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 게이의 신작이라서 이북으로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엣세인가 했더니 단편소설집. 깔끔하게 강연하는 걸 봐서 그런가 글은, 소설로는 조금 엉성한 느낌. 그래도 한 편씩 나눠 읽어봐야지.

 

처음에 실린 I Will Follow You는 열살, 열한살 때 아동성애자에게 납치, 감금당했던 두 자매 (샴쌍동이라고 놀림도 받는) 이야기다. 사건 후 오년이 지나고 범인의 재판이 열리는데 증언을 한 다음 언니는 그만 옷을 적시고 만다. 동생 (이젠 열다섯 살)이 언니를 쓰러지지 않게 가만히 화장실로 데려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다. 요즘 트위터에서 공분을 샀던 원로 남자 작가의 단편 소설이 겹쳐지는 장면.

 

충격으로 넋이 나간 언니, 그 뒷처리를 돕는 여동생, 하지만 언니의 황망함을 파고들어 세세히 속옷과 아랫부분을 묘사하는지 안하는지는 작가의 선택이다.

 

요즘 영어책을 더 읽고 있는데 간혹 원서가 더 싸기 때문이고, 때론 번역서 나오기를 못기다리는 내 성마름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내 책 읽는 방법 탓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오늘 아침에 들었다.

 

분명 같은 책을 읽었는데, 친구가 밑줄긋기로 남긴 문장들을 (우린 모두 같은 출판사의 번역서를 읽었다) 트위터에서 천천히 보면서...아 나는 왜 이런 문장을 건져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느낌은 처음이 아니다. 나는 문장의 아름다움을 (한국 소설도 마찬가지) 왜 놓치나 하고 속상했다. 그런데 그 친구, 그 문장을 기막히게 잡아내는 독자는 내게 어제 나의 트위터 내용이 색달랐다고 했다.

 

요즘 난 트위터에 벽보고 떠드는 맘으로 '전쟁과 평화' 읽으며 이런저런 걸 올리고 있다. 책에 나오는 반지가 실은 프리메이슨 상징이라던지, 해골이 러시아 정교 십자가 아래에 있다던지,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이 실제론 어떻게 생겼는지 검색한 사진 올리기도 하며 혼자말을 올렸는데, 친구는 자기에겐 놓치고 지나칠 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문장의 아름다움, 언어의 세밀한 구조를 바라보며 소설을 읽었고, 나는 소설이 보여주는 상황, 줄거리, 인물을 상상하며 소설을 읽고 있는 거였다. 친구는 세잔이라면 나는 좀 구식 (고전주의?) 그림인건가. ㅜ ㅜ

 

그래서 나는 영어 소설도 부담을 덜 느끼며 읽어나가는 지도 모른다. 첫 문장, 첫 페이지는 시간이 조금 걸려도 곧 흐름을 잡고 영어로든 우리말이로든 그 인물이 처한 상황에 쑥 들어가버린다. 못들어갔던 소설도 꽤 있었다, 물론. 난 문장이 기억나기 보단 상황과 인물이 저지른 짓들이 기억에 남는다. 즉 난 영어를 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소설을 별나게 읽는 아줌마인거다.

 

아, 그 친구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의 한 장면에서 설국의 문장을 알아보기도 했다. 정말 천재다, 내친구는. (친구자랑) 나는 어느 백작이 대머리니까 그 금발아들도 곧...이라며, 하하하 웃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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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7-05-30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영어책을 그렇게 읽나봐. 유부만두야 영어실력이 좋지만 나는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책을 읽나 스스로도 궁금했는데...

유부만두 2017-05-30 11:26   좋아요 2 | URL
영어실력 ㅎㅎㅎ 그저 웃지요. 하고 싶은 말이 제 때 안나와서 버버버버 하는데요, 하지만 영어책 읽기는 습관들이기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

Nutshell 재밌습니다. 언니. 강추해드립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