^
발리편에 비교해서 스페인편은 확실히 손님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가 귀에 쏙 들어 왔어요.너무나도 즐겁게 음식을 먹고 서로를 바라 보며 웃으며 대화 나누는 모습이 참 좋더군요!
그리고 와인이나 맥주 한 잔 정도씩 곁들여 식사를 하니 더 즐거운가 싶어 요즘 저도 한 번씩 그걸 따라하고 있어요.
술을 잘 못마셨는데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ㅋㅋ
윤식당을 보면서 ‘먹는 것‘에 대한 관점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또한 다락방님이 여행 하면서 올린 음식 후기문 또한 강한 식욕자극도 되구요.비빔면 또한 침샘 자극하는데요??^^
아~그것도 보셨는지 모르겠어요.윤식당에 단체 손님들 회식장면이 있었거든요.윤여정님 완전 힘들어 얼굴이 퉁퉁 부어 보여 안쓰러웠어요ㅜㅜ
에혀~~
그래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 더 반했어요.나이 들어도 저렇게 나이 먹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다락방 2018-03-06 10:38   좋아요 1 | URL
저도 윤식당 볼수록 윤여정 쌤께 반해버리게 되더라고요. 영어 실력도 실력이지만 늘상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고, 제가 보던 것중에 정유미가 늦잠을 자서 ‘선생님 저 늦잠 잤어요‘ 하니까, ‘응 잘했어‘ 하시는데, 그 장면은 또 왜그렇게 좋던지요. 뭔가 좋은 어른이란 어떤것인가 몸소 보여주시는 것 같아요 ㅠㅠ

저 비빔면은 너무 맛이 없었어요. 그냥 제가 만들어서 저 혼자 후루룩 삼켜버렸어요. 머릿속 요리는 아주 맛있는데 왜 현실의 요리는 저모양인지 ㅠㅠ 누구에게도 대접할 수 없는 요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전 이제 요리에 뭔가 솜씨 좀 생긴줄 알았는데..저만의 착각이었는가 봐요. 아하하하하.

제가 보던 회차에서 경쟁 레스토랑이 ‘다음주 금요일에 예약할게 여덟명‘ 이거 나왔는데, 잠깐 예고로 보니까 여덟명 훨씬 더 되는 것 같던데요? 그래서 엄마한테 ‘엄마 이제 어떡하지, 저 손님들 다 어떻게 상대하지‘ 했었는데 아아... 역시나 너무 힘들어 하셨군요. 그 날 밤은 푹 주무셨어야 됐을텐데 ㅠㅠ 역시 노동은 너무 고된 것이에요. 흙흙 ㅠㅠ 안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다면 좋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늙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요. 우리 잘 늙어갑시다, 책나무님!!

비연 2018-03-05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식당도, 더 포스트도 꼭 봐야겠어요 불끈

다락방 2018-03-06 10:39   좋아요 1 | URL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 진짜 너무 멋진 것 같아요! 제가 못해서 그런가봐요.
그리고 더 포스트는 비연님,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강추합니다!
제 친구 한 명은 최근에 본 영화중에서 가장 좋은 영화라고 말하더라고요. 추천!

2018-03-0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7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