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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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참 불공평 하다. 선(善)이 인정받고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악(惡)이 반드시 징벌 받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에 의해 그냥 흘러갈 뿐이다. 그런 것이 삶이라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정말 삶은 '원래 그런 것'일까? 지금의 내 삶도, 400여년전 낮선 이국땅에 표류해 온 그들의 삶도, 원래 그런 것인가? 조금 씁쓸하다.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책 임에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품들. 이런 작품들을 보면, 안타깝다. 훌륭한 책이 반드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것도 인생이고 삶인가?

'천년의 왕국'은 400여년전 동방 미지의 나라에 표류해 온 네델란드인의 이야기이다. 벨테브레, 에보켄, 데니슨. 그들의 불안한 심리와 그들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소설의 축으로, 효과적으로 서술된다.

'벨테브레', 그는 우리가 역사시간에 '박연'으로 배웠던 인물이다. 여기서 우린, 조선의 표류해 왔던 또 다른 네델란드인 '하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가사키로 가려다 폭풍우에 좌초된 하멜일행. 그들을 억류한 조선조정은 26년 먼저 표류해 와 정착한 '벨테브레'를 보내 그들을 조사하게 한다.(p.15-20) 이처럼, 26년이란 시차를 두고 조선을 표류한 두 이방인의 만남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김경욱은 이미 이와 유사한 단편을 선보인 적이 있다.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 마지막에 실려 있는 '나가사키여 안녕'. 인상깊게 읽었었다. 양자는 단편과 장편이라는 차이외에 한가지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나가사키여 안녕'은 하멜이, '천년의 왕국'은 벨테브레가 화자라는 점이다. 이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한 일부 에피소드가 양자 모두에 공유되는데, 이는 '나가사키여 안녕'을 바탕으로 이 소설이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소설로 돌아가자.

'벨테브레'는 하멜일행을 보며, 이국땅에서 보낸 26년간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즉, 이후 전개는 지금의 '벨테브레'가 회상하는 과거의 이야기. 조선에 억류된 '벨테브레' '에보켄' '데니슨'. 이들은 국왕의 근위병으로, 화포제작자로, 때로는 죄인으로 새로운 삶을 강요받는다. 낮선 이국에서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이들의 내면심리와 그 변화, 새로운 삶에 대한 이들의 입장차에 주목했다.

'벨테브레' 그는 다른 두명을 어우르는, '수용과 거부' 양극단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하게 품고 있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화포제작에 몰두함으로써 극복하려 한다. '에보켄' 굉장히 적극적인 인물이다. 삼국지의 장비같은 화통한 성격으로, 변화된 삶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척하려 한다. 이교도(이들이 조선사람들을 칭하던 말)들과 잘 어울리며, 무녀 '자줏빛 구름'과 동거하기도 한다. 기독교적 가치관에 회의적이다. '데니슨' 그는 도저히 강요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신이 불안정하고,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채 20살이 되지 않는 나이에 강요된 변화가 너무나 힘들었던 데니슨.

이런 이방인들과 조선인을 연결 해주었던 인물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젊은 관리'이다. 그는 이방인들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배워간다. 나중엔 그와 에보켄이 서로의 언어에 능숙해 질 정도가 된다. '젊은 관리'는 그들을 항상 걱정해 주고, 관심을 가져준다. 그들의 국경,피부색을 초월한 우정 역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야기 전개와는 큰 관련없지만 '젊은 관리'가 연루된 살인사건을, '에보켄'이 놀라운 과학지식을 동원해 그의 무죄를 증명해 보인 부분은 또 다른 차원에서 흥미를 주었다.

이방인들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들 눈에 비친 우리는, 정이 많고, 순박하다. 한 장면을 살펴보자. 억류되어 있다 도성으로 압송되는 장면에서, '성을 나설 때 몇몇 병사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에게 매질을 했던 병사도 있었다. 작별에 대한 아쉬움은 진심으로 보였다. 나는 이교도들의 불가해한 다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p.69) 이방인들은 정 많은 우리의 모습에 당황하고, 당혹스러워까지 한다. '역사속 '벨테브레'가 박연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우리의 저런 정 때문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끝부분으로 갈수록, 김훈의 남한산성과 비교 되었다. '남한산성'을 읽고 실망을 했던지라, '천년의 왕국'은 그런의미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작가 김경욱. 400여년 전 우리에게 표류해 온 이방인들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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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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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 가든>을 읽었다. 특이했다. 한국 문단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괴기스러운 작품들…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 그렇게 작가 편혜영은 내 기억속에 자리 잡았다. <사육장 쪽으로> 출간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작가의 강렬함은 어떻게 변했을까?'하는 궁금증과 더불어.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인상 깊었던 작품 몇몇을 살펴보자.

[소풍] 여행을 떠나는 두 남녀. 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여행은 아니다. 왠지 불편하고, 답답함이 가득하다. 이들은 여행내내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런 불편한 감정은 이상한 쪽에서 폭발하는데, 그건 '뭔가'를 차로 친 것이다. 저것은 무엇인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는 불편함이 '소풍'이 내포하는 즐거움과 대조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수록되어 있는 단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육장 쪽으로] 강제집행을 걱정하며 하루하루 불안 속에서 사는 가족들. 이들은 파산했다. '새빨간 강제집행 경고장', 사육장에서 끈질기게 들려오는 '개 짓는 소리'는 가족의 불안을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던 중, 아이가 개한테 물리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마지막, 개에게 물린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도중 맞닥뜨리는 트럭은, 가족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불행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너무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일까? <사육장 쪽으로>는 조금 실망이다. <아오이 가든>에서 선보인 강렬함이 어떤 의미로든지 변화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이 아니다. 뭔가 타협의 냄새가 난다. 기괴한 소설은 이단시 될 수 밖에 없는 현실과의 타협. 강렬함이 두걸음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약해지긴 했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공포스러움이 끈질기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작가에게 지나친 것을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난 여전히 편혜영 작가의 소설이 좋다. 앞으로 작가가 그려낼 소설이 벌써부터 궁금해 진다. <아오이 가든>을 다시 읽을 것이며, <사육장 쪽으로> 역시 다시 읽을 것이다. 작가가 숨겨둔,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발견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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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1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혜영 작가의 작품은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알라딘 곳곳에서 좋은 평이 보여서 관심이 갑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쥬베이 2007-08-15 22:04   좋아요 0 | URL
먼저 '아오이가든'부터 읽어보세요~ 굉장히 독특한 소설이라 마음에 드실겁니다~ ^^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2 - 두 번째 방문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0
이종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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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 쇼코, 사타케 노부히로...이젠 일본이름의 주인공이 낮설지 않다. 아니 아주 친숙하다. 폭풍처럼 밀려든 일본소설의 열풍. 특히 미스테리,공포쪽은 더욱 강하다. 상대적으로 너무나 취약한 우리나라의 미스테리,공포소설. 이는 근본적으로 이 분야를 2류취급하고, 이단시하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솔직히 나 역시 그랬다. 정체모를 편견. 읽기도 전에 손사래치던...뒤늦게나마 이 작품을 접하게 되어 기쁘다. 편향된 관심을 바로잡는 방향추가 되어준 작품이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두번째 방문>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품마다 약간 편차가 있었다. 기억에 남는 건 '벽' '드림머신' '레드 크리스마스', 이 세 작품. 

[벽] 인상적인 것은, '층간소음'이라는 일상 문제를 공포문학으로 형상화해 냈다는 점이다. 읽다가, 저자가 묘사해내는 층간소음의 공포가 어찌나 절절하게 다가오던지 나도 모르게 우리집 천장을 쳐다보았다. '층간소음'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동윤과 인하. 남편의 승진, 새집마련, 자기 소설의 영화화, 그리고 임신까지, 행복은 절정에 달하지만, 이는 동시에 불행의 전조곡이었다. '쿵쿵쿵' 울려대는 천장. '쿵쿵쿵' '쿵쿵쿵'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천장을 울려대는 기세가 어찌나 우악살 스러운지 금방이라도 발바닥이 천장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p.19) 또한, 동윤과 인하의 물건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불행과 공포는 서서히 다가온다.

[드림머신] 탁월한 묘사에 감탄했다. 특히 초반부 유진의 꿈 묘사(p.143-145)는 압권이다. 일단 내용을 보자. 귀여운 아미. 자상한 유진. 둘은 이상적인 커플이다. 그들은 특별한 데이트를 꿈꾸며, 두 사람이 함께 잠들면 먼저 잠드는 쪽의 꿈을 함께 꿀 수 있다는 '드림머신'을 체험하기로 한다.

드림머신이란 설정은 꽤 익숙하다. 어찌보면 다소 진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날카로운 묘사로 이를 돌파한다. 아미는 상당히 귀여운 이미지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요즘여자'를 정확히 재현했다. 또한 드림머신을 운용하는 '홍'의 악마적 이미지도 인상적이었다.

[레드 크리스마스] 강렬했고, 통쾌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으로 꼽겠다. '레드 크리스마스'엔 악마, 유령같은 비현실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공포소설이라기 보다, '사회적 잔학극,복수극'(이런 용어가 적절한지는 몰라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는지 몰라도.

폐지를 수거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인. 그런 그 앞에 괴롭힘 당하는 늙은 개가 있다. 왕자처럼 자란 우리의 꿈나무들에게 늙은 개는 또다른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개 주둥이에 철사를 걸어 개를 고문했다.(p.219참조) 노인은 개를 구해, 같이 지내고 이내 깊은 애정을 공유한다. 늙은 개와 노인의 우정, 사랑…그건 그 어떤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악마였다. 단순히 철없음으로 변명하고 넘기기엔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잔악하다. 결국, 개는 죽고 노인은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노인의 분노를 이해 할 수 있는가? 가슴이 울렁거린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난 분노했다.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노인이 결국 아무런 보상도 없이, 추락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그리고 생명의 가치를 모른채, 제 멋대로 자라나는 아이들...저자의 비판은 강렬하다. 그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우리 사회의 추악함이다. 유령도 악마도, 끔찍한 묘사도 없는 이 작품이 공포스러웠다면, 그건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리라.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저자에 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두번째 방문>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말'이다. 척박한 현실속에서 묵묵히 이 분야개척을 위해 노력해 온 작가분들과 출판사에…우리 공포문학의 밑알을 뿌리고 있는 그들은 칭찬받아야 한다. 이 작품이 편향된 관심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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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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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어린 일본작가의 소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다행히 국내엔 나보다 나이 어린 작가가 없어, 안도했었는데^^ 이제 저런 정체불명의 안도감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달의 바다>의 정한아님은 나하고 동갑이다. 조금 놀라우면서도 아주 반갑다. 내 또래도 이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구나,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구나, 하는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달의 바다>는 미국에 사는 고모가 할머니(즉, 고모에게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내용과 은미, 민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번갈아 서술된다. 고모는 편지속에서 자기가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하는 우주비행사를 자처하고 할머니는 이를 철석같이 믿는다. 할머니는, 거처를 옮기게 되어 영영 편지를 못할거 같다는 고모의 말에, 손녀 은미를 고모에게 보내 안부를 확인하게 하고, 은미는 절친한 친구 민과 미국으로 향한다.

간략하게 이야기한 것이 <달의 바다>스토리의 전부다. 심사위원들로부터 군더더기없다는 평을 받은 간결한 구성. 또한 소설은 부담없이 진행되며, 가독성도 좋다.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막판에 약간의 반전도 있다. 작가의 첫 장편에, 데뷔작임을 고려한다면 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듯하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저자는 할머니,고모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을 은연중 부각하고,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성성을 비판, 조소한다. 다음 서술을 보자. '할머니가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적금과 등산, 단골손님, 소갈비, 독감예방주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일 때마다 모욕과 비웃음을 당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마음을 감추게 되었다.'(p.52)

여기서 저자는 천진한 감상을 가진 할머니를 '고결하게' 부각하며, 일상적인 것에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를 조소하고, 할머니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비난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비난은 이유가 있는가? 왜 할아버지는 단골손님과 소갈비에만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할아버지를 비난하려면 먼저 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부인,아들,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다. 과연 그에게 환상과 꿈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없을까? 아닐 것이다. 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의 무거운 짐이 그를 일상적 믿음으로 내몰아 버린 것이다. 만약 할아버지가 아름다움, 무지개에만 믿음을 가졌다면, 비현실 몽상가의 가족은 거리로 내 몰릴것이 분명하다. 생각해 보자. 할아버지가 없고, 할머니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할머니는 저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할머니의 믿음은 할아버지의 믿음이 있기에 존재 가능한 소녀적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부분은 또 있다. 저자는 미혼모가 된 고모와 그녀를 다그치는 할아버지를 대조하고 역시 할아버지를 은연중 비난한다. '할아버지는 모든 가혹행위로 고모를 심문했다. 하지만 끝내 아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략) 할아버지는 이틀이 멀다 하고 물건을 부수며 고함을 질렀고 할머니는 고모와 할아버지 사이를 가로막고  버티다가 내동댕이쳐쳤다. (중략) 고모의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면 잘못된 쪽은 할아버지인 것 같았다. (중략) 모녀는 자연스럽게 출산을 준비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에 문제를 다시 들춰내려는 사람은 어딘가 촌스럽고 야비하게 느껴졌다.'(p.55-56)

과연 미혼모가 된 딸을 다그치는 할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는가? 이 문제가 촌스러움,야비함을 언급할 문제란 말인가? 조금 황당하다. 자기가 미혼모가 되기로 결정했는데, 애비인들 뭔 상관이냐고 할 사람도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험한 세상에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뱃속에 있는 아이의 삶까지 고려해 결정해야 할 문제다. 과연 고모는 모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미혼모가 되기로 한 것일까?

뒤이어 서술되는, 자기 자식을 할아머지, 할머니(위에도 언급했지만 자기한테는 부모)에게 맡겨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부분에선, 위에서 보이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이 오버랩 되며 심한 분노를 느꼈다. 내가 보기엔 고모는 현실감각없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 고모는 우주비행사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이는 핑계임을 잘 아시지 않는가?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자기 자식을 부모에게 맡기고 15년간이나 소식을 끊는다. 이게 과연 그처럼 당당하게 미혼모가 되겠다고 지랄하던 그녀의 모습이란 말인가? 생명은 장난이 아니다. (이 문제는 상대 남성이 근본 문제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난은 없이, 괜한 할아버지만 비꼬는 점을 지적한 것)

음, 이건 약간 사소한 문제인데, 할머니의 부탁을 받은 은미는 친구인 민과 미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과연 민이 그렇게 쉽게 은미와 동행을 결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 이 직전에 은미는 민의 성정체성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은미는 자기에게 성정체성 혼란과 수술에 대한 의견을 묻는 민에게 "장담하건대 너한테는 끼라는 게 없어.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트랜스젠더들은 기본적으로 자태라는 걸 갖고 있는데, 봐, 너는 누가 봐도 뻣뻣하잖아. 어느 모로 봐도 너무나 건장한 남자라고."(p.28)라며 차갑게 일축한다. 이에 민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절망적으로, 본노에 가득 차서, 마치 화염을 내뱉듯이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면서 머리띠를 집어던지고,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리면서, 시뻘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나쁜 년이라고 고함을 질렀다.'(p.28)

보았는가? 민은 자기가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정체성 문제를 정면에서 비아냥거린 은미에게 극한 분노를 느끼고 '다시는 은미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그 다음 아무런 극적화해 장치가 언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이들은 아주 친한 모습으로 미국으로 고모를 만나러 떠난다. 거 참, 묘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구성.

그리고 초반부에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은, '미혼모인 고모가 정체도 불분명한 미국인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우주비행사가 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건 아무리 그녀가 국립과학연구소에 취직한 적이 있다는 점(p.66)을 고려해도 거의 불가능 한 일이다. 난 이 점을 집중 비판하려고 했는데, 뭐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이라면 알지 않는가?^^ 저 비판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은미와 고모의 만남 이후, 고모의 밑바닥 삶을 보고 난 저자가 내릴 결말을 이해했다.

주제 넘게 너무 많은 말을 한거 같다. 모든 걸 떠나 <달의 바다>는 느낌이 좋은 소설이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가치를 가진다. 일본소설이 놀랄만한 속도를 잠식해 들어오는 현실에서 정한아라는 참신한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 더 멋진 소설을 독자들에게 선보여 주시길.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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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0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것 같다고 나름 혼자서 기대하던 책인데 별점이 생각보다 적어서 재미없나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일어볼만한 소설이란 확신이 생기는 군요.^^

쥬베이 2007-08-04 11:33   좋아요 0 | URL
아...아니에요^^ 제가 요즘 별점에 아주 인색해지기로 정했거든요ㅋㅋㅋ
웬만한 일본소설보다 괜찮아요~ 일단 느낌이 좋거든요^^

유스케 2007-08-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읽어보니... 느낌이 좋은 책일것 같습니다. 한국소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이 요즘은 왠지 버겁게 느껴져서 막연히 멀리했는데요.. 이젠 이유없는 반항은 그만 끝내야겠습니다. 웬만한 일본소설을 너무 읽어서일까요? 집이 너무 그리워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는것도 괜찮을것 같네요 ^^*

쥬베이 2007-08-04 18:23   좋아요 0 | URL
네네 집으로 얼른 돌아오세요~ 저도 요즘 집이 너무 그립습니다.
반성중이죠 ㅋㅋ

2007-08-09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7-08-12 21:27   좋아요 0 | URL
한번 읽어보세요^^ 느낌이 괜찮아요

2007-08-16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7-08-22 15:41   좋아요 0 | URL
디드님 댓글을 이제야 봤네요^^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부러웠어요. 벌써 등단해 작가활동을 하다니... 디드님 저하고 동갑.ㅋㅋ 반가워요
 
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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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절한 고통을 받은 우리의 형제자매들.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 끔찍한 소비에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등, 우리는 강대국의 노예였다. 이런 우리 부모형제들의 고통과 비극은, 안타깝게도 개인차원에서 조명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냥 '민족의 비극'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개인 한 사람의 삶? 그건 사치였다.

조정래님은 역사적 소용돌이속에서 고통받은 개인을 주목한다. 복도훈님의 해설을 잠시 살펴보자.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을 뿐이며, 역사와 그를 기록하는 사가는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복할 때 그 혼자서 해냈는지 묻지 않고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완성한 날 밤에 벽돌공들과 인부들이 어디로 갔는지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조정래는 소설 또는 문학의 임무는 만리장성을 쌓았던 벽돌공들과 인부들의 한 많은 이야기와 신산스러운 삶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 일차적 소임임을 분명히 한다."(p.224)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베니스의 개성상인처럼 조금은 의아한 사진이다. 한 동양인이 독일군복을 입고 적개심(?) 가득한 시선으로 처다보고 있는 사진. '오 하느님'은 사진에서 부터 시작된다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소설속에서는 등장인물이 직접 사진을 찍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은 복도훈님도 뒤 해설에서 약간 의아하다는 뉘앙스로 언급하고 있다) 그럼 소설속으로 들어가 보자.

일본은 지원병임을 가장하고, 만주로 쫓아낸다고 협박해, 젊은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몬다.  신길만. 그 역시 부모의 말을 뒤로 하고 전지로 떠난다. "총알 피해 댕겨라"(p.20) 아버지의 무뚝뚝한 한마디. 귀한 자식을 전지로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옥쇄를 강요하는 일본군에서 벗어나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다. 힘겨운 포로생활. 어느 날 갑자기, 소련군 장교는 신길만을 포함 한국인 포로들에게, 소련군이 되는건 어떠냐고 제의(?)하고 그들은 받아들인다.(p.83) 갑자기 달라진 대우. 그들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는 독일군과 맞서 싸우다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고, 또 독일군이 될 것을 강요당한다. 독일항복 후 이번엔 미국의 포로가 된 그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조국이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은 조금 갑작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가슴의 다가온 울림은 심했다.

200페이지 가량의 짧은 장편이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우리민족의 슬프고 가련한 역사와 그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우리 형제자매들. 많은 생각을 했다. 자칫 잃혀질 수 있었던 한 인물을 저자는 훌륭하게 그려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삶,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 등장인물이 조금 밋밋하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언급한 급작스러운 결말과 실존하는 사진이 찍혀진 내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아쉬웠다. 내용의 깊이나, 소재만을 봤을때, 거의 대하소설급인데 너무 짧은 소설로 그려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조정래 작가님께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거 같지만^^) 

 

* 200페이지 정도인데, 책이 상대적으로 두꺼워 보인다. 종이질이 다른걸까? 조금 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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