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로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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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음악' 집중분석

글쎄...작가 한유주에 대한 평을 읽어보면서 '과연 그래? 그렇단 말야?"라고 생각했다. 뭔가 그들은 느꼈기에 그런 말을 했겠지,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그들은 알고 있겠지.  한유주의 작품을 읽으며 느낀 감흥은 전혀 없다. 공감도 안 되고, 등장인물의 내면을 따라 쭈욱 서술되는 이야기도 공허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일단 기본적인 서사가 없다. 그냥 '내면의 흐름'(맞는지 모르겠다)에 따라 짧은 호흡의 문장들이 이어진다. '상상은 소리를 제거한다. 공백. 환영은 참일까, 거짓일까. 공백. 상상은 나와 그들을 떼어놓는다. 공백. 그들은 나와 완벽하게 분리된다.'(<달로>p.110)식으로. 이런 짧은 호흡의 문장은 뚝뚝 끊어져 어색하고 생기 없다. 물론, 소설에 반드시 서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를 몰입시키지 못하는 어색한 문장들은 저자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환영'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환영'이라는 이름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음 부분을 보자. '나는 환영의 옆얼굴에 흘긋 눈길을 준다. 환영은 눈을 감고 있다. 환 영. 나는 자꾸만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이름을 되뇌어 본다.'(p.99)  저자는 환영幻影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둔 건 아닐까. 환영幻影처럼 등장인물 '환영'은 그 존재자체가 모호하다. 음악당안 보이지 않는 환영의 얼굴처럼(p.101) 환영은 몰개성적이고, 특징 없다.

환영의 어머니는 익사한 것으로 언급되는데, 그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염을 할 때 삼베옷 밑으로 물기가 배어 있는 것을 본 사람은 환영밖에 없고, 몸을 마지막으로 만져본 사람도 환영뿐이었다.(p.107참조) 이 부분 서술을 보면 환영이란 존재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환영이란 존재는 실제 하는가? '나'와 환영의 관계는 뭐지? 혹시 동일인물의 별개의 인격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이야기 마지막이 극적으로 표출된다. '나'가 환영에게 어머니에 대해 묻자, 환영은 몸을 떨며 점점 사라져 간다.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p.120) 그리고 '나'가 환영의 대답을 헤아리며,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느낀다. 이는 이들이 본래 하나의 인격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를 통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저자는 언어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다. 뚝뚝 끊어지는 어색한 문장도, 생뚱맞은 비유도 저런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의도적인 장치일 수도 있다. 저자는 대안으로 '음악'에 희망을 건다. '말'의 근원에 근접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역시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를 알기에 더욱 곤혹스럽다.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 없이,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확신 없이, 그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저자가 말하려는 그 무언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뢰를 보낼 수 없는, 현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시금 읽는다면 과연 뭔가 느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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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순원 지음 / 뿔(웅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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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 보면, 어린시절 읽던 동화나 아동소설이 더 재미있었다. 최영재, 이동렬, 이슬기, 신동일 작가님 것을 많이 읽었다. 기억에 남는 건, 지경사에서 나온 '별난 가족' '요술친구 깨묵이의 별난모험' '엄마도 장난꾸러기였데요' 등등. 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방귀봉씨가 주인공인 소설시리즈도 엄청 재미있었다. 갑자기 이 말을 꺼낸건 <나무>를 읽으며 어린시절을 추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는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두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손자 나무와 할아버지 나무의 대화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성부터, 교훈적인 내용, 부담없는 분량까지. 잔잔하고 따뜻하다. 장편소설이라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각 챕터가 독립적인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며, 할아버지 나무, 손자 나무라는 전체적인 설정에 녹아든다. 단편들이 연작형식으로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

할아버지 나무는 '그 집' 부엌밖에 자리잡고 있는 100살 가까이 된 밤나무다. 손자 나무는 이제 겨우 7살된 밤나무. 손자는 묻는다. "할아버지를 이곳에 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나요?"(p.17) 할아버지는 조용히 손자에게 옛이야기(p.18이하)를 들려 준다.

<나무>는 성장소설이다. 아직 모든 것에 미숙한 손자 나무에게 할아버지 나무는 소중한 가르침을 준다. 추운 겨울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를 시샘하는 손자에게 '세상을 보는 깊고 따뜻한 시선'(p.41)을,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고 싶어 하는 손자에게 '바람과 구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p.83)을...그 외 많은 것을.

손자 나무는 스스로 깨우치기도 한다. 보잘것 없는 냉이꽃에게 온갖 나쁜말을 쏟아내는 손자나무, 하지만 냉이꽃은 냉정하게 손자 나무에게 꽃과 나무들의 다양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꽃과 나무도 모양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단다.'(p.95)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냉이꽃에게 사과하는 손자 나무. 이런 성장은 밤송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드디어 손자 나무가 밤송이를 맺게 된 것(p.157)이다. 하지만 작은 태풍에 밤송이는 떨어져 버리고, 손자 나무는 더 큰 교훈을 얻는다.

'작은 나무는 나무도 이렇게 무엇을 잃어 가면서 배우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자신이 부쩍 자란 것 같았다.'(p.161)

<나무>를 읽으며 가슴이 훈훈해졌다. 자애롭게 삶과 교훈을 들려주는 할아버지 나무를 보며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할머니 생각도 했다. 자극적인 소재에 익숙해져 버린 독서습관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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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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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뚜라미가 온다' 집중분석

원래 한 집 건물에 달구분식과 바람횟집이 얇은 벽을 사이로 자리 잡고 있다. 달구분식엔 달구와 늙은 노모가, 바람횟집엔 스물셋의 남자와 서른일곱쯤인 여자가 살고 있다.  '달구분식' 마흔 가까운 노총각 달구가 거의 매일 늙은 노모를 구타한다. 그런 아들이지만 늙은 노모는 아들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바람횟집' 거의 어머니뻘인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 그것도 폭력적으로.

'달구분식과 바람횟집이 원래 한 집'이라는 설정은 주목할 만하다. 횟집남자와 달구가 별개의 인격이 아닌 본래 하나인 존재의 분열이라고 난 이해했다. 즉, 이들은 하나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등가물이다. 좀 더 나아가 시간적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듯 하다. 나이가 어린 횟집남자를 이전시점, 달구가 횟집남자의 미래모습이다. 여기에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접목해보자. 횟집남자가 여자를 '엄마'라 부르며 모성을 추구하는 것은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다. 여기에 억압자인 아버지가 죽고(달구에 의한 살해) 그 이후 달구가 등장한다.

문제는 '달구가 왜 원시적 욕망인 어머니를 학대하는가'이다. 달구의 행동을 타나토스의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주변에 어머니밖에 없는 현실에서 타나토스가 이상하게 발현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나친 논리의 비약인지는 몰라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골적인 성묘사와 폭력, 사투리이다. 이는 과연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등장인물 내면의 욕망과 본성을 제대로 표출해 내준다고 본다.

그럼 귀뚜라미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귀뚜라미는 폭풍이고 그 폭풍은 결국 달구분식과 바람횟집을 쓸어가 버린다. 귀뚜라미의 상징성은 무었인가? 뀌뚜라미에게 희생된 것은 여성들 뿐이지만, 여성들은 은빛전어를 따라 갔다는 서술로 미뤄보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듯 하다. 라캉의 환타지 공식을 고려한다면(과연 타당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원시적 욕망인 어머니 내지 어머니의 등가물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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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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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탁환의 작품은 <열하광인>이 처음이다. 유명세에 비하면 너무 늦게 접한 셈이다. 사실 '한국형 팩션의 신기원'따위의 수식어가 부담스러웠다. 역사와 결합된 팩션을 좋아하지만 '잠깐 스쳐지나가는 유명에 지나지 않나'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열하광인>을 읽은 지금, 작가 김탁환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된다. 그는 자기만의 영역을 확실히 구축한 듯 하다.

<열하광인>은 백탑파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이다. 백탑파란, 영정조시대 활동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등 북학을 중시하던 실학자들을 말한다. 여러 작품에서 재조명 받고 있는 그들이라 꽤 친숙하다.

화자는 의금부 도사이자 표창의 명부인 '이명방'. 그는 백탑파 일원이자 왕실종친으로 정조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갑작스런 정조의 부름에 입궐한 그는 백탑파 서생들의 움직임을 보고하라는 칙명을 받고 갈등한다. 그럼 왜 정조는 이런 명을 내린 것일까? 정조의 부름을 받아 사회문화적으로 큰 역할을 했던 백탑파 서생들이지만 정조는 이들과 점점 거리를 둔다. 특히 '열하'나 '매설'같은 글에 대한 입장차는 뭐낙 깊어 결국 이들에게 '자송문'까지 쓰게 한다.

그러던 중, '열하'를 몰래 읽는 모임의 일원인 열하광인들이 자객들의 공격을 받게 되고, 조명수, 덕천스님등이 죽음을 당한다. 사건은 이상하게 전개되어 이명방이 누명을 쓰고 의심받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명방은 과연 누명을 벗을 수 있을런지?

<열하광인>은 흥미로운 역사추리소설이다. 왜 김탁환 작가에 열광하는지 그 열광의 의미를 이해했다. 특히 열하광인들을 둘러싼 미스테리한 죽음, 이명방에게 쏟아지는 의혹과 누명등은 인상적이었다. 도대체 열하광인을 노리는 배후세력은 누구란 말인가?

이명방과 은주의 사랑은 또다른 흥미였다. 열하광인중 은주 같은 여성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 '마방진'에 몰두하는 모습등등, 분명 저자의 창작이 분명한 은주는 이야기의 생동감을 넣어주었다. 또한 이야기 전체에 걸쳐, 처음 듣는 옛스런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는데, 몰랐던 단어들도 알게 되고 좋았다.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열하광인>, 한국형 팩션의 힘을 보여주었다. 스토리의 탄탄함과 흥미진진함, 묻어나는 역사적 진실,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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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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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 집중분석

할머니와 장성한 손자 대창, 그리고 미연. 이 세 인물이 등장한다. 할머니는 손자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엑센 인물이다. '늙은 마녀'(p.38), '골을 숟가락으로 잘라낸다'(p.39) 같은 표현처럼 그녀의 이미지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결혼하고 싶다는 손자의 말(p.40)에 아무 대꾸없이 '송치(소 뱃속에 있는 송아지)'를 먹고 싶다(p.41)는 할머니.

오늘날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들의 관계는 조금 이상하다. 왜 할머니는 압도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일까? 경제력 때문일까? 아무리 어릴적 부터 키워준 할머니라지만 결혼하겠다는 손자에게 저런 반응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떤 이유로 할머니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중요한 건 아니다. [숨]의 핵심은, 할머니 / 주인공 / 미연 사이 이미지 대립구도이다. 할머니는 원초적인 남성성에 가까운 강렬함을 소유하고 있다. 이에 반해 미연은 여성적이고 다소곳하다. 이는 제사준비를 위해 집을 찾아온 미연과 할머니가 함께 제사상을 준비하는 모습(p.51)에서 극적으로 대조된다. 중간적 위치에 있는 대창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 불안한 하기만 하고.

주인공이 하는 일을 소머리를 갈라 다듬는 일이다. 소머리를 다듬는 청년, 소골과 허파를 먹는 할머니, 내장을 취급하는 국밥집 주인등 인상적이다. 특히 소머리를 가르는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된 부분(p.47,48 이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오랜 취재끝에 썼낸 생생한 묘사.

제목 '숨'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다음의 서술이 있다. "사람이 평생 몇 번이나 숨을 쉬는지 알아요?" (중략) "오억 번 정도 쉰대요" (중략) "근데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그렇대요. 작은 동물이나 큰 동물이나, 육식동물이나 초식동물이나...(후략)"(p.57) 이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할머니와 미연을 통해 대립되는 남성성, 여성성을 초월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연이든, 할머니든, 똑같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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