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상징이자 전통과 혁명의 상징인 책, 그 책을 불태우고 작가와 독자를 부인한다는 설정은 문명의 말살, 디스토피아의 극한이다. 


저자 브래드버리는 이 소설을 UCLA 도서관 지하의 코인 타자실에서 시간에 쫒기면서 썼다고 했다. (50년대의 피씨방 같은건가) 그는 이 작품을 희곡으로 변주하며 방화소장 비티에게 사연과 개인 도서관을 안겨 주는 식으로 이야기를 확대시키기도 했다. 


소설은 3부로 되어있고 마지막 3부에서 50년대 초의 작가가 그려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며 파괴적인 문명의 끝, 원자폭탄이 터진다. 그리고 도시와 사람들, 인연들이 흩어진다. 책은? 책은 어떻게 이어질까, (책을 살리겠다는 저자의 의지는 너무나 또렷하다. 형광색이며 굵게 드러나 있어서 외면할 수가 없다) 이제 그들은 다시 호메로스의 시대로 돌아가 노래부르리라. 사람들이 책이 되리라. 폭탄처럼 감정도 문장도 아름답게 다 불타버리는 소설의 마무리는 .... 사실 아름답고 좋았다고요. 그런데 저자 후기가 다 망쳐버렸지.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262-263)



이웃의 남다른 17세 소녀, 뭔가 진실을 알고 있지만 이미 사망했다는 클라리세를 다시 불러내려는 상상과 요구도 많았다고 작품 후기, 작가와의 50주년 대담에서 브래드버리는 밝힌다. 또한, 작품의 시대적 한계 탓인지 성차별 인종차별적 요소에 대한 비판이 있어왔지만 그는 단호하게 NO 라고 답한다. (읽지않은 책은 손 대지 않은 숫처녀라고... 그러니 어찌 열지 않을 수 있냐는 둥 별 그지깡깽이 같은 비유가 나온다) 그의 소설은 한 권의 책이다. 그러니 그 책을 태울 수는 있어도 (검열이나 수정도 '합법' 방화와 다르지 않게 여긴다) 바꿀 수는 없다고. 성경 부터 시작해서 단테, 셰익스피어, 밀턴 등의 대 작가의 걸작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그의 이 소설은 (작가의 주장이지만) 감히 손 대거나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래서 싫어져버렸다. 주인공 몬태그의 전형적 바보 부인 밀드레드와 그 친구 주부들, 순수한 소녀 클라리세, 아집으로 책과 함께 타버리는 노부인 이렇게 여성 인물들은 세 부류로만 나온다. 말만 앞세우는 방화서장과 다리가 여덟이나 되는 로봇 개 처럼 과하게 철벅거리는 이 소설이그래도 멋지다고까지 생각했는데. '멋진신세계'의 멍청함 보다는 낫다고, 적어도 클라이맥스에서 파괴의 묘사와 방송/현실의 듀얼 어쩌면 제로 실존의 서술이 절묘했다고 칭찬하고 있었는데. 널 사랑할 수 있었다고. 불꽃처럼.   


다시 상상해 본다. 책을 태우지 않아도 이미 읽지 않고 저리 쌓아두거나 외면하거나 책이라 부르기 애매한 책을 만들고 파는 세상. 지금 싹 다 태우고 리셋해버리면 어떨까. 너무 후지고 후지고 지저분한 것들이 많잖아. 화씨451, 넌 살아남을 자신이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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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20-07-20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기전인데 왠지 욕할마음이 샘솟으면 이상한 기대가. ㅋㅋㅋ 조만간 읽어볼께요. 분노 같이 해요 ;0

유부만두 2020-07-20 20:30   좋아요 1 | URL
옛날 사람, 옛날 작품은 어쩔 수 없다해도
지금을 사는 독자가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분노 화르르

연화 2021-01-18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화씨 451을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고 감회에 젖어있었는데,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고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작가로서의 프라이드라고 하기에는 아집과 불통처럼 읽혔거든요. 사실 읽으면서도 여성에 대한 묘사가 아쉬웠는데 195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니 시대적 한계라고 생가하고 읽었거든요. 곳곳의 섬세한 묘사와 특히 3장의 문장들은 정말 아름다웠구요. 유부만두님 말처럼 마지막 작가의 말들이 그러한 감동 포인트들을 와장창 깨버린.. 그런 고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작가의 말을 읽지 않았다면 좋았을까요..

유부만두 2021-01-19 08:54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연화님.
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옛날 소설이지만 그나마 전복적 면모에 집중하며 읽었더랬는데 작가의 후일담이 제 감상마저 방해 했으까요. 이미 읽어버렸으니 연화님이나 제 손해 같아요. ㅜ ㅜ

미미 2023-12-0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17세 소녀를 묘사한 뒤에 푸석한 아내를 시체로 그린 부분에서 이미 불길했어요. 그래도 참고 읽다가 제왕절게 비난하고 이혼한거 전부 여성탓하는거 (뭘 얼마나 그 사람에 대해 알길래? ) 그리고 만두님도 리뷰에 언급해주신 12세 숫처녀 읽을 때 놀라며 작가의 사진을 다시보니 연쇄살인마 유형인것 같기도하고ㅋㅋㅋㅋ(어쩜 과거 그의 지하실에?)어처구니가 없더군요. 다 읽고 나니 작가가 그린 디스토피아에서 책을 불태우는 설정을 빼도 디스토피아구나 싶었습니다.

유부만두 2023-12-09 19:5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작가 사진이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 스타일 안경 때문에 더 음산해 보여요. 그런데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끔찍하죠. ㅜ ㅜ 미미님 말씀대로 완벽한(!!) 디스토피아 소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