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의 신작. 역사 탐정물. 금성은 행성이 아니라 옛 경주. 


작가의 전작을 생각하고 표지를 보면 가볍고 행복한 이야기이리라 넘겨짚기 쉽다. 하얀 매가 야무진 눈매로 칼 자루 하나와 센터를 차지하고 있다. 불상, 승려, 말탄 (늙은) 군인 등이 소용돌이 있는 물 위에 떠있다. 저 멀리 황룡사 9층탑이 보인다. 


때는 7세기 후반, 나당전쟁 이후 통일 신라시대. 오랫동안 당나라 유학(이지만 혼란한 국제 정세에 고생고생)을 마치고 관리 선단에 끼어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오는 이십대 (나약한 체격의) 설자은. 책의 뒷면에 나와있듯이 자은은 급사한 오빠 대신 남자가 되어 당으로 가 공부를 했고 여전히 오빠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들키면 죽는다, 심정으로 배에 올라 책 상자를 껴안고 있다. 그런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백제 출신 자칭 장인 목인곤. 그는 자은이 여자인 것을 알아채지만 별 내색없이 그 옆에 머문다. 통일신라 시대의 (여성) 셜록과 왓슨의 탄생. 


책은 네 편의 이야기, 즉 네 건의 사건과 자은과 인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비슷한 남장 여인의 탐정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 "사라진 소녀들의 숲"이 생각났는데 허주은 작가가 환이의 남장을 일찍 풀고 비단 치마를 입히며 암행어사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과는 달랐다. 자은은 계속 남자로 남는다. 그리고 다른 남자에게 의존하는 대신 목인곤을 수하로 부린다. 하지만 여기 실린 네 편의 사건 중 적어도 셋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이야기다. 여성 인물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각자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고 있다. 


코난이나 김전일이 가는 곳마다 살인이 벌어지듯 자은 옆에도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는 이야기가 있다. 배에서 죽은 상인은 정말 사라진 그 여인의 아비였을까? 어떤 여인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전설적 장군이 정말 손바닥에 저주 문자가 뜨면서 전쟁의 업을 치르는건가? 여성들의 베짜기 연례축제가 어떻게 여인들에게 탈출구가 되는가? 베틀을 부순 범인은 누군가? 문무왕의 매지기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 ... 문무왕에게 매란? 자은에게 자유란? 유부만두에게 정세랑이란?


자은은 용감하고 예리하게 그 이야기들의 실마리를 잡아 차근차근 사건을 풀어놓는다. 결코 서둘지 않고 절대로 으스대지도 않는다. 범인들은 의외로 간단하게 드러나는데, 자은은 처벌과 공개보다는 범행 동기와 뒷수습에 더 집중해 배려한다. 셜록과도 조금 다르다.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선 표지의 매와 자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이 설자은 통일 신라 탐정 시리즈의 대망의 첫 권이라고 선언한다. 자자잔!!!! 1권의 많은 부분이 시리즈의 설정과 밑밥이다. 옛정인, 집안 사정, 정치적 긴장, 밉상 고관대작 다 그려진다. 작가의 섬세함과 대범함이 보인다. 길게 갑시다, 작가님. 한 스무 권? 


표지가 조금만 덜 귀여웠더라면, 책소개 방송 등에서 정세랑 작가가 조금만 더 묵직하게 힌트를 줬더라면 더 일찍 이 책을 읽었으리라. 기대이상이라 깜짝 선물 받는 기분으로 읽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거인 왕 문무왕의 시대가 멀지 않아 끝나고 더 많은 사건들이 나올 걸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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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2-07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겠어요! 정세랑!!!!!!!!!!!!!!!!!!!!!!!

유부만두 2023-12-07 12:11   좋아요 1 | URL
재밌는 탐정 소설이에요. 피도 나고 서람도 죽어요. (경고 했으니 나중에 무서웠다고 불평 마세요, 너무 겁먹지도 말고요. 스티븐 킹만큼 음산하진 않으니까요)

psyche 2024-01-05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난 금성이 하늘에 있는 저 금성인 줄 알고 SF 라고 생각했지. 역사 탐정물이라니 재미있겠다!!

유부만두 2024-01-05 16:2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표지 보면 청소년 소설 같은데 아니고요. 꽤 공들여서 시리즈 빌드업 하는 거 같아요.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어요. 문장도 인물들도 좋아요.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