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책사이 소로나 샛길은 없는 것일까~. 학자와 학자 사이에도 그 길은 없을까? 잔잔히 스며드는 그 소통의 공간은 없을까? 독립된 성처럼 장벽을 드리우고 서있는 책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가? 그 공간을 채워주는 일들을 지식인들은 하고 있는가? 어디 장사될만한 것에 혈안이 되어 이식하는데 급급할 뿐, 그 앎들이 스며들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식의 사대주의 분위기에서 자유로운가? 그 앎들이 암초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소통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다닐 수 있는가? 사회학도 아니고, 경제학도 아니고, 코끼리 다리만지듯 느낌만으로 나눈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젊은? 소장?학자들의 고민의 결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제를 넘어본다.
[일상의 시화] 부문이나 분과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이 낱개가 아니라 모두 한묶음이라는 말. 그리고 마음이 박제화되는 것이 아니라 늘 말랑말랑하게 살아있게 만드는 시의 세계. 학문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것을 반성해야된다는 점.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어렵지 않은가? 지극한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지금 여기에 비춘다면 얼음처럼 굳어있는 마음경직주의자가 대부분인 현실에 조명한다면, 그 얼마나 엄청난 바꿈의 말씀을 전하는지도 눈치채야할 것 같다. 등대에서 조망하면 본다면(그럴만한 능력이 생긴 것이 다행이라고 봐야되는지?!) 그렇게 단선으로 평가의 일획을 긋는 것이 평론가의 능력과 마음이겠지만, 인식의 시선을 몸높이로 가져내려와 본다면 새기거나 느껴야될 열정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보고 새기고 하면 평론이 일점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다점으로 풍요로움을 만드는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김우창
[몸으로끌면서] 이분은 어렵다.아니 너무쉽다.아니 무서운가.그의 인문의 흔적을 쫓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숱한 서양학자들은 그의 사유의 결에 아주 조금 필요한 부분으로 존재하는데 쉽고 명쾌하다. 에둘러 올라갈 필요없이 숱한 방황을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무섭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동무의 그물은 넓고 크다. 외려 넓고 큼이 단점이기도 하겠지만, 생각과 연인과 친구의 벽을 넘으면서 넓다. 구체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그 추상을 작심하고 따라가볼만하지 않을까? 그가 뜬금없이 뱉는 생각의 다양한 결.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술과 사유. 그가 감추고 보이지 않는 일상의 다른 사물.정물.움직이는 물이 어떻게 포착되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지금을 넘는 것도, 이 시대, 이 자본주의시대를 타넘는 방식. 몸으로 끄을 면서... ... 자유롭되 자유롭지 않은...어쩌면 머리의 사유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말하고 있는 것은 가르키는 엄지손가락이 아니라 나머지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 몸의 사유를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영민
[포월소내행복....]말을 만든다. 지금 관성에 짓눌려있는 단어를 되새김질한다. 잘게잘게. 그리고 그 단어의 폭이 여러층위이면서 그 설명을 듣다보면 어느새 나만의 사유가 너의 사유로 가까이 가고 있다. 그리고 일상의 뜨거움으로 남는다. 나의 너의 고정관념은 벌써 곧 빠질 치아처럼 흔들리고 있다. 보수는 진보는 이들의 말에 눈길을 주고 있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찾아내려고 하는가? 그저 일개 소부르조아 지식인의 영양가없는 말들인가? 마음에라도 그 말과 단어를 담갔다가 꺼내보았는가? 밑져야 본전 아닌가? 한번 마음에 적셔봐서 아니면 말구. 마음이 굳어 도대체 움직일 수 없다구. 그렇다면 아예 얘기하덜말던가?? 생각의 결을 넓히는 마술을 가진 분들이다. 늘 당연한 사물이 아니라 추상단어의 결을 넓히는 재주?(감히). 그러니 당신의 일상이 그로인해 풍요로울 수 있다는 점. 다른 센서를 가질 수 있다는 점. 당신이 사랑하는 애인들에게도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점. 궁금하지 않은가? 김진석 김용석
[서로주체] 나르시스. 개인의 천국. 그로인한 불행. 서구철학과 학문의 맹점. 우리사유의 구할은 이것. 그러므로 몸에도 가슴에도 손과 발에도 맞을 수 없다. 더 이상 남을 것도 없다. 학자들이 인정을 한다면, 그 전제의 잘못을 시인한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출발한 학문의 맹점을 파고들어야할 의무가 있다면. 움직임이 없다. 말을 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너. 이기의 사유가 아니라 되기. 나의 사유, 너의 사유가 아니라 나-너의 사유. 너-나의 사유는 출발할 수 있을까? 그 사유가 일상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문턱과 저지선을 만드는 사람은 없을까? [나]의 불안에 서있는, 붙임살이에 대해 사유가 번져나갈 수 있을까? 학문과 학문사이를 넘나들 수 있을까? 김상봉
[이기가 아니라 되기]머리의 공백을 너무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분. 하지만 너무도 이지적인 분들. 사유의 날은 서고 다가서면 베일 듯 날카롭다. 그 사유를 넘어서면 부드럽고 애잔하고 어깨와 웃음이 동생처럼 형처럼 정겹다. 천양 학자. 완벽.이란 단어가 겹친다. 그들이 현실을 몸을 끌면서 너머서고 있다. 소수자이기가 아니라 소수자되기. 그들의 사유는 머리에 멈춰서고 있지 않다. 끊임없는 하향의 향기. 가슴향이 난다. 손발의 소금내가 나기 시작한다. 했다. 되기란 용어는 아무나 쓸 수 없다. 쓴 적도 별반없다. 몸과 가슴, 손발의 뜨거운 효용성을 녹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정우 윤소영
[용광로] 사유를 머리로 녹이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과 손, 발로 녹이는 학자가 있다. 그래서 늘 그의 글을 읽다보면 먼저 데인다. 주춤거려지고 나의 정체를 무너뜨릴 각오를 하고 그녀의 생각을 넘겨야 한다. 아리고 아프고 말미 공황의 지경까지 생각은 흐뜨러진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큰 한숨을 쉰다. 며칠이 지나 몸은, 몸이 누리고 있는 권력은 머리보다 먼저 잊는다. 잊으려 몸부림친다. 머리의 악다구니로 다가서지 않으려 애쓴다. 다음글이 무서워진다. 그의 가슴과 손발의 공간엔 머리의 구획이 필요없다. 부문의 울타리가 필요없다. 열정과 동사, 형용사가 일상을 다 채우기에 머리의 성벽은 이미 무너져있다. 그러니 집착이고 머리사유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거울에 비춰 얼핏 보인다. 존재이전이 필요한 사유의 용광로이다. 정희진
[나쁜소년] 나는 그에게서 김수영을 본다. 그가 마누라에게 스스로에게 남편에게 김수영의 언설을 뱉으리란 것을 안다. 그리고 무뎌진 세월의 겨울을 그의 푸른 유리조각이 실금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조금씩 김수영이 되어가고 있는 밥벌이의 비루함을 끌며가는 후원군들이 있음도 안다. 밥벌이의 비루함이 그렇게 유리조각을 품고가다 그렇게 밥벌이의 신성함, 밥벌이조차 되지 않는 현실을 끌고 만나고 할 것이라는 허언도 만나게된다. 그리고 이미 바닥에 긴 채로 끌며 가는 찬연한 꽃들의 소리도 인지하게 된다. 아마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흔적의 탑을 쌓아왔음을 저 봄꽃 떨어지면 느끼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땅엔 김수영이 너무도 많다. 이땅엔 김수영의 방언이 너무도 많다. 다만 듣지못할 뿐, 맛보지 못할 뿐, 느끼지못할 뿐. 섞이지 못할 뿐. 그로인해 외로움을 한수 던다. 그로인해 김수영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로인해 김수영이 일상을 뜨겁게 달굴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게 된다. 허연
뱀발.
1. 한결같이 [나] [개인]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그것에 중독되어 있음을 말한다. [너]로 향하고 [몸]으로 향하고, [가슴]으로 향하고 [몸]으로 끈다. 하지만 인문을 말하는 지식권력은 아무말이 없다. 그 성이 이미 무너졌음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 잘난 인문을 읍조리고 팔고 있다. 성밖의 외로운 싸움과 인문의 길을 내는 분들의 외로움만이 더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 유행하는 학자의 생각꼬리를 잡아 이땅에 풀고 있다. 맥락도 이력도 밝히지 못하면서 소매를 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얼마나 든든하고 틈실한가? 현실에 우리에 착근하는 학자의 길이 놀랍지 않은가? 고진에 들썩이고, 지젝에, 또 다른 맥락없는 수입이 유행처럼 바닥을 훑고, 인문의 지평은 넓고 깊어지지 않는다. 사대의 그늘아래선, 일그러진 근대의 패턴을 되풀이하고선...(너무도 독선적이고 주제넘은 생각..시건방..말을 듣더라도 느낌을 나누고 싶을뿐...)
2. 사차원의 세계에서 한결같이 이차원을 이야기하다니, 부대끼고 부딪치고 담쟁이 덩굴처럼 절망의 벽을 넘는 방법은 타넘는 것이라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그렇게 넘다보면 지금 우리를 옥죄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도 그것이라 한다. 얼마나 지금여기의 우리가 몰핀에서 벗어나는가가 관건인가? 지금여기를 느낄 수 있는 방법도 그것밖에 없다는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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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쟁 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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