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깐깐한 독서본능


북마크하기교보서 발견한 반가운 책l1류소설


마태우스 (이메일 보내기) l 2007-03-19


http://blog.aladin.co.kr/747250153/1082069




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코올에 관한 책을 사려고 교보에 갔다가, 저자 이름이 ‘윤미화’인 책을 발견하고 잽싸게 집어들었다.



독서본능’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만 해도 동명이인이겠지 했지만, 책날개에 붙은 사진이 아무래도 낯이 익다. 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리뷰가운데 86편을 골라 저자의 소신을 담은 에세이집이었는데, 책 곳곳에서 난 내가 아는 그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설마 지금 낚이신 것 아시고 계신거죠!!!(cook)

3분의 1쯤 읽다가 책을 덮었다. 가슴이 북받쳐 더 읽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난 사려던 책은 팽개쳐 둔 채 그 책 세권을 포개 계산대에 내밀었다. 한권은 내가 읽고, 두권은 입시경쟁 때문에 정서가 메말라 가는 조카들에게 줄 생각이다. 11월이 가기 전에 우리 모두 이 책을 읽자. 가슴 뭉클한 무엇을 느끼고 싶다면 말이다. 파란여우님, 책 정말 멋져요! 냈으면 냈다고 말이라도 해주시지!

 뱀발. 마태우스님은 알고 있었다. 아 ~ 이 놀라운 관觀능! 그것도 몇년전 여우님의 저작에 대한 천기누설을... ...  미안해요. 마태우스님. 빨간색만 고쳤어요. 저작권을 주장하신다면... ...그리고 미안해요. 파란여우님. 분위기 너무 무거운 것 같아...하하. 축하해요. ㅁ 그리고 곧 두번째 책을 내셔야 할 듯. ㅎㅎ [여우는 알고있다]가 괜찮은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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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단 2009-11-14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헷갈리실 분들을 대비해서 파란여우님의 <깐깐한 독서본능>은 11월 18일 출간예정입니다.^^
 

[세상을 바꾼 항해술의 발달] 지성사, 김우숙, 이민수 - 모나크나비,연어,꿀벌,개미,바다제비,자이로컴퍼스,해리,노트
[손영운의 우리땅 과학답사기],살림  전라남도 해남편, 고천암호, 우항리
[신갈나무투쟁기],지성사

 

1. 항해술이란 얇은 책인데 쉽고 재미있다. 꿀벌의 춤을 보면 거리와 꽃의 위치까지 알 수 있다. 물론 개미도 태양을 위치로 해서 정확히 집의 공간을 기억하고 있다. 모나크나비는 겨울잠을 자기 위해 상승기류를 타고 로키산맥에서 멕시코 이남으로 이동한다. 몸에는 자성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육지냄새, 섬위의 구름으로, 새들을 이용하는 방법들....제법 호기심가는 것들이 많이 들어있다. 

2.신갈나무투쟁기가 10년만에 다시 나왔다. 가독성도 디자인도 달라보인다. 이쁘게 훑어보다 . 

3. 손영운은 지구과학전공, 교사직을 그만두고 우리땅을 돌아다니며 책을 만들고 있다. 광물과 암석이 나와 반가웠고, 저기 땅끝마을부터 군데군데 해당하는 곳이 많아 보다나니 벌써 많은 곳을 다녀왔다. 지질과 섞어 설명하는 것도 괜찮다 싶었는데 이렇게 책으로 출간되니 반갑다. 

 4. 모리스는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부분을 읽었는데 마지막의 에코토피아는 마저보질 못하다. 다음주나 될까...

[윌리엄모리스 평전] 

 



>> 접힌 부분 펼치기 >>

 5. 월요일 휴가 참* 잠시 머물렀는데 사무실에 책자가 하나 와있다. 그린비출판사로 이영희-김동광-김명진님의 번역서이다. 여러 생각과 느낌, 분위기 많은 것이 배여나오는 책이다. 뭉클하기도 현실이 아로새겨지기도 한다. 참*도 주에 소개해놓은 고마움까지 느껴진다. 따로 내용은 정리하기로 한다. 6장까지 강독.

뱀발.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잡지에 연재된 소설을 보고싶다. 여러책에서 영국의 차이점, 오언이나 모리스, 사회주의의 이력에 대해 알고 싶고, 폴라니의 파시즘에 대한 관점은 다른 책들과 또 다른 맛이 있다. 메모는 예전 페이퍼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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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 거대한전환의 마지막장을 온전히 읽지 못했는데(해석본과 본문), 반납을 망설이고 찬찬히 음미하면서 본다. 그런데 역시 읽는 사람마다 방점이 다를 수 있구나 한다. 다음에 읽게 된다면 스스로도 다를 것이니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책망의 요인이 될 수 없다.


" 우리시대에서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예전에 믿었던 모습의 자유가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 사회 실재의 현실을 불평 없이 묵묵하게 받아들인 이상,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불의와 비(非)자유라면 모조리 제거해내고 말겠다는 그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이 책을 마무리짓기 일곱번째 전 줄에 적혀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랬고 행복한 것만 생각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굳이 불행을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그래도 생각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삶이란 행복하게만 살 수가 없다. 대부분 삶의 면역력은 아픔, 슬픔, 체념에서 나온다. 그래도 살겠다는 - 삶의 공간은 아쉽게도 죽음이나, 체념에서 소중한 것을 얻게 되는 연유로 - 그 실제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지금 아프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나-너의 공간에서 배우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자 우리의 자산이란 것. 먼저 삶의 소중함을 겪는 일이라고 여겨야 된다.


루쉰은 현실을 온몸으로 겪으며 철로된 죽음의 방 이야기를 한다. 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그래도 단 한사람이라도 그 상황을 알게될 때 아주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말해야한다고 했다. 인생의 바닥을 본다는 것이 어쩌면 자유의 지평을 넓히는 지렛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니, 슬픔과 아픔, 절망을 너무나 외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행복과 소유만 배우게 되고 그렇지 않은 반대편을 배울 길이 철저히 차단되어 오히려 극단의 선택이 벌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볼 때 폴라니의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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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느 왕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을 담은 것을 가져오라는 우화가 있다. 신하들은 책들을 모으고, 어렵고 어려운 책들을 갖다바치자 왕는 점점 더 간단한 것을 요구했다. 또 다른 것을 가져오고 오고 그렇게 순환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하나로 정리된 것이 나왔다.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엔 공짜는 없다.'였다는 한마디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처럼 인문학에도 인문에도 공짜는 없을 것이다. 요약이나 다이제스트는 들어가는 문의 편리나 수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인문이라는 것은 달리 그 숙성의 과정이 배이지 않으면 무용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유명인이나 강사를 찾거나 쫓아다니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인문의 입문으로 저명한 분의 안내가 얼마나 유효한가는 입증된 사실이다. 선무당같은 이에게 출발을 맡겨 도통 알 수 없는 길이나 숲으로 들어서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다.

그런데 정작 인문의 힘은 무엇일까? 유명하고 능력있는 누구 [ ]가 말했다. 어떤 어떤 대학자가 이렇게 말했다에 괄호를 쳐보면 어떨까?  그 영향력을 끼치는 [괄호]에 장삼이사를 넣는 것이다. 인문의 힘이란 것은 [괄호]에 누가 들어가든지 상관없이 그 [괄호]를 통해 [나]와 [너-나]를 달리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차이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세상도 사회도 미쳐 눈치채지 못한 것들을 가슴으로 마음으로 가져가는 힘일 것이다.


우리가 인문학과 인문을 소비하지 않고 소통한다고 한다면, 그 궁극은 저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무심코 뱉은 한마디에 전율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일 것이다. 유명강사를 만나는 회수나 강도로 당신의 인문이 확장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당신의 자유와 바라고자 하는 바는 바로 당신 등잔밑에 있다는 사실부터 출발하는 것이 인문의 길일지 모른다. 인문人文이 아니라 인문人紋. 그렇게 평범하고 모자란 사람들의 무늬를 탐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2. 


인문학이 유행이다. 어느 모임도 공지사항이나 게시판을 보면 인문의 흔적이 넘쳐나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듣고 싶고 보고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보지 못하던 사람과 얼굴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갑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대면하고 접촉하고 싶어하던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일까? 인문을 핑계로 서로의 삶이나 견해를 섞고 품고자 했던, 인문의 기본소양에 대한 궁금증을 잊은 것은 아닐까? 

 
유명한 사람과, 인문의 주제가 화려하면, 우리 단체와 모임은 잘 되는 것일까?라는 우려는 그 모임들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생각은 섞이는가? 고민을 섞이는가? 내모임에 대한 아집과 경계는 허물어지는가? 인문으로 인한 상상이 저기 저 모임의 당신에게 향하는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수집이야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조선의 골동품들이 돈이 될 것이라구.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란, 재미란 문화는 다음을 기다리게 한다. 사람들이 저기 갈 곳이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보이는 것만 쫓는 무리에게 여전히 보이는 것만 궁금할 것이다.

 
또 다른 것이 괜찮다 하면 또 우르르 몰릴 것이다. 다음 유행할 것은 인문이 아니다. 소통의 아이템이 아니라 소비의 아이템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또 몰릴지 모른다. 그리고 또 그것만 할 것이다. 소비의 순환구조를 갖는 것은 정작 아줌마와 장삼이사의 모임이 아니다. 찬란한 모임들이 더 그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 


 

1. 

며칠전 신문 정칼럼니스트의 글이 생각난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여기저기 봇물터지듯 공간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문화의 향유가 꽂꽂이나 그림, 취미를 넘어서는 공간잠식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헌데, 조금 헛갈리는 것이 그것이 인문학의 소통인지 소비인지 구분이 모호함이라 한다. 세대가 달라지듯, 주도적인 주부도 달라지고 있다. 새마을...부녀회..엄마세대에서 그래야 조금 다른 지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일까? 일견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소비인지 소통인지, 유행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가르는 선은 무엇일까?
 
아마 소비는 끊임없이 유명하다는 것과 좋다는 것을 쫓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통은 아마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일회성이 아니라, 조금씩 뿌리를 내리려할 것이다. 만들거나 끊임없이 작아지거나 하는 방향성으로 그 가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되물어보는 것이다. 유명하다는 단맛이 빠진다면, 우르르 몰려다닌 연유뒤에 허망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더해지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아프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한마디 한마디 죽비소리에 정신이 바짝 나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더 원하는 인문의 골수만 갖는 명강사에 이끌려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시선이 걸려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엄마가 아니라 엄마들이 바뀌고 있다. 

뱀발.  엄마가 아니라 엄마들이 바뀌고 있다. 내아이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말이다. 무늬만 바뀌는 것인지? 무늬도 바뀌는 것인지 의심스럽지만 세월의 힘은 관심과 질적 측면도 다른 색을 물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보인다. 그런데 집착에 대한 반성이나 잣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지? 자의적이면 되는 것일까? 아마 반성의 능력과 인문학의 힘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현실화시키는 것은 소비와 소통의 문제이지 않을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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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9-11-1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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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의 변천사(ing)

-1. 저기 밤하늘에 반짝이는 북극성을 꼬리에 둔 북두칠성은 안녕한가? 하나하나 반짝이는 돈, 우리나라도, 국가도, 사랑도, 진리도...말이다. 늘 우리가 기대던 그 주춧돌 같은 개념들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면, 당신이 기대고 서있던 벽이란 것이 안개같은 것이었다면, 의심한번 해보지 못했던 그런 삶-생각줄기가 흔들리고 있다면 어이할 것인가? 여전히 지구는 돌고, 하늘도 돌고, 별도 반짝이지만, 북두칠성의 별주위를 도는 것이 당신이었다면, 당신이 그 별들을 딸 수 있다면... ... 

0. 책이 나오다. 아래 첫책이 이에 대한 소개여서 갈증이 많이 났다. 읽고 보니 아래 벡이나 기든스의 책도 이 책을 부분적으로 발췌하거나 특정 주제만을 언급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영민님의 책과 함께 보면 좋기도 할텐데. 아무튼 예상외로 우리는 지금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니 소개책들과 곁들여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맥락이란 뿌리를 좀더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자들의 노고를 보니 실은 영역본은 1998년에 출간예정이었는데, 번역, 교정의 다른 개념들과 비교할 수 있어 좋다. 

1. 이책은 옮긴이가 이야기하듯 사랑에 대한 지침이 아니라 사랑을 문제삼고 다루어나가는 법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사회학적 기술 336 이자, 현대적 사랑에 대한 역사 사회학적 해명 331이다. 따라서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있다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더 치밀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제목처럼 [열정으로서 사랑]이란 자막의 밑에 [친밀성의 코드화]란 부제가 있다. 이상과 역설의 지점에서 문제가 드러났고,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프로그래밍이 되는지에 시선이 깊숙히 있는 것이다.  

5. 마지막 장을 아껴두고 읽지 않았다. [16 상호침투체계로서의 사랑]이란 장이다. 며칠 묵혀두고 읽는다. 지금까지 개인의 인격적 체계에 관해 살펴보았으니 역으로 개별 인격의 체계/환경 관계에서 친밀성이 무엇인지 물어보자고 한다...체계와 체계의 차이는 환경속에서 전통과의 연결지점만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들도 놓여있다고 한다. 이 차이의 문제는 친밀관계의 도움으로 발전한 사회체계의 문제가 된다고 한다. 두 인격 사이에 성립하는 친밀관계를 위해 특화된 기능을 갖고 독립분화된 자기지시적인 사회적 체계들이라는 요청기준에서 출발한다면 그리고 친밀성을 상호침투로 이해한다면, 열정적 사랑과 낭만적 사랑이라는 의미론적 전통이 이를 위한 지침이 되는 모델인지 다시 살펴볼 것을 요구한다.(답을 주면서도 다시 음미할 것을 요구한다하겠다.) 

6. 친밀 영역이 분화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위한 사랑이란 관념인데, 이렇게 되면 사랑은 사랑의 법칙을 스스로 부여한다.... 

하나의 얼굴/ 한 사람 앞에 있는/ 더이상 주-체가 아니고/ 관계만 맺을 뿐/붙잡을 수 없고/그리고/묶여서 ....투명함은 체계와 체계의 관계 속에서만, 체계와 이 체계가 구성하는 환경의 차이 덕분에 존재한다. 사랑만이 이런 투명함일 수 있다. 

7. 사랑이 체계사이를 넘어서는 투명함으로 존재하고 친밀관계를 분화시킬 수 있다. 체계만의 장벽들을 넘는 채로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잡으려고 하거나 꿰뚫어보려하면 그 순간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을 맺는 시구절을 통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란 것은 양손으로 포개놓은 손바닥 위에 물처럼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는 것이지만, 보듬을수록 그 사랑을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체계사이를 넘나들고 인격적인 관계만 아니라 비인격적인 관계도 서서히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삽십년의 연구를 통해 맺고자 하는 것의 그것은 아닐런지. 저자의 요구대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음미할 일이다.

-[  ]의 고고학-

 

  

 

 

뱀발.

 1. 지난 독서에서 소통이란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 정보,통지,이해라는 프리즘을 갖는 것으로 구분했다. 그러면서 행간의 지평을 넓히는 생각에 관심이 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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