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에서 '다코네의 우울'과 '엄마' 두 편을 읽었다. 남편의 지인 딸 결혼식에 가야하고, 남편 근무지를 따라 해외로 이사해야 하는 여자들. 남편의 출근 후 혼자 남아 자신의 고민과 긴장을 감당해내야한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물건을, 혹은 커다란 상실을 감당해야 하는데 남편은 그녀들의 애원하는 눈길에서 어떤 적의를, 혹은 악의를 느낀다.

 

커다란 서양식 호텔, 처음 먹는 양식에 긴장해서 예행연습까지 하는 다코네. 자신과 함께 벽 안쪽에서 숨어 걷는 쥐 한마리의 기척마저 느낀다. 지인의 딸 결혼식, 신부 머리에 쓴 흰 장식을 흘끗 쳐다본다. 이미 거쳐온 의식, 이제는 어른의 자리에 앉아서 무사히 치뤄낸 한 편의 사교극.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식당에서 여종업원을 희롱하는 사내의 자유를 보고 신문에서 읽은 어느 여직공, 성추행 당해 미쳐버렸다는 다른 여자의 사연을 생각한다. 그날밤, 다코네는 기차에 치고도 살아 의식은 생생한 악몽에 시달리고 아침까지 그 여운이 지난밤 양식당의 긴장과 함께 몸에 서려있다. 음식은 무엇이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그 음식의 기름기가 찻물 위에 어린다. 소화가 잘 되었을라나.

 

두 명의 도시코, 이제 갓 엄마가 된 이 두 사람은 남편들을 따라 중국에 왔다. 근무지로 정식 이주를 하기 전 항구도시 여관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이 된다. 한 명의 도시코는 얼마전 아기를 폐렴으로 잃고 이웃 도시코의 통통하고 '날카로운 젖냄새' 나는 아가를 부럽고도 아픈 마음으로 쳐다본다. 이후 중국 내지쪽으로 이사한 '아기 잃은' 도시코는 나른하고 편안한 오후, 남편은 정원의 해먹에 누워 새장 안의 금문조를 쳐다보는 옆에서, 자신에게 온 분홍빛 편지를 펼친다. ... 타인의 비극에, 흥분하는 부인의 모습이 섬찟한 남편. 아내는 고집스레 금문조를 풀어줘야 한다고, 방생해야 한다고 하며 닿지 않는 새장쪽으로 손을 뻗는다. 달큰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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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4 정도 읽는 중인데 미리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다. 육아의 아름다움, 보람, 따위는 넣어두고 현실적인 '부모되기'에 대한 이야기. 미국에서 2014년에 출간된 책이니 요즘 책이고 한국 실정과도 꽤 맞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도입부에는 개인들의 경험들을 생생한 목소리 인용으로 실으면서도 1950년 이후 가족생활, 육아법 등에 대한 통계와 기존 학술서등을 언급한다. 인간이 '어린이'를 가족 안에서 낳아 키우는 경험이 지난 100년 이후 얼마나 그 의미가 달라지고 사람을, 부모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서술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된지도.

 

부모가 되서 겪는 변화, 부부 사이의 갈등과 개인 (특히 엄마)의 고립, 여러 성장단계에 걸친 아이들의 '미친' 반응들, 과 '바른' 부모의 개입의 정도, 그리고....두둥 사춘기와 그 이후의 아이들과 부모, 그 모든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살아있다면) 이루어낼 부모의 성과에 대한 아웃라인이 목차에 보인다. 이제 2장, 남녀 차이인지 사회 불평등인지 육아와 집안 살림의 격랑 속을 헤쳐나가는 서로 다른 모습들을 읽고 있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과거 (더 젊지만 더 지치고 더 무지했던) 나의 모습이 보인다. 지식도 요령도 없던 나여, 하지만 도와주기 보다는 간섭하고 훈장질로 나를 둘러쌌던 사람들이여.

 

그래도 재미있게 읽고 있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일단 부모라는 굴레를 쓴 다음에는 무를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회에 만연한 '아이들은 소중하고 착한 존재'라는 신화에 집착하지 말아야한다. 십년을 주기로 바뀌는 유행 육아법에 이끌리지 말고, 아이 때문에 빼앗기는 시간, 잠, 에너지를 미리 알고 대처해야한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아, 눈물 나)사회에서 격리되엇 자존감을 떨어뜨리지 말고, 도움을 청해야할 때는 손을 내밀어야한다. 아직 고생담 부분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내 주목적은 '사춘기 육아' 부분) 자꾸만 추억에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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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6-2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다 키워놓고 남들은 엠티 네스트네 어쩌네 하는데 나는 늦둥이 아들 놈 때문에 이 책 읽어야 할거 같네.

유부만두 2018-06-23 09:00   좋아요 0 | URL
하하하 동감 십만개 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내 몸도 늙었는데 아직도 학부모 하는 우리!
 

베르뒤랭 씨 부부는 스완 씨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자신들의 의견에 덮어놓고 찬성하지도 않고 은근 귀족과 고관대작들과 친한데다 그걸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다고, 무화과도 포도도 아닌 사람이라고 흉본다. 주석을 따르면 '말린 무화과 열매와 건포도를 지칭하는 표현인데 정체가 의심스러운 사람을 가르킨다'고 한다. 말린 두 과일을 빵에 넣어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정체가 의심스러운 게 아니라 달콤한 사람입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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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6-19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있는 음식의 정체가 궁금하군요

유부만두 2018-06-19 10:02   좋아요 0 | URL
건포도와 말린 무화과, 호두 등이 들어있는 통밀빵이에요. 다이어트 하려고 패스츄리 대신 샀는데....너무 맛있어서 마구 먹어버렸어요. 스완씨 달콤한 사람, 이러면서.
 

일찍 잠에서 깨버려서 억울하기도 하지만 다시 잠들기도 아깝고 힘들어서 책을 읽었다. 아침에는 전날 읽었던 책 보다는 단편을 찾아 읽는편인데 벌써 6월, 벌써 17일, 나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어. 맑은 하늘에 일상이 어색한 기분이 드는 아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같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읽는다.  

 

'마죽'에는 마흔 훌쩍 넘고 낡은 옷 두 벌로 연명하는 말단 '오위'가 나온다. 이름도 없이 그저 빨간 코에 굽은 등으로 묘사되는 이 사내는 온갖 멸시와 조롱에도 바깥으로 분노를 표현하기 보다는 조용히 자책하고 도망가는 편을 택한다. 참다참다 한 마디, '안돼겠구먼, 자네들' 에는 비애와 서글픔이 배어나온다. 다만 그 '박해에 울상짓는 인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을 뿐. 그에게 작은 소망, 혹은 집착이라면 '마죽' (저자의 시대에서도 백여년 전의 미식이라고...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듯)을 실컷 먹는 것. 부유한 집의 사위인 도시히토라는 사내가 그의 소망을 들어주겠다며 술김에 약속하고 오위를 얼러 숲을 지나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숲에선 여우를 만나 자신의 도착을 알리라 호령도 하는 도시히토. 모든 면에서 오위와는 정반대의 인물. 집에 도착해선 마를 마당 가득 쌓아두고 큰 솥 가득 마죽을 쑤게 한다. 큰 은그릇에 넘칠듯 담긴 마죽에 질려버린 오위. 감당할 수가 없는 그의 집착은 사라진다. 그 많은 마죽을 억지로 먹이는 고문이 이어질까, 걱정할 찰나 다시 나타난 어젯밤의 그 여우!

 

'묘한 이야기'에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령이 나온다. 이번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나이. 지에코라는 젊은 새댁은 비오는 날 한사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겠다며 친정집을 나선다. 그녀의 남편은 1차대전 참전으로 유럽에 나가있는 상태. 지에코가 기차역에 도착해 바라보는 역 창문 밖은 착시인지 바닷가 풍경이 펼쳐진다. 인사를 건네는 낯선 빨간 모자의 사나이 (짐꾼이나 노동자의 복장인듯)가 남편의 상태를 알아오겠다면서 사라진다. 섬뜩한 느낌에 지에코는 그후로 빨간 모자만 보면 소스라치게 되는데. 남편이 귀국 후 더욱 이상한 이야기를 듣곤 남편과 함께 근무지로 이사한다. 그녀의 행동의 배후에 숨겨져있던 계획이 설명되는 마지막 부분이 귀엽기도 했지만 '자네가 조선에 갔을 때'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쎄한 기분이 들었다.

 

식구들은 아직 잠에 빠져있는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는 식구들이 야속하기도 부럽기도 하다. 현실은 여기, 지금은 유월. 자꾸만 마음이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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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6-17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당할 수가 없는 그의 집착은 사라진다..요 문장에 자꾸 시선이 갑니다. 라쇼몬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 책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어요. 다시 읽고 싶네요. 유부만두 님의 글을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유부만두 2018-06-18 09:54   좋아요 0 | URL
오위가 마죽을 기다리고 또 그 순간을 두려워하는 장면은 꽤 섬세해요. 아마 다시 읽으시면 예전 감상을 강하게 느끼실지도 모르겠네요. 조금씩 천천히 떼어 읽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음산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요.
 

막내에게 추월당했다. 나보다 먼저 어슐러 르 귄 소설을 읽다니. 얕보고 훈수 두었던 일을 반성한다. 르귄의 동화라니 고양이, 한 마리도 아니고 네 마리에게 (그리고 한 마리 더) 날개를 달아놓다니. 이런 판타스틱한 이야기가!

 

그런데! 판타지를 향한 내 기대를 꺾듯이 이 날고양이들은 의외로 현실세계에서 산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고양이들 등에 달린 날개뿐. 도시의 쓰레기통 옆에서 태어나 길고양이로 사는 고달픔, 엄마의 다정함, 그리고 적대적인 다른 동물들과 인간들 모두 현실세계에서 나왔다. 여느 고양이처럼 날개 없는 제인 부인 고양이는 훨훨 날아서 힘든 도시 생활을 벗어나는 '태몽'을 꾼 후에 날개를 단 네 아이 고양이를 낳았다. 철새가 아비라는 둥, 시덥잖은 이웃들의 농을 무시하고 살뜰하게 아기들을 키운 엄마 제인 부인. 아기들에게 이제 멀리 떠나라고, 독립하라고, 도시를 벗어나 살라고 말한다. 어설픈 날개짓과 통통한 몸의 네 마리 고양이들은 도시를 건너고 공장 지대를 지나 숲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숲이라고 마냥 고양이들을 환영할 리는 없다. 고양이들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있다. 다행히 '다정한 손'을 만나서 발라당 누워버리는 행복을 찾는 고양이들. 그러다 엄마가 보고 싶어져서 도시로 가는데 ...

 

네 마리의 날고양이들 외에도 검은 날고양이 제인과 혼자 잘난 집고양이 알렉산더도 나온다. 고양이 시선을 어린이 독자들이 감당할 만한 긴장과 흥미 수준을 지키며 그려내고 있다. 어린 제인이 겪는 트라우마와 후반부 모험담이 꽤 흥미롭지만 현실세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괴물이기도 천사이기도 하고 날고양이들은 게으를만큼 '안락'에 쉽게 정착해 버리지만 이야기 흐름은 세련되게 독자를 이끈다. 모험은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편안함과 가족의 사랑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안전한 모험담, 고양이가 함께 한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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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6-16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ㅎㅎ

유부만두 2018-06-16 13:12   좋아요 0 | URL
귀엽고 재미 있는 모험담입니다. 저희집 아이는 다양성 포용이라는 주제 숙제로 읽었는데 재미가 주제를 이겨버림;;

psyche 2018-06-19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twings! 전에 한인 학부모회에서 북클럽 만들때 추천도서로 골랐던 책이었는데. 반갑네~

유부만두 2018-06-23 09:01   좋아요 0 | URL
언니도 알고 계신 책이네요. 전 이번에 르귄이 동화도 쓴 걸 처음 알았죠.
대가는 동화도 잘 쓴다! 감탄했어요. (라지만 어른용 소설도 사두기만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