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몇 장 읽지도 않았을 때부터 나는 '이 작가에겐 있고 나에겐 없는 것이 대체 뭘까'를 생각해야 했다. 왜 이 작가는 글을 잘 쓰고 나는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어떤것에서 오는 무슨 차이인가. 이 작가에게 있고 나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자꾸 문장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읽었다. 몇 장 읽지 않았을 때 느낀건, 이 작가가 나보다 훨씬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거였다. 가지고 놀 수 있는 단어가 많다. 게다가 그것들을 어떻게 써내야 하는지도 알고. 그래서 문장들이 화려하다.


작가는 자신의 문체가 건조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몇 번이나 '이게 건조하다고? 건조해?' 되물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김 살로메 작가의 문체는 건조하지 '않다'는 거였다. 건조한 문체가 나쁘다거나 혹은 좋아서가 아니라,- 건조한 문체는 나도 참 좋아하고요-, 그러니까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한 권의 책으로 느낀 김 살로메 작가의 문체는 건조하지가 않다는 거다.



프로이트 역시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인간 과제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언제나 나보다 타인이 나를 잘 알며, 이웃보다 내가 이웃을 잘 아는 수가 있다고 했다.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제 마음을 타인이 더 잘 읽는다는 것. 대체로 인간은 자신보다 타인을 분석하는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p.175)



타인인 나는 이 작가의 문체가 건조하지 않아. 게다가 작가는 지나치게 겸손하다.



평범한 우리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건 내 안의 정서가 외국어 낱말처럼 서툴기 때문은 아닐지. 두껍게 언 마음 호수에다 도기로 바람구멍 한 점 내고 싶다. (p.126)





네???????????

나는 몇 장 읽지도 않고 이 작가가 어휘력이 풍부하구나, 생각했고 그래서 '사전을 따로 읽고 들여다보는 건 아닐까' 했는데, 작가는 자신이 '우리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부리지 못'한다고 한다. 음...



에세이라는 장르는 작가에 대해 너무 잘 드러내기 때문에 장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대로 에세이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내가 이 책 한 권을 읽고 이 작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건 말도 안되지만, 이 책 한 권을 읽고 나는 이 작가가 굉장히 욕심이 많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욕심과 노력은 좋은 글을 쓰는데에 집중되어 있어서 일상의 하나하나 사람들과의 대화들까지 고스란히 글의 소재가 되고 생각의 거리가 되는거다. 매일 일천자의 글쓰기를 했다는 것은 당연히 성실하다 말할 수 있지만 단순히 '성실하다'는 것만이 이 작가의 특징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잘쓰고 싶다는 욕심. 그게 이 작가에겐 굉장히 크고, 그것이 이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나는 작가를 알지 못하면서 작가의 욕심이 느껴졌는데, 그게 내가 '이 작가는 굉장히 노력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런데 뭔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계속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좋은 책을 만들고 싶었던 욕심이 한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사전을 따로 보는걸까 싶을 정도로 단어도 많이 알고, 책 한 권을 읽어도 꼼꼼하게 읽는가보구나 싶을 정도로 문장도 잘 써내는데, 그런데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단락을 이루고 단락이 모여 한꼭지를 이룰 때, 그 모든 것들이 과한 느낌을 주는거다. 많은 것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붓는 느낌이랄까. 작가는 자신의 문체가 건조하다 했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건조하게 느끼지 못한건 아마도 그 과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금팔찌, 은팔찌, 진주 팔찌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팔찌를 팔에 껴버린 느낌이랄까. 책장을 넘기면서 사진은 대체 왜 넣은걸까, 없는 편이 더 나앗을텐데, 라는 생각도 했다. 사진이 글의 맥락과 딱히 어울리질 않아 사진을 보면서 어떤 의미로 넣은걸까를 자꾸 멈추어 생각하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책을 읽다가 흐름이 끊겨버리는 것. 중간중간 사진을 삽입한 것 역시 좋은 책, 원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는데, 오늘 다시 생각나 이렇게 페이퍼를 쓰게된 건, 오늘 점심시간에 본 한 편의 다큐 때문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무얼 볼까, 하다가 고른 프로그램이었는데, 아무런 정보도 없어서 다큐인줄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재생시켰다. 음식구경이나 실컷하자, 하고. 내가 본 프로의 주인공은 '크리스티나 토시'라는 쿠키와 파이의 장인이었다.





크리스티나 토시는 학창시절 공부를 엄청 잘해서 늘 A 만 받는 학생이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건 너무 싫었다고 했다. 뭘해야 할까, 뭘 해야 내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행복할까, 를 고민하다가 그 길로 요리를 배우게 되고 뉴욕으로 가 식당에도 취직하게 됐다는 거다. 요리를 하는 게 너무 좋고 또 뉴욕에서도 요리로 성공하고 싶어서, 취직한 직장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 일하면서 디저트도 만들어보고 직원들의 식사도 챙겼다고 했다. 그런 자신에게는 다른 것들을 볼 여유도 없었다고. 가족도 친구도 보이지 않아 외로웠는데, 그 외로움마저 일로써 이겨내자고 생각했다는 거다. 여기까지가 내가 본 30분 정도의 시간동안 나온건데, 나야 '크리스티나 토시'라는 이름을 이 프로를 보며 처음 알게된 거지만, 그녀는 엄청 유명한 파티쉐인것 같았다.



최근에 '노력'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멋진가,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기초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일기까지 일본어로 쓸 수 있게된 친구 생각을 오래 했고, 이 다큐를 보면서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은 정말이지 얼마나 근사한가 생각했다. 그러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까지 생각하게 된것. 최근에 읽으면서 '작가가 진짜 노력하는구나', '머릿속에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엄청나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터다. 게다가 엄청 열심히 살고 있어!!


크리스티나 토시는 턱까지 다크가 내려와도 쿠키를 굽고 파이를 만드는 게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성공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나 노력을 하는데 성공은 당연한 보상이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노력하는 파티쉐, 친구, 작가를 보고나니 자연스레 내가 나를 돌아보게 되는 거다.



나는 무슨 노력을 했지?



아무리 물어도 내가 노력한 게 없는 거다. 크리스티나 토시처럼 오래, 계속, 끊임없이 하는 게 도대체 나는 뭐가 있지? 천재도 아닌데 노력도 안하면 어떡하지? 글 쓰는 게 삶의 낙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내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건 뭐가 있지? 한 권의 책을 정성스럽고 꼼꼼하게 읽지도 않고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하는 게 뭐지? 요가도 고작 일주일에 두 세번밖에 안가는데 실력이 늘 수가 있나? 머리서기 마흔다섯에 하겠다고 했지만, 쉰에는 될까? 모르겠다. 매번 다이어트 하겠다고 설레발 치는 건 뭐지? 그건 매번 실패하기 때문이 아닌가? 난 대체 어디에, 무엇을 노력하지? 나는 너무 막 사는게 아닌가? 내가 오래, 끊임없이, 계속 하고 있는 것, 쉬고 싶은데고 계속 하는 게 뭐지?



앗!


나는 그렇게 묻고 또 물었는데 답할 수 있는 게 '회사 다니기' 밖에 없는 거다. 맙소사...그렇다면 내가 이 일이 좋아서, 기뻐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우앙 - 오늘도 회사 가네~ 넘나 신나는 것. 울라울라 울라울라~'


이래서 하는건가? 노노. 아침에 눈뜰 때마다,


'도대체 이 지겨운 짓을 언제 그만둘 수 있나' 만 생각하는 거다.



그런 내가 직장생활을 20년 가까이 하고 있는 건..나는 내가 먹고 살아야 할 돈을 내가 마련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나 먹여살려달라고 누구에게 의지하기도 싫고 부탁하기도 싫어. 그렇지만 먹고싶고 마시고 싶다. 그러면 어째야 하나.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은 어떻게 만들 수 있나.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가진 게 없으니까... 애초에 돈이 없으니까 누군가의 밑에서 누군가가 출근하라는 시간에 출근하면서 꾸역꾸역 일을 해야해. 이것은 노력이 아니다. 나의 살고자하는 의지가 넘나 강해서 이어져온 것....


살아야 한다.

어떻게?

가급적이면 즐겁게!

뭘 해야 즐거워?

먹고 마셔야 즐겁다!!



이래서 끈질기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 내가 내 의지로, 내 행복을 위해 꾸준히 하는 건 뭐가 있나... 물론 책 읽고 글 쓰기가 있지만, 그걸로 무슨 성공을 한다거나 할 수도 없어. 나는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을 읽으면서 '나는 소설가는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씁슬하게 계속 해야 했다. 이렇게 노력하지 않는 내가 무슨 소설가람... 이렇게 된 것.


성공은 뭐지?

성공하기 위해 그럼 나는 무슨 노력을 해야하지?

음..

딱히 성공을 안하면 되지 않나?

그러면 노력하지 않아도 되잖아?




막 이렇게 의식의 흐름이 제멋대로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티나 토시..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에너지를 받고 그렇게 미친듯이 쿠키 만들기에 도전할 수 있었나요... 나도 쿠키 만들어 볼까요? (네?)



일단 주말에 집에서 소떡소떡이나 만들어 먹어봐야겠다.




어떤 사안 앞에서 그것이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제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겉 물결이 역류한다고 물길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본질의 물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묵묵히 흐른다. 그 깊은 속은 결코 역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p.68)

쓰는 말의 틀에 따라 품격이 달라진다. 맘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 상대가 오해하거나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싿면 그것은 말을 잘못 부린 탓이다. 돌팔매질이 들어간 말보다는 봄바람 같은 상쾌함이 깃든 말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그런 이의 말은 나이테가 늘어나도 말의 심지가 훼손되지 않으룬더러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하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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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8-24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무슨 개똥소리냐 싶으시겠으나, 포기하면 편하더라구요. 하지만 다락방님은 포기하지 마세요. 뭐든지. 뭐든지 나 혼자 편할테다....

다락방 2018-08-24 15:12   좋아요 0 | URL
이게 무슨 개똥소리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나도 포기할거지롱. 같이 편하자~~~~~~~~~~~~~~~~~~

syo 2018-08-24 15:28   좋아요 0 | URL
훠이~~ 훠어어이~~
포기는 나의 것. 나만의 포기.

다락방 2018-08-24 16:08   좋아요 0 | URL
날 두고 혼자 가지 말란 말예요.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같이가요 포기의 길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단발머리 2018-08-2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이 문장 말이예요.

아무리 물어도 내가 노력한 게 없는 거다.

너무 맘에 와 닿아요. 제가 무엇을 얼마나 못 하는지를 따질것도 없이 그냥... 전 게을러서 ㅠㅠ
같이 가요, 포기의 길로.... 저도 데려가세요~~~

다락방 2018-08-24 22:16   좋아요 0 | URL
ㅎㅎ 포기하면 편해질텐데, 그 길이 분명 편한길일텐데, 저는 가만 생각해보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어요. 그것들을 포기하지 말자고, 단발머리님의 포기하자는 댓글을 읽고 오히려 다짐하게 됐어요. 이상하게 의욕적이 되는 밤이에요. 아마 하루키를 다 읽어서, 마지막에 큰맘 먹고 헤어진 아내(유즈)에게 묻고 싶은 걸 묻는 걸 읽어서 그런가봐요, 단발머리님. 헤헷.

카알벨루치 2018-08-2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은 소떡소떡 ㅋㅋㅋㅋㅋ우아 정말 락방락방 다락방님입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08-24 22:17   좋아요 1 | URL
소스를 미리 만들어두는 게 좋다고 해서 제가 지금 막 소스를 만들었는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두근두근... 소떡소떡한 토요일 되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8-10-2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8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8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9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책상 아니고 부엌 식탁인데, 커피 내리려고 일어나보니 이렇게나 엉망이고...


그러하다..


난 왜 늘 이모양이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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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9-06-0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엉망이라고요? 아닌데...;;;;

다락방 2019-06-09 17:17   좋아요 0 | URL
아아 이게 엉망이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지 뭡니까!

꼬마요정 2019-06-0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 옆보다 정돈이 잘 되어 있는데요..^^;; 이 와중에 제 옆에 책더미랑 커피가 담긴 잔이 있다는 것까지 같아서 소오름이... ㅎㅎㅎ

다락방 2019-06-09 17:17   좋아요 0 | URL
아앗 꼬마요정님도 언제나 어수선한가요? 책 읽는 사람들은 이렇게 옆에 막 쌓아두고 펼쳐두고 읽어야 하는가 봅니다 ㅋㅋ 전 정신차리고 식탁 위 초토화 된 거 보고 너무 깜짝 놀라서... 하아-

얼룩말 2019-06-09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 예뻐! 식탁 책 받침대 머그컵!!! 어느 하나 안 예쁜 게 없어요

다락방 2019-06-09 20:41   좋아요 0 | URL
아니 딱히 예쁜 건 없는것 같은데 말이죠 ㅋㅋㅋ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19-06-10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멋져보이는 것은...^^

다락방 2019-06-10 08:36   좋아요 0 | URL
여러분들 늘어놓는 거 좋아하시는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사랑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넬은 버넌이 미울 지경이었다. 이기적으로 자기 일에만 푹 빠져서, 그녀가 불행하면 자신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싫다고 하고 있었다 …… (p.284)



애거사 크리스티가 '웨스트매콧' 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여 번역한 여섯권의 소설을 모두 다 읽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보다 웨스트매콧이 쓴 소설을 나는 더 많이 읽어버렸는데, 매작품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성격을 가진 인물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이 소설에서도 그랬다. 어느 하나 완벽한 인간은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일 테니까. 입체적인 인물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단단하게 자기몫을 하고 있다. 물론 지지리 못난 인간까지도.


이 소설 속에서는 특히 음악의 천재로 나오는 남자, '버넌'이 너무 싫었다 ㅎㅎ

아름다운 '넬'을 사랑하면서 버넌의 가난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게 되는 넬을, 자기 멋대로 '너는 가난을 신경쓰지 않는 여자잖아' 라고 단정짓는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상대가 불행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너가 불행하면 내가 힘들기' 때문에 싫은 남자. 내가 딱 싫어하는 인간 유형인데, 그러니까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심하면서, 그걸 인정하기 보다는 늘상 '너를 사랑해', '너를 위하는 거야'로 포장해버리는 사람. '너를 이토록이나 진실되게 사랑하는 나'에 푹 빠져버린 사람. 정말 딱 싫어. 너무 징그럽지 않은가.


그런 남자이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고나서야 비로소 '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했구나, 처음부터 그랬어' 라고 깨닫게 된다. 진짜 바보 천치가 따로 없다. 똥멍충이. 음악의 천재이지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똥멍충이. 나는 그런 음악의 천재 따위 필요치 않다. 완전히 자기 중심적이라, 상대가 당연히 자기 생각대로 결정할 거라고 너무나 확신을 갖고 있는 점이 진짜 너무 짜증나고 못마땅하다. 싫어합니다. 책에서도 주변 친구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며 버넌을 비난하곤 하는데, 버넌은 그러니까 현실보다는 환상에 집착해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랑은 아름다울거야, 가난해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할거야 블라블라..



무엇보다 '제인'에게 한 행동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한 넬이 다른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하자 큰 슬픔에 겨워 제인에게 '옆에 있어달라' 말하고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와 함께 살면서, '내가 잘못생각했어, 너랑 결혼할게' 하고 돌아온 넬을 얼싸안으며, 제인이 보는 앞에서 행복해하고 팔짝팔짝 뛰고, 그래 우리 결혼하자 이러는 개새끼... 제인은 뭐냐, 그러면? 왜 너가 힘들 때는 제인에게 옆에 있어달라고 해놓고, 어떻게 제인 앞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팔짝팔짝 뛰어? 니가 인간이냐 진짜? 그리고 결국 어떤 실수를 저질렀죠?



이긍...

그만하자....



책의 제목이 '인생의 양식'이어서인지, 나는 오늘 나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점심시간. 나보다 먼저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동료 직원에게 맛있게 잘 먹고 오라고 인사하고 웃으면서, 아 좋다, 하는 생각을 했다. 특별할 게 없고 어제와 같은 일상이 안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상사가 몹시 싫어서 미칠 것 같은 시간도 지나갔고, 동료와도 늘상 사이좋게 지내고, 그렇게 평온하고 가만한 나날들이 이어지니 좋구나, 하는 생각. 물론 이런 틈틈이 슬프거나 힘든 일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오늘은 평온한 오늘이 좋다, 하는 생각을 한것이다. (아, 내일이 쉬는 날이어서 기분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너무 힘들었던 작년과 재작년 생각이 났다. 작년과 재작년은 심정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재작년에 일어났던 일과 작년에 일어났던 몇몇 일들이 나를 몹시 힘들게 했는데, 지금와 돌이켜보면 '그것이 그렇게까지 힘들 일이었나' 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렇게까지 힘든 일은 아니었는데' 하게 되는 것이다. 넓게 보면 좋은 일에 대해서도 나는 되게 힘들어했다. 남동생의 결혼과 조카의 성장에 있어서,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그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는 서운함이 어찌나 크던지 너무 힘들어서 곧잘 울곤 했다. 애인의 이성친구가 몹시 신경쓰여서 숨이 막힐 지경인 적도 있었다. 몇 번이고 '나 좀 어떻게 해줘'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면서 나는 얼마나 지옥에 살았던가. 그 때의 나를 그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해 나는 사랑을 좀 공부해보자 생각해서 사랑에 관한 책도 읽었더랬지. 그러나 그 지옥에서 빠져나오게 된 건 한참이 지난 후였고, 떠나갈 사람들이 떠나간 뒤였다. 그때 내가 그에게 나 좀 살려달라고, 속으로만 외치지 않고 입밖으로 말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나는 수차례 내게 물었지만, 딱히 긍정적인 생각은 들질 않는다.



대학시절 '스토리'의 <다시>란 노래를 좋아했는데, 이게 유명한 노래가 아니어서 내 주변에도 아는 사람이 없는 노래인데, 요즘 이 노래가 너무 생각이 나는 거다. 다시 듣고 싶어 음악앱을 검색해도 안나오고 유튜브를 검색해도 안나와, 그저 혼자 흥얼거리는 게 전부이구나, 했는데, 이 노래를 알만한 사람에게 이 상황을 얘기하고 싶은 거다. 역시 남동생 뿐이었다.



"스토리의 다시 라는 노래 알지? 이게 유튭에 없네."



나는 남동생이 안다는 답을 할거라고 생각했다. 아니까. 그리고는 나처럼 없냐고 서운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놈은 아 글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답을 보내왔다.



"나한테 있어."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얜 뭐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이런 새끼가 다잇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더니 슝- 파일을 보내주는 게 아닌가. 대단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너무 좋아서 계속 웃었고, 이걸 동료에게 얘기하니, 차장님네 남매는 진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남매인 것 같아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전에는 조카와 같이 서점에 갔다가 사달라는 책을 사줬는데 다 읽었다고 하더라. 앗, 타미야, 그 책 어땠어? 물어보니. 이모 그거 감상문 썼어, 하고는 '사진 찍어 보내줄게' 하면서 슝- 사진을 보내주는 게 아닌가. 아아, 내 조카여. 너는 누구 조카다? 이모 조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내 안에 사랑 넘쳐서 어떻게 하지를 못하겠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나는 남동생과 조카가 각자 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자신들의 세계를 더 확장시키고 있음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는 그들이 나로부터 멀어진 게 아니라 그들이 더 성장하는 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전히 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고 나 역시 그러하며 우리가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로부터 멀어진다는 생각에 서운해했던 시간은 이제 다 지워져버렸다.

애인의 어떤 말들에 크게 상처받고 힘들었던 그 시간도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그 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왜그렇게 숨이 막혔을까.



그 일들이 정말 나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할 일이었나. 만약 지금 이순간 또 닥친다면 나는 그때처럼 똑같은 크기로 힘들어할까? 지금의 내게 그 일들이 똑같이 일어난다면 나는 물론 서운할 것이다. 힘들기도 할것이다. 그러나 그 크기는 작년이나 재작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작년과 재작년의 바이오리듬 탓일까? 왜 그 일들을 나는 그토록이나 크게 비극적으로 받아들였을까? 내 운명의 흐름은 그 때, 그 모든 것들을 그렇게 힘겹게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지점에 와 있었던 걸까? 그 흐름이 지금은 안정적인 단계로 넘어왔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이라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텐데' 라고 생각할 수 있는걸까?




인생은 뭘까.

나는 인생에 대해 아주 자주 생각한다.

앞에 누가 있든, '인생은 뭘까' 종종 묻곤 한다.



인생은 뭘까.



그리고 지금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얼마나 유지될까. 내일 일은 나도 모르기 때문에, 당장 내일 나는 무언가로 인해 힘들어할지도 모르고 슬퍼할지도 모른다. 분노야 뭐, 자주 일어나는 것이고. 또 어쩌면 당장, 아직 닥치지 않은 오늘 밤에 즐거울지도 모른다. 자기 전에 웃으며 잠드는 어떤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버넌은 음악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천재였고, 넬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결혼까지 밀어부쳤지만 훨씬 더 나이들고 나서야 넬에게 '아니'라고 덤덤히 말할 수 있을만큼 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제인은 자신에게 사랑과 죽음이 그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조'는 '난 너같은 사람이 싫어'라고 해놓고 진실된 마음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결국 인생이란 '이럴 줄은 몰랐는데'의 연속인걸까.



지금까지의 나의 삶도 그랬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라는 말을 얼마나 여러번 뱉었던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이 회사에 입사했고 그럴 줄은 몰랐는데 여태 다니고 있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그럴 줄은 몰랐는데 이별도 했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슬퍼서 울기도 했고 그럴 줄은 몰랐는데 행복해서 엉엉 운 적도 있다.





지금 확실한 건 내가 오늘 저녁 양꼬치를 먹는다는 것.

그것 뿐이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닥쳐봐야 알겠지만, 쉬는 날인 내일 점심에는 치즈 닭갈비를 먹으러 갈 것이다. 동네에 새로 생겼어, 꼭 한 번 가서 먹어보고 싶어. 아빠한테 가자고 해야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밥도 볶아 먹어야지. 이런거슨 인생의 작은 기쁨....... ♡




그녀는 슬픔에 잠겼지만 행복해했다. 남편은 죽어서 그녀 차지가 됐고, 그의 생전에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러는 상황을 원하는 대로 만드는 능력을 발휘해서 자신의 결혼생활이 아주 행복했던 것처럼 그럴듯한 이야기를 엮어가기 시작했다.- P128

˝네, 이 오페라는 페르 귄트보다 솔베이를 위한 거예요. 솔베이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아주 얌전하고 소극적이지만 페르 귄트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야말로 세상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굳게 확신하죠. 솔베이는 페르 귄트가 자신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가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고, 방치되고 버림받기만 하는데도 말이죠. 솔베이는 그가 자신을 버린 것이 오히려 사랑의 큰 증거라고 생각해요.˝-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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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0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안에는 이토록 ‘사랑이 넘쳐서‘ 사랑대신 돈을 선택하는 것이로군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05 17:48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도망친다) =3=3=3=3=3=3=3=3=3=3=3=3=3=3=3=3=3=3=3

사랑은 내안에 넘치는 것이니 저는 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응?)

잠자냥 2019-06-05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사람을 한참 잘못 봤어요. 저 그거 ‘사랑‘ 선택했는데 ‘돈‘이라고 하셔서 젠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05 18:01   좋아요 0 | URL
저런. 정말 잘못보셨군요! 아니, 다들 왜이렇게 잘못보시는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한 분 빼고 다 틀리시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룩말 2019-06-0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정말 좋아요.

다락방 2019-06-06 11:2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좋아해요! ㅎㅎ

비연 2019-06-0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 책들, 읽어봐야겠네요.

다락방 2019-06-06 11:42   좋아요 2 | URL
이 시리즈 좋아요, 비연님!
 






지난 토요일에는 엄마와 술을 마셨다. 보통 여행 프로그램을 틀어두고 술을 마시는데, 그 날도 엄마가 '니가 좋아하는 여행 프로그램 틀어봐' 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 《봄밤》이 하길래 채널을 고정했다. 엄마, 이거 보자.


이걸 처음부터 제대로 본 게 아니라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지난번에도 잠깐 본 적이 있던 터라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대략 알고 있다. 지난번에 잠깐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막 몰랑몰랑 해졌으므로, 나는 이걸 한 번 보기로 한다.



내가 본 게 몇 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정인(한지민)은 자신이 먹어야할 영양제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공부하는 정인의 동생이 친구에게 다 갖다준 것.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그 영양제가 다시 필요했던 정인은, 그 약을 팔았던 지호(정해인)에게 문자메세지를 넣는다.


"오늘 약국 문 열었어요?"



그 날은 주말이었고 약국이 쉬는 날이었다. 지호는 여느때처럼 주말에 사람들과 어울려 농구를 했고 뒤풀이로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다. 그런 참에 정인으로부터 문자가 온 것. 잠깐 고민하던 지호는 답장을 보낸다.


"네, 열었어요."



거짓말이다.

거짓부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지호와 정인은 처음 만나고 아는 사이가 되면서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다. 정인을 향한 지호의 마음은 이성으로의 호감이었고 그건 정인도 마찬가지. 그러나 정인에게는 오래 사귀어온 애인이 있었다. 지호랑도 알고 지내고 싶은 마음,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한 정인은 지호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하지만, 지호는 정인에게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다'고 말하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크-


위의 친구 제안 거절은 아마도 1,2회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이 장면만 잠깐 보았던 나는, 이 순간 지호의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성으로, 연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싹트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사람과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상대를 속이는 일이다. 속이면서, 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지. 왕년에 그거 안해본 사람 어디있나. 나도 다 해봤다. 어떻게든 옆에 있고 싶고 그러므로 오케이 친구, 알겠어, 하며 친구로 지내는 바로 그 마음... 그러나 마음 깊숙이 저기 저 안에 들어있는 큰 사랑... 럽...


더 럽....



하아-


그러나 그런 식으로 친구로 지낸다면 내 가슴은 찢어져요. 아파요. 더 가까워질 수 없고, 그러나 상대에게 다른 사랑이 생기는 걸 지켜보기도 해야 하는 그 마음. 그것들을 감당하면서 억지로 웃으며 '응 잘됐네' 해야 하는 그 마음... 그거슨 노노해. 그러지말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이제 그만 아프게 하자. 그러므로 지호는 정인을 계속 만나고 싶고 다정한 사이가 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자신은 없어'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싫어서, 원하지 않아서 친구로 지내지 않는 게 아니라, 더 큰 마음이라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뭔지 알지. 크- 소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 아닌가. 아무튼 그랬는데 그 다음 회차를 안봐서 뭐가 어떻게 된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둘은 친구...가 되기로 했는가보다.



친구.

펑요우.

프렌드...



친구란 무엇인가....




자, 그렇게 지호는 부랴부랴 달려가서 서둘러 약국 문을 연다. 약국 문을 열고 잠시 후 정인이 온다. 그 때 그 영양제를 다시 달라고 말하면서 그들 사이의 대화가 이어진다. 처음엔 서먹, 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대화. 그 잠깐 동안 서로에게 할 말을, 약국 앞 공사로 인해 시끄러운 소음들 탓에 방해받기도 하면서, 하다가 말다가 하다가 말다가, 그러다가 정인의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오는 것을 또 받다가, 받는 걸 보다가...



닫았던 약국 문을 열기 위해 서두르는 남자와, 굳이 그 밤에 굳이 꼭 다시 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약국에 갈 핑계를 만들어 대는 여자와, 그들 사이의 분위기와, 그 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 봄밤을 지켜보는 나의 여름밤...




"엄마, 저 마음 뭘까. 약국 쉬는 날인데 열었다고 거짓말 하고 달려가서 약국 문을 여는 저 마음, 저 마음은 어떤걸까."



나는 괜스레 센치해져 툭, 건넸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도 다 해봐서 알잖아."



어 그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지 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와인 홀짝 홀짝...

드링크.

건배.




오늘 낮에는 혼자 밥을 먹으러 갔는데, 식사를 주문해두고는 아하, 넷플릭스에 봄밤 있던데, 그거 봐야지, 하고는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한 번 제대로 보자, 하고 3회를 골랐다. 1,2 회는 대략적으로 둘이 알게된 게 나올 것이고, 아마도 5.6회쯤이 약국 문 열러 달려간 것일테니, 그 사이, 그 사이를 보자.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보자.



아아, 이것은 또 슬프기도 한 것이,

정인은 정인의 애인이 못마땅하다. 말 하나하나가 다 거슬려.. 내가 듣기에도 거슬렸는데, 아마 사귀기 전에는 그런 것들을 무심히 넘겼던 것이겠지. 정인의 여동생이 외출한 걸 보게된 정인의 애인은, 그렇다면 집에 정인이 혼자 있겠구나 싶어 정인의 집 앞에서 '잠깐 집에 가서 차 한잔 할까' 하지만, 정인은 '늦었다' 며, '오늘은 동생도 있고... '라고 거짓말을 한다.

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왜 어떤 거짓말은 시작을 암시하고 어떤 거짓말을 끝을 암시하나요.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쓸쓸히 애인은 돌아서가고, 애인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채로, 우리의 정인은 네, 으라라라라라라라라, 지호에게 전화를 겁니다. 따르르르릉-





"여보세요."

"이정인이에요."



그렇다, 이것은 그들의 '첫' 통화였다.

첫..

첫 통화.

그래서 지호는 그런다.


"정인씨 전화목소리는 이렇구나"


그 때 정인은 그에게 말한다.


"내 목소리가 어떤데요?"



아아, 새벽 세시다, 새벽 세시야. 새벽 세시에 정확히 이 대사가 나왔다!!



2분 뒤
Aw:
에미,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내가 몹시 놀랐다는 소리예요. 당신 목소리와 말투를 전혀 다르게 상상하고 있었거든요. 당신, 정말로 늘 그렇게 말해요? 아니면 목소리를 일부러 꾸민 건가요? 

45초 뒤
Re:
제 목소리가 어떤데요? 

1분 뒤
Aw:
끝내주게 에로틱해요! 포르노방송 진행자처럼. 

7분 뒤
Re:
그거 칭찬이죠? 한시름 놓았어요! 당신도 나쁘지 않은걸요. 당신은 글보다 말이 훨씬 대담해요. 목소리가 아주 허스키하게요. "내가 줄곧 이런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야?" 이 대목이 마음에 들어요. 뭐랄까, 무척 방탕하고 섹시한 느낌이 나요. 그런 목소리라면 비아그라 같은 정력제 광고에 써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p.304)


















나는 이 순간 정인이 되어 지호의 말을 기다렸다. 지호는 과연 뭐라고 답할 것인가. 레오가 에미에게 그런것처럼 포르노 방송 진행자처럼 끝내주게 에로틱하다고 할것인가. 두구두구둥-

그러나 지호는 이렇게 말한다.



"들어줄만 해요."



하아-

이것이 그러니까 그렇다.

이런 대답도 좋은 것.

이것이 바로 시작이다.

이것이 봄밤이야.

아무 말이나 다 그냥 다 좋아.

이들 사이는 그러니까 막 친한 친구도 아니고, 친구 하기로 했지만 사실은 이성애감정 둘 사이에 물씬물씬하고 막 그래가지고, 만나면 또 서먹해져서 잠깐 어색어색 하다가 금세 웃으며 농담하고 반말과 존대말을 썪어 버리는 것이야... 봄밤이여.. 하아- 숨이 막힌다. 여름에 숨막히게 하기 있긔없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줄줄 운다 나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울어 울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화 목소리라는 게 그렇다.

얼굴을 맞대고 듣게 되는 목소리랑은 달라.

왜 다를까?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다르다.

호감을 가진 상태에서 전화 통화를 처음으로 하게 되면, '당신의 전화 목소리는 이렇구나' 라는 말을 사실 누구나 하게 되는데, 이것이 시작되는 관계에서 나오는 말이니만큼, 그 문장 안에 뭔가 다 담겨 있는 것만 같다. 꾹꾹 눌러담은 당신에 대한 나의 호감..이런 거. 크- 건배.





지호도 정인의 애인의 존재에 대해 아는만큼, 그들은 일반적인 친구들처럼 자주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서로가 늘상 궁금해. 지호는 정인의 친구이자 동료에게 정인의 안부를 묻고, 정인은 친구로부터 그가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막, 또 뭐래, 뭐랬는데? 궁금하고 미치겠다.


잘 지내나요?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쉽게 전할 말을, 그거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어떤 사이에서는 차마 묻지 못하고 내내 삼키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야 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몰래몰래 들여다봐야 한다.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에서도 마찬가지. 어린 시절 헤어졌다 13년만에 만나게된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일상이, 소식이 궁금하다. 그런데 상대에게 그걸 직접 묻지 못하고 빙돌아간다. 여자는 남자의 페이스북을 훑어보며 남자에 대한 소식을 업데이트 하고, 남자는 요즘 잘나가는 셰프가 된 여자의 기사를 검색해 찾아 읽으며 여자에 대해 파악한다.


물어, 직접 물으라고.

잘 지내는지, 잘 있는건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 그냥 물으라고!

훔쳐보지 말고 물으면 되잖아.

숨어서 쳐다보지 말고 물으라고, 이 밥통아!



하이.

하우 아 유?

파인 땡큐 앤 유?


거짓부렁...


사실 나는 파인 하지 않다고 한다...



















책이나 사러 가자.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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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04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다 해봐서 알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이제 술을 한동안 못 마셔서 어떡하십니까? 술 마시고 싶을 때마다 책을 사세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04 14:37   좋아요 0 | URL
엄마의 대답 넘나 쿨한 것입니다. 쿨싴이라면 어디가서 지지 않는 엄마인 것입니다... ㅎㅎ

네, 제가 내일을 마지막으로 두달가량 술을 안 마셔야 되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득해지는 것이지만, 흑흑 ㅠㅠ 책....을 사면 채워지겠죠? (뭐가?) 너무 슬퍼서 ‘사실 한 달이어도 되지 않나?‘ 라고 점차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킁킁.

비연 2019-06-0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대답... 아 빵터졌어요 ㅎㅎ
근데, 두달.. 술.. 못 먹...;;;; 책으로 채우시려면 책이 가득 해지실 듯...
한달은 안되구요... 괜챦다 할 때까지 계속 금주하셔야 한다는...ㅜㅜㅜ

다락방 2019-06-04 16:30   좋아요 0 | URL
저도 어머니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제가 검색해봤는데, 2주... 금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저는 그것을 믿는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19-06-04 16:53   좋아요 0 | URL
2주! 는 정말 짧은듯. 아마 그 때 말씀하신 수술을 하는거 같은데... 전 석달 정도 금주하고... 술마시기 시작.

다락방 2019-06-04 16:55   좋아요 2 | URL
닥터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확실하겠지만, 물어봤다가 두 달이나 세 달이라고 답할까봐 듣기 싫어서 못물어보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9-06-04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따라쟁이 2019-06-04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세시에 관련된 글에 댓글을 안쓸수가 없네요.
잘지내요? 나는 잘 지내요.

다락방 2019-06-04 16:30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게 누굽니까!
저야 뭐 여기에서 늘 지내던대로 지냈지요.
따라쟁이 님이야말로 잘 지내나요?

2019-06-04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조기후 2019-06-05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안녕!

다락방 2019-06-05 09:11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도 안녕? 잘 지내고 계시지요? :)
 

요코 아가씨의 열에 들뜬 듯한 재잘거림이 계속 이어졌교, 그것이 다로 군이 천상의 행복과 연옥 사이를 평생 동안 방황케 할 관계로 끌려들어가게 된 시초였습니다. (상권, p.483)

















일본 회사의 뉴욕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살고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아버지의 소개로 아버지 지인의 '고용 운전사'인 '아즈마 다로'를 알게 된다. 책의 <서문>은 14페이지에서 끝나지만, 바로 이어 시작하는 <본격소설이 시작되기 전의 길고 긴 이야기>는 무려 183쪽까지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책의 서문이라고 봐도 될만큼, '내'가 어째서 '아즈마 다로' 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서문 아닌 서문이 183쪽에서 끝나는만큼, 상권을 다 읽도록 본격적인 아즈마 다로의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판 <폭풍의 언덕>이라고 했으니, 아즈마 다로의 사랑이 상권에 이르도록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사랑은 하권부터인거냐, 라며 책장을 넘기다가 상권의 맨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서, 나는 위에 인용한 문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요코 아가씨의 열에 들뜬 듯한 재잘거림이 계속 이어졌교, 그것이 다로 군이 천상의 행복과 연옥 사이를 평생 동안 방황케 할 관계로 끌려들어가게 된 시초였습니다. (상권, p.483)


크-

천상의 행복과 연옥 사이를 평생 동안 방황케 할 관계......로 끌려들어가게 된 시초..........라니.

아, 세상이여..

아, 사랑이여..



나는 아즈마 다로가 굉장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 그 어린 시절에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 '요코'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적잖이 우울하다. 이런 사랑은 안된다. 그렇게될 경우 한 쪽이 다른 한쪽에게 집착하게 된다. 모두가 나를 미워하고 모두가 나를 구박하고 모두가 나를 괴롭히는데 나타난 단 한 명의 구원자라니. 어떻게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사랑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끝날 확률은 얼마나 희박한가. 이런 식으로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만났기에 '나'는 폭풍의 언덕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쓰노라 말하게된 게 아닐까.




아즈마 다로의 이야기 ……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지금까지 무수히 이야기되어온 연애 이야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새삼스레 쓰고 싶어진 것은, 그것이 사실은 옛날 소녀 시절에 되풀이 읽던 그리운 번역소설들을 갑자기 선명하게 가슴에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읽을 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영국 소설과 닮았다. 히스가 자라는 요크셔 황야를 무대로 지금으로부터 백오십 년도 더 전에 에밀리 브론테라는 영국인 여성작가가 썼고, 그후 점차 세계의 고전으로 간주된 소설이다. 내가 아즈마 다로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애당초 그 소설을 되풀이해 읽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p.178)



천상의 행복과 연옥 사이를 평생 동안 방황케 할 관계로 끌려들어가게 된 시초, 라는 문장이 너무 훅- 들어와서, 나는 아즈마 다로와 요코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짐과 동시에, 아아, 나의 시초는 무엇이었나,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사랑이 천상의 행복과 연옥 사이를 평생 동안 방황케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필히 그런 관계가 찾아들곤 한다. 천상의 행복과 연옥 사이를 평생 동안 방황케 하는 그런 관계. 나는, 내가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땜시롱, 아아, 우리가 그렇게 된 시초는 무엇이었나...돌이켜 보게 되었고, 아아, 그 시초는...알라딘......


이렇게 되고야 만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네?




자,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아즈마 다로는 가난했고 배운 것도 없는 채로 미국으로 와, 부잣집의 고용운전사가 된다. 그는 미국에서 살아남고 또 성공하기 위해 일단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런 그를 보고 '나'의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회사로 스카웃해와 공장에서 일하게 한다. 나는 그가 영어 공부를 필사적으로 열심히 해내는 게 진짜 너무 좋았다. 아, 열정이란 무엇인가. 이런 열정이 왜 내게는 없는가.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모두가 놀란 것은 아즈마 다로의 영어였다. 아니, 영어라기보다 영어에 대한 정열이었다. 다른 주재원보다 젊은 나이에 미국에 왔고 미국인의 집에서 일 년 가까이 먹고 잤으니 영어를 남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상회한 것은 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 이목을 꺼리지 않고 정진하는 그의 자세였다. 일본 회사에 근무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일을 일본어로 처리함에도 불구하고, 수리중에는 늘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영어 단어 같은 것을 계속 입 안에서 되풀이한다. 점심시간에는 야간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를 한다. 이민자들을 포함해 영어 쓰기와 읽기가 능숙하지 못한 어른을 위한 야간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버지가 모두에게 권장하는 일이어서 그 때문에 일을 빨리 끝내는 것도 봐주곤 했는데, 회사에서 가장 밑바닥이고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가장 적을 아즈마 다로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 야간 학교에 다녔던 것이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만한 수준 이상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영어를 사용하는 역할이 어느 틈엔지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전화 응대뿐 아니라 편지 왕래 등 조금만 복잡한 영어가 나오면 그전처럼 윗사람이 불려나가는 대신 아즈마 다로가 모두 도맡게 되었다고 한다. (p.52)




나는 당연히 나의 구몬...을 생각한다. (응?)

며칠전에 내가 버린 구몬.. 쌓여있던 구몬. 사무실의 책상 서랍에도 내 방의 책장에도 가득 쌓여있던 구몬..언젠가 이걸 할거야, 라고 생각해 계속 가지고 있던 밀린 구몬..그러나 그것을 한꺼번에 한다고 해도 내 영어 실력이 향상할까? 내가 내게 물어보니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고, 그리하여 나는 영어 구몬 버리기.. 를 실행한 것이다. 다 버렸다, 다. 풀지 않고 다 버렸다. 이것은 진정한 돈지랄... 나의 영어 실력은 뭐다? 제자리다.. 여전히 영어 못하는 나...인 것을... 슬픔의 새드니스..


그런데 아즈마 다로는 한다, 영어를, 열심히..

나중에는 영어 공부 테이프를 줬는데 그것도 다 달달 외워버린다. 어찌 영어를 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열정을 가진 이 남자, 단순히 영어에만 열정을 가진 게 아니라 성공에 대한 열정을 가진 것일까. 일도 열심히 하고 기술도 열심히 익히고 그래서 내시경 기계에 전문가가 되어 나중엔 의사라고 해도 모두가 믿을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그러다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열정..

열정..

열정은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가?

내가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열정이 없기 때문인가?

나는 부자가 되어서 좋아하는 남자를 돈으로 꼬시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부자가 안돼..그것은 나에게 없어서인가, 열정이?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열정이 없어서 영어를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렇지만!

만약 내가 영어를 써야 하는 곳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내게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열정이란 것이, 영어공부에? 그래야 사니까 말입니다. 안그래요?

그러다가 나는 나의 열정이 궁금해졌다.

나의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발현되는가.



얼마전에 친구1은 운전면허 시험을 봐 기능까지 합격했다고 했다. 이 나이에 공부하려니 너무나 힘들었지만 합격해서 좋았다고. 아직 주행은 남아 있지만 보람차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한껏 축하를 건넸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못했던 것을 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좋으니, 너의 성취감은 정말 장난 아니겠다, 축하한다, 고. 친구2는 그간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최근에 자전거 교육을 받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나는 역시 '못했던 것을 하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친구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 아아, 얼마나 좋은가. 못했던 것을 하게 되는 것,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 이런 열정. 열.정.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나요, 나의 열정?

있긴한가요? (글썽)




아무튼 아즈마 다로는 떼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아니다... ㅠㅠ




아까도 언급했지만 '나'는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니고.. 일본에 다시 갔다가 미국으로부터 단기 교수자리를 제안 받아 나이 들면서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삶을 살게 된다.




이번에도 차 없이 지냈지만, 슈퍼마켓까지 조금 거리가 있어서 식료품을 사러 갈 때는 백팩을 짊어지고 갔다. 장을 보러 가지 않는 날은 산보를 했다. 비가 자주 와서 사흘에 한 번은 집에 갇혀 있었다. 한번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계속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아무리 우기라지만 예년 같지 않은 강수량이라고 했다. 엘니뇨가 원인이라는 설의 가부(可否)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몇 번인가 하이웨이가 봉쇄됐을 정도였다. (p.144)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에 체류하며 학교에서 마련해준 집에 근무기간 동안 머무르게 되는데, 차 없이 지내며 백팩을 짊어지고 식료품을 사러 가는 중년의 여성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나는 이 장면에서 여유를 느꼈다. 만약 내가 캘리포니아든 어디든 외국에 머물게 된다면, 어쩌면 이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할 것 같았다. 사실 이십대 중반에 1종 운전면허를 따놓기는 했지만, 그 뒤로 한 번도 운전해본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은 터라, 만약 내가 외국에 간다 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걷는 것도 좋아하니 백팩을 짊어지고 슬렁슬렁 마트로 가서 와인 열 병 백팩에 넣으면 무거워서 집에 못가겠구나..... 그러면 갈 때마다 세 병씩 사도 내가 나이가 들수록 그것도 힘들겠구나. 배달 안되나요, 캘리포니아는? 그리고 고기도 사면 무거운데 나는 와인과 백팩을 짊어지고 집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현실적으로 개고생인가?


아마 캘리포니아든 어디든 살아야 한다면 나 역시 아즈마 다로처럼 영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 나란 여자는 어디다 데려다놓아도 아주 잘 살 사람이고, 꿋꿋이 버틸 사람이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내가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백팩...와인..음..... 무겁겠군. 그래도 운동되지 않을까. 아니 어깨가 뒤로 휘어버리려나. 척추에 안좋을까? 허리에도 안좋겠지? 자전거.. 탈까. 자전거라면 괜찮지 않나? 리틀 포레스트 보면 자전거 타고 장보러 다니던데, 나도 캘리포니아에서 자전거 타면 앞에 바구니 설치해서 와인 넣으면...와인 흔들리나. 흔들리지 않게 좀 많이 사면 .. 너무 무겁나.


아, 삶 겁나 빡세구나..




어쨌든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책을 쓰고 교수로 혼자 살아가면서, 자신을 찾아온 일본인 '유스케'와 자신의 집에 가게 된다. 유스케는 아즈마 다로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레스토랑에서 얘기하는 걸로는 성에 안차, '나'는 유스케를 집에 초대하는데, 아아, 역시 이것도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다.



-어? 꽃이 있네. 역시 여자분의 집은 다르네요.

방에 발을 들여놓은 유스케가 어울리지 않는 공치사를 한 것은 긴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항상 있는 건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혼자 산 지 오래되었다는 유스케가 좁은 부엌에서 같이 음료 준비를 바지런하게 도와주어, 금방 리빙 룸 커피 테이블에는 마개를 딴 캘리포니아 산 적포도주와 두 개의 와인글라스, 포트에 가득 담긴 홍차와 두 개의 머그, 그리고 치즈 덩어리와 길게 썬 옛날식 피클이 늘어섰다. 유스케는 팔걸이의자에 앉고, 나는 직각으로 놓인 긴 의자에 앉았다. (p.166)



이 장면속의 여자와 남자는 로맨틱한 관계가 아니다. 단지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여자의 집에 갔는데, 아, 거실에 와인과 안주를 늘어놓고 자리 잡아 늦은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 좋은 거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이렇게! 꼭 연인 관계가 아니라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밤이면, 우리 집에 가 이야기를 나누자, 하고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와인과 안주를 꺼내서 천천히 먹고 마시며 길게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크- 이것이야말로 리얼 해피니스 아닙니까?



나중에 숲속 외지고 낡은 별장에서 아즈마 다로가 유스케와 술을 마시는 장면도 잠깐 나오는데, 아아, 나는 그런 장면이 너무 좋다. 항시 준비되어 있는 술과 술잔을 꺼내와서 술 한잔 하자, 하고 사는 삶... 리얼 해피니스, 리얼 해피 라이프...

이 책 읽으면서 얼마나 술 마시고 싶던지, 지난주에도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면 와인을 따라 마셨고, 어제도 그랬다. 어제 반찬은 무려 밥과 김치였어... 내가 진정한 승자 ^^v



천상의 행복과 연옥 사이를 평생 동안 방황케 할 관계로 끌려들어가게 된 시초..까지 읽었으니, 이제 그 다음 본격적인 천상의 행복을 읽어봐야겠다. 연옥도. 평생동안 이어질 그들의 이야기도.




그나저나,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갈 예정인데, 이 더위에 뚝배기를 마주할 자신이 없구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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