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장난
전아리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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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장난>은 올해 읽은, 아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읽은 소설집중 최고다. 수록된 10편의 단편 모두 흥미롭고 문학적 향취까지 뿜어낸다. 놀라운 일이다. 86년생 어린작가의, 그것도 첫 소설집이 이렇게 완벽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하나 놀라운 것은 작가가 선보이는 작품세계가 깊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남편과 헤어지고 힘겨운 삶을 사는 중년여성(메리 크리스마스), 트랜스젠더를 등장인물로 다큐멘터리 제작하는 대학생(내 이름 말이야), 서커스단을 전전하는 난장이(외발 자전거), 괴팍한 스님 밑에서 행자승노릇하는 젊은이(깊고 달콤한 졸음을)등등. 다양한 소재, 등장인물을 맛깔지게 그러낸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쓸 수 있을까? 이런 심리묘사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감탄할 따름이다.

[메리 크리스마스](p.29이하) 떠나버린 남편, 주인공은 전셋방에서 딸(유리)과 단둘이 살아간다. 남겨진 두모녀의 끈끈한 사랑, 깊은 애정을 떠올렸는가? 아니다. 주인공에게 딸은 화풀이 대상일 뿐이다. "내가 눈치 보면서 밥 먹지 말랬지? 왜 병신처럼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어? (중략) 엄마 말이 말 같지 않아? 꼭 맞아야 사람 말을 들어?"(p.33) 딸아이의 피를 보고서야 진정하는 주인공…. 아파트 단지를 돌며 책을 팔고, 보험영업을 하는 주인공에게 삶은 전쟁이었다. 보험을 대가로 노골적인 요구하는 사람들, 아파트 관리인의 성화, 집주인 여자의 독촉, 딸아이를 향한 무한한 사랑은 애당초 무리한 요구인지 모른다.

여고동창 '명희'가 등장한다.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 남편은 둔 명희는 화려하고 안정된, 주인공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부러움 섞인 주인공의 생각, '명희의 삶에는 갓 지은 쌀밥의 따뜻한 온기와 반드르르한 윤기가 돈다'(p.32) 이어 주인공은 보험때문에 명희남편을 찾아가고 어색한 이야기를 나눈다. 부러워 했던, 그렇게 화려해 보였던 명희의 삶 이면의 씁쓸함, 그렇다. 뭐든 소유하지 못한 것이 크고 대단해 보일 뿐이다. 막상 가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선물을 내미는 유리의 모습(p.55)에서 두 모녀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참 마음이 찡해지는 마무리다.

한가지 주목한게 있다. 바로 '까마귀'의 상징성이다. 딸아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다음에 등장하는 까마귀(p.38), 잔잔한 결말이전에 등장하는 목 졸려 죽은 까마귀(p.54)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의 장편 <시계탑>에서도 주인공 연이들 둘러싼 까마귀 상징이 등장한다. 과연 전아리 작가에게 까마귀는 어떤 의미일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깊고 달콤한 졸음을](p.151이하) 남의 집 일하며 힘들게 번 돈을 사기당한 어머니, 집을 나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동생 경선, 도선이 열아홉 나이로 절에 들어 온 것은 저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스님이 되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혹독하다 못해 괴팍하기까지 한 큰스님의 타박은 도선을 힘들게 한다. 저것도 수련인걸까?

절에 먹을거리를 들고 오거나, 빨래를 해주는 긍골노파는 이야기에 활력소 역할을 한다. 긍골노파가 꺼낸 앨범속 사진(p.170)은 큰스님과 긍골노파의 뭔가 말할 수 없는 관계를 나타낸다. 노파의 모습에서 어머니를 느끼는 도선. 한편, 큰스님에게 단주를 훔쳤다는 오해를 받게 된 도선은 절을 떠나기로 하는데. 과연 도선은 어떤 깨달음을 얻을까?

단 두편의 단편을 소개하지만, 저 단편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누누이 말했지만, 모든 작품의 완성도가 탄탄하고 훌륭하다. 책 가격이 아깝지 않다. 음…'즐거운 장난'이란 제목을 한번 생각해 보자. '즐거운 장난'은 수록 단편의 제목중 하나가 아니다. 저자에게 글쓰기가 하나의 '장난', 그것도 '즐거운' 장난이란 의미일까? <즐거운 장난>, 절대 후회하지 않을 멋진 소설집이다. 문학천재 전아리 작가의 매력을 직접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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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2008-06-1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작가의 나이를 감안하면 책의 주제가 굉장한 설정이네요. 쥬베이님이 최고의 소설집이라 할만하네요...

쥬베이 2008-06-16 18:15   좋아요 0 | URL
<즐거운 장난> 강력 추천입니다!!^^
칼리님께서도 분명 좋아하실거에요. 어린 작가인데 어쩜 이리 잘쓰는지...
정말 놀랐어요
 
시계탑
전아리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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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문단을 위해 많은 시간 고민했다. 쓰고, 지우고,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현하고 싶던 것은 '전아리란 이름을 처음 어떻게 알게 됐고, 읽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전아리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였다. 결국 다 지워 버렸다. 애당초 불가능하고 쓸데없는 짓이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대단한지는 남의 말보다 직접 읽고 판단하는게 나으니까.

<시계탑>은 성장소설이다. 당찬 소녀 '최연'이 11세부터 19세까지 보고, 느끼고, 겪게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무척 재미있다. 잘 읽히는데다 순식간에 이야기속으로 녹아든다. 근래 읽은 국내소설중 이런 작품은 없었다.

저자는 생생한 등장인물 형상화에 성공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해, '차별화 된 생동감'을 창조한다. 밝고 당차지만 도벽이 있는 연이, 어리숙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가끔 개짓는 흉내를 내는 정육집 아들 병욱, 너무 일찍 이성에 눈을 떠버런 3층소녀 소영, 화장 1cm 미장원언니 희정등등, 공감할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근한 캐릭터들이다.

연이가 처한 상황(아버지의 폭력, 어머니의 가출, 가난)은 암울하고 답답하지만, 이야기는 밝고 생기넘친다. 연이부터 좌절하고 슬퍼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같은 반 반장네 생일파티에 가서 고급시계를 훔치고(p.15), 훔친 물건을 능청스럽게 팔아치운다. 심지어 희정언니가 신었던 스타킹을 비싼 값에 팔기도(p.26) 한다. 또한 기발하고 톡톡튀는 표현이 이어지는 것도 밝은 분위기를 가능케한 원동력이다. 몇 부분을 보자. '오지랖 넓게 굴지 말고, 집 안에 큼직한 바늘이 있다면 학생 입부터 꿰매고 오세요."(p.60)라던가, '볼펜 잉크 속에는 똥파리라도 한 마리 헤엄치고 있는지, 쓸 때마다 잉크 똥이 쉴새없이 나왔다.'(p.78) '미지근한 녹차는 녹차 이파리가 잠깐 반신욕을 하다가 나간 물처럼 싱겁다.'(p.129)등등.

<시계탑>처럼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에 뭐가 아쉬운게 있으랴만, 두가지 점이 약간 아쉬웠다. 99점인 작품의 부족한 1점이라고나 할까? 배부른 투정쯤으로 봐주시길. 초반 배가 아파 병원에 간 연이에게 의사는 까마귀가 살고 있다(p.17)고 한다. 이는 단순한 농담차원을 넘어 어떤 상징성을 가진다. (표지 그림도 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중반 이후 연이가 품은 까마귀와 그 상징성은 더 이상 부각되지 않는다. 까마귀의 상징성을 좀 더 구체화했으면 어땠을까? 또한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간 연이의 어머니. 그녀 역시 중반 이후 전혀 등장하지 않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소식을 알린다. 어머니와 연이의 관계등 좀 더 심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시계탑>, 오랜만에 보는 멋진 국내소설이다. 연이, 병욱, 소영이 펼쳐가는 우정과 감동의 스토리는 정말 아름답다. 거기다 재미까지. 86년생 어린 작가의 작품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이렇게 완벽한데. 전아리 작가는 한국문학을 이끌 보석같은 존재다. <시계탑>을 읽는다면 왜 그녀가 문학천재로 불리는지, 왜 청소년문학상을 석권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꼭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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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2008-06-1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지 않을수 없게 만드는 리뷰예요... 저도 꼭 천재의 매력을 경험해보고 싶군요.

쥬베이 2008-06-16 18:16   좋아요 0 | URL
전아리 작가 정말 최고에요^^ 분량도 적절하고 아주 재미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조선 1 - 금속활자의 길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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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조선>을 읽으며 확신했다. 역사소설에 있어 오세영 작가님을 따라갈 작가는 없다는 것, 근래 주목받는 역사팩션의 개척자는 오세영 작가님이란 것. 오세영 작가님 하면 슈퍼 베스트셀러 <베니스의 개성상인>아닌가? 이미 우리는 뛰어난 역사팩션을 접해왔던 것이다. 그간 잊고 있었다.

쿠자누스 신부의 소개장을 들고 마인츠의 구텐베르크를 찾는 석주원과 이레네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장영실의 수제자인 야금장 석주원과 사마르칸트 출신 미모의 여인 이레네. 이들은 어떻게 동행하게 된걸까? 석주원은 왜 머나먼 이역 땅에 와 있는걸까? 미모의 여인 이레네의 비밀은? 이처럼 저자는 동서양의 극적인 만남을 초반부에 배치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시선을 집중시킨다. 저자의 노련한 구성력이 시작부터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후는 석주원이 회상하는 형식(…하는 생각이 들자 석주원의 기억은 멀리 떨어진 조선의 경복궁 주자소로 날아갔다. p.28)으로 파란만장했던 여정이 펼쳐진다. 석주원의 스승, 장영실은 어가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불경혐의를 뒤집어 쓰고 행적이 묘연한 상태다. 주자소는 중심을 잃고 표류하고 석주원은 어린 나이에 주자소 야장이 된다. 한편, 훈민정은 반포에 반대하는 최만리등 유학자들은 주자소를 장악하려는 음모(p.44)를 꾸미는데…

<구텐베르크의 조선>이 흥미진진한 이유중 하나는 속도감 있는 이야기전개이다. 미스터리했던 장영실의 행방(p.53), 석주원이 명나라로 가게 되는 과정(p.57), 명나라의 권력투쟁에 휘말린 두 사람(p.107이하), 티무르 제국으로 향하는 석주원(p.122), 로마 교황청으로 향하는 석주원(p.166)등등 굵직굵직한 중심사건이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그러다보니 한순간도 시선을 팔 수 없었고 완벽하게 이야기속으로 몰입했다. 이런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은 자칫 잘못하면 늘어질 수 있는데, 저자는 능수능란한 전개로 이야기의 중심을 꽉 잡고 있다. 역시 역사소설의 대가답다.

다른 하나는 생생한 등장인물 형상화이다. 저자는 장영실, 성삼문, 최만리, 구텐베르크등 실존인물을 개성 넘치는 인물로 재창조한다. 특히 성실하고 장인정신 넘치는 장영실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어가를 부서뜨렸다는 혐의로 벌을 받은 역사적 사실을 세종과 그의 자작극(?)으로 재해석한 부분, 나아가 그가 세종의 특명을 받고 훈민정음의 위한 활자제조를 위해 중국으로 밀입국하는 설정등은 대단히 놀랍다. 구텐베르크를 열정적이지만, 다소 거친 인물로 묘사한 것도 인상적이다. 또한, 핵심인물인 석주원, 이레네 같은 가상인물을 적절하게 창조해 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여정을 함께하는 석주원과 이레네의 은근한 애정모드(^^)와 결국 이뤄지는 사랑, 장영실의 제자로 세종의 밀명을 받는 석주원의 열정등, 정말 대단하다.

저자는 꼼꼼하게 관련 사료를 분석하고 정리한 것 같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과정, 특히 해탄 관련 내용, 구텐베르크와 얽힌 세계사적 내용등은 역사소설의 대가 오세영 작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조선>은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뒤를 잊는 또하나의 신화다. 금속활자를 중심으로 조선과 유럽을 넘나드는 장대한 스케일, 한순간도 눈을 돌릴 수 없는 흥미진진함, 정말 멋진 작품이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대작을 꾸준하게 선보여 주시는 오세영 작가님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한다. 고구려나 발해 같은 민족자존심이 걸린 소재도 많이 다뤄 주시길. <구텐베르크의 조선>,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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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1 - 일타 큰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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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연>의 장르정체성 문제를 살펴보자. <인연>은 '일타 큰스님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일타 큰스님의 삶을 돌아보고 기리는 '전기적 성격'이다. '일타 큰스님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했다'라고 말하는게 타당할 듯 하다. 주목할 것은 소설을 위해 일타 큰스님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일타 큰스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형식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즉, <인연>은 장편소설이라 불리지만, 일반적 의미의 장편소설은 아니다. 또한 실존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했기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저것이 문제일까? 그렇지는 않다. 정작 중요한 건, 전기적 요소와 소설적 허구를 어떻게 버무려 조화시키느냐 이다. 저자는 일련의 서술적 장치와 놀라운 구성력으로 이를 해결한다. <인연>의 구성은 이렇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일타 큰스님의 자취를 더듬는 현재의 '고명인'이야기(A), 일타스님의 출가부터 해탈까지의 전기적 이야기(B)가 교차 서술된다. 양자는 무리없이 어우러 진다. 특히 고명인과 다른 스님들(주로 일타스님의 제자)의 추억속에서 그려지는 일타스님의 모습은, (A)에서 (B)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같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고명인은 20년전 보았던 일타스님의 법문을 떠올린다. 고명인의 회상속에서 일타스님은 생생하게 법문을 하고 있다. 또한 혜각스님이 고명인에게 들려주는 설명(p.49이하)속에도 일타스님은 미소짓고 있다. 이처럼 고명인과 혜각은 자연스레 일타스님의 흔적을 되살리고,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일타 큰스님의 전기적 요소를 녹여 넣는다. 이는 전기적 요소가 혹여 야기할 수도 있는 거부감을 제거한다. 객관적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 고명인이란 인물을 내세운 것도 좋다.

한가지 의문은, '고명인이 일타 큰스님의 흔적을 더듬는 동기가 약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오래전 일타 큰스님을 본 적 있다? 그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설 속에선 자세한 설명이 없다. 이는 구성의 전제가 되기에 꽤 중요한 문제다. 저자도 이 점을 고심한 듯 하다. 관련된 부분을 보자.

"이상하고 분명한 사실은 미국에서 벌려놓은 사업들이 까마득히 멀어져버렸고, 특별한 이유없이 고승 일타의 흔적을 쫓고 있다는 점이었다."(p.219참조) " '일타 스님은 어떤 분인가.' 고명인에게 동기가 있다면 이 정도일 뿐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결정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 우습기조차 하였다. (중략) 그런데도 고승 일타는 자력이 강한 자석처럼 밑도 끝도 없이 고명인의 마음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무형의 무언가를 자신에게 안겨줄 것만 같았다. 고명인은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어느새 고명인은 일타 스님이 누구인지, 스님이 이 세상을 살다 간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다."(p.220)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저 정도에 만족하자.

일타스님과 혜각, 혜인, 혜국스님의 이야기속에 성철 큰스님 이야기가 드문드문 등장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이다. (처음 말한 것처럼 이것이 실화인지, 픽션인지 알 수 없다.) 일타스님의 세속 누나인 응민스님이 봉암사에 머물고자 일종의 시위(?)를 한다. 그러자 성철 큰스님은 응민과 대면하고 이렇게 말한다. "봉안사에서 살고 싶다꼬." "좋데이. 그라믄 내 시키는 대로 할 낀가, 말 낀가." "지금 당장인기라. 니 손가락을 끊어 보그래이."(p.214) 과연 대단한 스님이다. 손가락을 끊으라는 큰스님이나, 정말 끊는 응민스님이나 대단하다.

또한 세속의 정을 끊지 못하고 방황하는 혜국스님에게 호통치는 성철 큰스님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성문제로 방황하다 절을 떠난 혜국스님이 돌아오자, "야, 이 샹놈의 새끼야. 너 가스나 생겼지." "니 동자때 준 세뱃돈이 아깝다. 좋은 중 되라고 했더니만 도망친 놈 아이가."(2권.p.24) 이처럼 엄격했던 성철 큰스님. 혜국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깨우침 덕인지 손가락을 연비하고 큰스님이 된다.

일타 큰스님의 삶을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무교지만 불교에 상당한 호의를 갖게 되었다. (만약 종교를 갖게 된다면 불교에 마음을 줄 것 같다.) 일타스님의 행적을 더듬는 고명인의 여정도 인상적이었으며, 실제 여정을 함께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저자가 일타 큰스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도했던 일련의 소설적 장치는 성공했다. <인연>, 일타 큰스님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책이다. 소설적 완성도도 뛰어나기에 종교적 색채에 부담갖지 않고 읽어도 좋다. 책으로나마 일타 큰스님을 만나 보시길.

 

* 일타 큰스님의 어린시절, 출가과정, 가족관계등 모든 것을 정리해 언급하려고, 노트에 일일 체크해가며 읽었다. 하지만, 서평을 쓰면서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소설'인 작품속 내용을 '이건 일타 큰스님의 출가과정이야, 가족관계야'하며 정리한다는게 주제 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큰스님의 삶은 1권 앞부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원하시면 그걸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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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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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선배와 술자리를 하면서, 선배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은 듯한 느낌이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애잔해 선배의 속마음을 헤아리며 몰래 눈시울을 적신 후배의 심정'이라면 너무 오바일까? 화자가 김수영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p.145, p.158)을 읽으며 저런 느낌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구나 '안도'했다. 이런 약간의 부담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가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허구고 사실인지 경계가 모호한, 말그대로 저자의 젊음과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는 소설이다. 또한 저자(저자인지, 소설속 화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동일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가 말미에 언급하고 있거니와, 첫사랑 그녀 박은영과 그의 아들 김수영에게 바치는 소설이다. 저자가 삶을 돌아보며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간 것에, 제3자의 느낌은 건방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배경은 아직 박정희가 살아있던 70년대, 화자와 '그녀' 박은영의 운명적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난생 처음 본 '플레이보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화자는 대학 음악감상실에서 잠을 자고, 잠자던 박은영의 기타를 건드리는 실수를 한다. 이를 계기로 말을 나누는 두사람, 은영에 빠져버린 화자, 정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다. 화자는 말한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기절할 것만 같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그 즉시 그녀가 내 인생 최초의 진정한 포르노-플라토닉 러브의 상대가 될 것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했다."(p.19) 첫 눈에 반한 남자의 설램이 강하게 느껴진다.

'은영'은 적극적이고 활발한 여성이다. 화자가 '옹달샘'으로 데려가 사과의 뜻으로 커피를 사지만, 그녀는 "어휴, 구정물 같아."(p.23)라고 한마디하고(ㅋㅋㅋ), 음악감상실에서 자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박하기도 한다. 70년대 여자가 아니라, 요즘 여자같다^^ 은영의 꿈은 가수다. 그것도 십만명의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화자는 눈치없이 '망상 같다'(p.36)는 실언을 하고 사타구니까지 차인다. 대단히 화가 난 은영, 이 여자 성격도 화끈하다. 이어지는 둘의 관계는 뭔가 중요한게 빠진 듯 진전이 없다. 화자는 그녀를 정말 좋아하지만, 은영은 시종일관 비밀을 간직한 채 미스터리할 뿐이다. 들여다 보면 그녀도 그를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결정적인 순간에선 숨어버린다. 도대체 은영의 비밀은 뭘까? (그녀의 모든 비밀은 시간이 흐르고, 김수영이 등장(p.120이하)하고 나서야 밝혀진다.)

화자가 여행사 가이드를 하던 경험은 소설의 또다른 축이다. 화자는 단테를 안내해 준 베르길리우스 같은 가이드를 꿈꾸던 사명감 넘치는 가이드다. 그의 기억에 남은 두명의 외국인-독일인 '한스 뭘러', 전진 히피 '조 후버'-이야기는 또다른 흥미를 안겨줬다. 독감때문에 방에서 잠만 자다 떠난 한스 뭘러, 자유분방한 독설가이자 괘변가인 조 후버, 그들은 화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저자는 과연 베르길리우스 같은 여행 가이드란 작은 희망을 이뤘을까? 저자는 말한다. "나는 결국 단테의 베르길리우스 같은 여행 가이드가 된 것 같다. (중략) 소설가를 인생이라는 여행길의 가이드로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말이다."(p.70) 잠깐 등장하는 여행사 여직원과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화자를 좋아한다고 공개선언한 귀여운 여자, 하지만 그의 마음엔 은영뿐이다. 나중 여행사 여직원을 바람맞치는 장면, 눈물을 흘리던 귀여운 여자,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정말 사랑은 마음대로 안되는 듯.

그렇게 화자는 은영과 사랑이라 할 수 없는 사랑의 숨바꼭질을 하며, 베르길리우스 같은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자기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귀여운 여자를 바람맞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소설가가 된 화자를 찾는 김수영, 그의 정체는? 점점 드러난 것들. 그리고 인생. 진부한 70년대 로맨스로 취급할 수 없는 애잔함이 가슴에 밀려온다. 뭘까? 내가 느낀 지금 이 감정은 뭘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70년대를 이야기하는 이 책에서 난 뭘 느낀 것일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애잔하고 향내 가득한 책이다. 70,80년대를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이라도 '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마법의 책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사랑과 젊음, 인생은 시대를 초월하기에. 오랜만에 추천할 만한 국내소설을 읽었다.

 

* 구성이 독특하다. 도입부와 말미에 책 속 '화자'와 '저자'를 동일인물로 보게 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마치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내지 편하게 들려주는 이야기같은 느낌.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와 이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라는 배경부터, 소설 속 남녀관계까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사랑하지만, 결국 숨어버린 은영. 화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약간 지엽적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을 보자. '그녀는 아무 앉아 있다가 막 떠나려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몸짓을 해보였다. (중략) 그 모습을 보니 스무 살 그해 여름,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캠퍼스와 학교 앞 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때처럼 갑자기 강렬한 상실감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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