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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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공창제 도입 여부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지금도 성매매합법화 논의는 계속되고 있지만, 활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을 사고 파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옳은가?"

이렇게 도덕적, 윤리적으로 접근한다면, "옳다"고 대답할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사고 파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 필요한가?"

라는 실용적, 정책적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필요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허용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고.


"필요하다"는 것은 성을 파는 쪽이 아니라 성을 사는 쪽의 입장일 것이다. 그 저변에는 "(남성의)성적 욕구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폭력적으로 발현되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주장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성매매합법화를 주장하는 측에서 중요한 논거로 드는 것은 장애인이나 연애, 결혼 등을 통한 욕구 해소가 여건상 어려운 사람(남성)들의 욕구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 등을 들먹이는 것은 매우 가식적인 주장이 아닌가? 현재 성을 매수하고 있는 남성들 중 장애인이거나 연애(오로지 성적 목적을 위한 파트너와의 관계를 포함), 결혼 등을 하지 못하여 성매매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남성의) 성적 욕구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라는 생각은 성적 욕구 해소의 대상이 되는 여성(물론 동성애자의 경우에는 남성을 포함)을 객체화, 사물화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비하가 아닌가? 인간을 짐승과 구별해 주는 것이 이성일진대, 욕구를 이성으로써 제약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언가. 여기에서 (남성의)라는 단서를 단 것은 여성의 성욕이 남성에 비해 약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성이 남성의 성을 매수하는 것은 그 반대에 비해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유부녀들의 호스트바 출입 등이 기사에 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를 보며 어떤 이는 여자들도 똑같아, 서로서로 성매매 허용하는 게 어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화제가 된 이유 자체가 애초에 그것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매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 가지 들어보자면 이렇다.

 1. 임신가능성에 대한 부담- 남성은 여성의 성을 매수하면서 이 부분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매매 여성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니까. 그러나 여성이 남성의 성을 매수할 경우 아무리 조심해도 임신의 가능성은 존재하며, 뒷감당은 여성의 몫이다.

2. 성병의 우려 - 남성에 비해 여성이 성병에 걸릴 경우 타격이 더 크다. 특히 출산을 원할 경우.

3. 공개될 경우의 타격에 대한 우려 - 성매매 사실이 알려졌을 때 여성이 남성보다 큰 타격을 입는다. 가정의 파탄, 주변의 손가락질. 이런 점을 이용해 상대 남성이 협박을 가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공창제를 허용한다고 해서 문제(어떤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근거가 빈약해 보인다. 성관계를 오랫동안 갖지 못한다고 해서 폭력성이 발현되거나 성범죄를 저지르게 될까? 애초에 내재된 폭력성을 가진 사람은 성관계를 많이 가지든 오랫동안 갖지 못하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성관계를 많이 가지는 사람도 애인에 대한 폭력, 변태적 성행위 요구, 거절당한 변태적 성행위 욕구의 충족을 위한 성매매나 강간시도 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공창제의 장점으로 꼽히는 것이 성을 파는 쪽(주로 여성)의 복지 향상 - 건강을 관리할 수 있고 포주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등 - 인데, 분명 그런 장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성매매는 예전과는 그 양상이 다른데, 돈 때문에 포주에게 묶여 열악한 상황에서 성매매로 연명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치를 위해서 또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비교적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인터넷 등을 통해 (포주 없이) 자발적으로 성을 파는 사람들도 많으며, 이런 사람들의 경우 굳이 자신을 드러내며 공창에 편입되려고 할지 의문이다. 공창이 생기더라도 음성적인 성매매는 근절되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공창에서는 성매수자들의 성병 감염 여부를 확인할테고, 피임을 시킬 테고, 변태적 성행위는 금지할 테고, 성매도자들의 나이를 제한할 테고.. 등등의 많은 제약이 따를 텐데 과연 성매수자들이 그걸 원할까? 달리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또 성매도자가 공창에 있을 때는 나름의 복지를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공창이 정년이나 연금을 보장해주지 않는 이상- 정년은 과연 몇 살..? - 그 후의 그들의 삶은 어찌되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결국 음성적 성매매의 세계로 편입되지 않을까?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어쨌든 그 모든 의문을 제쳐놓더라도, 공창제를 포함한 성매매합법화에 반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공창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남성의)성적 욕구는 해소되어야 한다"는 명제 뒤에 "이를 위해 국가는 (여성의)성을 도구로 삼을 수 있다"는 결론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현실적으로 완전 근절이 어려운 성매매를 암묵적으로 방치하는 것과 공개적으로 합법을 선언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는 성의 존엄과 가치를 국가가 무시하겠다는 것이고, 일부일처제를 기초로 하여 부부간의 정조의무와 가정의 평화를 꾀하는 국가정책과도 모순된다.


공창제 얘기를 한참 한 이유는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가 유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무슨 판타지소설인 줄 알았다.. 판탈레온이 만들어 낸 특별봉사대를 판탈레온의 이름을 따서 '판타랜드'라고 부르게 되는 대목을 보면, 풍자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작가가 의도한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50년대의 페루는 군부에 의한 독재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군에서는 아마존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이 민간에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판탈레온 대위를 보내 비밀리에 군인들을 위한 '특별봉사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한다. 지극히 성실하기만 했던 판탈레온은 처음에는 이 임무에 괴로워하지만 특유의 책임감과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특별봉사대'를 훌륭하게 조직해낸다. 그러나 특별봉사대의 봉사를 원하는 자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봉사대의 규모는 점점 커져가고, 비밀은 폭로되는데...

소설의 구성과 서술 방식이 특이하다. 서술과 대화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지만, 군 내부 보고서, 라디오방송, 신문기사, 편지 등의 다양한 형식이 동원된다. 서술과 대화로 이루어진 부분도 마치 여러 가지 화면을 동시에 보고 있는 것처럼 장면 전환이 예고 없이 빠르게 일어나서 처음엔 조금 헷갈린다.

판탈레온의 성공에서 몰락까지가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이단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형제'의 성공에서 죽음까지의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군의 사기를 높이고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기획이 군 장병들의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어 가는 것, 군 장성들의 가식과 책임 떠넘기기, 특별봉사대가 성매매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까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 많지만 공창제 얘기를 너무 길게 해서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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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11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처음으로 읽은 요사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팬이 되어 그의 전작에 도전했었지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독서괭 2017-05-11 18:03   좋아요 0 | URL
저도 다른 작품에도 도전해 보고 싶네요^^
 
니코마코스 윤리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개정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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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 따라읽기를 하며 읽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가 무슨 뜻이지. 뭔가 심오해 보여...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이름이자 아들의 이름으로 그냥 붙여진 것이라고 하니 허무하다. 그냥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다. 강의노트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라서 그런지 책 전반을 통일적으로 쭉 밀고 나가는 힘이 부족한 듯 하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단락들이 비교적 쉽게 씌어 있음에도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올바로 알면 올바로 행할 수 있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올바로 아는 것과 올바로 행하는 것 사이에는 폴리스에서 형성되는 좋은 습관이라는 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폴리스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으로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제국을 건설하면서 일반인들은 정치와 멀어지게 되고, 이 시기에 나온 윤리학설인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키니코스 학파 모두 정치와 무관한 이론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비해 상대적이고 유연한 논리를 펴고 있는 듯 하다. 개별성과 가변성을 무시하지 않고 미덕에 있어서나 실천적 지혜에 있어서나 개별적 가치판단의 영역을 인정하고 있다.

<인문 고전 강의>에서 인용한 부분들과 이 책을 비교해 보니 종전 번역을 상당히 많이 수정한 것 같다. 훨씬 읽기가 편하다.


제1권. 인간의 좋음

 - 모든 인간 활동은 '좋음'을 추구한다.

   하나의 목적은 다른 목적에 종속될 수 있다.

 - '좋음'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

    인간의 최고선을 연구하는 학문은 정치학이다(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괄한다).

 - '좋음'에는 가변성이 내포된다.

 -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고, 결코 다른 것 때문에선택하지 않기 때문.

 - 삶의 세 가지 유형 : 향락적인 삶/ 정치가의 삶/ 관조적인 삶

 - 하나의 보편적인 좋음은 존재할 수 없다.

 - 좋음 : 외적인 좋음/ 혼의 좋음/ 몸의 좋음

 -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완전한 미덕과 필생의 노력이 필요하다.

 - 진정한 정치가는 무엇보다도 미덕을 연구하는 사람.

 - 행복은 궁극적인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

    (혼) - (비이성적 부분) - (식물적인 부분)/(욕구적인 부분)

           - (이성적 부분) - (이성에 귀를 기울이려는 부분)/(엄밀한 의미에서 이성적인 부분)

    (미덕) - (지적인 미덕) : 철학적 지혜, 이해력, 실천적 지혜

              - (도덕적 미덕) : 후함, 절제


제2권. 도덕적인 미덕

 - 도덕적인 미덕들은 본성에서 생겨나지 않음. 습관화함으로써 완성됨.

 - 중용 : 지나침과 모자람은 피해야 한다.

 -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쾌락 때문이고, 우리가 고상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고통 때문. =>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

 - 미덕은 감정이나 능력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마음가짐 : 우리가 감정들에 잘 대처하거나, 잘못 대처하게 해주는 심적 상태.

 - 도덕적인 미덕의 특징은 중용을 선택하는 것. 산술적인 중간이 아님.


 - 때로는 지나침 쪽으로, 때로는 모자람 쪽으로 치우쳐 봐야 좋은 것(중용)을 알아낼 수 있다.


제3권. 도덕적인 책임

 - (자발적 행위)

    (비자발적 행위) - (강요당한 행위) : 제1원리(행위의 도구인 사지를 움직이는 원리)가 외부

                              에 있어, 강요당한 사람의 의지와는 완전히 무관한 행위

                          - (무지로 인한 행위) : 선택에서의 무지X, 일반적인 무지X, 행위의 상황과 대

                             상에 대한 무지O + 고통과 뉘우침이 뒤따를 것

 - 미덕와 악덕은 수단에 관련된 것으로, 숙고와 합리적 선택의 대상이며, 자발적이다.

 

제5권. 정의

 - 정의는 대인관계에서 행해지므로, 타인을 위한 좋음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미덕이다.

 - 분배적인 정의 : 명예나 금전 등 구성원들 사이에서 분배될 수 있는 것들의 배분에서 발견됨.

   조정적인 정의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래에서 조정하는 역할.

 - 정의는 일종의 비례이다.

 - 조정적인 정의(재판관의 정의)와 달리 사람들이 교환을 목적으로 서로 교류할 때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균등함이 아니라 비례에 따른 응보이다. -> 돈이 도입되어 일종의 중용 역할을 함.

 - 어떤 행위가 불의한가 아니면 옳은가는 자발적인가, 비자발적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분배하는 사람이다.

 - 법의 보편성으로 인한 결함은 공정성에 의하여 시정된다.

 - 자살은 법에서 허용하지 않는데(손이 잘리고 따로 묻힘), 자기 자신이 아니라 국가에 대해 불의를 행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


제6권. 지적인 미덕

 - 혼의 이성적인 부분 - (제1원리가 불변하는 것들을 관조)= 인식

                              - (제1원리가 가변하는 것들을 관조)= 헤아림(숙고)

 -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마음가짐

   (1) 학문적인 인식 :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마음가짐. 대상은 필연적인 것.

   (2) 기술 : 참된 이성이 수반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

   (3) 실천적인 지혜 : 사람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 대상은 가변적인 것.

   (4) 직관 : 실천적인 지혜, 학문적인 인식, 철학적인 지혜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를 파악하게 해주는 것.

   (5) 철학적인 지혜 : 가장 소중한 진리들에 대한 최정상의 학문적인 인식. 본성상 가장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학문적이며 직관적인 인식. 개별적이고 경험적인 실천적인 지혜와는 구별됨.

 - 실천적인 지혜와 정치학은 같은 마음가짐이지만 본질은 다르다.

   국가와 관련된 실천적인 지혜 - (기획) -> 입법적인 지혜

                                           - (개별 상황) -> 정치학

 - 인간의 기능은 실천적인 지혜(수단)와 도덕적인 미덕(목표)이 결합될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 강유원 : 플라톤 철학에서는 지혜와 학문적인 인식이 구별되지 않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적인 것은 '인식', 실천적인 것은 '지혜'로 구분하였다.  


제10권. 쾌락

 - 쾌락은 하나의 전체이며, 시간이 경과해야 비로소 그 형상이 완성되는 쾌락은 어느 순간에도 발견하지 못한다. -> 쾌락은 과정이 아니다.

 - 사고와 관조에도 그에 걸맞은 쾌락이 있듯 모든 감각에는 그것에 걸맞은 쾌락이 있는데, 가장 완전한 것이 가장 즐거우며 건강한 상태에 있는 기관이 가장 훌륭한 대상과 관련하여 벌이는 활동이 가장 완전하다.

 - 쾌락은 활동을 완전한 것으로 해주며, 따라서 모두가 바라는 삶도 완전한 것으로 해준다. 그렇다면 모두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 진지한 활동에 고유한 쾌락은 훌륭하고, 하찮은 활동에 고유한 쾌락은 나쁘다. 분명히 누구나 다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인정하는 쾌락들은 쾌락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 관조적인 삶은 가장 지속적, 자족적인 것으로 신적인 경지. 가장 행복한 삶.

 -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입법이 필요. 정치학으로 이행.

  

정치학은 다른 모든 학문을 이용할뿐더러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만큼, 정치학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괄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인간을 위한 좋음을 추구한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좋음과 개인의 좋음이 같은 것이라고 해도, 국가의 좋음을 실현하고 보전하는 일이 분명 더 중요하고 더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24쪽

고상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쾌락들은 본성상 즐겁다. 유덕한 행위들도 이와 같아서 유덕한 사람들에게도 즐겁고 그 자체로도 즐겁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자체 안에 쾌락을 내포하고 있어, 쾌락이라는 장신구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 -43쪽

입법자들은 시민들을 습관화를 통해 좋은 시민들로 만들며, 바로 이것이 모든 입법자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입법자들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좋은 정체(政體)와 나쁜 정체의 차이점이다. -63쪽

소망의 대상은 목적이고 숙고와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수단이므로, 수단에 관련된 행위는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그런데 미덕의 활동은 수단에 관련된다. 따라서 미덕의 실행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그 점은 악덕도 마찬가지이다. -106쪽

방종은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인 것 같다. 방종은 쾌락에 의해 유발되고 비겁함은 고통에 의해 유발되는데, 방종은 선택의 대상이고 비겁함은 회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본성을 흐트러뜨리고 파괴하는 데 반해, 쾌락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종이 더 자발적이다. 그래서 방종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132쪽

자부심이 강한 사람의 또다른 특징은, 아무것도 또는 거의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고 기꺼이 남들을 도와주며, 영향력 있고 잘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거만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겸손하다는 것이다. (...) 전자에게 거만한 것은 비열하지 않지만, 미천한 사람들에게 거만한 것은 약자에게 힘을 과시하는 것처럼 야비하다. -156쪽

법은 위법 행위의 변별적 성격에만 주목하고 당사자들을 동등한 자로 취급하며 한쪽은 불의를 행하고 다른 쪽은 불의를 당했는지, 다시 말해 한쪽은 해를 끼치고 다른 쪽은 해를 입었는지 물을 뿐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불의는 불균등한 것이기에 재판관은 이를 균등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 재판관이 하는 일은 균등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마치 한 선분이 동등하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을 때, 더 긴 선분에서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부분을 떼어내 더 작은 선분에 덧붙이는 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전체가 동등한 반쪽들로 나뉘어 양쪽이 동등한 몫을 갖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이 제 몫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균등한 것은 올바른 것(dikaion)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균등한 것이란 마치 동등하게 두 쪽으로 나뉜 것(dichaion)이라고 불려야 하는 것처럼 동등한 두 쪽(dichaia)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관(dikastes)은 둘로 나누는 사람(dichastes)이다. -189쪽

정의와 공정성은 일치하며, 둘 다 훌륭하지만 공정성이 더 우월하다. 다만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공정성은 정의이지만 법적인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법적인 정의의 교정(矯正)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모든 법은 보편적인데, 어떤 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이 옳은지 보편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말할 필요는 있지만 제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영역들에서는 법은 그렇게 하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 자주 일어나는 경우를 취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법이 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오류는 법이나 입법자 탓이 아니라 사태의 본성 탓이기 때문이다. (...) 법의 보편성 때문에 법에 결함이 있는 곳에서 법을 교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공정성의 본성이다. -212~213쪽

자제력 없는 사람은 올바른 법안들을 모두 통과시켜 좋은 법률을 갖고 있지만 그 법률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국가와도 같다. (...) 하지만 사악한 사람은 법률을 이용하되 나쁜 법률을 이용하는 국가와도 같다. -286쪽

우리는 인간이니까 인간의 일들을 생각해야 하며, 필멸의 존재이니까 필멸의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권고를 따라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되도록 불멸의 존재로 만들고 우리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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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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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추천사는 탁월하다. 오래 전 책 대여점에서 소설을 뒤적이다가 표지 뒷면에 인쇄된 글이 너무 좋아서 그게 본문을 발췌한 것인 줄 알고 빌려 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본문이 아닌 김연수 작가가 쓴 추천사였다. 그 책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다.

<완벽한 날들>의 표지 뒷면에 인쇄된 김연수의 추천사 역시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내게 "어떤 시인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짐짓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쉼보르스카나 네루다, 혹은 파울 첼란"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거기까지 듣고도 "그리고요?"라고 또 묻는 사람이 있으면 마지못해 "메리 올리버도 좋아해요..."라고 털어놓았다.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어서. (...) 이제 당신 앞에도 이 이 기쁨이 놓여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마음이 든다. 그냥 안 읽고 지나가기를. 나만 읽기를. 너무나 인간적인 그 마음으로.  -김연수 추천사 중

 

이런 추천사를 읽고 기대를 안 품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한 권만으로 김연수가 품은 애정의 깊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평생의 동반자인 몰리 멀린 쿡(책에서는 M으로 지칭된다)과 함께 숲과 바다가 있는 '프로빈스타운'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였다는 메리 올리버는 자연을 향한 사랑과 경이를 시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읽고 있노라면 이 뿌옇고 복작대는 도시에서의 삶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고,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책의 크기나 색감도 좋다. 아름다운 책.

잘 정비된 개미 언덕을 바지런히 오르내리는 검은 개미들도 하나의 기회다. 뜨거운 모래밭의 말랑말랑한 두꺼비도 하나의 기회다.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한 시간을 보내는 건 기회들의 향연이다. 아침마다 소란과 고요가 결혼하여 빛을 만든다. 태양이 장밋빛 자두처럼 떠오른다. 물에서 떠도는 새들이 돌아본다. 이따금 바람도 돌아보는 듯하다.  -33쪽

인간은 무릇 가정적이고, 견실하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바람의 손아귀에 든 먼지처럼 소용돌아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의 유연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신념이었다.  -81쪽

상실은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있던 게 없어지는 거니까. 먹이고, 산책시키고, 목욕시키고, 안아줄 대상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소중히 여기고, 걱정하고, 동정하고, 위안을 얻을 지각력 있는 생물체가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곁을 떠난 베어는 어디 있을까? 우리는 흰 구름을 유심히 본다. 조만간 저 하늘에서 무심하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베어를 보게 될 것이다. 전능의 신들은 떠도는 먼지로 얼마나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창조했는가! 비단 같은 흑기러기, 시폰 스카프, 편지, 빈 봉투, 미국오리, 낡은 신발, 떠나간, 떠나가버린 조그만 흰 개. 우리 삶의 모든 음악은 그것들 안에 있다. 신들은 행위하고, 우리는 그 행위의 목적은 알지 못하지만 이것만은 안다. 세상은 우리의 깊은 관심과 소중히 여김의 소용돌이와 회오리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124쪽

날이 선, 반짝반짝 빛나는 십 대, 자물쇠 채워진 시간. 단단한 이십 대. 느슨해지는 삼십 대. 초조한 사십 대. 가끔은 희망과 약속의 시간이 있는, 버팀의 오십 대. 지금은, 육십 대.
그리고 난 단순하고 헌신적이고 싶다, 떡갈나무처럼.  -129쪽

나는 날마다 내 풍경 속을 걷는다. 늘 똑같은 들판, 숲, 창백한 해변. 늘 똑같은 푸른빛으로 즐겁게 넘실대는 바닷가에 선다. 늦은 여름 오후,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거대하고 단단한 똬리를 틀고, 파도가 흰 깃털을 달고 해변을 향해 달려와 소리 지르며, 고동치며 마지막 상륙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목격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다음에 올 것이 오고, 다시 겨울이 되고,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은 우주 안에서 그 뿌리, 그 축, 그 해저로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흔들리고 있으니까. 세상은 재밌고, 친근하고, 건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사랑스럽다. 세상은 정신의 극장이다. 하나의 불가사의에 지극히 충실한 다양함이다.  -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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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서관으로 산책 가는 게 쏠쏠한 재미다. 얼마전 아주 깨끗한 상태의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발견하고 빌려보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으로 알차고 재미있는 책이라, 나중엔 결국 사게 되지 않을까 싶다. 20권짜리 전집이라 비싸긴 한데...
고려 개혁을 꿈꾸던 공민왕, 정몽주,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던 정도전이 차례로 스러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파벌싸움은 무섭고, 개혁의 길은 고되다... 속마음을 숨기고 연기를 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신하들의 청원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루어내는 왕들의 전략이 재밌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는 쇼가 동반되는구나. 뭐 쇼 좀 하면 어떻겠는가. 방향만 제대로라면.
정도전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작성된 조선왕조실록을 보완하기 위해 참고하였다는 <정도전을 위한 변명>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도서관에 없다. 다음 기회에...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에 새로 생긴 작은 빵집이 있길래 들어가봤다. 식빵, 치아바타 등 담백한 빵 서너종류만 파는 곳. 소금, 설탕, 버터를 적게 넣는다고 한다. 먹어봤는데 오...!!! 맛있다!!! 겉은 약간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것이 일반적인 식빵보다는 바게트에 가까운 맛.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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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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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네로 이사할 때마다 주변 도서관을 한번씩 찾아가곤 하지만 책을 빌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 책의 깨끗한 종이를 문질문질하는 느낌이 좋고, 반납기한에 쫓기는 느낌은 싫어서.

그런데 얼마 전 이 동네에서 처음 간 도서관에서 절판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을 발견했고, 두께가 얇고 상태도 좋아서 오랜만에 빌려 보았다. <싱글맨>을 반납하러 갈 때는 다른 책을 또 빌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신착도서 코너를 훑어보다가 나폴리 4부작 중 두번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발견. 신착도서이니만큼 반짝반짝 새 책인데다 자리에 앉아 잠시 읽다보니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즈 첫 번째인 <나의 눈부신 친구>가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극적인 장면으로 끝났기에 뒷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던 차였다.


페란테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다층성'이다. 대중적인 요소가 풍성한 이야기 속에 여성 문제, 계급 문제, 물질만능주의, 이탈리아 사회의 남부 문제 등 수많은 사회적 이슈를 함축하고 있다. 동시에 페란테는 시대와 국가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감성을 다루는 데 탁월하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제1권에 이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엉클어지는 릴라와 레누의 우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극의 중심이 되는 감성은 '두려움'이다. 성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랑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두려움, 선택과 결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  -662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유년기가 중심이었던 <나의 눈부신 친구>와 달리 릴라의 결혼을 신호탄처럼 하여 시작된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릴라와 레누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를 보여주면서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 내면과 심각한 삶의 문제들을 다룬다. 1권에 비하면 2권에서의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매우 소원하다. 릴라의 결혼과 레누의 대학 진학으로 인하여 둘 사이의 접점이 많은 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연대감과 묘한 경쟁심, 서로에게 미치는 강한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 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470~471쪽


 릴라의 결혼은 첫날부터 파탄에 이른다. 폭행과 강간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은 남편 스테파노의 비겁한 거래를 용납하지 못한 릴라가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 그 후 이어지는 릴라의 굴곡진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그에 비하면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피사에 있는 대학에 학비 걱정 없이 진학하게 된 레누는 지성인들 사이에서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고향의 온갖 지저분한 관계들에서 멀어진다.


 2권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니 세대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폭력적인 가부장제다. 릴라의 남편 스테파노는 결혼 첫날 릴라의 뺨을 때린 데서 시작하여 결혼생활 동안 많은 폭력을 가한다. 어디 스테파노 뿐인가? 릴라의 영민함, 강함, 격정적인 변덕스러움과 그 모든 것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남자들은 결국 같은 이유로 릴라를 욕하고 그녀를 굴복시키려 한다. 릴라와 레누가 깊이 사랑했던 니노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강하고 똑똑한 릴라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다. 리노는 아내인 피누차를, 미켈레는 여자친구인 질리올라를, 스테파노는 아내인 릴라와 정부인 아다를 때린다. 레누는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당하지는 않지만, 안토니오와 헤어질 때 폭력의 위험을 각오하는 모습을 보인다(오늘날 흔히 보이는 이별폭력을 생각하면 60년대의 이탈리아와 별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보아왔다. 낯선 남자는 우리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지만 부모님과 남자친구나 남편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뺨을 때릴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라왔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알아들을 때까지 다시 가르치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68쪽


 레누의 경우 피사에서 겪는 어려움은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지역적 불리함, 지성도 부도 없는 가정이라는 계층적 불리함, 여성이라는 성적 불리함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릴라와는 다른 양상을 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릴라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결코 굴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스테파노와 결혼한 후 그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만 후회와 체념에 빠지기보다는 그때그때 원하는 바에 충실하게 행동하면서 버텨나간다. 레누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치열하게 공부하여 아예 그 지긋지긋한 나폴리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자 한 비범한 여성들이다.  

 릴라의 적당히 타협하려 하지 않는 성정과 제멋대로의 행동 때문에 레누가 휘둘리는 모양을 보면 릴라가 미워지기도 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다. 또한 릴라가 가난과 가족들의 강압(릴라를 이용하여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것들 - 학업적 성취, 예술적 감각, 뛰어난 미모까지 - 을 생각하면 그녀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으로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되살아나는 그녀의 비범함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일견 바닥까지 떨어진 듯 보이는 릴라와 빛나는 미래를 약속받은 듯 보이는 레누가 3권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봄에 출간된다는 글을 봤는데.. 지금 봄인데? 5월에는 출간되려나. 영문판으로는 4권까지 모두 번역되어 있으나 이 두꺼운 책을 영어로 읽어낼 자신은 없다(슬픔). 어쨌든 마지막까지 함께하련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 리뷰


어느 날 오후 릴라가 니노에게 부자와 빈민 간의 갈등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조용히 말했다.

 "왜?"

 "하류층은 상류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니까.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폭력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어떻게? 모두를 상류층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하류층으로 전락시켜서?"

 "그것도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상류층 사람들이 기꺼이 하류층이 되려고 하겠어? 하류층 사람들이 신분 상승할 기회를 포기하겠느냐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그럴 수도 있지. 너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응. 계급 간 투쟁이란 다른 계층의 사람들끼리 카드놀이나 하면서 노는 게 아니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거고 이들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거야."  -289~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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