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잠에서 깨버려서 억울하기도 하지만 다시 잠들기도 아깝고 힘들어서 책을 읽었다. 아침에는 전날 읽었던 책 보다는 단편을 찾아 읽는편인데 벌써 6월, 벌써 17일, 나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어. 맑은 하늘에 일상이 어색한 기분이 드는 아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같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읽는다.  

 

'마죽'에는 마흔 훌쩍 넘고 낡은 옷 두 벌로 연명하는 말단 '오위'가 나온다. 이름도 없이 그저 빨간 코에 굽은 등으로 묘사되는 이 사내는 온갖 멸시와 조롱에도 바깥으로 분노를 표현하기 보다는 조용히 자책하고 도망가는 편을 택한다. 참다참다 한 마디, '안돼겠구먼, 자네들' 에는 비애와 서글픔이 배어나온다. 다만 그 '박해에 울상짓는 인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을 뿐. 그에게 작은 소망, 혹은 집착이라면 '마죽' (저자의 시대에서도 백여년 전의 미식이라고...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듯)을 실컷 먹는 것. 부유한 집의 사위인 도시히토라는 사내가 그의 소망을 들어주겠다며 술김에 약속하고 오위를 얼러 숲을 지나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숲에선 여우를 만나 자신의 도착을 알리라 호령도 하는 도시히토. 모든 면에서 오위와는 정반대의 인물. 집에 도착해선 마를 마당 가득 쌓아두고 큰 솥 가득 마죽을 쑤게 한다. 큰 은그릇에 넘칠듯 담긴 마죽에 질려버린 오위. 감당할 수가 없는 그의 집착은 사라진다. 그 많은 마죽을 억지로 먹이는 고문이 이어질까, 걱정할 찰나 다시 나타난 어젯밤의 그 여우!

 

'묘한 이야기'에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령이 나온다. 이번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나이. 지에코라는 젊은 새댁은 비오는 날 한사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겠다며 친정집을 나선다. 그녀의 남편은 1차대전 참전으로 유럽에 나가있는 상태. 지에코가 기차역에 도착해 바라보는 역 창문 밖은 착시인지 바닷가 풍경이 펼쳐진다. 인사를 건네는 낯선 빨간 모자의 사나이 (짐꾼이나 노동자의 복장인듯)가 남편의 상태를 알아오겠다면서 사라진다. 섬뜩한 느낌에 지에코는 그후로 빨간 모자만 보면 소스라치게 되는데. 남편이 귀국 후 더욱 이상한 이야기를 듣곤 남편과 함께 근무지로 이사한다. 그녀의 행동의 배후에 숨겨져있던 계획이 설명되는 마지막 부분이 귀엽기도 했지만 '자네가 조선에 갔을 때'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쎄한 기분이 들었다.

 

식구들은 아직 잠에 빠져있는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는 식구들이 야속하기도 부럽기도 하다. 현실은 여기, 지금은 유월. 자꾸만 마음이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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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6-17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당할 수가 없는 그의 집착은 사라진다..요 문장에 자꾸 시선이 갑니다. 라쇼몬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 책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어요. 다시 읽고 싶네요. 유부만두 님의 글을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유부만두 2018-06-18 09:54   좋아요 0 | URL
오위가 마죽을 기다리고 또 그 순간을 두려워하는 장면은 꽤 섬세해요. 아마 다시 읽으시면 예전 감상을 강하게 느끼실지도 모르겠네요. 조금씩 천천히 떼어 읽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음산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