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독서법 - 마음과 생각을 함께 키우는 독서 교육
김소영 지음 / 다산에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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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유독 독서기록장이나 독후감 쓰기를 어려워합니다. 글쓰기라는 건 많은 생각과 집중력, 물리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부모님께서 직접 해보면 더 쉽게 이해되실 겁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서 한 권을 골라 연필로 독후감을 적어보세요. 짐작으로만 하지 말고 실제로 해보셔야 합니다. 다 쓴 독후감을 '윗사람'에게 검사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됩니다. 어른보다 글쓰기 경험이 적은 아이들이 마주하는 상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p.17-18)





국민학교 2학년(어쩌면 3학년? 4학년?)이었나, 방학 숙제로 독후감 쓰기가 있었다. 당시 내 모든 숙제는 엄마가 봐주셨는데, 엄마도 독후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셨던 것 같다. 친척언니에게 놀러오라고 해서 나에게 독후감을 가르쳐주라 하셨다. 친척 언니는 나보다 두 살 더 많았는데, 나는 언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줄거리를 요약하고 내 감상을 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줄거리 요약'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거다. 다만 그 당시 내가 이해한바로는, 책 한 권을 읽고 책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요약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요약.. 요약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진짜 모르겠는거다. 언니는 나한테 몇 번이나 반복해 설명한 것 같은데, 결국 나는 언니 없이 어떻게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책 한 권을 통째로 베껴냈다. 나름 똑같이 베끼면 안되고 어쨌든 분량은 달라져야 하니 내가 요약할 수 있는 건 문장의 맺음말과 접속어를 하나로 만드는 거였다. 이를테면, 


'~ 한 것이다. 그러나~'


라는 문장이 있다면 '~ 했으나' 라고 바꾼것. 내가 할 수 있는 '요약'은 그게 전부였다. 결국 내 독후감의 원고지 매수는 매우 많았다. 나에게 독후감은 그렇게 매우 어려운 숙제였다. 이게 나한테는 잊을 수 없는 일로 남아있고 또 심지어 부끄럽기까지 한데, 이 책, '김소영'의 [말하기 독서법]을 읽으면서 그 때의 내가 생각나 매우 안타까웠다. 그 때의 내게 김소영 선생님이 있었다면, 김소영의 독서교실에 다녔다면 나는 독후감 숙제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을텐데, 김소영 선생님은 나를 잘 지도해주었을텐데... 그리고 그 어린 시절 그런 독서지도를 받았다면 지금의 나는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아, 너무 슬프다. 김소영 선생님, 선생님은 왜 지금 거기에 계신건가요? 과거의 내게 선생님으로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책, [말하기 독서법]은 김소영의 전작 [어린이책 읽는 법] 처럼 어른들에게도 매우매우매우매우 유용하다. 읽으면서 '글쓰기는 너무 어려워서 쓸 수가 없어' 라고 말했던 내 주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예 글 쓰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어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시도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제법 잘 써낼 수도 있을 것 같은 거다. 물론 이미 글쓰기에 능숙한 사람이라 해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읽지 않는 것보다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거의 매일 글을 쓰는 나같은 사람도 이 책의 어느만큼에는 '으음, 내가 잘하고 있군' 하였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앗, 이런 방법이!' 하면서 온 몸으로 새로운 배움을 흡수한것이다. 김소영 독서교실에 성인반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반이 있다면 제가 먼 곳에 있어도 다닐 의향이 있습니다, 김소영 선생님.



이 책은 책을 읽고 감상을 얘기하고 글쓰기를 진행해가는 과정에 대해 아주 좋은 방법들이 들어가있지만, 비단 그것만이 이 책의 장점이 아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소영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몇 번이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독서지도 혹은 글쓰기 지도를 하는 게 김소영 선생님이 독서교실에서 맡은 역할이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선생님은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아이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고자 하는 사람. '이렇게 좋은 어른이 저기 숨겨져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이렇게 좋은 어른, 좋은 선생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나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어른이 있다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좋은 일 아닌가. 



'기욤 뮈소'의 책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렇긴 해도 이 불안한 세상에서 제시를 돌봐주는  어른이 셋이라면 그리 많은 게 아니잖아." (기욤 뮈소,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p.367)



김소영 선생님 혼자서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을 상대할 순 없으니, 또다른 김소영 선생님들이 여기에도 또 저기에도 숨겨져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로 대화상대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뉴스를 보면 온갖 나쁜 어른들이 경쟁하듯 내가 더 나빠 내가 더 나쁘지 튀어나오지만, 이렇게 좋은 어른들이 있구나, 저기 어디에 자신의 존재를 크게 드러내지 않은 채로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어. 김소영 선생님이 하는 일은 글쓰기와 말하기, 책읽기에 관련된 지도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있었어. 예로 드는 많은 책들을 읽고 싶어져서 장바구니에 넣지만, 또 예로 드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 같다. 그 어느 소설을 읽을 때보다 김소영 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에 마음을 빼앗긴다. 훌륭한 이야기들이 이 책 안에 가득하다.




나는 몇 번이고 이 공간을 통해 언급했지만 시를 읽는 것이 어렵다. 시를 읽는 것이 어렵고 어쩌다 좋은 시에 감탄하면서도 외우기가 잘 안됐다. 나는 사람들 전화번호는 기가 막히게 잘외우는데, 어째서 시는 외우지 못할까. 좋아하는 소설속의 문장들은 기가 막히게 잘 외우는데{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항상 비누 냄새가 났다, 뚫어지게 보시구랴, 프라납 삼촌은 엄마에게 순전한 기쁨이었다), 어째서 좋아하는 시는 한 편도 외우지 못하는걸까.


이 책의 <언어의 힘을 배우는 동시 말하기>는 그래서 내게 매우 유용한 부분이었다. 시를 잘 읽지 못하고 외우지 못하는 내가 이 책을 읽고나니 다시 시집을 읽기를 시도하고 싶고 또 좋아하는 시 몇 편은(겨울 휴관, 많은 물, 오십 미터) 외우고 싶은 욕망이 '다시' 생겼다. 머릿속에 갑자기 시 세 편쯤은 외우는 내가 그려지면서 멋있어졌다. 아 시 외워서 암송하는 나 짱 멋져! 나중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서 불쑥, 시 한 편을 읊어야지. 아, 짱멋져...



필사에 대해서라면 사실 좀 심드렁했다. 그게 책 읽거나 글 쓰는데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니 필사도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꾹꾹 눌러쓰는 아름다운 문장들은 나에게 어떤 것들을 가져다줄까?



나는 이미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는 사람이니까, 하면서 한껏 잘난척 하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읽기와 쓰는 것에대해 더 나은 방법들을 알아간다. 무엇보다 시에 대해 다시 무언가 해보고 싶어진 게 너무 좋았다. 보리국어사전도 살까, 지금 계속 고민중이다. 국어사전을 새로 사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가끔 펼쳐보는 일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필요하며 또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국어사전 조금 비싸지만......(내적갈등중)


물론 이 책은, 다시 말하지만, 글쓰기가 어려워서 좀처럼 쓸 수 없는 어른들에게도 매우 좋다. 진짜 좋다. 내 말 믿고 한 번 이 책을 읽어봐, 쓰지 못했던 사람들이 쓰게 될것이다. 




뜻과 활용을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이 수준보다 조금 어려운 어휘를 섞어서 씁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일일이 그 말들을 가르치기보다 ˝무슨 뜻이에요?˝ 하고 물었을 때 칭찬하고 뜻을 알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르쳐줄 기회는 늘 있으니까 조바심 내지 안아도 됩니다. 아이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중간중간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표현 좋다˝, ˝그 부분 잘 못 들었어. 미안하지만 다시 얘기해줘˝ 같은 말로 지금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것은 듣는 태도를 가르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 P57

앞에서 작가는 어떤 장면을 그리고 어떤 장면을 그리지 않을지 결정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다면 그려지지 않은 장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대부분 독자의 머릿속에 있습니다. 스무 장면의 그림들이 서로 연속적이지 않더라도 독자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채워 넣습니다.
그림책 독자는 누구나 능동적인 참여자입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아이와 나눈 대화가 특별하지 않아도 실망할 것 없습니다. 읽는 일 자체가 창조적인 일임을 잊지 마세요. - P83

동화가 어른에게는 단순해 보일지라도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동화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제를 파악하는 건 더더욱 더딜 수 있고요. 어른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겪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입니다. 아이가 서툴다는 것은 경험이 적다는 것이지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를 채근해서도 얕잡아 봐서도 안 됩니다.- P138

독서가 마음과 생각을 살찌운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즐겁게 하고 세상으로 안내하는 콘텐츠는 너무나 다양하지만 책만큼 자기 마음을 내밀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자기 힘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자극이 넘쳐나는 시대에 온전히 자기 힘으로 몰입하는 시간은 귀하기까지 합니다. 독서가 그 시간을 만들어내고요.- P207

아이들이 유행어나 비속어를 사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서 금방 떠오르고, 상대(주로 친구)도 잘 알아듣죠. 물론 언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그러면서 사회의 어휘가 풍부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들은 감정이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 때가 더 많습니다. 말의 품위도 떨어집니다. 비속어를 종종 사용하던 아이가 글을 쓸 때 만큼은 되도록 다른 표현을 찾으려고 애쓰는 걸 보면 스스로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합니다.-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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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9-10-06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소영 선생님 죠아요!

다락방 2019-10-07 07:44   좋아요 1 | URL
저는 김소영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단발머리 2019-10-06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말만 믿고 읽기는 하겠지만, 그렇게해서 읽게 된 책이 너무 많.....ㅠㅠ

다락방 2019-10-07 07:44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그래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책읽기를 권장하고 뽐뿌받고...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단발머리님, 출판계를 우리가 먹여 살립시다!! 불끈!!!

syo 2019-10-06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독후감을 쓴 적이 있었어요. 생명공학과를 가서 인간복제 기술을 연구할 걸, 그럼 김소영 쌤을 복제해서 각급 초등교육기관에 배치할텐데- 이런 거요 ㅎㅎㅎ

다락방 2019-10-07 07:4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제 인생의 흑역사에요, 그 독후감은. 그것도 반공독후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용은 생각 안나고 진짜 열심히 옮겨 적은 기억만이...(눈물이 그렁그렁)
김소영 쌤같은 쌤은 세계의 모든 어린이에게 필요합니다!!

네꼬 2019-10-0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편애... 감사 드리며 뻔뻔하게 댓글마다 하트를 찍고 갑니다. 사람은 편애를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으허허헝 저는 그만 웁니다.

다락방 2019-10-07 14:33   좋아요 1 | URL
편애.. 하면 또 다락방 아니겠습니까. 편애에 살고 또 편애에 사는 다락방인 것입니다.
그리고 책 정말 좋아요, 네꼬님.
이런 책을 쓴 스스로를 아주 자랑스러워해도 돼요. 이런 책을 커리어에 한 줄 더 하다니.. 인생 진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네꼬님...

블랙겟타 2019-10-0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단 보관함에 넣어놨습니ㄷ....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9-10-07 14:33   좋아요 1 | URL
열심히 읽고 쓰며 살아갑시다, 블랙겟타님!!

심술 2019-10-1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봐야겠군요. 좋은 책 소개 고마워요.

하나 맞춰볼게요. 다락방님은 타미에게 김소영 선생님 어린이 독서교실 수강권을 선물했어요, 맞죠?

비누 냄새랑 프라납 삼촌은 저도 아는데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뚫어지게 보시구랴.

이 셋은 금시초문이(거나 제가 읽었는데 잊은 거)네요.
어디서 나온 문장이죠?

다락방 2019-10-10 17:44   좋아요 0 | URL
타미에게 김소영 선생님 독서교실 수강권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서 도저히 다닐 수가 없답니다 ㅠㅠㅠㅠ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이 두 문장은 모두 비누냄새와 같이 <젊은 느티나무> 이고요,
뚫어지게 보시구랴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입니다. ㅋㅋㅋ 에미가 레오에게 가슴 큰 여자 좋아하지 않냐고 해서, 가슴 큰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자기가 뭘 어쩌겠냐고 했더니 에미가 답하는 거에요. 뚫어지게 보시구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술 2019-10-11 14:55   좋아요 0 | URL
인용문 5분의3이 <젊은 느티나무>네요. 락방님이 이 책을 참 인상깊게 읽으셨군요.

요즘 에미 충고대로 했다가는 ‘시선 강간‘에 걸려서 된통 고생하죠.

기억하시나 작은 시험 하나 볼게요.

리아의 젖꼭지는 ‘분노의 포도‘처럼 뽈딱 솟았다.

어디서 나왔죠?

다락방 2019-10-11 14:57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때 <젊은 느티나무> 읽고 너무 좋았거든요. 여러차례 읽었었어요. 크- 비누냄새에 대한 환상도 그 때 생겼죠. 지금은 사라졌지만... ㅋㅋ

말씀하신 문장은.. 모르겠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아는 책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술 2019-10-12 12:18   좋아요 0 | URL
blog.aladin.co.kr/fallen77/9592337 가셔서 복습하시고 오세요. 댓글에 나와요.

저도 락방님 덕분에 오랜만에 어제 <젊은 느티나무> 다시 읽어봤어요. 결과적으로 어제만 두 번 읽었네요.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랑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둘 다 나오는군요.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는 ‘그에게는 항상 비누 냄새가 났다.‘ 처럼 위치 때문에 기억하기 쉬운데 왜 잊었을까 스스로 의아했어요.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는 첨 읽을 땐 놓치고 이 문장만 찾아 다시 읽으며 찾아냈죠.

근데 이현규가 이야기 속 ‘나‘인 윤숙희 뺨 때리는 대목이 있더군요. 옛날 작품은 옛날 작품이다 싶어요.

2019-10-14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14 15:10   좋아요 0 | URL
링크해주신 글 들어가서 댓글 봤는데, 댓글 완전 기억도 안나네요. ㅎㅎ 게다가 제가 읽은 게 아니라 심술 님이 읽은 작품에서 나온 거였으니 더 기억안날 밖에요. ㅎㅎ

네, 젊은 느티나무는 나이 들어 읽고 깜짝 놀랐어요. 그게 오빠 친구한테 받은 편지를 오빠가 보고나서 ‘그 편지를 거기 둔것은 날 보라는 건가?‘ 이런 뉘앙스로 얘기하다가 뺨 때리는 거였죠? 으으 맞아요, 제가 그 장면 읽으면서, 아니 그게 이 여자가 뺨 먖을 일인가 하면서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작가는 그 때 요즘말로 하면 츤데레... 표현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절레절레.

전 모르겠어요. 자기도 좋아했잖아요, 여동생을. 그리고 좋아하고, 계속 좋아하고 싶어서 ‘우리에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미국엘 가든지‘ 이렇게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때릴까요? 전 그게 너무 이해가 안돼요..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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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02 세의 할머니 '베르트'는 옆집 남자를 총으로 쏘아 부상을 입힌다. 이 일로 경찰서에 가게 되는데 형사와 마주 보고 앉아 그를 왜 쏘았는지를 얘기하다가 결국 자기네집 지하실에 몇 구의 시체가 있음을  자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왜 거기에 쌓이게 된건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자신의 어린시절부터의 인생 얘기를 시작한다.


한 여자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나쁜 남자의 총량은 얼마일까? 혹은 좋은 남자의 총량은 얼마일까? 과연, 있기는 있을까?


 


베르트는 젊은 시절부터 숱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여러차례 결혼하게 된다. 여러차례 결혼한다는 건 여러차례 남편과 헤어졌다는 걸 뜻하는데, 놀랍게도 아니 놀랍지 않게도 그 남편들 모두는 괴물이었고, 베르트는 괴물 앞에 참지 않았다. 그들을 그냥 다 죽여버렸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에 감탄해 결혼한 남자는, 결혼 후에는 그 몸매 때문에 그녀가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걸레라고 욕을 하며 함부로 대한다. 춤을 잘 추어서 그녀를 매혹시켰던 다른 남편은, 자신의 작은 고추로 만족하지 않는  아내에게 화를 내며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녀를 뮤즈라며 따라다녔던 한 화가는 돈벌이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팔리지 않는)예술에 도취되어 그녀가 번 돈으로 먹고 마시며 그녀의 집에서 산다. 그런 주제에 그녀를 가르치려 들어(흥, 니가 보부아르 읽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녀의 옆집 남자는 미성년자만 골라서 성매수를 하고, 전쟁이 한창일 때 그녀의 집에 찾아온 나치는 그녀를 강간한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브누아 필리퐁'이 써낸 프랑스판 '82년생 김지영'이구나, 했다. 김지영이 살면서 겪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그냥 읊기만 했을 뿐인데 거기에는 한심한 한국 남자들이 등장한다. 베르트 할머니 역시 그저 자신의 삶을 얘기했을 뿐인데 거기엔 지독한 괴물들이 가득했다. 김지영은 체념과 울분으로 살아가 영혼이 아픈 고백을 시작했다면, 베르트 할머니는 참지않고 그냥 다 쏴죽여버렸다. 


그녀가 직접 총으로 그 나쁜 짓을 응징한 건 비단 전남편이나 자신을 강간한 강간범에게만 향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흑인을 집단린치한 남자들에게도 자신의 총을 꺼내들었다. 필요한 상황에서 그녀 곁에 없었던 혹은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경찰이나 형사들 때문에 그녀는 혼자서 이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한다. 그녀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마음이 가득하다. 아이와 여자들에겐 한없이 다정하며 남자들의 폭력으로부터 그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소녀들의 편이 되어준다. 역시 그녀들 곁에 의사가 있어주지 않기 때문에.




"설마 세상이 공평하다는 헛소리를 주절거릴 만큼 바보는 아니겠지?"

"네, 물론이에요. 그런 흰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도 법은 믿는다?"

"법을 수호하며 살아온 지 삼십 년입니다. 네, 전 법을 믿어요."

"그럼 날 지켜줘야 할 순간엔 어디 있었니?"

베르트의 두 눈에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멀리 지나가는 구조선에 필사적인 신호를 보내는 표류자의 씁쓸함이 어렸다.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 걸요."

"능청 떨래? 너나 다른 경찰, 네가 죽고 못 사는 그 헌법을 지키는 모든 자들, 정작 행동해야 할 땐 눈을 씻고 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어. 오래오래 천천히 죽이는 건 살인으로 치지들 않지.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증거만 있다면, 처벌받습니다."

"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내보일 수 있니? 정의와 법은 정략 결혼처럼 서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p.197)







그녀가 겪었던 그 괴물같은 남자들은 그녀가 유독 운이 나빴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끼어들었던걸까?


김지영이 겪었던 삶이 유별난 게 아니었듯, 베르트가 지내온 삶 역시 유별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늘 만나던 바로 그런 남자들을 만났다. 결혼 전에는 달콤하고 다정했으나 결혼 후에는 돌변하는 그런 남자들. 대화보다는 주먹을 쓰면서 여자를 쥐고 살려던 남자들. 여자의 섹스에, 가사노동에, 감정 노동에 기생하면서 여자를 소유하려던 남자들.



그 와중에 만난 잊지 못할 사랑, 인생 남자, 102세가 되어서도 눈물 흘리는 사랑. 이건 작가가 그녀의 삶이 안쓰러워 보내준건지 혹은 모든 남자가 나쁜 건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 위함인건지는 모르겠다.



프랑스판 82년생 김지영 베르트 할머니의 이야기를 쓴 작가는 남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남편들을 죄다 쏴죽여버린 이 이야기에 프랑스 남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했다. 이 나라에서 그렇듯이 작가의 SNS 에 달려가서 득달같이 댓글을 달았을까? 모든 남자가 이런건 아닌데 남자를 나쁘게 그려놨다고, 페미 묻었다고 작가를 욕했을까? 이 책을 읽은 연예인들을 가혹하게 비난했을까? 이런 남자들이 어딨냐며 과장됐다고 야유했을까? 설사 그렇게 욕했다한들 이 남자 작가의 커리어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 책은 특별할 게 없다.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이 이 책 역시 큰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특별할 건 없는 내용,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로부터든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나열일 뿐. 

벤투라 형사가 그랬듯 베르트 할머니의 살인에도 할머니에게 감정적 동의와 공감을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처벌한 남자들은 사실 누군가 대신 처벌해줬어야 할 나쁜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참지 않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은가.

별다른 상상력 없이 그저 여자들이 하는 말들을 듣고 썼다해도 충분할 소설이라 별은 셋을 주려고 생각하다가, 그러나 베르트가 서른한살에 인생 남자를 만나서 3.5가 됐는데, 알라딘 별점에는 반개짜리가 없으므로 넷을 준다. 



어쨌든,

베르트 할머니는 참지 않긔!!


˝내가 그렇게까지 역겨운데 왜 나랑 결혼한 거야?˝
자신의 위선에 말문이 막힌 뤼시엥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붕 위에 올라갔을 때 이 굴곡진 몸매에 반했잖아, 아니야? 충분히 당신 취향이었으니까 나한테 청혼까지 한 거 아냐? 그런데 왜 지금은 이걸 감추길 바라는 거야? 내가 당신을 창피하게 하는 거야, 아니면 이런 날 바라보는 당신이 창피한 거야?˝
베르트는 당대를 뒤흔드는, 최소한 대화 상대를 뒤흔드는 현대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뤼시엥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즉 베르트의 따귀를 갈겼다. 부족한 지성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선조들의 방식이었다. 남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바꾸겠는가?- P101

˝휴! 드디어 자유군!˝
베르트는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상반신이 나체인 채로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삽질에 따라 덜렁거리는 젖가슴 사이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음산해보일 수 있는 순간이 어떻게 이토록 도발적일 수 있는 것일까?
˝자, 이제 알겠지? 아내에게 응당 자상하게 대하는 대신 구타를 일삼으면, 아내가 당신 무덤을 파면서 신바람이 난다는 걸? 이래도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남편인지 깨닫지 못한다면야.˝- P111

감정을 표현하는 남자라니. 베르트는 절대 믿지 못했으리라. 그 믿음을 위해 루이지애나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독일군의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은 남자, 그것도 흑인이 필요했다. 루터는 그녀에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심어주는 중이었다. 서른한 살에, 생각지도 못한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발견은 받아들이는 것이 이롭다. 특히 그것이 폭넓고 탄탄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루터의 품처럼 우리를 단단하게 감싸준다면, 그것은 매우 이로웠다- P145

수프 맛이 고약했다. 베르트가 회복하려고 애쓰며 침대에 못박혀 있던 나흘 이레로 마르셀이 그녀에게 음식을 떠먹이고 있었다. 마르셀은 형편없는 요리사였으나 강력한 주먹꾼이었다. 베르트는 뤼시엥에게 당했던 폭력을 되씹으며 조용히 클클거렸다. 만만치 않은 선수. 마르셀은 상위 그룹에 속했다. 후유증을 남기는 그룹. 베르트는 질이 부어오른 것도 모자라 꽁무니뼈도 부러졌다. 의사에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르셀은 계단 추락사고라고 둘러대며 잘도 빠져나갔다.
‘아니, 아랫도리는 브로콜리가 되고 엉덩이는 두 동강이 났는데, 계단을 헛디뎠기 때문이라니. 그런데 그 핑계가 먹혔어. 다들 한패인거지.‘
베르트는 불만이었고 속단했다. 지폐 몇 장과 칼바도스가 진단서 작성에 힘을 보탰다.- P220

˝어, 그래, 우리 여자들은 말이야, 선택의 호사를 누리지 못해. 우린 무엇보다 애 낳는 기계라고. 물론 그곳도 모든 기능이 정상일 때 얘기지만! 출산과 살림, 우린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지만 난 달라, 이젠 시대가 바뀌었고 난 평등을 원해. 그러니 당신도 집세를 분담해.˝
˝이 집은 당신 거잖아.˝
˝상징적인 제스처를 하란 거야.˝
˝난 도무지 당신네 여자들이 이해가 안 가. 여자들이 살기가 얼마나 편하냐고. 먹여줘, 입혀줘, 재워줘. 책임은 죄다 남편들이 지고. 거기에 발목엔 어떤 족쇄도 없는데도 오늘날 평등을 떠들어대니.˝
˝은행에 계좌를 트고 자기 돈을 자기가 쓰려고 해도 남편의 동의가 필수적인 건 어떻게 생각해? 그게 발목의 족쇄가 아니면 뭐야? 투표권을 얻기 위해 애걸복걸해야 했던 건, 그건 자유야? 바지를 입으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건,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예술가라고 해서 꼭 바보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달에 당신 주기가 언제지?˝- P284

베르트가 목제 식탁에 포크를 꽂았다. 열이 올랐다.
˝아, 젠장! 나한테 생리 핑계 갖다 붙이지 마. 당신만은 제발!˝
˝그게 당신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인정해.˝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신의 너절함이야.˝
˝천박하게 굴어서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여자가 권리만 주장했다 하면 그 즉시 생리대를 들고 나오니, 이거 원. 저질에, 비루하고, 생산적이지 못하기 짝이 없네.˝
˝생산적이지 못한 건, 당신이 잘 알겠구나.˝
궁지에 몰렸다고 느낀 노르베르가 비겁한 무기를 선택했다.
˝그 부분은 건드리지 마, 노르베르, 특히 그건 하지 마.˝
˝난 그저 당신이 보부아르를 읽고서 들떴을지 모르겠지만, 단신은 크게 불평할 처지가 아니란 얘기를 하는 거야. 이렇게 아늑한 집도 있고, 가게도 잘 굴러가잖아. 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내 예술을 팔고 있어. 누가 더 불평을 해야겠어? 이건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생존자와 그 밖의 사람들의 문제야.˝- P285

˝왜, 당신이 보기에 난 생존자가 아닌 것 같아서?˝
방 안의 온도가 핵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당신은 그리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내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해.˝- P285

˝지금 저 협박하러 온 거예요?˝
어조가 매서워졌다.
˝그럴 리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럼요?˝
˝제 좋은 평판으로 당신의 나쁜 평판을 희석해주고 싶어요.˝
‘남자들이란. 죄다 똑같아. 우리의 구세주들. 내가 또 황홀해해야 하는 걸까.‘
˝전 당신의 좋은 평판이 필요 없어요, 밥티스트. 전 지금의 제가 부끄럽지 않거든요.˝-- P308

˝너흰 그를 죽여서 얻은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 난 ……난 모든 걸 잃었지.˝
그녀의 입에서 말들이 새나왔다. 공허하고 싸늘한, 유령의 말들이었다.
탕!-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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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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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만 해도 나는 한국소설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도 했었는데 요즘에는 한국 소설 읽는 게 참 좋다. 애초에 나의 모국어로 쓰여진 걸 읽는 재미와 기쁨은 번역서가 결코 줄 수 없는 거니까. 게다가 한국 여자작가들의 작품은 다 저마다의 매력으로 좋은데, '문목하'는 이야기 쪽에서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와, 우리나라 여성작가들 글 잘쓰네, 라고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감탄했다. 며칠전에 '한국문단은 죽었다'고 말하던 누군가도 떠올랐다. 어떤 책을 읽어왔기에 또 어떤 책을 읽을 생각을 하길래 한국 문단이 죽었다는 거야. 이렇게나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구먼!!


별 다섯의 0.5 정도는 사실 응원과 기특한(?) 마음 같은 걸로 덧붙이게 된건데, 뭐 아무래도 좋다.



윤서리는 초능력을 가진 비원과 초능력을 가진 경선산성의 싸움이 못마땅하다. 분명 이 깊은 싱크홀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윤서리의 능력을 얘기하는 건 이 책의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사랑이 어떤 부분에서는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이야기한다.


사랑은 모든 것의 답이 될 수도 없고 모든 것의 길이 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많은 선택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당신이 살아있기를 원하는 마음, 당신이 잘 지내기를 원하는 강렬한 마음은, 모든 선택들을 다시, 다시 뒤로 돌리게 만들기도 하니까. 내가 지금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타인의 안녕에 대한 바람이 대부분의 이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책의 윤서리가 그랬고 정여준이 그랬고 최주상이 그랬다.



읽다보면 '애쉬톤 커쳐' 주연의 영화 『나비 효과』가 자꾸 생각나는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 애쉬톤 커쳐는 다른 이들에게 일어난 불행을 막기 위해 결국은 자신의 태어나지 않음을 선택하기로 한다. 여기까지만 하겠다.




이 책은 헐리우드에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할리우드에 판권 팔린 토종 SF


기사 중간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가장 로맨틱한' 이야기라는 어느 독자의 평은 적확했다. 읽으면서 서너번쯤 눈물을 닦았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고 또 이렇게 풀어갔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차례 했고, 그래서 와, 우리나라 여자 작가들 글 잘쓰는구나, 했다. 작가가 출판사 아작을 알게 되어 원고를 투고했다는데, 작가의 그 시도와 용기가 감사하다. 이런 글이라면 투고해야함이 마땅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가영이 …… 윤서리를 저기 살려두려고 왜 그렇게까지 견디는 거야?˝

정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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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 상품 뒤에 가려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안미선.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그린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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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화장실을 같이 쓰고 싶지 않다고 한 적이 없는데, 왜 고객용 화장실과 노동자들용 직원용 화장실이 따로 있는걸까? 부끄럽게도 나는 화장실이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 건물에 있는건데 왜 고객용 화장실과 직원용 화장실은 질적으로 달라야 하나? 이거 만들면서 저거 만들텐데 왜 달라? 나는 백화점 직원들과 에스컬레이터도, 엘리베이터도 같이 쓰고 싶다. 그들이 어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 초조하게 뛰어 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 눈에 쉽게 잘 띄는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먹으면서, 그걸 직원들은 먹어서는 안된다는 걸 몰랐다. 백화점이 20:00-20:30 에 문을 닫으니, 당연히 그 긴 근무시간을 한 명이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2교대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나는 얼마나 무심한 사람이었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유명했던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가 떠올랐다. 신애라는 백화점 직원이었고, 차인표는 그 백화점의 임원이었는데 그 안에서 둘의 사랑이 싹텄고, 불꺼진 백화점 안에서 그들은 키스를 했었는데.

아 그것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작품이었던가.

그 때 백화점 노동자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헛웃음이 나왔겠지.

여성 노동자가 그렇게 온갖 노동과 고통과 부조리와 불합리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데, 그걸 보지 못하도록 가려두고 낭만으로만 덧씌워 로맨스 드라마를 만들었었구나....


이 책은 2016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지금은 백화점 노동자들의 현실이 좀 달라졌을까? 그러나 얼마전에 백화점에 가 화장실에 들렀을 때, 내가 거기에서 유니폼 입을 직원을 본 기억은 없다.



백화점이여, 당신들은 직원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왜 그들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하며, 그들의 돈으로 매출을 맞추게 합니까. 왜 그 고통으로 자살하게 합니까. 당신들에게 그 많은 백화점의 여성노동자들은 어떤 의미입니까. 왜 이딴 거 써붙입니까.





그렇게나 크고 깨끗하고 화려한 건물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후진 공간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게 너무 역겹다.

나 역시도 백화점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기 보다는 향기 좋은 꽃밭을 보고 살았던 것 같다.

물건도 사람도, 그리고 CCTV도 참 많은 백화점에는,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풍경들도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백화점 노동자‘, ‘안경을 낀 여성노동자‘, ‘고객용 화장실을 이용하는 백화점 노동자‘입니다. 앉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앉을 의자조차 없다는 것이 못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장 건물은 화려하고 근사한데, 알고 보면 ‘의자 하나 주지 않는 직장‘이라니 말입니다.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매장이 많은 백화점 1층에서는 ‘안경 낀 여성노동자‘또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화점은 시력이 좋은 사람만 뽑는 것도 아닐 텐데, 거짓말처럼 안경 낀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요? 물기 한 방울 없이 깔끔한 ‘고객용‘ 화장실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우리는 백화점 노동자를 만나 볼 수 없었습니다. - P9

대개 남성인 백화점 정규직 관리자들은 판매직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에게 이렇게 욕했다. ˝너 나이 먹고 잘리면 마트 가서 캐셔밖에 못해. 너희는 나이 먹으면 쓸모없는 사람들이야.˝ 지독한 욕설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나이 먹는 것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협박을 받으며 일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이가 적건 많건, 여성노동자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 발언에 불과하다. 소위 ‘여성 일자리‘라고 불리는 일이 있고, 여기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높다. 그 편견과 싸우지 않으면 자존감마저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다.- P43

노동을 하러 들어간 일터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노동 안에 모욕과 멸시에 대한 감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차갑고 경멸적인 태도, 외모와 나이에 대한 평가, 편견이 담긴 질문, 폭력적인 술 문화, 갑을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애초부터 그녀들에게 주어진, ‘여성‘, ‘비정규직‘이라는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P46

백화점 판매직으로 일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는 여성이고, 이들은 긴 근무시간으로 인해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하기 어렵다. 서울 지역 유통 판매직 여성의 수면시간은 6시간이었으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하루에 1.9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관련 연구들은 유통 판매직 여성노동자의 자녀 돌봄 시간이나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여성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거의 전담하고 있으므로, 여성노동자는 장시간 임금노동,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으로 3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근무시간은 그나마 공식적인 것이지만 일과 생활을 함께 꾸려 가기 위해 이들이 겪는 시간 압박과 과중한 노동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 P52

화장은 물론 액세서리와 손톱까지 관리 규정하는 지침은 실제로 창고를 오가며 육체노동을 하는 백화점 판매직 여성노동자에게 불편을 가져온다. 창고 일을 하고 매장을 오가면서 지저분해진 손톱을 의식하고 지적받으며 다시 손질하는 것은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준다. 그녀들은 백화점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분서주하며 타인의 시선에 비칠 외모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고객 응대 외에도 매장 청소, 재고 정리, 상품 진열, 전산 작업 등 다양한 일을 해야하는데, 딱 맞는 옷, 짧은 치마, 높은 구두 등은 일하기에 불편한 복장이다.- P91

매번 진상 고객은 있지만 심한 날이 있어요. 매장에서 한 20년 일하신 선배님이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진상 고객들은 어디서 대접 못 받고 와서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것 같다고, 우리들 아니면 누가 상대해 주겠냐고, 그냥 불쌍한 마음으로 생각하자고, 이렇게 안 하명 링 오래 못한다라고 이야기하시거든요. 그만큼 힘들고 더러운 꼴 많이 보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 선배님은 20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손님 대하는 첫마디부터가 달라요.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해요. 경력이란 게 있는 것 같아요. (한아름, 백화점 잡화 매장)- P143

단순히 ‘웃는다‘는 것 그 자체, 그 웃음으로부터 매출을 끌어내는 데에만 집중할 뿐, 백화점은 노동자의 행복한 노동 조건에는 큰 관심이 없다. ‘지금부터 고객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용모와 복장을 점검합시다‘라는 어구 옆에느 ㄴ꽃을 들고 활짞 웃고 있는, 원피스 차림의 여성의 사진이 있었다. ‘잊지 않으셨죠? 지금부터 고객과 함께하는 공간입니다‘라는 어구가 적힌 포스터에는 사람의 머리 대신 하트가 얹혀 있는 직원의 모습이 그려져 잇었다. 직원의 공간에서 고객의 공간으로 한 발자국 내디디면, 서비스라인의 흰 금을 넘어서면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모습은 언제나 ‘웃고 있는 하트‘일 뿐이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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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9-2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리뷰를 읽고 예전에 시사인에서 제가 봤었던 기사가 생각나서 검색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기사에서도 백화점을 ‘고객에게는 서비스를 받는 장소겠지만, 판매 직원에게는 평가와 감시, 처벌의 장소이다.‘이라고 하더군요.
2013년 기사였는데요. 지금은 크게 달라졌을까요? 다락방님이 읽으신 책을 보니 아닌 것 같네요.
거기서도 여성노동자들은 이중의 압력을 받구요.
우리의 편리함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보이는 것만 봐왔던 제 자신도 부끄러워지네요.

다락방 2019-09-24 08:48   좋아요 1 | URL
네, ‘미스터리 쇼퍼‘라고 손님으로 가장해서 직원들의 서비스를 체크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서비스에 점수를 매겨서 상부에 보고하는 사람이요. 진짜 손님처럼 물건을 사기도 해서 누가 미스터리 쇼퍼인지 직원들은 알 수 없고, 본사에서 보내는 사람 백화점에서 보내는 사람도 있어서 일 년에 여러차례 만난다는데, 얼마나 스트레스 겠어요 ㅠㅠ
게다가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봤자 창고에 다름아니고 그마저도 제대로 쉬는 시간도 보장되지 않고요. 저는 고객들과 같은 화장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를 쓰지 않는다는 것에 너무 놀랐어요. 돌이켜보니 정말로 그곳에서 직원을 만난 적이 없는거에요!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나 무심했구나, 깨달았답니다. ㅠㅠ
 
나방 사냥꾼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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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하버 스트리트]보다 더 재미있다.


돈 많고 은퇴한 사람들이 밤마다 술을 마시는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쩌면 그렇게 매일을 여유롭게 살 수 있는지, 어쩌면 그렇게 집 안을 완벽하게 꾸며놓을 수 있는지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은 베라는 궁금하며 질투심도 일지만, 그들 개개인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많은 것들을 숨기고 살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그래,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살 수 없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것 같은 그들이었지만,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그들은 비밀을 갖고 있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뚱뚱한 독신 여성 베라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후배 여성과 후배 남성과 일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좋다. 냉정함을 홀리에게 주고 따뜻함을 조에게 준 것도 유쾌한 설정이다.

사건의 중심과 주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장점. 읽으면서, 아 이 맛에 소설을 읽는 거야, 생각했다.




베라 시리즈는 나오는 족족 다 읽어봐야지.


집 옆쪽으로 구식 부엌 정원이 딸려 있었다. 과일 덤불에는 망을 씌웠고, 식물이 나란히 싹트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깔끔했다. 수전은 정원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있었다면 분명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카스웰의 솜씨다. 그들은 이 집을 사랑했고, 이 정도의 시간을 집에 투자할 수 있다면 분명 은퇴했을 것이다. 정원 너머로 언덕은 가파르게 바위산으로 이어졌다. 잠시 서있으니 양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P22

˝나이절 루카스입니다.˝
˝소문은 다 들으셨겠지요.˝
˝음, 수전 새비지, 퍼시 노인의 딸이 간밤에 전화해서, 카스웰 저택 하우스시터가 도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개울 옆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려고 위층에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베라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도 그를 위해 슬퍼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P73

베라는 자기도 조금만 잘 갈고 닦으면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아침마다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을 들여 얼굴에 분칠하는 수고를 감당할 만큼 가치 있는 남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P75

애니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두려워했다. 고통이나 질명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자신이 없이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자체가 무서웠다. 아직도 그녀는 어둠에 삼켜져 갑자기 사라지는 악몽을 꾸곤 했다. - P120

나이 든 여자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고, 같이 온 사람은 안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잇는 것 같았다. 뺨에는 둥글게 분을 발랐고, 립스틱은 입술 경계를 넘어 파우더까지 번져 있었다. 옷은 밝은색이었다. 파란 코트와 분홍색 스카프, 그녀는 탁자 위에 헝겊 인형을 들고 아기처럼 어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자동차 창문이 닫혀 있어서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홀리는 인형을 계속 탁자 위에서 아래위로 어르다가 아기처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노인에게서 당황스러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치매였다. 어쩌면 알츠하이머일 것이다. 이렇게 도로 가까이 혼자 내버려두면 안전하지 않으니, 보호자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홀리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저런 노인을 밖에 돌아다니게 할까? 어디 보호소에 있는 게 노인에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홀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노인의 편안함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23

자신이 이렇게 잔인하게 타인을 재단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자기도 저렇게 약하고 정신 나간 노인으로 생을 마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갑자기 구역질이 나도록 역겨웠다.- P123

홀리는 카모마일 차를 끓여 거실로 향했다. 사각형의 방에는 물건이 별로 없었고, 홀리는 그게 좋았다. 이 집 융자 보증금을 대느라 몇 년 저축을 쏟아 부었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 돈이 한 푼도 아깝지 않았다. 이곳은 업무의 긴장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적이 좋았고, 자동차 소음이 없어서 좋았고, 새로 칠한 벽의 날렵한 모서리와 다림질해서 반듯하게 접어놓은 침대 시크가 좋았다. 도전적인 곳이 경력을 위해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북동부로 옮겼고,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는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P132

˝요즘도 안 좋은 남자하고 사귀나요?˝ 베라는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려고 해 보았지만, 이제는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수사와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애니는 딸이 외지에서 일한다고 했고, 베라는 굳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 선생 중 한 사람과 관계를 가졌죠. 선생은 해고당했어요.˝
˝그건 학생 잘못이 아닙니다!˝ 베라는 받아쳤다. ˝특히 미성년일 때는. 유일한 잘못은 남자한테 있어요!˝- P137

˝이렇게 멀쩡한 척하는 것도 압박 아닌가요?˝
로레인은 피식 웃었다. ˝모든 부부는 뭔가 가장하고 살아요. 항상 정직하면 미쳐 버리고 말겠죠. 성공적인 이성 관계는 선의의 거짓말과 사소한 아첨으로 이루어지지 않나요? 파트너가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거예요.˝-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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