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와이프
메그 월리처 지음, 심혜경 옮김 / 뮤진트리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달 전쯤인가, 신랑과 영화관 한번 갈 수 있으리라는 야무진 희망을 품고 상영중인 영화를 찾아보다가 발견한 <더 와이프>. 줄거리도 흥미롭고, 관람평도 괜찮아서 보고 싶었으나 상영 영화관이 멀었다... 무엇보다 영화관을 갈 시간이 없었다. 흑. 책이 원작이라기에 찾아보니 도서관에 들어와 있었다!

잠자냥님의 <젤다> 리뷰를 읽고 피츠제럴드 부부의 이야기가 이 소설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들 뿐일까.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어려웠던 때, 가능은 하지만 성공하기는 어려웠던 때, 남편의 이름에 묻혀버린 재능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더 와이프>는 조지프 캐슬먼이라는 유명작가와 그의 아내 조안 캐슬먼의 삶을, 조안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조안이 어떻게 자신의 재능을 묻어놓고 헌신적인 아내로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마음이 다시 변해갔는지 추적한다.

둘 사이는 처음부터 평등하지가 않다. 시작부터 삐걱거림을 예감하게 하는 아래와 같은 서술은 앞으로을 예감하게 한다. 조지프의 관심사는 조안이라는 인간 전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없는 재능이 아니었을까.

#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나의 불안감, 나에게 스며드는 정치적 공감과 연대,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욕심들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한편으로 후련했다. 그래, 이런 것이 남자와 함께 있다는 의미였구나. 그가 신경 쓰는 것들을 나에게 말해주고, 그 다음에는 내가 신경 쓰는 것들을 그에게 말해주고,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 적절한 시점에 분노하고 동정하며 맞장구치는 것. 그건 마치 친구를 갖는 것과 같고, 전혀 다른 신체적 구조와 기억들을 가진, 낯선 자신의 판박이를 갖는 것과 같다. 그리고 둘이 모두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면 서로 상대방의 내부에 있는 기억의 채굴장과 저장소에 특별히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그의 질문은 ˝내 글은 어땠어?˝였다.
- 115쪽

여자는 열심히 남자에게 그의 가족, 삶, 생각, 취향 등을 물어보고는 남자도 이제 그런 것들을 물어보리라 기대하고 마음을 열었는데,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 있어... 이런 느낌 안다. 아 너무 슬퍼 ㅜㅜ

1950-60년대에 여성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부분들도 여럿 등장해서 흥미롭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 덩굴과 기숙사 현관의 그네, 그리고 마리화나로 이루어진 캠퍼스에서 나의 관심사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 여기서는 모든 것들이 황금빛과 여성성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조직이나 단체의 주류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56년, 우리는 중요한 세계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커다란 마이크를 들고 반질반질한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상원 소위원회에 한통속이 되어 앉아있는 혐오스러운 남자들, 호텔 방에서 긴급한 욕망을 채우고 있는 남자들의 세계와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세균 배양액에 담긴 표본들처럼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4년 동안 유보한 채, 어떤 다른 용도를 위해 보존되어 있었다.
-63쪽

# “당신이 그들의 관심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녀가 말했다.
˝누구의 관심요?˝
그녀는 나를 불쌍하다는 눈으로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안전핀을 치마에 꽂고 있는 바보.
˝남자들˝ 그녀가 말했다. ˝서평을 쓰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신문·잡지를 편집하는 남자들, 누가 정말로 선택될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누구를 권좌에 올릴지 결정하는 남자들 말이야. 똥 중의 왕이 될 사람.˝
˝그럼 그런 건 음모陰謀란 말이에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내가 질투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일레인 모젤이 말을 계속했다. ˝아니야. 아직은, 하지만, 맞아, 여자들의 목소리를 작고 조용하게 만들고 남자들의 목소리를 크게 만드는 것을 음모라고 부른다면 말이지.˝ 그녀는 크게라는 단어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 예˝ 나는 애매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마.˝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다른 길을 찾아. 어디든 갈수 있는 여자들은 극히 소수야. 대부분은 단편 작가들이지, 마치 여자들은 작은 것들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어쩌면요.˝ 내가 말을 시도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라요. 아마도 여자들은 글을 쓸 때 다른 것을 시도하려는 것일 수도요.˝
˝맞아.˝ 일레인이 말했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 하지만 큰 캔버스, 그 안에 모든 것을 넣으려고 시도하는 대단한 책들, 멋진 정장, 큰 목소리를 가진 남자들은 항상 더 많은 보상을 받지. 그들은 중요한 사람들인 거야. 왜 그런지 알고 싶어?˝ 그녀가 나에게로 몸을 숙이더니 말했다, ˝왜냐면 그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 89~90쪽

영화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나중에 파일로 볼 수 있겠지..
책에 오탈자가 상당히 눈에 띈다. 영화 내리기 전에 출간하려고 서두르다가 교정을 덜 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번역은 괜찮다.

결혼생활에 안주하는 여자들, 남편과 가정에 대한 헌신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자들, 결혼생활이 자신들이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느끼고, 실제로도 가장 좋아하고 잘 맞는 일이었기에 결혼생활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여자들. 수재너는 익숙한 것과 알고 있는 것들에서 누리는 호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불밑의 늘 같은 자리가 튀어나와 있는 침대, 귀를 덮은 머리카락. 남편. 결코 내가 기어오를 수 없고, 흥분해서도 안 되는 존재.
그래도 엉성하게 바른 회반죽으로 벽돌을 쌓아가듯, 세월에 세월을 얹으며 그저 옆에 사는 사람. 두 사람 사이에 결혼이라는 벽이 세워지고, 기꺼이 그 안에 눕게 되는 부부의 침대.
˝내가 비참하다고 누가 그러던?˝ 이것이 내가 수재너에게 실제로 한 말이었다.
- 139쪽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는 그들 사이에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밥 러브조이가 내 팔을 만졌고 나는 약탈당하고 협박을 받은 기분이었지만 어떻게 적극전으로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남성이 여성을 만졌고, 예상 밖의 일이었다면, 여성은 ˝그러지 말아요.˝라고 속삭이거나, 아니면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남자를 밀어낸다. 그러면 남자는 하던 짓을 멈추거나, 어쩌면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이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나는 여기에 조와 함께 왔기에 혼자 일어나서 떠나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비상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적막한 거리를 비참한 기분으로 내려다봤다. 조가 드러난 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날씨가 차가워서 뭔가 덮을 게 필요하던 참이었다.
“조안.” 조가 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자.˝
그것이 나는 고맙고 또 고마웠다. 마치 그가 나를 구해주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구해냈고, 파티장을 떠났다.
- 18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에게 '문맹'이라니, 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유년시절부터 읽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한 소녀가, 외로움과 가난을 시와 희곡을 쓰며 견뎌냈던 그 소녀가, 언어를 잃고 문맹이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56년, 스물한 살에 남편과 4개월 된 어린 딸을 데리고 헝가리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간다. 당시 소련의 지배를 받던 헝가리에서 정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헝가리혁명에 연루되어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이 든 가방 1개와 사전들이 들어 있는 가방 1개를 들고 월경안내인을 따라 국경을 넘는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무사히 오스트리아에 도착한다.

그러나 모두가 월경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열 살 먹은 터키 아이가 부모를 따라 스위스 국경을 은밀히 넘다가 피로와 추위로 인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월경 안내인들'은 그들을 국경 근처에 데려다 주었다. 그들은 스위스의 첫 반째 마을까지 곧장 걷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산과 숲을 가로질러 오랜 시간 동안 걸었다. 날은 추웠다. 여정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버지는 아이를 업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피로와 추위 그리고 탈진으로 죽어 있었다.

 - 67~68쪽

 

 국경을 넘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기 롤랑이 떠올랐다. 그는 스위스 국경을 넘으려 했지만 안내인은 그를 버려두고 사라져 버린다.

 그러고보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월경 장면이 나온다. 트랍 대령에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라는 소집 명령이 내려지자, 마리아와 트랍 부부는 7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을 시도한다.

 

현실은 소설과 영화보다 잔혹하다. 추위와 탈진으로 죽은 아이. 지금도 국경을 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탈북민, 난민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는 걸까.

 

 

스위스에 정착한 아고타에게, 언어는 무서운 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그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 52~53쪽

 

 잊혀져가는 모국어, 여전히 낯선 새로운 언어... 어릴 때 망명하여 프랑스어를 익힌 아이와의 의사소통의 벽(이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다).

 그 안에서 그 새로운 언어를 익혀 그것으로 소설을 써내는 일은 끝나지 않는 도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도전을 감행한 아고타의 의지와 용기는 감탄스럽다.

 

 시종일관 담담한 언어로 상실과 도전을 기록한 글. 그 여백에 담긴 무수했을 고통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찬사를 보낼 뿐이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대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 34쪽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중략)
어떻게 그에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짧은 프랑스어로, 그의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 난민들에게는 사막, 사람들이 ‘통합‘이라든지 ‘동화‘라고 부르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건너야만 하는 사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어떤 이들은 끝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 89, 9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코 좀 뚫어주세요 - 수면장애, 두뇌발달 저해, 성장장애의 원인과 치료법
기카와다 토오루 지음, 요시타케 신스케 그림, 황미숙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 아이가 콧물을 달고 산다. 밤에는 코가 막히고 목 뒤로 코가 넘어가는지 기침을 하느라 잠을 잘 못 잔다. 병원 가서 약 처방 받고 먹어도 좀 나아지는가 싶으면 다시 새롭게 시작이고.. 어린이집과 콧물은 함께라더니. 열이 안 나고 폐렴이나 후두염 등 문제만 없으면 큰 걱정은 아니지만, 잠을 푹 못 자서 아이도 부모도 힘들다.

 산책 중 도서관에 들러 신착도서 코너를 훑는데, 이 책이 딱 눈에 띄었다. 음? 이 귀여운 그림체는? 익숙하다 싶었더니 요시타케 신스케다. 오호! 바로 대출.

 비염으로 대표되는 코막힘의 원인, 문제점, 해결방법까지 쉽게 설명해 주는 가벼운 책이다. 정말로 가볍기 때문에 가볍게 읽히지만 별로 특별한 건 없다.

 낮에는 괜찮더라도 밤에만 코가 막혀 수면에 방해를 받는 '숨은 코막힘'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수술까지 갈 정도가 아니라면 코세척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나도 입 벌리고 자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은데 숨은 코막힘인가.. 남편이 비염이라 나는 괜찮다고만 생각했지 숨은 코막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어린이집 엄마들이 코세척기를 추천했는데 한번 써봐야 하나.

 아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코세척은 못하는데 그렇다면 가습밖에 답이 없는 듯.. 환절기 지나고 나면 좀 나아지길 빌 수밖에. 제발 좀 떨어져라 감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04-1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염을 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감기에 걸렸을 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정말 괴로워요. 이 책 속에 있는 내용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져요. 이 책을 봐야겠어요. ^^

독서괭 2019-04-19 07:30   좋아요 0 | URL
음.. 부모를 대상으로 “성장기 아이의 코막힘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지, 그러니 조기 발견과 치료가 얼마나 중요한지”을 강조하는 책이라 별로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비염.. 환절기에 특히 괴로우시겠군요 ㅜㅜ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독자가 아니지만 꽤 재미있게 읽었다. 마들렌 에피소드가 제일 재밌었음. 막판 스토리가 황당하긴 한데.. 독서+병맛 코드의 신선함만으로도 별 네개는 충분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4-1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반에는 창대하였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병맛이 파도처럼 몰려 들더군요.

그냥 처음 페이스 대로 갈 것이지...

독서괭 2019-04-11 17:2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냥 독서중독자인 거 빼면 평범한 캐릭터들로 쭉 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배틀그라운드 -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백영경 외 지음 / 후마니타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월 11일, 바로 내일 낙태죄 헌법소원에 대한 헌재 결정이 내려질 예정이다.

급히 다른 책을 미뤄두고 이 책을 펴들었는데, 12명의 저자가 쓴 12개의 글 중 6개를 읽었으니 딱 절반이다. 낙태죄를 둘러싼 논의들을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보여주고 있어 아주 흥미롭다.

 

1. 백영경, 프롤로그 -  낙태죄 폐지가 시대의 상식이 되기까지

 

결국 재생산권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구체적인 맥락이나 현장을 두고 지금 여기에서 이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를 묻는 데 있다.

- 17쪽

 

2. 이유림, 낙태죄를 정치화하기

 

 낙태죄가 과연 고결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온 것인가. 이 글은 거기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생명 보호라는 절대적 윤리를 내세우기에는 얼마나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지. 낙태죄가 결국 여성과 성에 대한 억압, 가족계획을 통한 인구 관리 등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꼬집는다.

 

혼전 임신에 따른 낙태는 문란한 성생활이나 문제적 섹슈얼리티의 기표로 여겨지며, 사문화된 법이 처벌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응징하고 징벌해야 하는 사건이 된다.  (...) 반면, 이와 다르게 응징하고 징벌해야 할 사건으로 여기지지 않는 낙태도 존재한다. 이 서사에는 주로 기혼 여성의 임신중지가 소환된다. 가정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남편과 가족 구성원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자녀의 터울 조절이나 단산을 목적으로 임신을 중지하는 것이 그 예다.

(중략)

임신중지라는 사건은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이 두 서사는 전혀 다르게 이해되며 실제로 다른 문제로 배치된다. 그러나 만약 여성이 임신을 중지하는 행위가 생명윤리라는 어떤 자명한 준거에 의해 용납할 수 없고 국가가 규율하고 처벌해야 할 사건이라면, 그가 어떤 여성인지, 임신을 중지하는 사유가 무엇인지, 그의 태도가 어떠한지는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 34-35쪽

 

인구 조절을 위해 낙태가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던 가족계획 운동의 역사가 있는 한국 사회는 사실상 낙태를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한국 사회에서는 낙태라는 행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정상가족주의와 성적 규범을 유지하는 것이 구심이었고, 정말 엄밀하게 모든 낙태를 근절하고 처벌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기보다 오히려 '출산이 더 문제가 되는 임신'을 비가시화된 사적 영역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유도해 왔다.

- 41쪽

 

"여성이 완전무결한 피해자가 아닌 이상 법은 여성 편에 서지 않는" 수많은 울분과 치욕 앞에서, 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도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은 임신중절에 대한 규범화된 성적 각본의 폐기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 47쪽

 

3. 윤정원, 인권과 보건의료의 관점에서 본 임신중지

 

 산부인과 전문의가 쓴 글로, 낙태죄가 실제 낙태를 줄이는 효과가 없고, 오히려 불법적인 낙태 시술, 낙태죄가 허용되는 외국에서의 낙태 시술을 감행하게 하며 산모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낙태죄가 폐지된다고 하여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자료를 제시하며 반박한다.

 솔직히, 낙태죄가 폐지되면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여성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아무리 의료진에 의해 안전하게 시술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누가 임신중절을 하고 싶어하겠는가? 누가 하던 피임을 그만두고 마구 성행위를 한 다음 아무렇지 않게 임신중절을 하겠는가? 처벌이 되든 안 되든, 여성들은 자기의 온 인생을 걸고 결정한다. 또한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저지르게 되는 영아살해죄의 건수는, 낙태죄가 폐지되면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2018년 기준 OECD 36개국 낙태법을 비교해 보면, 한국보다 임신중지가 어려운 나라는 칠레뿐이다. 흔히 임신중지가 쉬워지면 임신중지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공시적으로나 통시적으로 임신중지의 합법화 정도와 임신중지율은 상관관계가 없음이 밝혀져 있다. 전 세계에서 임신중지율이 가장 낮은 곳은 북미와 북서부 유럽인데(가임기 여성 1000명당 각각 17, 18꼴), 둘다 임신중지가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지역이다.

- 58쪽

 

프로라이프는 태아의 생명을 봏해야 한다고 하면서 인공임신중절 클리닉에 폭탄 테러를 하여 의사와 여성들을 죽이며, 그들이 발의하는 법은 여성을 감옥에 가게 하고 여성의 가족이나 태아의 미래는 안중에 없다. 프로초이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배아와 태아는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으며, '국가는 내 몸에서 손 떼'라는 슬로건은 안전한 인공임신중절과 재생산 건강을 위해 국가가 가져야 하는 공중보건적 책임을 무화시킨다.

- 62쪽

 

프랑스 보건부 장관 클로드 에벵은 "나는 임신중지 논쟁이 여성에게서 의학 진보의 결과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 지금부터 미페프리스톤은 단지 제약 회사의 상품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도덕적인 상품'임을 프장스 정부가 보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미페프리스톤은 1990년 2월 '미프진'이라는 상품명으로 병원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 71쪽

 

출산이든 임신중절이든, 그것이 진정 여성의 오롯한 선택이었던 적이 있는가. 낙태 근절 비디오가 아니라 월경주기와 가임기 계산법을 학교에서 배우고, 약국에서 약사와 눈 마주치며 "피임약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고, 파트너의 성기에 내가 좋아하는 향의 콘돔을 끼울 수 있고, 임신했다고 학교에서 퇴학당하지 않고,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출산을 지원받을 수 있고, 임신중절과 출산에 똑같이 건강보험을 적용받고, 무엇을 선택하든 소독된 진료대 위에 누워 경험 있는 의료진에 의해 안전하고 적절한 시술을 받을 수 있고, 아이 걱정 없이 직장에 다닐 수 있고, 내 아이가 엄마만 있는지 부모가 다 있는지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때, 우리는 출산을 '선택'할지 임신중지를 '선택'할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79-80쪽

 

 

4. 최현정, 낙태와 헌법 논쟁

 

 법 관련 내용이라, 특별히 법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읽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태아의 보호 여부는 심지어 배우자가 낙태 수술에 동의했는지 여부에 의존한다. 강간이나 준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에도, 태아의 보호 가치는 윤리적 이유 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동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배우자는 누구일까? 여성의 법적 배우자인가? 태아의 생부(성폭력의 가해자)를 의미하는가? 배우자가 없는 여성은 누구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가?

- 91쪽

 

 

5. 나영,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인가 명령인가

 

 종교계, 특히 피임과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카톨릭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위험으로 내몰았으며, 또한 종교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정치를 이용하여 왔는지 보여준다. 가장 흥미롭게, 또한 열받으며 읽은 장이었다. 얼마 전 기사에서 염수정 추기경이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는 글을 읽었다. 낙태 합법화가 여성 위한 배려가 아니라고.. 코웃음 뿡이다.

 

니카라과의 로시타는 코스타리카에서 이주 노동을 하던 중 성폭력으로 임신했으나, 정부와 교회의 압력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로시타와 그의 부모는 인공유산 시술을 받기 원했지만, 두 나라의 정부와 교회가 모두 나서서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로시타는 여성단체들의 연대와 싸움을 통해 "치료적 임신중절"이라는 명목으로 겨우 임신을 중지할 수 있었지만, 이후 니카라과의 대주교가 이에 개입한 모든 사람을 파문하겠다고 발표했고, 결국 2006년 니카라과 의회는 치료적 임신중절마저도 금지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 117쪽

 

 

"인간 생명" 회칙에서 교황 바오로6세는 "피임 방법 사용에 습관을 들인 남편은 아내를 존경할 줄 모르며, 아내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무시하고 아내를 자기 정욕에 봉사하는 도구로 삼아, 아내를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할 동료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고 경고하지만, 과연 피임과 임신중지를 모두 금지한 대가는 결국 누가 치르게 되는가.

- 119쪽

 

- 피임하는 남편은 아내를 존경하지 않는 거라고? 이런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레이건은 임신중지 금지를 약속하고 대통령이 되었고, 부시 정부는 임기 내내 임신중지와 피임 문제를 위기 때마다 쟁정화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3년 만에 임신중지에 관한 연방 정부의 기금 사용을 금지하는 하이드 수정안이 통과되었고, 프로라이프 단체들은 레이건 정부에 헌법상으로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인간 생명 수정안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의 막대한 자금력과 정치적 동원력은 오늘날까지도 공화당 정책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각 주의 법과 정책을 후퇴시키고 현재 트럼프 행정부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 127쪽

 

성 윤리를 단속하고' 죽여도 되는 생명'과 '절대적인 생명'을 구분하여 처리할 명분을 만들어 주는 일, 출산과 임신중지를 통제하여 특정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금기와 인구 관리를 적절히 관리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 속에서 종교가 수행해 온 핵심적인 역할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때로는 전쟁을, 때로는 우생학을 지지해 온 역사, 태야의 생명은 절대적인 위치에 두면서 강력한 임신중지 처벌의 혀닐에서는 자가 낙태나 안전하지 못한 시술로 죽어 가는 수많은 여성의 생명은 외면해 온 역사가 마치 불변의 원칙처럼 제시되는 종교적 생명윤리 속에서 모순적으로 공존해 왔다. 어느 시대, 어떤 종교이든 종교계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종교적 입장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윤리가 같은 믿음을 지니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윤리로 제시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 135-136쪽

 

 

6. 류민희, 낙태의 범죄화와 가족계획 정책의 그림자

 

 해외의 사례들, 그리고 역사적 맥락을 통해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변화해 왔음을 보여준다. 또한 인구정책이 여성의 자율성에 제동을 가해 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압도적으로 많은 사례에서 배아와 태아의 절대적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낡은 형법을 두고 '낙태가 범죄인가 혹은 합법적인가'를 다룰 수밖에 없는 법적 논증은 결과와 상관없이 사회적 담론과 언어를 제한해 왔다. 발달단계의 세포인 배아가 실제 비율과 맞지도 않는 큰 사진으로, 혹은 실제 낙태와는 거리가 먼 출산 직전의 태아 사진으로 낙태 관련 언론 기사에 등장하고, 여성은 트라우마적 상황에서 의료인에 의해 구원받는 '위험에 처한 여성'으로 판결문에 등장한다. 생식능력을 개인의 자율성에 따라 통제할 수 있게 된 여성, 함께 그 혜택을 받은 파트너와 다른 자녀들의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 148쪽

 

과연 인구정책과 여성운동은 화해할 수 있을까? (...) 인구정책 자체도 사실은 권리의 문제, 즉 미래의 권리에 입각한 것이며, 집단의 권리에 대한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이 전제 아래 출산력 제고에만 집착한다면 여성의 자율적 결정은 그가 속한 커뮤니티의 미래를 제한하지 않는 조건에만 정당화되는 것이 된다. 많이 낳아도 안 되고, 적게 낳아도 안 되고.

- 158쪽

 

 

내일 헌재 결정이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법조계 예측처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올까? 결정 이유는 얼마나 진일보 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