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들 간의 섬세한 차이를 사문서(死文書)처럼 무의미하게 여기는 몇몇 무지한 일반인들 및 사교계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을 친밀하게 만드는 것은 견해의 공동체가 아니라 정신적 혈족관계이다. - P17

사랑이라는 순전히 주관적인 현상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현상이라는 것이, 하나의 보충적인 인물을, 즉 사회 속에서 같은 이름으로 통하는 이름으로 통하는 인물과는 구별되며 그 대부분의 구성인자들이 우리자신에서 추출된 하나의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일종의 창조 행위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세인의 눈에 보이는 것과는 같지 않은 어떤 사람이 결국 우리의 내면에서 차지하게 되는 엄청난 비중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을 사람들도 거의 없다. - P62

나는 새해 첫날이, 자기를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나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모습으로 황혼 속에서 끝나고 있음을 느꼈다. [...]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에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그들에게 새해선물을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새 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일 월 초하루를 이제 막 겪고 난 후였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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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서 기준) 7권 중 2권의 1부, 우리 번역본으로는 3권을 읽고 있다. 두 번역본을 번갈아 아주 천천히 읽으면서 다른 책들에 눈을 주느라 진행되는 이야기도 느긋하다. 하지만 더 놓아두었다가는 나도, 프루스트도, 오데트도 다 잊고 말 것 같아서 약간 정리만 해두기로 한다. '스완 부인의 주변'의 1/3쯤 읽었다. 



열댓 살 정도의 화자 (중3 이거나 고1 나이 일테지만  더 어린 아이 느낌을 준다)는 고대하던 라 베르마의 '페드르' 공연을, 연극 공연이라고는 처음 봤고 배역과 배우들을 혼동하면서 온전히 극을 즐기지는 못한다. 자신의 기대에 못미치는 공연에 실망을 할뻔 하지만 관객들의 환호와 배우들의 열정적인 분위기에 취한듯 다시 자신의 '평'을 정정하기로 한다.


그의 집에 전직 대사 노르푸아 씨가 저녁 식사에 온다. 귀족 출신에 명망도 높은 그는 부르주아 가족인 화자의 아버지에게 친절하며 '작가'로서의 진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해준다. (어쩌면 외교관직은 귀족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작가와 외교관 둘 다 차지했던 폴 클로델과 로맹 가리 생각이 났다. 


노르푸아 씨와의 저녁 시간 이전에 이미 익숙한 주변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스완씨'는 매우 경박한 인물로 (사랑, 사랑 때문이야!), 엉뚱한 결혼으로 제2의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말장난 좋아하는' 의사 는 진중하고 실력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1권에서 보았던 인물들의 다른 면, 사교계의 평판을 엳듣게 된다. 당시 제3공화국 시대의 정치 분위기도 그려지는데 정치적 이념보다는 문화적 (사회적) 출신이나 성향이 더 사람들을 무리 짓는다고 말한다. 의외로 스완씨 부인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노르푸아씨, 그녀의 미모, 그녀 주위로 몰려든 고관대작 '남자'들 (부부동반 아니라고;;;)에 대해 알듯말듯 말한다. 덥석 화자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스완부인을 존경? 숭배? 한다며 그녀의 딸 질베르뜨와 논다고 이야기하고 스완씨네 댁에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는데, 너무 앞서간 걸 느낀 그 순간, 마음 속으론 노르푸아 씨에게 감사의 볼뽀뽀 까지 할 뻔했는데, 쎄 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과 빈정대는 눈빛을 감지한다. 노르푸아 씨가 저녁초대에 극찬을 한 대상은 프랑수아즈의 요리였다. 훗, 하고 칭찬에 감복하는 시늉도 하지 않는 꿋꿋한 프랑수아즈.   



자신의 장래 진로 '작가'와 라 베르마의 공연에 부모의 허락을 얻게 해 준 고마운 노르푸아 씨이건만, 그에게 진심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전달하지 못한 불안감으로 화자는 속이 썩는다. 습작 (1권에서 콩브레의 두 종탑에관한 감동을 적은 글)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심드렁할 뿐이고 화자의 최애 작가 베르고트도 얄팍한 작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베르고트가 아름다운 문장 밖의 실생활에서 얼마나 좀스럽고 치사한지 이 전직 대사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신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하지만 의외로 화자가 '실망했다'고 평한 라 베르마에 대해선 칭찬하며 며칠 후 신문에는 라 베르마 공연에 대한 훌륭한 평론이 실린다. 화자는 다시 자신의 인상을 정정한다. 그러곤 자신이 감동적으로 공연을 관람했노라 생각한다. 



샹젤리제 공원에서 질베르트를 기다리기를 여러 날, 드디어 그녀를 만나고 다시 술래잡기등 과격한 '몸놀이'를 하는데 (잠깐, 열 다섯이라고요?;;;) 가깝게 그녀를 안고 당기면서 흥분을 느꼈던 화자는 자신의 '순진함'을 연기하기 위해서 놀이를 계속 이어간다. 하지만 질베르트의 말, "우리 부모님은 널 별로라고 하시던데". 놀란 화자는 장장 열여섯 장에 걸쳐 편지로 자신의 얼마나 순수하게 질베르트 가족을 좋아하는지 알린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부정적이다. 아마도 스완씨는 영악한 소년, 겉다르고 속다른, 어른들에게 잘보이려 과하게 애쓰지만 영악한 아이로 알았을 수도 있다. 




.....


라 베르마는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를 모델로 쓰였다고 하는데 Evaristo의 소설에도 언급되는 이름이다. 


Amma is reclining somewhat grandiosely on a lumpy old sofa, propped up by cushions

like a latter-day Sarah Bernhardt or Lillie Langtry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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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책이고, 인격은 시간을 따라 일정한 폭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두루마리 같은 겁니다. 아니면 자, 일반 책이라고해도 페이지는 순서대로 돼 있잖아요? 책 속에 글자가 아무리 많아도 읽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외줄로 쭉 읽어 나가죠? 쓸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걸 선형성이라고 하거든요. 한 가닥 실이 좌우로 쭉 직조해 나가는 태피스트리에 비유해도 되겠습니다. 시간을따라 감상하는 음악이나요. 아무튼 인간이란 출생부터 죽음까지이어진 한 장의 빈 두루마리, 폭이 그리 넓지도 않은 두루마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 __ 이지연 <역표절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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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16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듯 모를듯한 말이네요. ㅎㅎ 오늘은 화요일 아직 주말이 멀었지만 태피스트리를 짜는거든 뭐든 일단 열심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유부만두님도 이번 주 화이팅 힘 내시고 계속 좋은 책, 좋은 서평 주세요. ^^

유부만두 2021-03-16 17:06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알찬 화요일 태피스트리 직조 중이시군요. 전 망한 거 같아요. 그런데 역방향으로 올을 풀고 다시 짤 수도 없대서 그냥 저냥 계속 나아가야 하고요. ^^;;;;
 


책/이야기의 중요성 만큼이나 '인간'과 '연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단편들이 모여있다. 책은 어느 형태로 존재하든, 종이책, 텍스트, 칩, 정보, 총컬러 영상, 구술되는 이야기, 혹은 4d 인터엑티브 체험까지 곧 인간이라는 등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책이 없다면 인간도 사라질 수 밖에.

인간을 무시하고 책에 담긴 정보/지식만을 챙기려다보면 결국 인간 사냥꾼 혹은 노예상과 다르지 않다고 책-종이-나무 설정부터 구구절절 풀어내는 <금서의 계승자>와 헌책방과 노포에 대한 노스텔지어에 작위적인 연애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켠>은 지리했다. (차라리 그 놈을 죽여버리지)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연상시키는 <12월, 길모퉁이 서점>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 덜 이상하고 더 따뜻했고 예측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가혹한 가정 상황, 청소년 '정서' 학대는 고통스럽다. 학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어린이는 <모든 무지개를 넘어서>에도 나온다. 열두 살, 초등 오학년 아이는 2150년의 가혹한 자연환경, 경제환경 속에서 나이든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몇몇 도구나 설정은 미래로 그려졌지만 낡은 종이책에 미련을 가진 모습들과 사람들 생활 모습들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고 (덜 망했고) 평범해서 (성에 차질 않았단 말입니다) 어떤 반전을 기대하면서 읽었다. 다시 불려오는 <오즈의 마법사>의 황금길. 아이가 혼자 걷는 게 아니길 바란다. 성장소설 분위기만 퐁퐁 뿌리지만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열두 살, 도서관 카드로 뭘 할 수 있을까. 너무 낭만파잖아. 차라리 애한테 급식 카드를 주세요. 부모 재교육을 시키던지. 그 부모와 그 식구들을 그렇게 그냥 놔둔 상태라면 이 아이의 미래는 가시밭길일 게 뻔하다. 




이경희의 <바벨의 도서관>은 문목하의 <유령해마>의 작은 버전 같다. 정보체계가 명령을 수행하기를 그만둔 다음의 세상, 중앙장치나 ai가 '창의력'을 가진 세상에서 '낡아서 생명을 다한' 데이터/기기는 누가 구해주는가. 모든 책과 모든 정보가 모인 도서관이 그 방대한 육각형 무한대의 (11차원으로!!!) 건물이 실재한다면. 그저 보르헤스의 뻥이 아니라 그곳에 알레프도 있다면 어쩔건가. 우선 반갑습니다? 악수는 ... 아, 아니요. 어려운 '과학' 이야기에 액션이 더해져서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기초가 탄탄해야 합니다. 과학 기기일수록. 컴퓨터 부팅이 늦다면 일단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켭니다. 


그 기초 이야기, 책의 성질, '쓴다' 그리고 '읽는다'에 집중해본다. 그 사이에 온갖 첨가와 삭제가 있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의 이야기는 이지연의 <역표절자들>에서 어지럽게 꼬여있는데 모르겠으면서도 알듯 말듯 읽게된다. 그리고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는 다른 존재, 다른 '책'이었다. 그 책은 거대한 정보, 감히 덩어리를 자유로이 포기하거나 새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경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조심. 이 모든 가능성, 이 온갖 뻥ability. 기억의 문제라고, 슥 넘어가 뭉게버릴 수도 있지만 책인걸. 찢겨나간 곳과 덮어 접어 둔 곳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조금씩 엇나가는 디테일에서 '나'는 결단을 내린다. 


다시 책=인간(성??) 공식으로 돌아와서 꼼꼼 따져보는 소설이 <두 세계>다. 책의 세계와 현실, 사람의 육신이 사는 세계. 이 두 세계를 연결해서 인터엑티브 게임 같은 독서 경험 프로그램을 개발한 주인공이 어느 모험서사 '책'의 오류를 만나 두 세계의 본질에 대해, 몇 년 전 자살한 쌍둥이 동생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열망하며 '정신'을 죽인다면 다른 곳으로 건너갈 수 있다니? <사자왕 형제의 모험>의 낭기열라 낭길리마 같은건가. 두 세계의 교차라는 과격한 설정에 의외로 쉽게 납득되는 나는 소설 속 세계를 잠깐 상상해 본다. 하지만 체험이라도 그곳으로 건너가는 건 겁이 난다. (스테판 킹의 세상도 박완서의 세상도 다 너무 고달프다. 살려준다고해도) 그러니까 '책에 갇히'는 건 누구인가. 등장인물들도 탈출하고 저자는 진즉에 놓아둔 책의 세계는 독자 앞에 와서 슬그머니 문을 열어둔다. 




어젠 첫 네 편만 읽고 별로, 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다 읽어서 다행이다. 네 명(더하기 알파) 분의 사람을 못 만날 뻔 했다. 읽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갈등하면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독자의 딜레마. 갇힐만 한가. 발을 들여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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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16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실린 소설을 보면서 다른 책을 떠올리기도 하셨군요 벌써 쓰인 책이라면 갇혀도 바꿀 수 없겠지만, 아직 쓰이지 않고 쓰이는 책이라면 좀 나을지... 《끝없는 이야기》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군요


희선

유부만두 2021-03-16 07:01   좋아요 0 | URL
이 소설집은 책과 서점을 주제로 하기에 계속 기존의 책과 미래의 책들을 불러와서 이야기를 만들어요. 그런데 갇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독자가 책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그 작업을 하는 게 바로 이 소설집 같고요) 말해주기도 하고요. 네버 엔딩이죠. 책 밖으로 나와도 다시 책 속에 있는 걸까요. ^^ 뭐, 결국 다 책 아니겠냐, 는 이야기 일 수도 있고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단발머리 2021-03-16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엘라 인첸티드>에만 눈이 가는 독자입니다. 역시 아는 만큼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좀 어려울듯 하지만 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네요^^

유부만두 2021-03-18 20:31   좋아요 0 | URL
꽤 재미있어요. 연상되는 이야기들이 변주되면서 독자도 그 안에 들어가 놀 수, 그리고 갇힐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1, 5번째 수록작들 추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