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운동에 앞장서는 언니들 얘기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나 힘들게 돈을 벌어 아주 좋은 대학에 보내놨더니 데모를 해서 경찰에게 끌려가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입장이 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여러가지 갈등을 하게 되는데, 나는 나의 조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조카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고 부당한 일에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다가 혹여 다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안할 수가 없다. 내가 좀 더 앞 선 시대를 살아 내 조카가 이 책의 등장인물들처럼 잘못된 정부에 맞서 싸우려고 한다면 나는 온전히 조카를 지지할 수 있을까. 나는 차라리 내가 나가서 싸울지언정 조카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하게 두고 너는 가만 있어' 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이 정말 조카를 위한 길일까. 아픈 조카를 보고싶지 않은 나를 위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조카가 하고자 하는 걸 하게 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어떨까... 막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감옥에 있는 딸에게 쓴 엄마의 편지를 보면 눈물이 왈칵 고이는 거다. 어휴... 더러운 세상이었어.......
위에 사진 찍어 올린 부분들을 읽다가 티비 시리즈와 책이 생각났다. 152페이지, 악몽을 꾸다 깬 장면에서는 아주 오래전,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일요일마다 텔레비젼에서 보여주었던 《V》 생각이 났다. 지구인으로는 '도노반' 과 '줄리엣'이 주인공이고 물론 그들과 함께 하는 로빈도 있고 또 누구더라...아무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고, 파충류로는 '다이아나'가 주인공인 시리즈였다. 당시에 아주 재미있게 본 시리즈여서 일요일에 가족들이 외출할 일 있어도 공부하겠다는 핑계로 집에 있으면서 나는 그 프로를 보았던 거다. 그리고 도노반과 얼마나 사랑에 빠졌던지! 나는 꿈에서 여러차례 지구를 구하곤 했다.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주생명 파충류가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인간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 지구인에게 우호적인 듯 보였고 또 지구인과 같은 모습이라 생각했지만, 실상 쥐 같은 것들을 꿀꺽 삼키는 파충류였다는 거다. 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그걸 막으려믄 지구 방위대(?) 같은 게 생기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도노반과 줄리엣이었던 거다. 이야기가 흐르고 후반으로 갈수록 파충류의 힘은 더 거세지고 더 많이 지구를 장악하는 것 같은데, 그 과정에서 줄리엣이 파충류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어떤 기계 안으로 들어가 몸에 밀착되는 옷을 입고 전기고문 같은 걸 당하게 되는데, 그 후로 줄리엣은 악몽을 꾸고 몸에 이상증상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그러면서 도노반에게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그후로 자꾸 왼손을 쓰게 된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거다.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을 쓰게 된 걸수도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에 고문당한 그 순간이 자꾸 떠오르게 되는 것.
어제 저 책의 152페이지를 읽는데, 그 고문의 후유증에 갑자기 줄리엣이 생각나는 거다. 어휴..
줄리엣은 그 시리즈 말고 보지 못했다가, 아마도 이름이 '페이예 그란트' 였을텐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영화 《오멘》에서 만난 기억이 있다. 도노반은 '마크 싱거' 였던가.. 그 사람도 어딘가에서 보긴 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저 책의 153페이지에서는 '조지 오웰'의 책 《1984》가 생각났다. 연애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가 상부에 보고되어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답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버티다가, 그만, 쥐를 풀어버리는 데서 다 불어버리고 마는 거다. 쥐를 너무 싫어했는데 쥐로 고문을 해서. 너무 끔찍해서 불어버리고 말았어. 영초 언니도 벌레를 아주 징그러워하고 싫어했는데, 아마도 그걸 알고 그런 식으로 고문을 했던 것 같다.
고문이라면, 답을 들어야 하니, 그러니 아마도 상대의 가장 약한 점을 노린거겠지만, 너무... 치사스럽지 않나. 치사스럽다는 말은 사실 적합하지 않을거다. 고문 자체가 잔인한 행위이니까.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끌려가고 고문을 당하고, 내가 너무 싫어하는 것들을 내 앞에 풀어놓는다는 것, 거기에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그 시간이 지나고난 뒤에도 그 시간에 대한 악몽을 꾸고 자꾸만 그 시간을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몇 개의 이미지라도 가져오려고 네이버에 V 검색했는데 포스터 하나만 딸랑 나오네. 이미지를 눌렀더니 사람들이 손으로 브이자 모양하고 사진 찍은 거만 주루룩 나온다 ㅎㅎㅎㅎㅎ 인생... 시간이여.... 시간은 정녕 이렇게 흐르는 것입니까... 넷플릭스 안하는데, 거기에 브이 있나? 뭔가 말하다 보니까 다시 보고싶네.
거기에 '엘리자베스'라는 등장인물이 극중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이 인물이 또 되게 신비로웠다. 기억에 의지해서 글을 쓰는 거라 이름들이 다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구의 전사 여자 '로빈'과 착한 파충류 '윌리엄'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거다. 그게 엘리자베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다들 안도하는 데, 혓바닥을 내미는데 뱀혓바닥 이었던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놀라는데, 이 아이의 성장 속도가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빠른 거다. 아주 쑥쑥 자라서 금방 소녀에서 어른이 되는 거다. 지구인과 우주파충류의 혼혈이어서인지, 엘리자베스에겐 초능력이 생긴다. 아, 근데 그 초능력이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염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엘리자베스는 나중에 '칼'이라는 지구인 남자랑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의 막이 내리는데, 엘리자베스는 우주선을 타고 파충류와 함께 지구를 떠나는 것. 그래서 칼과 헤어지게 되는데, 칼은 우주선에 몰래 숨어들어 엘리자베스를 따라가는 거다. 음...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네.....
아..사랑 뭐지.... 내가 살던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되는, 그런 사랑...뭐지..... 졸 위대하네?
그러고보니 이 책, 《영초 언니》에도 사랑한다고 하고 사귀기로 하고서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연인이 등장한다. '명숙'과 '주웅'이 그들인데, 주웅이 데모를 주도하다 걸려서 감옥에 가게 되어서 그들은 자주 만날 수가 없게 되는 것. 그래서 그들은 주웅의 여동생을 통해 서로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누이가 되어서 교도소로 속칭 '비둘기'를 날렸고, 그는 누이 이름 앞으로 내게 '비둘기'를 날렸다. 우리는 교도관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편지 속에서 오빠와 동생 코스프레를 하면서도, 우리끼리만 통하는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았다. 평범한 안부 편지, 집안 소식 속에 슬쩍 숨겨놓은 비밀 메시지를 발견해낼 때의 그 기쁨이란! 잦은 만남과 소통 속에 오가는 달콤한 구애만 사랑이 아니었다. 얼굴조차 못 보는 절대빈곤도 사랑을 키워나가는 또다른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p.115)
보지 않아도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계속 소통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소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편지란 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기다리고, 믿고, 또 대화할 수 있었던 것. 내가 여기 있고 네가 거기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고 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확실히 보이지 않음에도 사랑을 키워나가는 데 필요하며 중요한 일인 것이다.
칼은 지구인이었고 엘리자베스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 가야하는 상황. 만약 칼과 엘리자베스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돈만 있으면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칼은 그 우주선에 숨어탈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라도 주고받는 게 가능했다면, 전화통화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우주선에 타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야. 그러나 지금 엘리자베스를 다른 행성으로 보내고 나면 그 뒤는 엘리자베스를 전혀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전화도 편지도 안돼... 그러니 그 우주선에 타는 게 아니고서는 그녀에게 닿을 수가 없는 거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움직이고 행동한다는 것. 그것만큼 확실하게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 어디있을까. 칼은 제대로된 선택을 했다고 새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우주선에 숨어드는 것. 이것말고 삶에 있어서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라는데, 나는 고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칼은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할 때만해도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안중에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칼이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 왜죠? 왜 때문이죠? 또 내가 아닌 누가 이 글을 쓴것이냐.... 다른 자아, 들어가.... 지금 나오는 거 아니야, 들어가....어디서 또 튀어나온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왜 이렇게 된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줄리엣 얘기 하려고 했는데 왜 칼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엊그제.
내가 지난 가을 런던에서 보낸 엽서를 받았다는 친구의 연락이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10월 초에 런던에서 보낸 엽서를 엊그제야 받았다는 것.
항상 잘 받았다고 말해주는 친구인데 그런 말을 안하길래, 아 못받았나보다, 중간에 분실됐나보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낸지 한달도 안되었을 때 받았다고 말해준 친구들이 많았는데, 말을 안한 친구들이 몇 있어서, 어쩌면 다른 우체통에서 보낸 친구들 것이 도착을 안했나보다, 통째로 다 분실된거야, 그 우체통은 진짜 우체통이 아닌 것인가....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가 이제 시간이 오래 지나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받았다는 거다. 거의 반년이 다 된 지금!!
한 친구가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다른 친구들 둘도 받았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작년 10월초에 보낸 걸 올해 3월초에 받았다는 것. 이게 무슨 일이지? 그동안 대체 엽서들아, 어디 갔다온거야?
받은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서프라이즈라 기뻐했고, 나는 나대로 기뻤다.
그것들이 돌고 돌아 결국은 목적지까지 닿았다는 생각에. 어쨌든 가 닿았어. 다른 엽서들보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래서 그 사이에 대체 어디를 갔다가 또 어디에서 머무르다 이제야 오게 된건지는 모르지만, 닿았어, 닿았다고!!
나는 항상 시간이 우리를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닿아야 할 곳이 거기라면, 언제가 됐든 거기에 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가을의 엽서는 내 말에 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 엽서들이, 자신들이 닿아야 할 곳에, 어떻게든, 기어코, 닿고야 말았으니까.
좋았다. 좋은 일이야.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다.
결국 닿아야 할 곳에 닿는 이야기.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