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를 동반하는 산책 혹은 걷기를 불어로 flanerie라고 하고 그 행위자 flaneur 의 여성형 명사가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남성 시선의 대상으로 '구경거리'였던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걸으며 철학적 혹은 전복적 시선을 주위에 던졌던 그 길들을 같이 걸으며 그녀들의 예술도 짚어보는 책이다. 더불어 저자 자신의 여러 도시 경험도 서술한다.

 

책의 출간 당시 저자는 30대 후반의 뉴욕 출신으로 파리에 거주(혹은 정착)하는 여성이다. 그는 이 책에서 두 언어 사이를 오가고, 유대교, 유럽 이민자, 미국, 프랑스의 여러 역사와 문화 사이을 오가며 되짚어본다. 하지만 그 시작은 아주 귀여운 백인 여성의 유러피언 판타지로 보였다. 메트로폴리탄 도쿄의 외국인 거주지 호텔/레지던시에서 프랑스인 애인 은행 관리직의 동거인으로 비교적 특권을 누린 위치에서 그 편협함이 어김없이 드러나기 까지 한다. 1999년 스무살 때 파리에 가서 라쿠폴라에서 노트에 뭔가를 적으며 오래 앉아있었다더니.... 몽파르나스, 서울의 고터에 해당하는 그 거리, 나는 왜 기억하는가. 아 그 17세기 돌벽 건물 사이의 골목길, 달큰한 냄새를 풍기던 오전의 카페를 나는 기억하네. 그리고 조금 설렜네. 하지만 동양인 여자에게 더 좁은 골목길, 덜 자유로운 도시였음을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서도 기억한다네. 또 책을 잔뜩 주문했지 머야. (겔혼 책은 번역된 게 없다. 2012년 영화도 품절)

 

저자에 대한 신뢰가 약하니 내용에 집중할 수도 호응을 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도시를 걷는 여성 예술가들 중 런던의 버지니아 울프와 파리의 바르다, (걷기 보다는 주로 뛰고 굴렀다는 이미지인) 스페인 에서의 마사 겔혼의 이야기는 강렬하다. 저자가 처음부터 언급하는 flanerie의 정의가 꽤 넓게 적용되는 듯 하지만 결국 사적인 공간을 떠나 공적인 공간을 자신의 의지로 걷고 타인(주로 남성)의 시선을 견뎌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시선을 던져서 관찰하고 맞서고 비판하며 기록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 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만나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종종 끼어드는 이 저자의 어설픈 서술에 내 독서는 방해를 받았다. 게다가 마무리 부분에서 캣콜링을 즐기는 '주체적 여성' 입장 해명이나 '우리 모두는 난민' 서술은 의아함을 한참 건너 뛰어 버린다. 

 

 매일 아이들을 채근해 각각 컴퓨터 앞에 앉히고 끼니를 챙긴 다음 나는 나 대로 책 속으로, 파리로, 뉴욕이나 기원전 그리스나 때론 우주로 날아가, .... 걷는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나의 (날 찾지 말아라) 시공간을 확보하고 숨을 고른다. 책들의 공간과 서재, 작가들, 또 사이버 공간을 걷는다. 교보, 예스, 밀리의 서재, 그리고 나의 본진 알라딘. 이 코로나 시대의 걷기, 남의 시선 따위 무시하고 내 멋대로 생각하며 방랑하기는 최고의 사치 아이템이 되었다. 저자 로런 엘킨은 자신의 이 첫 책에서 (어쩐지 티가 났어) 실망을 불렀지만 이 시국에 이처럼 유혹적인 책을 만나기도 쉽지는 않다. 이제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을 걸어야 겠다. 


덧: 현지 시간으로 일요일,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 스무 명 정도의 여성들이(FEMEN) 상의를 벗고 시위를 했다. 가슴엔 "음란함은 니들 눈에 있다" 라고 써놓았다. 며칠 전 가슴이 너무 패인 옷을 입었다고 출입을 거절당한 미술관 관람객 뉴스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시위가 끝나자 다른 관람객들이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https://www.bfmtv.com/paris/des-femen-au-musee-d-orsay-apres-qu-il-a-refuse-l-entree-a-une-femme-a-cause-de-son-decollete_AN-2020091300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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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 언더 블럭 (TvN)에 백희나 작가님이 나오셨다. 구름빵 소송을 이야기 하면서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소중히 여기라고 당부하고 아이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사람을 엄마 대신 '양육자'라고 칭하셨다. 




방송에는 작가님의 작업실 모습을 조금 보여줘서 더 좋았다. 전시회를 (예전에 있었다지만) 다시 한 번 열어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여러 작품 속 캐릭터 인형들을 만날 수 있다면!! 


방송에서 동동이 말고도 선녀님, 이상한 엄마, 이상한 손님 이야기도 나눠주었더라면 더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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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13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내랑 제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에 백희나 작가님이 나오셨군요. 구름빵은 진짜 인생작품인데 안타까운 이름이 되어 버렸어요 ㅠㅠ 그림책 속 주인공들을 실제로 만난다면, 핸폰에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유부만두 2020-09-13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이 프로그램 알게 되어서 금,토는 여러 회를 찾아보면서 주말을 ‘보람차게 날렸‘ 습니다. 하하하
특히 어린이들 인터뷰 모음 영상이 재미있었어요. 어쩜 그렇게 당당하고 솔직한지!

백 작가님 전시회 한다면 정말 좋겠지요? 절대 만져선 안돼겠지만 동동이를 본다면 악수를 .... 흠.... 하고 싶을 거에요. ^^

단발머리 2020-09-13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금이...... 6억!!!! 아, 정말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죠. 근데 6억이면 어린이/청소년 책 만드느라 고생한 시간들이 아주 쪼금 위로는 되겠어요. 스웨덴 스케일!!!

유부만두 2020-09-13 22:06   좋아요 0 | URL
그것도 스웨덴 국민들이 만든 상이라고 해서 더 감동이에요. 하지만 이 상금이 작가님의 소송 비용을 충당할 거라니 슬펐어요.
 

팟캐스트에서 여름 특집으로 추천한 작품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 4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중 '식객 히다루가미'만 골라 읽었다. 마침 '맛있는 녀석들'의 금요일 저녁에. 


운이 다한 무사나 문인에게 얹혀사는 이름 모를 식객이 알고보니 대단한 기운, 운을 끌어오는 얘기가 많다는데  이 소설은 도시락밥집을 하는 후사고로에 깃든 식객 귀신, 식신, 혹은 히다루가미 (길에서 아사해 버린 원귀) 이야기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오오오오. (갑자기 길에서 당 떨어져서 무릎이 꺾여 풀썩 주저 앉아봤다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무섭다기 보다는 인간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운을, 밥만, 맛있는 음식만 잘 먹여주면, 돈과 명예로 갚는 귀신이지만 그 댓가가 무겁고 커서 (문자 그대로! 무겁고 크다. 먹깨비가 깃들었으니 인간 후사고로가 원 체격을 유지하더라도 그 귀신은 커지고 무거워져서 주위를 짓누른다) 해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 먹깨비, 혹은 걸신은 은근 멋과 풍류도 알아서 후사고로가 만든 음식이 맛있으면 팥 세 알을 베개에 늘어 놓는 것으로 별평점을 매긴다. (귀신은 팥을 무서워 한다더니, 걸신은 그 팥도 오도독 씹어드심) 맛이 없으면 팥 한 알 달랑. 


나에게도 이런 귀신....이? 라는 상상을 오 초 쯤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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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1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에 평점을 매기는 먹깨비라니 귀엽네요~ 밥을 주면 돈과 명예로 갚는다니 좋은 거래인 것 같은데 해법을 찾아야한다니요.... 귀신과 인간은 공생하기 어려운걸까요...?

유부만두 2020-09-11 20:40   좋아요 1 | URL
무겁고 큰 존재감으로 일상생활에 폐를 끼치거든요. 집이 무너 앉아요;;;;;;
이야기 주인공 인간은 욕심을 조절할 줄 알아서 해법을 찾지만 많은 경우 그러긴 힘들 것 같아요. 그나저나 베개에 팥이 한 알 올라있는 걸 본 인간은 화도 났겠더라고요. 명색이 음식점 주인인데 말에요.
 

소녀답게 나는 지도 보는 일을 좋아했다. 태양계 지도와 지구의 지도. 무엇보다 지역의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어머니와 내가 살고 있는 페어펙스처럼 낯익은 거리가 밖으로 뻗어나가 내게는 낯선 다른 거리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이 거리들이 또 다른 거리와 도로, 고속도로로 연결되다가 나라 전체로, 대륙으로, 종내는 지구로 어떻게 차례차례 이어지는지 추적하기를 좋아했다. 지리학상의 지구가 있다. 인류 (내 생각에 이 인류란 남자가 아닐까 싶다)가 측량하여 이름 붙인, 정치적 명칭으로 이루어진 지구. 또한 지질학적인 지구가 있다. 역시 측량을 하긴 했지만 지리학상의 지도보다 앞서 생긴 지도로 그려낸 지구. 여기서 출발하여 결국에는 저기로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매혹했다.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도 다른 지점으로 여행할 수 있다. 능력만 있다면. 


50년대 여고생들의 갱단 이야기. 면도칼 좀 씹으면서 '몹쓸' 남자 인간들을 패버리는 언니들 이야기 같은데 불광동 여우파 더하기 성장소설 느낌. 하지만 또 가슴을 후벼파겠지. 조이스 캐럴 오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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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12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저도 곧 읽어야겠어요!
이거 동명의 영화도 있는 거 아세요? <클래스>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로랑 캉테 감독 영화라 영화도 괜찮을 거 같은데, 전 원작 읽고 나서 보려고 여태 미루고 있네요. 다가오는 추석 연휴에 책도 영화도 다 봐야겠습니다!

유부만두 2020-09-12 12:21   좋아요 1 | URL
그쵸?! 저도 책 읽은 다음에 보려고 아껴뒀어요. 실은 이 책도 신간일 때 사서 묵힌 거고요;;;; 진하고 강렬하고 묵직하게 천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은 조이스 캐럴 오츠는 제게 좋고 나쁘고를 오가거든요.
그들, 카시지 가 별로였고
좀비는 좋았고요.

잠자냥 2020-09-12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츠는 좋고 나쁘고를 오가는 편인데, <폭스파이어>는 왠지 좋은 편에 속할 거 같아요. ㅎㅎㅎ
 

표지에서 '시녀 이야기' 의상이 보여서 아, 그 버터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아.... 이 책은 헐렁헐렁 음식 이야기나 하고 넘기는 책이 아니었다. 너무 각잡고 철학을 논하지는 않지만 음식!이 책에서 쓰인 이유가 그저 독자의 흥미와 침샘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 이상을 알려주는 문화적 코드와 분석을 품고 있어서 '지적'으로도 유혹적인 부분이라고 말한다. 아무럼요! 


맛보기로....


<나를 찾아줘>는 단순히 여자와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크레이프를 만들고 와인을 마시는 여자와 팬케이크를 먹고 맥주를 마시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길리언 플린은 음식을 상징적으로 활용해 완벽해 보이는 부부가 서로에 대한 환상을 깨가는 이야기에 사회계층과 지역 간의 차이라는 서사을 엮어 넣어 깊이 있는 의미의 층을 만든다. [...] 촘촘히 엮인 디테일들은 에이미와 닉의 차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아니라 계층적 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이야기는 현대 미국 사회에서 심화되어 가고 있는 계층 간, 지역 간의 차이와 갈등을 드러낸다.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는 '인간은 곧 그가 먹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단순한 '먹방'의 포인트는 그 말과 맞닿아 있다. 인간을 먹는 존재로 인식한 포이어바흐는 음식이 피가 되고, 피는 심장과 뇌가 되고, 곧 사상과 정신이 된다고 했다. 음식은 인간의 몸과 생명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이니, 음식을 먹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수단이다. 그래서 이런 음식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주체적 의식이 파괴되는 미래를 예측한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전자책이라 페이지 수가 없음)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책은 


물론 현대는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보다 더 복잡하고 더 다층적으로 상/하 문화가 계층 별로 나타나고 IT 발전과 함께 그 경계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하지만, 뭐랄까, 긍정하기 싫지만 그 선이 도처에 그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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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10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필 바꾸셨네요!!! 너무 이쁜 책들이라 꽂아만 두어도 흐믓할 기세입니다^^
전 읽는건 자신없고 그냥 구입만 할까요? ㅎㅎㅎㅎㅎ

첫번째 두번째 제인 오스틴이에요. 하트뿅뿅!!

유부만두 2020-09-10 16:06   좋아요 0 | URL
펭귄사이트에서 얻어온 사진이에요. 제인 오스틴 특별 컬렉션!!!!
갖고 싶지만 읽을 것 같지 않아서 사진으로만 가져보려고요. ^^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